임강사종(臨江寺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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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현종 10년(1019), 왜구의 극심한 약탈 시기로 울산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임강사종(臨江寺鐘)’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오사카(大阪) 정우사(正祐寺)가 소장하고 있다.
고려시대 울산 범종으로 유일한 자료이며, 명문이 아름답고 역사성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됐으나, 1945년 3월 미군 폭격으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현재는 종 아랫부분 5/1정도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본래 종의 크기는 높이 116.7㎝, 입지름(입구부분) 67.2㎝, 무게 213㎏이었다. 종 표면에는 고려 초기 울산의 지명인 '흥려부(興麗府)'와 종이 있었던 '임강사(臨江寺)', 종을 만든 사람들 이름, 제작 목적 등을 기록한 명문이 있었다. 그러나 명문 부분은 없어졌다.
특히 ‘임강사(臨江寺)’라는 사찰이 신라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태화사(太和寺)’와 동일한 사찰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기 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 제영조에 실린 오연율시에 ‘임강사(臨江寺)’라는 절이름이 강과 인접해 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향토사학계 일각에서는 임강사는 태화강을 낀 곳에 있는 절로 보고 있으나 자장율사가 세운 태화사와는 다른 절로 본다. 또 중구 반구동 서원산 폐사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일본 땅에 건너간 이 종은 처음에는 미야자키(宮崎)현 평등사(平等寺)에 걸려 있다가 1874년부터는 정우사가 소장해왔다. 일본열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센코쿠시대(戰國時代, 15세기 후반~16세기 후반)를 지나며 고물상에 나뒹굴던 것을 주지가 구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이 종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5년 3월 미군의 폭격으로 종의 윗부분이 손상됐다. 오사카 교육위원회는 이 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2009년 복제해 이듬해 정우사에 기증했다. 정우사에는 손상된 종과 복제한 종을 나란히 전시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은 이 종은 ‘평등사종’, ‘정우사종’으로 불리다 이제는 ‘임강사종(臨江寺鐘)’으로 불린다.
<임강사종 명문과 해석>
菩薩戒弟子高麗國興麗府棟梁僧彦脩名保」
戶長陪戎校尉金瑤含…○…○○○」
聖壽天長鴻基長久隣兵永息○○上興」
立願鑄成金鍾一口重五百斤觀者○容端」
正聲響淸高掛於當府內臨江寺者竺謹」
疏天禧三年龍集己未十二月○○日謹記」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고려국(高麗國) 흥려부(興麗府) 동량(棟梁) 승(僧) 언수(彦脩) 명보(名保)와 호장(戶長) 배융교위(陪戎校尉) 김요함(金瑤含)이...(이하생략)
성수천장(聖壽天長) 하기를, 국가의 기업(鴻基)이 장구(長久)하기를, 이웃나라의 병화(兵火)가 영구히 종식되기를,(결략)
흥(興)하기를 발원하면서 금종 1구(金鍾一口)를 주조하여 만들었다.
무게는 5백 근(五百斤)이 나간다. 보는 사람마다 모습이 단정(端正)하고 소리가 맑고 높다고 하였다. 흥려부 안(府內)의 임강사(臨江寺)라는 절에 종을 걸어 놓고 삼가 새긴다.
천희(天禧) 3년인 용집(龍集) 기미년(己未年, 현종 10년 1019) 12월 ○○일에 삼가 기록한다.
<임강사종에 나타난 문양>
임강사종의 문양은 신라종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비천상을 표현하면서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부처 상을 추가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 종이 파손되기 전 일본 국보로 지정됐을 때 탁본을 보면 문양은 앞뒤 좌우가 대칭이다. 앞과 뒤는 금강역사 2명이 무기를 들고 있고 위쪽은 연좌대와 부처상이 있다.
좌우에는 천인(天人)이 구름위에 무릎을 꿇고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다. 천인은 여성에 가깝고 천의(天衣)라 불리는 옷자락이 상승하듯 나풀거린다.
이는 신라의 봉덕사 신종에서 보이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과 비슷하다. 종의 아래와 윗 줄에는 인동덩굴 형태의 무늬가 있고 종을 매다는 용뉴에 용모습이 보인다.
<자료출처>
‘울산제일일보’, ‘울산박물관 자료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