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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과 철학의 전환
박재순 씨ᄋᆞᆯ사상연구소 소장
1 한국 근현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함석헌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은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족의 주체적 자각으로 전개된 한국 근현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한국과 동아시아 문화의 주체성을 가지고 서양문명의 기독교, 과학사상, 민주정신을 깊고 철저히 받아들였다. 함석헌은 서양의 기독교신앙, 과학사상, 민주정신을 깊이 체화하고 구현했으며 한국의 민족정신과 동아시아의 정신문화를 체화하고 구현하였다.
1) 동서 정신문화의 만남과 민족의 주체적 자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에는 한국의 민족정신, 동아시아의 종교문화와 함께 서양의 기독교 정신, 과학사상(이성철학), 민주정신이 온전히 통합되어 나타난다. 나라를 잃고 고통당하는 한민족과 함석헌의 정신과 삶 속에서 동서 정신문화가 창조적으로 융합됨으로써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저마다 역사와 지역의 한계와 제약에서 벗어나 온전하고 새롭게 더 깊고 온전하게 성숙해질 수 있었다. 동서정신문화의 만남과 민족의 자각으로 전개된 한국근현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함석헌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동서양 전통문화와 사상을 비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2) 서양문명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성찰
(1) 인도유럽어족이 형성한 서양문명: 그리스 이성 철학, 순수수학과 과학, 형이상학
그리스 헬레니즘 철학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등을 사용하는 인도 유럽어족은 국가문명이 확립된 후 4천 년 전경부터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서쪽으로는 유럽으로 남쪽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권력과 부를 침탈하기 위하여 다른 국가들을 지배하고 정복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인도유럽어에서 주어가 문장(객어와 술어)을 지배하는 것처럼 인도유럽어족은 매우 호전적이었으며 이들의 지배와 정복은 오늘날 유럽, 러시아, 인도, 북미와 남미를 지배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생산 노동에서 자유로웠던 그리스 지식인들은 순수 이성을 사용하여 순수수학(유클리드 기하학)을 발전시켰고 현실의 필요에서 자유로운 순수 이성의 관념 세계를 탐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최고의 덕과 행복은 이성의 관조(觀照)에 있었다. 그리스어 이데아, 테오리아(이론)는 ‘본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이들의 학문은 현실에서 벗어나 한가하고 자유롭게 제3의 자리에서 관조(구경)하는 활동이었다. 이성의 관조활동은 현실을 창조하고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순수수학은 근현대의 과학 기술혁명을 낳은 모태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선미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고결한 형이상학을 확립하였다.
(2) 히브리·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 신앙
히브리 기독교 신앙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국가에서 억압과 수탈, 신분 차별이 심화하고 지배와 정복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3,900년 전쯤에 아브라함과 그의 친족들이 수메르 국가 문명에서 탈출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갈구했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잠시 이스라엘 왕국을 형성하고 유지시키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이집트, 아씨리아, 바빌론, 페루시아, 시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강대한 국가들의 지배와 수탈을 겪고 종살이하는 고난과 슬픔 속에서 해방과 구원을 갈구했다.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해방하고 구원할 전지전능한 초월적 하나님을 믿고 기다렸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일반적인 지식의 전지가 아니라 고통받는 피압박자의 억울한 심정과 형편을 다 알아주는 전지다. 전지한 하나님은 나를 눈동자처럼 아끼고 나의 머리카락까지 다 헤아리는 신이다. 전능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불의한 역사와 사회를 심판하고 악한 세력을 깨부수고 새 하늘, 새 땅, 새 나라를 여는 정의의 신이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연재해와 조건, 사회역사의 현실과 상황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새 세상을 열 수 있는 초월적 하나님이다. 이들의 신앙은 자연조건, 국가권력, 사회역사의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생명과 영혼의 초월적 정신을 확립해주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신앙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나왔다.
(3) 민주주의 기득권의 분배정의, 권리투쟁,
고대사회에서 노예제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그리스인들은 신분, 능력, 업적에 따라 전리품과 사회의 지위, 명예를 분배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쟁취한 권리들을 법으로 보장하려고 하였고 법에 따라 권리를 누리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권리(rights), 법(rights),, 정의(righteousness)는 동일한 의미를 지녔다. 서양에서 민주주의의 역사는 권리 다툼의 역사였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권리-의무의 계약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권리 다툼에 기초한 서양의 민주주의는 불안정하고 허약하며 피상적이다. 권리의식과 권리투쟁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생명의 본성과 목적, 뜻과 사명을 실현할 수 없다. 권리-의무 관계를 넘어서 생명의 본성과 목적에 기초한 민주사회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생활공동체는 자치와 협동의 삶을 실현하고 완성해 갈 수 있다.
(4) 근현대 관념론과 인식론, 현상과 관념, 물질·기계·관념의 지배
인도유럽어족이 형성한 서양문명은 히브리기독교의 초월적 신앙과 그리스철학의 고결한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본디 인도유럽어족은 그들의 언어와 역사가 보여주듯이 지배와 정복의 정신과 기질을 가지고 유럽, 러시아, 인도, 북미와 남미,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점령해왔다. 그들은 중세시대까지는 그리스철학의 고결한 형이상학과 히브리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 신앙을 보존했으나 정치혁명과 과학기술 혁명으로 엄청난 힘과 재물을 갖게 되자 전통적 속박과 제약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욕망과 감정을 맘껏 분출하고 실현하려고 하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거대한 물질적 힘과 재화를 얻게 된 이들은 지배와 정복의 정신을 가지고 식민지 정복 전쟁으로 치달았고 권력과 부에 도취되어 고결한 형이상학과 초월적 하나님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물질, 기계, 관념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 생각뿐이었다. 물질, 기계, 관념의 지배를 받게 된 이들은 영혼 ‘나’가 없고 생명이 죽은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3) 한국과 동아시아문명
중국정신문화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거대한 국가를 이룩한 중국은 큰 땅을 바탕으로 농사를 짓는 국가사회를 형성하였다. 땅에 충실한 중국인은 아시아 대륙의 중심에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생명 친화적 유기체적 공동체 사회를 이루었다. 중국인은 실용적이고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중시했으며 개별자의 독립된 실체나 순수한 원리보다는 서로 하나로 이어지고 소통하는 길(道)을 중시하였다.
개인의 개성과 창의보다는 전체의 합일과 조화를 중시한 중국인은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와 그 자연 질서에 부합하는 국가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지향하였다. 중국인이 형성한 사유체계는 순수수학, 고결한 형이상학, 초월적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땅을 중시한 천지인 합일의 실용적이고 절충적인 세계였다. 그들이 창안한 주역 팔괘, 음양(陰陽) 오행(五行), 풍수지리는 모두 땅을 중시하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땅의 영향력과 지배력을 강조한 사상이다.
한민족의 민족정신
한민족은 호모 사피엔스, 신생 인류가 생겨난 5~6만 년 전부터 고조선국가 문명이 형성된 5천 년 전까지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질러 한반도와 만주까지 더 나은 삶, 밝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삶을 찾아서 이동해온 사람들이었다. 땅에 안주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르며 해뜨는 동쪽을 향해 아시아 대륙 끝까지 나아온 한민족은 하늘을 우러르는 고결한 뜻과 강인한 생명력, 깊은 생명 사랑을 지닌 민족이 되었다.
한민족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해뜨는 동쪽으로 오랜 세월 편력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을 우러르며 밝고 환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에 대한 꿈을 키웠다, 하늘을 우러르며 오랜 세월 이주해오면서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품고 하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고결한 정신문화를 형성했다. 이들은 자신과 하늘을 일치시키는 ‘한’민족이 되었고 큰 하나, 하늘을 염원하는 ‘한’사상을 형성했다. 해뜨는 동쪽 아침의 나라를 찾아오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해뜨는 아침의 나라에 대한 관념과 염원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새겨졌다. 해 뜨는 동쪽 아침의 나라는 하늘과 땅이 하나인 이상국가(理想國家)다. 고조선 건국 설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와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 하는데 아사달은 아침의 땅, 아침의 나라를 뜻한다. 조선(朝鮮)은 아침의 나라 아사달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인정(人情)과 생명 사랑, 고결하고 아름다운 나라의 이념, 염원이 한국어와 한국의 건국 설화, 종교문화 전통 속에 담겨 있다,
하늘을 우러르고 그리워한 한민족은 하늘(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아름답고 풍성한 삶에 대한 사무친 염원을 가졌고 강인한 생명력과 생명에 대한 깊은 정(사랑)을 지녔으며 다른 인간과 자연생명세계에 대한 포용적이고 낙관적인 관점을 유지하였다. 아름답고 고결한 나라의 삶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가지고 아시아 대륙 끝 한반도와 만주에 온 한민족은 상생 공존의 정신과 자세를 가지고 한민족과 한국어를 형성하였다.
4) 동서문명의 통합
함석헌은 한국 근현대 역사의 중심에서 역사와 생명을 철저히 체험하였다. 그의 사상은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상이 아니라 역사와 삶에 참여하여 체험하고 체득한 사상이다. 참여하여 체험하고 체득한 그의 사상은 평면적 이성의 사상이 아니라 그의 몸, 맘, 얼이 참여하고 체험하고 체득한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이해와 깨달음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에는 그의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이해와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가 몸과 맘과 얼로 그의 생명과 정신 속에서 총체적이고 주체적으로 체험하고 깨달은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이해와 깨달음 속에서 동서정신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하였다.
함석헌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유교와 불교와 같은 동서문명의 폐해를 가장 잘 아는 한국인이 동서문화를 종합할 자격이 있음을 시사한다.
“동서문명의 통일을 한번 못해 봐요?···구리도 묽고 납도 부슬부슬 떨어지는 거지만 그것을 한데 섞으면 놋이 되어 아주 억센 쇠가 되듯이, 그래서 그 위의 여러 나라들을 세울 수 있었듯이, 동양도 별것 아니고 서양도 잘못이 많겠지만, 그것을 조화하노라고 힘쓰노라면 제3의 새 문명이 혹 아니 나올까요? 지금 이 시대가 막다른 골목에 든 것만은 사실인 듯한데 그것을 뚫는 길은 거기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그 자격은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이것저것의 나쁜 결점을 가장 잘 알았으니 유교가 어떻게 나쁜지 불교가 어떻게 나쁜지 물질문명은 어떻게 해가 되는 건지, 사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내막은 어떤 건지는 우리가 잘 알지 않아요?”
2 씨ᄋᆞᆯ사상의 핵심
1) 빅히스토리의 주체화
빅히스토리의 주체화: 인간은 우주, 생명진화, 인류 역사의 씨ᄋᆞᆯ
함석헌은 우주, 생명진화, 인류 역사로 이어지는 빅히스토리를 내재화, 주체화하였다. 함석헌은 오산중학교 시절에 1921년경에 웰즈(H.G. Wells)의 책 ‘세계문화사’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 과학교사를 지냈고 신문기자와 공상과학소설가였던 웰즈는 빅히스토리의 원조다. 그는 2권으로 된 ‘세계문화사’(The Outline of History 1920)에서 우주사, 생명진화사, 인류사를 아우르는 거대한 정신 문화사를 서술했으며 인류는 세계단일국가를 이루고 세계평화에 이를 것으로 낙관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인간정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비관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1936년 1월~1938년 3월까지《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연재했다. 이 책에서 그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통합하여 우주, 생명진화,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빅히스토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신의 사랑 아가페가 창조적 생명 진화의 동인과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포유류의 모성애에서 인간의 지성과 영성이 닦여져 나왔다. 그는문명을 우주생명의 자기인식, 자기이해와 자각으로 파악하였고 인간과 우주생명과의 이해와 소통, 사귐으로 이해하였다. 인간문명의 첫 번째 형태인 목축은 다른 동물을 이해하고 소통하며 사귀는 일로 보았다. 목축을 통해서 인간은 동물의 세계를 알게 되고 친하게 되었으며 사귐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문명의 둘째 형태인 농업은 인간이 식물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식물과 벗으로 사귀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식물과 사귐으로써 식물을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게 하는 자연법칙, 하늘과 땅의 조화로운 법도를 익히고 우주의 법도에 순응하게 되었다.셋째 형태인 금속공업은 우주의 이화학(理化學)의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와 소통하게 하는 것이다. 금속을 다룸으로써 우주의 법칙과 우주물질세계의 무궁한 본성과 신비를 알고 사귀게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에게 문명은 인간이 우주생명세계를 인식하고 소통하고 사귀는 것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것이고 우주를 창조하고 이끄는 신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과 역사는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 완성해가는 인간의 자기 교육과정이다. 문명을 우주생명과의 이해와 소통과 사귐으로 보고 신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봄으로써 함석헌의 문명관은 종교적 근거와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생각(정신)과 노동(삶)과 역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였다. 인류는 (농업)노동에 의해 “진실히 생각하는 자”, “참 사람”이 되었다.인간은 땀 흘려 노동함으로써 생각하게 될 뿐 아니라 참되고 순수한 생각을 하게 된다. “노동 더구나 농업노동은 인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할 뿐 아니라 또 그것을 정화한다.” 함석헌은 노동의 목적이 진실하고 순수한 생각을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사랑의 신이 노동으로써 인류의 어깨에 지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히 생각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하여서다.” 노동하는 동안에 창조적이고 고귀한 생각이 솟아나온다. “혼자 묵묵히 땅을 파는 동안에 많은 잡념은 사라지고, 많은 광채가 안에서 솟아 나옴을 깨닫는다.” 노동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나무와 짐승에게는 역사가 없으나 노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역사가 있다. “자연의 선물을 먹고, 기나긴 여름날을 노래로 보내는 풀벌레나 썩은 것을 찾아 영영(營營)하는 창승(蒼蠅)에는 역사는 없다. 그러나 노동에 우는 인류에게는 (역사는) 있다.”그에게서 생각은 단순히 이론적 이성의 사변이 아니라 삶의 행위다. 인간은 직접 삶에 참여함으로써 논리와 윤리를 통합할 수 있다.
함석헌과 함께 씨ᄋᆞᆯ사상을 정립한 다석 유영모는 우주, 생명, 인류의 빅히스토리를 내재화 주체화하였다, 유영모에게 인간의 자아 ‘나’는 우주자연과 생명과 정신, 하늘과 땅의 모든 이치와 법도가 실현되고 완성되는 길이고 문(門)이다. 유영모는 “만물의 변화와 발전의 대법칙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 것이 (인간의) ‘나’”라고 말했다. 인간의 ‘나’는 물질의 낮은 단계에서 정신의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과 법칙을 구현한 존재로서, 땅에서 하늘로, 물질에서 영으로 올라가는 존재다. 다석은 “변화 발전해 가는 이치의 길··· 그 이치를 파악하고 그 이치를 가지고 다시 하늘을 올라가는 (‘나’의) 길이 만물의 이치를 아는 중묘지문(衆妙之門)”이라고 했다. 다석에 따르면 물질변화와 생물진화의 이치를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는 나의 생명의 길이 만물의 이치를 아는 ‘모든 오묘함에 이르는 문’이다. 내가 하늘로 올라갈수록 만물의 이치를 잘 알게 된다. 또한 다석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자연을 연구하여 법칙을 찾고,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신비의 문이 인생”이라고 하였다.
함석헌은 인간을 우주, 생명 진화, 역사의 씨ᄋᆞᆯ로 파악함으로써 자연과 역사와 영성의 통전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서 천지인 합일, 몸, 맘, 얼의 통합에 이르렀다. 함석헌은 우주생명진화의 맥락에서 역사를 보았다. 인간의 뇌신경과 뇌세포 속에, RNA, DNA 속에 생명진화와 인류사, 민족사가 통조림 되어 있다. “너는 씨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설움은 네 허리를 묶는 띠요, 네 머리에 씌우는 관이다. 너는 작지만 씨이다. 지나간 5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5천 년만이냐, 5만 년 굴 속에 살던 시대부터의 모든 생각, 모든 행동, 눈물, 콧물, 한숨, 웃음이 다 통조림 되어 네 안에 있다. 아니야, 5만 년만이겠나, 파충류시대, 아메바 시대, 양치류 시대...造山 시대...허공에 소용돌이치던 가스 성운 시대까지도, 그보다도 절대의 얼이 캄캄한 깊음을 암탉처럼 품고 앉았던 시대의 모든 운동이 다 네 속에 있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의 천지창조, 개벽이 인간 속에서 지금 일어난다. 우주와 생명진화와 인류의 큰 역사를 내면화, 주체화한 인간은 제 속에 우주와 자연생명세계와 인류역사와 사회를 품고 있다. 인간은 우주와 자연 생명과 인류의 한없는 깊이와 높이를 가진 것이며 저마다 헤아릴 수 없는 사연과 곡절을 지닌 존재이고 삶의 존엄과 주권을 가진 것이다.
2) 주체 ‘나’와 전체(생명, 하나님)의 일치
인간의 주체 ‘나’ 속에 과거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고, 살아 있다고 본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은 고대 동양의 철학적 원리인 천인합일, 범아일여, 무위자연과는 달리 개별적 인간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전체를 내재화한 민은 역사와 사회의 주인이며, 하나님과 직통하는 존재다. 역사의 씨인 민 속에 민족정신과 생명이 온전히 담겨 있고 5천 년 민족사가 담겨 있다. 더 나아가서 우주 생명 진화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의 역사와 생명진화의 운명이 씨의 손에 맡겨져 있다.
생명은 주체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의 ‘하나 됨’으로 나아간다. 함석헌에게 참, 진리는 개별적 인간의 주체인 ‘나’와 전체 생명을 통일하는 ‘하나’다. “참은 그러니 뭔가? 참은 하나다. 한 나다. 한 아다. 나다. 큰이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다...하나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있는 것이다. 그래 나다. ‘나는 나다’하는 이가 하나다...참은 하나요, 하나님은 참이다.” 나와 하나, 큰 나, 한 나는 수로 헤아릴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와 무를 초월한 것이며 유와 무의 창조자적 근원이 되는 것이다.
나(개별적 인간의 주체)와 하나(전체 생명)의 일치, 한 나, 큰 나, 참 나, 한 나가 진선미성(眞善美聖)이다. 나와 하나가 일치한 ‘큰 나, 한 나’는 시간과 공간, 법칙의 근원이다. “그것은 누가 보나 언제 보나 진(眞)이요, 선(善)이요, 미(美)다. 그러므로 거룩이다. 그것은 마음이요, 혼이요, 정신이다. 그것을 시간이 부술 수 없고 시간이 도리어 거기서 나오며, 그것을 공간이 감출 수 없고 우주가 도리어 그 품에 안기며, 법칙이 그것을 다스릴 수 없고 모든 법칙이 도리어 그에게서 나온다.”
인간의 생명은 초월(神·한님)과 맞닿은 존재다. 함석헌은 하나님도 사람도 삶 속에서 이해한다. 삶의 의지인 하나님과 사람은 삶 속에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우주의 생명이 살아서 ‘나’와 이어진 것을 느낀다. “인간은 죽음같이 텅 빈 듯한 하늘을 향해 ‘아버지’하고 부를 때 자기 모세관 속에 우주의 맥박을 느낍니다.” “나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다. 있는 건 산 생명뿐이다. 서로 맞서는 나와 하나님은 다 가짜다.” 있는 것은 산 생명뿐이며, 믿음 안에서 우주의 생명이 ‘나’와 이어진 것을 깨닫는다.
함석헌은 인간의 깊은 죄를 말하고 피조물로서 작고 유한한 존재임을 강조하지만, 인간을 신과 일치된 존재, 신과 통하는 존재로 본다. 하나님과 일치하고 통하면 인간 영혼에서 무한한 얼 힘이 나온다. 하나님과 일치된 나를 펴기만 하면 우주와 역사를 돌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중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3) 자신의 창조자와 피조물
인간은 자신의 해방자와 창조자
빅히스토리를 주체화한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이며 자신에 의해서 창조되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역사가 기록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역사의 창조와 심판과 해방이 이루어지는 자리다.
“낡은 역사책을 모두 불살라 버려라. 새 역사를 쓰자. 그것 내놓고 사료가 어디 있느냐? 걱정마라. 말하는 3천만 산 역사가 있지 않나? 이 나라의 지도자라 하고 다스린다는 놈들이 돈에 팔리고 권세에 팔려 역사를 삐뚤어지게 쓰고 있는 동안 무식한 민중은 무식하기 때문에 붓과 먹으로 쓰지 않고 피와 땀으로 쓴 역사를 석실(石室) 아닌 육실(肉室)에, 골실에, 그래 탑의 지성소(至聖所)에 감추어 지켜왔다...돌에 아로새겼던 문화는 망가졌어도 여기는 유전 속에 깊이 묻혀 있어 캐내는 날을 기다리는 산 문화가 있다. 이 자리에 서서, 막막 우주에 여기밖에 없는 이 자리에 서서 새 역사를 쓰고 짓자...거기서는 역사해석이 곧 역사요, 역사지음이 곧 뜻이다. 이 자리에, 너 위에 서라. 거기가 우주의 중심이요, 거기가 과거와 미래가 다 내다뵈는 점이요, 거기가 시(時)·공(空)이 한데 맞닿는 원추의 정점이요, 거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거기서 창조가 나오고 심판이 이루어진다.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있다. 하나님없이 나없지만, 나없이 하나님도 없다.”
함석헌은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서 역사를 변혁하고 창조한다고 보았다. “너는 씨 앞선 영원의 총결산,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지나온 5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민중의 자궁 속에 새 시대의 아들이 설어진다.”그에게 민중은 역사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민중은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 자체가 민중 속에 있다. 그리고 민중이 역사를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씨은 (역사의) 어머니인 동시에 아들이다. 시간마다 역사의 심판, 우주의 창조, 역사의 출발이다.”
함석헌은 ‘우리가 내세우는 것’에서 씨ᄋᆞᆯ은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새로 만든 말”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해방자이면서 새로운 창조자이며 자신의 해방과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야 할 존재다. 씨ᄋᆞᆯ이 자신의 해방자와 창조자라는 관점에서 ‘ᄋᆞᆯ’에 대한 풀이를 볼 때 그 생명철학적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씨ᄋᆞᆯ로서 인간은 ‘극대 혹은 초월적 하늘’을 품은 존재이며 ‘극소 혹은 내재적 하늘 곧 자아를 지닌 존재로서 활동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역사적 생명으로서 씨ᄋᆞᆯ은 물질적 제약과 법칙적 속박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자신을 해방하고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다. 고난 속에서 자신을 해방하고 창조하는 씨ᄋᆞᆯ의 삶 속에서 천지창조, 개벽이 일어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문명, 새 세상이 열린다.
3 철학의 전환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은 한국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상생과 공존의 생명철학이다. 그의 생명철학은 한국정신과 사상을 담아낸 한국철학이면서 동서양의 정신문화를 아우른 세계 철학이다. 전쟁과 폭력, 지배와 정복의 국가주의문명을 극복하고 민주적이고 영성적이며 평화적인 생명철학으로서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은 철학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한다. 지배와 정복의 서구 이성철학에서 상생과 상육(相育)의 한국 생명철학으로, 현상과 관념에서 생명의 본질과 주체로 철학의 근본적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1) 인도유럽어족의 지배와 정복 인문학에서 한국어족의 상생상육의 인문학으로
(1) 생명과 영혼을 죽이는 현대철학
물질, 기계, 관념의 철학이 생명과 정신을 고갈시키고 영혼과 생명을 메말라 죽게 한다. 지배와 정복의 언어, 철학, 사상이 생명과 정신을 쪼그라들게 한다. 지배와 정복의 언어와 생각은 생명과 영혼을 죽이는 생각이다. 오늘 인류사회를 지배하는 서양문명을 만든 것은 인도유럽어족이다. 인도유럽어는 지배와 정복의 언어이며, 인도유럽어족은 지배와 정복을 통해서 서양 역사를 이끌었고 서양문명을 만들었다.
인도유럽어족은 순수수학, 이성철학, 폴리스 민주정치, 로마제국을 만들고 히브리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유럽문명을 확립했으며 종교개혁, 과학기술과 산업혁명, 민주혁명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부국강병의 국가주의에 빠져 그리스의 형이상학과 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 신앙을 제거하고 물질론, 기계론, 관념론에 매몰되어서 식민지쟁탈전으로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정신적 파산선고를 받았다.
(2) 지배와 정복의 언어 인도유럽어
주어가 객어와 술어, 문장 전체를 지배하고 주도한다. 문장에서 객어(상대)는 자리만 차지할 뿐이다. 인식주체인 주어(이성)이 인식대상을 타자화 객관화하여 지배하고 정복하는 언어다. 이런 언어에서 인식대상은 주체가 될 수 없다. 인식대상은 현상과 관념에 머물 뿐 대상의 본질, 본성, 실질, 진실을 주체로서 드러낼 수 없다. 생명체의 주체적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는 과거, 현재, 미래에 따라 복잡하고 자세하게 분석, 분해된다.
동사시제의 이러한 복잡하고 자세한 변화는 생명주체의 행동을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분해하는 것이다. 생명체와 생명체의 행동은 인식주체가 자세히 규정하여 분석하고 분해하는 대상에 머문다. 논리적이고 규칙적이며 체계적으로 복잡하면서 엄밀하게 작동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마치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와 같다. 인도유럽어에 기초한 이성철학은 인식대상을 타자화, 객관화할 뿐 결코 인식대상의 주체에 이를 수 없으며, 인식대상을 분석하고 분해하여 논리적 법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인식대상의 표면에 머물 뿐이며 현상과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구언어의 뿌리 말인 인도 유럽어에서 ‘알다’를 나타내는 말(라틴어 scio)의 말 뿌리는 ‘skei’인데 “자르다, 분리하다, 가르다”를 뜻한다. 서구언어에서 ‘알다’는 대상을 ‘가르고, 잘라서’ 본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인식주체인 이성적 자아의 자르고 분리하는 능력이 앎의 내용과 행위를 구성한다. 인식대상은 가르고 자르는 인식행위의 수동적 대상에 머문다.
인식주체인 이성이 인식대상을 가르고 쪼개서 얻는 앎, 지식은 표면적이고 현상적인 지식일 뿐 결코 인식대상의 주체와 본질에 이르지 못한다. 여기서 감각적 지각과 인식적 이성의 앎은 인식대상의 표면적 현상적 앎에 머물고 그 본질과 주체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다. 이성이 대상을 분석하고 분해해서 얻는 지식은 표면적이고 현상적인 정보와 데이터가 될 뿐이다.
그리스어에서 말, 이성, 법칙을 나타내는 logos는 본래 ‘수를 헤아리다, 말하다, 이해하다, 설명하다’를 뜻한다. 그리스어에서 idea(이데아), theoria(이론)는 모두 ‘본다’는 말이다. 순수 이성의 사유 활동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이성의 관조(觀照)가 최고선이고 최고 행복이라고 하였다. 제3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이성의 사유 활동은 구경꾼, 방관자, 비평가의 학문활동이며 분석하고 이해하여 설명하는 해석학을 넘어설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생명과 역사의 현실에 참여하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주민자치 인문학은 주민의 삶과 정신, 자아와 품성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다듬고 정화 고양시키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인도 유럽어와 순수이성의 관조활동으로서의 철학과 사상은 주민의 삶에 참여하여 주민이 스스로 자치능력을 기르고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힘과 지혜를 심화 확대하지 못한다.
서구 근현대의 철학은 인식주체(이성)의 인식론에 몰입했다. 근현대의 인식론 철학을 정립한 칸트는 인간의 감각과 이성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고 현상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사물의 본질과 주체는 알 수 없고 사물에 대한 감각의 지각 활동으로 얻어진 감각자료를 가지고 이성이 구성한 (사물의) 현상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성의 인식과 사유활동에 집중하여 이성의 사유활동 세계인 관념의 세계에 머물렀다. 칸트의 현상계나 헤겔의 관념계는 인식대상인 사물, 생명, 인간의 주체와 본질, 알맹이에 이를 수 없다. 현상계에서는 주체의 깊이와 자유에 이를 수 없다. 관념계에서는 인식주체인 ‘나’의 경계가 없으므로 ‘나’는 타자(인식대상)의 주체를 만날 수 없다. 현상학을 정립한 훗써얼(E. Husserl)은 현상계와 관념계를 넘어서 사물의 본질에 이르려 했다. 그러나 훗써얼도 선험적 자아의 순수의식과 물리 신체적 직관에 의존함으로써 인식주체의 지각과 인식에 머물뿐 인식대상의 주체와 본질에 이르지 못했다.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의 주체와 본질에 이르려면 인식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대상의 주체와 본질이 드러나고 실현되게 해야 한다. 인식대상의 주체와 본질이 지각과 인식의 활동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서로 주체로서 지각과 인식의 활동에 참여하려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나와 남을 서로 주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생명철학에 이르러야 한다. 인간은 자기 안에 우주, 생명 진화, 인류의 역사가 압축되어 살아 있는 존재다. 주체이며 전체인 생명은 서로 감응하고 공명하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의 지각 활동과 이성의 사유 활동에는 생명의 주체와 전체가 참여한다.
만일 인간이 현상계와 관념계에 머문다면 인간과 인간은 서로 주체로서 참된 만남과 사귐, 소통과 교감, 협력과 협동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지각활동과 사유활동은 현상계와 관념계를 넘어서 서로의 주체와 본질(알맹이)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실현한다. 한국어에서 ‘앎’은 인식대상의 알맹이 속알을 드러내는 것이고 표현하는 것이다. 서로 속알을 드러내기 때문에 인정을 느끼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자신의 삶 속에 다른 사람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 생명의 교감과 소통의 언어: 한국어
한국인의 사유와 인식방법은 인식대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한국어에서는 객어(상대)에 따라 주어와 술어의 꼴이 달라진다. 주어 특히 1인칭 주어는 ‘우리’로 뭉뚱그려지거나 흔히 생략된다. 한국인의 언어는 객어(상대)를 존중하고 모시는 언어이며, 객어를 드러내는 언어다. 언어가 인간의 감정과 의식, 무의식까지 규정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한국인의 인식방법은 이런 언어의 형태와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인은 인식대상을 지배하거나 정복하지 않고 인식대상과 교감하고 감응하는 방식으로 대상과 타자를 인식한다.
문장에서 주어의 구실이 약화되고 객어(상대)를 중심으로 문장이 구성되고 작용한다는 점에서 주어와 객어가 직결된다는 점에서 한국어는 인식대상, 대화대상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언어이며 상대에 대한 인정과 사랑을 담뿍 담은 언어다. 한국어에 1인칭이 약화되고 3인칭이 없다는 것은 한국어가 상대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언어임을 의미한다. 한국어로 말할 때 제3자를 지칭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상대와 교감하고 소통하는 데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예컨대 주어와 객어를 생략하고 “왔어”하는 한 마디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 인도유럽어로는 이런 표현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1인칭이 약화되고 3인칭이 없다는 점에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체계적인 표현과 사고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교감과 소통,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아를 넘어서 상대를 모시고 받드는 언어라는 점에서 한국어는 감성과 영성이 풍부한 언어다. 또한 어휘변화가 라틴어처럼 기계처럼 규칙적이고 체계적이지 않고 말하는 이의 감정과 필요에 따라 또는 말하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어휘의 조사와 어미가 변한다는 점에서 한국어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한국어가 형용사와 부사가 풍부하고 의성어, 의태어가 발달한 것도 인식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하지 않고 객관화, 타자화하지 않고 인식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체로서 존중하고 드러내고 돋보이려는 한국어의 특징을 드러낸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한국어에는 정이 담겨 있다. 1인칭이 약화되고 3인칭이 없는 한국어는 소통과 교감의 언어다. 형용사, 부사, 의성어, 의태어가 발달한 한국어는 다양하고 풍부하며 미묘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언어다. 소통과 교감의 언어이며 다양하고 풍부한 소리를 내는 한국어는 예술적 교감적 언어이며 상대를 주체로서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적 평화의 언어다.
형용사, 부사, 의성어, 의태어가 발달한 한국어는 발음, 소리가 풍부하고 다양하고 미묘하며, 한글은 다양하고 풍부하고 미묘한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인식대상의 소리를 풍부하고 다양하며 아름답고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인식대상을 주체와 전체로 있는 그대로 온전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한자는 400음절을 소리 낼 수 있고 일본 글자는 겨우 300음절만을 소리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한글은 타이핑 할 수 있는 음절만 1만 개가 넘고 타이핑 할 수 없는 글자도 모두 조합해 쓰는 게 가능하다. 따라서 한글은 사실상 무한대로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어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소리를 잘 드러낸 장세정의 ‘샌프란시스코’를 들어보라. 배려와 존중, 소통과 교감의 언어이므로 정이 담기고 형용사, 부사, 의성어, 의태어가 발달하여 미묘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한국어는 음악적 소리 언어다.
한국어에서 참과 거짓이란 말도 생명의 본질과 주체를 드러내는 한국어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준다. 참과 거짓은 사물과 생명의 본질과 현상을 가리킨다. 우리말 사전에 보면 참의 어원은 알기 어렵다면서 ‘알이 차오름’, ‘알참’에서 참이란 말이 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매우 그럴 듯 하다. 곡식의 낟알과 열매의 알맹이가 알찬 것이 참이다. 거짓은 거죽에서 온 말이라고 국어사전이 밝히고 있다. 예전에는 ‘거즛’이라고 했는데, 거즛은 거죽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까 거짓은 알맹이가 없이 쭉정이, 거죽만 있는 것이고, 거죽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이다. 착실(着實), 진실(眞實)이란 말도 열매, 알맹이가 충실한 것이 참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거짓은 거즛(거죽)이며 겉, 표면,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짓은 거죽, 표면, 현상에 매인 것이며 알맹이, 알짬, 본질, 깊이가 없는 것이다. 참은 ‘알참’을 뜻하며 알맹이 알짬 속알이 차오르는 것이다. 참과 거짓에 대한 이런 설명에는 심오한 생명철학과 교육철학이 담겨 있다. 생명과 정신, 사회와 역사, 정치와 경제, 종교와 문화에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분하고 알맹이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 참 교육이다. 아름답고 참된 교육은 사람과 사회에서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고 알맹이에 충실한 사람과 사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알찬’ 것이 참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알찬 것이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앎다운-아름다운’ 것이다. 교육은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알이 찬 것,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것이다. 실현(實現)이란 말도 열매, 알맹이를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삶과 말과 일에서 열매가 열고 알맹이가 드러나게 해야 한다.
씨사상은 자신이 생명과 역사의 씨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씨알맹이를 싹트고 꽃 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사상이다. 씨사상은 생명과 정신의 껍데기에 매이지 않고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에 충실한 사상이다. 생명과 정신의 껍데기는 육체이고 물질이다. 생명과 정신의 알맹이는 이성과 영성이다. 거짓은 껍데기 거죽에 매인 것이고 참은 ‘알이 찬’ 것이다. 껍데기, 거죽에 매인 것이 거짓이고 씨알맹이에 충실하여 생명과 정신의 알이 차서 ‘알참’이 참이다. 씨사상은 거짓된 껍데기를 깨고 알맹이 참에 이르는 영성을 추구한다. 씨정신은 인간의 삶과 사회에서 껍데기와 알맹이를 잘 구분하고 껍데기, 거죽이 알맹이를 짓누르고 해치지 않게 하고 알맹이를 보호하고 살리는 구실을 하며, 알맹이가 싹 트고 꽃 피고 열매 맺게 하는 정신이다. 씨정신은 생명을 살리는 종교평화의 영성이다.
2) 생명의 본질과 주체를 드러내는 앎과 모름의 한국적 인식론
앎의 인식론
‘알다’는 한국말도 서양의 말과 비교된다. 서구언어의 뿌리 말인 인도 유럽어에서 ‘알다’를 나타내는 말(라틴어 scio)의 말 뿌리는 ‘skei’인데 “자르다, 분리하다, 가르다”를 뜻한다. 서구언어에서 ‘알다’는 대상을 ‘가르고, 잘라서’ 본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인식주체인 이성적 자아의 자르고 분리하는 능력이 앎의 내용과 행위를 구성한다. 인식대상은 가르고 자르는 인식행위의 수동적 대상에 머문다. 그리고 인식대상을 가르고 잘라서 얻는 지식은 인식대상의 거죽(표면)에 대한 현상적 지식일 수밖에 없다. 이성이 가르고 자를 수 있는 것은 물질과 관념뿐이다. 인식대상의 본질, 속알, 깊이와 자유, 얼과 혼은 가르고 자를 수 없다.
이에 반해 우리말 ‘알다’는 사전에서 “배우거나 경험하여 모르던 것을 깨닫다.”로 풀이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인식대상을 배우고 경험하여 인식대상의 본질이 내게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의 뿌리 말 ‘알’은 ‘알맹이’(核), ‘알짬’(精), ‘알’(卵)이고 ‘얼’(情神)과 통한다. 우리말 ‘알다’는 인식주체의 인식능력이나 행위와 관련되지 않고 인식대상의 본질·내용과 관련된다. ‘알다’는 인식대상의 알맹이와 알짬, 잠재적 생명력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알다’는 인식대상에 ‘알맹이’, ‘알짬’, ‘생명의 씨앗’이 있다고 믿고 대상에 접근한다. ‘알다’는 인식대상의 알짬[내적 본질]이 알려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 앎에는 인식대상의 알짬이 담겨 있다. 이런 앎의 행위에서는 인식대상이 중심과 주체로 존재한다. 서구언어에서 ‘알다’는 인식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해서 대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이라면 한국어에서 ‘알다’는 인식대상 전체의 핵심이 손상되지 않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한국어에서 ‘알다’는 전체적인 이해와 깨달음을 뜻한다. 이런 말의 어원적 차이는 서구에서는 인식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인식론을 시사하고 한국에서는 인식주체인 인간의 이성적 자아가 겸허하게 인식대상을 긍정하고 신뢰하고 존중하며, 인식대상에 자신을 맞추는 인식론을 시사한다.
모름의 인식론
서구의 학문방법과는 달리 동양의 학문방법은 삶 속에서 깨달음을 전제하고 추구한다. 서구의 학문을 나타내는 말, science나 Wissenschaft는 모두 앎과 지식을 뜻한다. 서구의 학문을 앎, 이성적인 지식과 정보를 추구한다. 그런데 동양의 학문은 “모르는 것을 배우고(學) 의혹을 묻는 것(問)이다.” 서경(書經)에서는 학(學)을 “가르침을 받아서 깨달음을 전하는 것”(受敎傳覺悟)이라고 했다. 동양의 學은 객관적인 지식과 논리보다는 주체와 객체가 통전되는 ’깨달음‘에 초점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배움‘을 뜻하는 ’學‘은 가르침과 깨달음이 몸과 맘에 ’배게‘ 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모르는 것에 대해 묻는” 동양의 학문은 ’모르는‘ 인식대상에 대해 겸허하게 접근하며, 그 인식대상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닌다.
동양적 학문의 방법과 내용인 가르침과 깨달음은 몸과 인격적 주체의 참여를 전제한다.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로서의 앎만을 얻는 것이라면 인격적 참여와 깨달음이 필요 없다. 인격적 참여와 깨달음은 ‘모름’을 전제한다. 생명과 물질의 세계는 이성의 빛이나 물질의 빛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신비의 차원을 지닌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주체를 가지고 물질은 고유한 존재의 깊이를 지녔기 때문에 밖에서는 다 알 수 없고 규명할 수 없는 모름의 차원이 남는다. 이성과 개념의 인식은 이 알 수 없는 모름의 차원을 훼손하지 않고 지킴으로써만 생명과 물질의 내용과 성격을 밝힐 수 있다. 모름지기는 ‘반드시’, ‘꼭’을 뜻하는데 유영모는 ‘모름직이’(모름을 지킴)로 풀이한다. 절대와 초월의 궁극적인 세계, 삶의 미묘한 세계는 논리와 개념으로, 생각과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세계다. 알 수 없는 모름의 세계에서만 ‘반드시’, ‘꼭’이 성립된다. 생성소멸하고 늘 변화무쌍한 상대세계에서는 ‘반드시’, ‘꼭’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름의 세계’를 지킬 때 ‘반드시’,‘꼭’이란 말을 쓸 수 있다. 모름을 지킬 때 삶과 사물의 본질적 깊이와 궁극적 차원을 드러낼 수 있다.
모름의 인식
모름이란 말 자체가 한국인의 이런 인식방식과 성격을 드러낸다. 다른 나라 말들에서는 ‘안다’는 말 앞에 부정사를 써서 알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영어는 'know', 'don't know'라고 한다. 영어를 비롯한 서구 언어가 다 그렇고 중국어와 일본어도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다’, ‘안 안다’고 하지 않고, ‘안다’, ‘모른다’고 할까? ‘모른다’ 는 ‘못 안다’에서 온 말이다. ‘모름’ 은 ‘못-앎’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김민수 편 『우리말 語源辭典』에서는 ‘모르다’의 어원을 ‘몯[不能]+[매개모음]+다[어미]’로 보기도 한다. ‘모른다’는 말에는 “능력이 없거나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어원적으로 ‘모름’이 ‘못 앎’에서 오지 않았다 해도 ‘모름’에 인식능력이 없거나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면, ‘모름’은 ‘못 앎’을 뜻한다. ‘못-앎’은 ‘안-앎’과는 다르다. ‘못’은 능력이나 형편이 미치지 못한 것을 나타내고 ‘안’은 사실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거나 말하는 이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다. “결혼 못 했다”는 말과 “결혼 안 했다”는 말에서 그 차이가 잘 드러난다.
인식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와 생명 세계에 대한 겸손한 인정과 접근태도가 모름이란 말에 담겨 있다. 앎의 세계와 알고 있지 않은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자세와 태도가 아니라 나의 인식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모름의 세계를 긍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모름’이라는 말에 드러나 있다. 모름은 인식능력이 미치지 않는 차원의 세계가 내게 알려주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자세를 나타낸다. 모름을 모르는 대로 두어두고 모르는 대상이 알려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모르는 대상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모름’을 지키는 것은 나의 인식능력과 주체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이지 인식능력과 인식주체를 포기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모르는 것을 물으면서 모르는 대상이 스스로 알려주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나’ 자신이 깨달아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다’. ‘알고 싶은 데 모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모름’은 인식대상에 대한 존중과 경이를 내포하고 모르는 것에 대한 알고 싶은 의욕과 의지를 담고 있다. 이것은 ‘모름의 세계’에 대한 구도자적 탐구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으나 모르는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왜곡과 폭력을 피하는 주의 깊은 태도이다.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제하는 이러한 ‘모름’의 인식론에는 ‘모르는 것’이 알려질 수 있다는 낙관적 신념이 들어 있다. 지금 모르지만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닫혀 있지 않다. 지금 인식능력이 부족하고 미치지 못하지만 알 수 있다는 신념과 알고 싶은 의욕이 깔려 있다. 인식주체의 인식능력이 늘어나고 커질 수 있으며, 인식대상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알릴 수 있다. 모름의 인식론에서는 인식대상이 인식행위와 과정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한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사이에 친화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인식관계 속에서는 인식대상도 수동적이고 닫힌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인식행위와 인식사건에 참여한다. 인식대상이 인식주체로 하여금 눈을 떠서 새로운 차원을 보도록 일깨우고 자극하고 영감을 준다. 모름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인식주체도 모름의 차원과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단순한 정보(information)를 추구하지 않고 모름의 세계를 깨달으려는 사람은 스스로를 변형(transformation)시켜야 한다.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식방식과 관점과 관념을 변형시켜야 한다.
이미 ‘깨달음’이란 말 속에도 이런 인식론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서정범은 ‘깨’의 조어형(祖語形) ‘걷’은 눈을 나타내는 말이고 ‘닫’(=)은 ‘언어,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깨닫는 것은 “정신적이며 언어적인 인식”이며, “참뜻을 아는 것”이다. 서정범의 어원풀이에 따르면 ‘깨’는 객관적 인식대상에 대한 시각적 인식이고 ‘닫’은 인식대상의 뜻을 나타낸다. 깨달음에는 인식대상에 대한 눈의 감각적 지각과 인식대상의 내적 본질과 총체적 의미에 대한 정신적 통찰이 결합되어 있다. 깨달음은 ‘눈’으로 인식대상의 ‘뜻’, 내적 의미와 존재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인식주체의 몸과 정신이 하나로 되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하나로 된다.
김민수가 펴낸 어원사전은 ‘깨’를 “참깨, 들깨의 총칭”으로 보고, ‘깨다’의 첫째 의미를 “잠, 꿈, 술기운이 사라져 정신이 맑아지다”, 둘째 의미를 “조각이 나게 하다”로 풀이한다. 그리고 ‘깨닫다’의 어원을 ‘(覺)+(走)+다’로 보고 “생각하고 궁리하여 알게 되다”, “어떤 경지에 이르다”를 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깨닫다’의 의미를 ‘깨다’의 첫째 의미와 연결짓고 있다. 깨닫는 것은 인식주체의 인식이 무지와 편견의 어둠을 뚫고 분명한 앎에 이르는 것이다.
3) 서양의 기계론적 언어이해와 한민족의 생명 철학적 언어이해
서양의 기계론적 언어이해
촘스키가 인간의 뇌와 맘에 언어 습득 기능과 보편문법이 있다고 본 것은 기계적 후천적 행동주의 심리학을 넘어선 것이지만 생명철학적 언어이해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가 말한 언어 습득 기능과 보편문법은 인간의 고유한 언어능력을 인정한 것이지만,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인간의 특별한 신체구조와 심리구조, 언어의 본질과 사명, 목적과 지향에 대한 생명철학적 논의와 이해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촘스키가 말하는 언어습득장치와 보편문법은 서양철학의 기계론적, 관념론적 사고를 반영한다. 인간의 뇌에 언어습득장치가 있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검증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문법이 있다는 주장도 공통적인 문법구조와 변화 규칙을 가진 인도 유럽어들 사이에는 용인될 수 있지만, 한국어를 포함한 세계언어들 사이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언어습득장치와 보편문법 이전에 인간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신체구조와 심리구조가 있다. 인간의 독특한 성대구조와 구강구조를 갖지 못한 침팬지는 언어의 다양하고 복잡한 발음과 표현을 할 수 없다. 또한 욕망과 감정과 지성과 영성을 가진 인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심리구조가 없으면 말을 할 수 없다. 촘스키가 말한 언어습득장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신체구조와 심리구조에서 파생된 지적 능력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언어습득장치는 생명철학적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그리고 한국어와 라틴어의 서로 다른 문법구조와 규칙을 생각하면 보편문법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언어습득장치나 언어의 보편문법이 있는 게 아니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신체구조와 심리구조가 있고 언어를 요구하고 사용하는 인간 생명의 보편적인 본질과 목적, 의지와 지향이 있다. 언어는 인간 생명의 본질과 목적을 구현하는 행위이며 사건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은 인간의 생명을 표현하고 구현하며 창조하고 혁신하는 생명의 근본 행위와 사건으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이성주의적 언어이해에서는 이성적 법칙과 개념, 기호와 상징으로서의 언어는 언어를 말하는 인간의 생명이나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사물)과 내적이고 필연적인 관련을 갖지 못한다. 그 까닭은 이성의 관념·논리·규칙적 행위로서의 언어가 언어를 말하는 인간의 생명 세계나 언어가 지시하는 자연 생명 세계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이성의 논리적 규칙과 개념, 추상적인 기호와 상징으로만 규정될 수 없다. 말은 감각의 정보와 이성의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서 생명의 근본적인 행위이고 사건이다. 말은 감각의 지각내용과 이성의 인식내용뿐 아니라 생명의 근원적인 의지와 지향, 간절한 염원과 목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소통하려는 생명의 본성에서 우러난 생명의 근본 행위다. 또한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사귐과 소통, 일치와 합일을 이루는 창조적인 공동체적 생명 사건이다. 말은 인간 생명의 깊고 높은 의지와 열망의 표현이고 수단이다. 말은 생명의 주체적이며 전체적인 행위다. 말은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하려는 생명의 총체적인 행위와 수단이다.
또한 말은 나의 몸과 맘 속에 있는 욕구와 감정, 의지와 뜻이 나의 몸과 맘 밖에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맘 속에 있는 욕구와 감정, 의지와 뜻을 움직이고 서로 다른 인간의 생명과 의지가 소통하고 연락하여 일치와 합일에 이르게 하는 창조와 혁신의 사건이다. 말은 나와 남의 생명과 뜻이 일치와 합일에 이름으로써 협동과 연대를 이루고 큰 힘을 얻어서 큰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행위이고 사건이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생명철학적 이해
말은 생명의 본성과 목적을 실현하고 완성하려는 생명의 간절한 의지와 열망을 담은 것이면서 생명의 본성과 목적, 진리와 이치를 드러내고 실현하는 매체다. 말은 인간의 몸, 맘, 얼이 모두 참여하는 생명의 총체적 행위이고 사건이며 나와 우주 자연과 하나님이 함께 참여하는 우주적이고 신적인 사건이다. 말은 인간의 성대와 혀와 입이 대기(大氣)와 서로 울리고 떨게 해서 내는 소리다. 중국어에서 천명(天命)은 ‘하늘의 뜻과 말씀’을 뜻하는데 명(命)은 목숨을 나타낸다. 목숨은 몸으로 하늘의 대기와 소통하고 공명하는 생명의 근본작용이고 활동이다. 천명이란 말은 인간의 목숨과 하늘의 뜻, 말씀을 직결시킨다. 말은 인간의 몸으로 목숨(목의 숨)을 울리고 떨게 하여 하늘의 뜻과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은 인간의 몸과 하늘의 대기가 서로 울리고 떨림으로써 하늘의 뜻, 말씀과 일치하는 인간의 간절하고 깊은 뜻과 염원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가장 인간다우면서도 신령한 생명사건이다. 말은 인간의 몸(성대, 혀, 입술)으로 생명의 숨(목숨)을 울리고 떨게 하여 생명의 간절하고 지극한 생각과 뜻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이다. 생명의 간절하고 지극하고 높은 생각과 뜻은 하늘에 닿는 것이며 하늘의 얼과 높은 뜻에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인간의 생명과 우주가 서로 울리고 떨려서 만들어내는 신비한 것이며, 인간생명의 가장 깊고 높은 차원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말은 땅의 흙(물질)으로 빚어진 몸과 인간의 목숨과 맘(생각과 지성), 하늘의 높은 뜻과 얼이 서로 어우러지고 울려서 나오는 것이니 천지인합일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말에는 땅의 물질과 몸의 깊이와 이치, 생명의 본성과 이치, 지성과 영성, 하늘과 얼의 높이와 이치가 담겨 있으며, 말은 그런 이치와 가치와 뜻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닦아내는 것이다.
말은 나의 생명과 정신을 진동시켜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정신을 진동시키고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가장 깊고 높은 본성, 속알(仁, 眞心, 眞實)이 말을 통해 표현되고 실현되고, 남의 본성, 속알과 소통 전달 연락이 된다. 말은 인간의 가장 깊고 간절한 얼·혼의 주체적 표현이면서 서로 다른 주체와의 연락과 소통, 사귐과 교류이다. 말은 인간 생명의 가장 깊고 높은 의지와 뜻, 본성과 사명을 담은 것이다. 생의 욕구와 의지, 소통과 공명, 행위와 사건이며 신의 뜻과 명령을 전달하는 말은 논리와 개념, 문법과 이치로만 탐구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은 말과 생명의 본성, 바탈을 직결시켰다. 그에게 말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생명과 역사의 근본을 새롭게 바꾸는 일이었다. “혁명의 명은 곧 하늘의 말씀이다. 하늘 말씀이 곧 숨·목숨·생명이다. 말씀을 새롭게 한다 함은 숨을 고쳐 쉼, 새로 마심이다.···혁명이란 숨을 새로 쉬는 일, 즉 종교적 체험을 다시 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대로 하면 하늘이 명(命)한 것은 성(性) 곧 바탈이다.” 하늘의 말씀인 천명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천명은 무한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의 신비를 담은 것이며 인간의 생명 속에 심겨진 것이다. “억만년 진화의 총결산과 미래 영원한 발전의 설계를 한 데 합한 신비의 말씀인 알갱이를 속에 품고 있는 산 씨···.” 말은 생명과 역사의 핵심과 뜻, 혁명과 변화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함석헌에게 말씀은 이성과 직결된 것이면서 이성을 초월한 것이다. 그는 말씀을 하늘 영과 일치시켰다. 그에게 말씀은 이성과 하늘의 결합이다. 1955년에 쓴 글 “말씀,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성의 높은 봉에 오르지 않고 하늘에서 내리는 영을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은 이성만이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고, 자아를 초월하여, 절대계에서 오는 영에 접할 수 있는 디딜 곳이 되기 때문이다. 감정 같은 것은 그 봉우리의 중턱에 피는 꽃밭에 지나지 않는다...사람의 맘에 무한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뿐이다...”
더 나아가서 함석헌은 우주 만물의 본성을 말씀으로 이해하여 말씀과 우주 대자연을 직결시켰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우주 이 세계란 것은...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배통에서...그칠 새 없이 울려나오는 굉장한 말소리가 곧 이 천지, 이 우주, 이 만물이란 것이다...바라보아서 장엄한 높은 봉우리도 그 파동의 한 엉킴이요 만져볼수록 신기한 작은 버러지도 그 파동의 한 맺힘이다.”
말을 우주만물과 인간 생명과 역사의 본성과 직결시킨 함석헌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직결시켰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생각이 가장 위대하고 신비한 사상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사상인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다는 생각은 어찌하여 사람의 자식의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던가....과연 이 일 자체가.....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것으로 된 일이요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 증거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말의 위대함과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말’ 이것처럼 이상하고 이것처럼 위대한 것은 없다. 이는 뵈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영의 나라를 물질의 나라로 번역하는 일이다. 하나님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4) 생명의 본성, 주체성, 전체성, 창조성을 실현하는 생각: 생각하는 씨ᄋᆞᆯ이라야 산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인도유럽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와 칸트의 철학에서 보듯이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지배하고 규정할 뿐이며 인식대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뿐이다. 서양철학은 이성이 조용히 관조하는 구경꾼의 철학이며 인식대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해석학이고 인식대상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평론가 인문학이다. 이런 학문전통에서는 인식주체인 나의 변화와 혁신에 이르지 못하고 상대(객어)를 주체로 이해하고 존중할 수 없으며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상호 변화에 이르지 못한다.
속 힘을 길러주는 생각
함석헌에게 생각은 생명의 근본행위로서 생명의 알맹이, 알짬을 살리고 성숙하게 하고 고양시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의 속알을 살리고 키우고 높이는 일이다. 그에게 생명의 속알은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것이면서 전체적이고 신적인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생명의 씨ᄋᆞᆯ을 살리는 것이며 생명의 씨ᄋᆞᆯ을 살리는 것은 주체로서의 나를 살리는 것이면서 공동체적 전체를 살리는 것이다. 일본 교토포럼의 대표였던 김태창이 공공(公共) 철학 원리로 제시한 “나를 살리고 공의 세계를 열기”(活私開公)는 함석헌의 씨사상에서 자극과 영감을 받은 것이다.
함석헌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인식주체인 나와 인식대상인 상대의 삶에 참여하여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참된 주체와 전체에 이르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주관·객관을 구별하는 서구의 객관주의적 사고경향을 비판한다. 객관적 사물에 대한 연구, 통계 숫자의 나열이 “나 자신을 욕심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악에서 건져내는 데 무슨 효력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인간 문제와 사회 문제 “해결의 열쇠는 내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자신의 얼굴을 존중하고 바로 세우는 데서 삶과 생각을 시작한다. “거울에 비치는 네 얼굴을 보라. 그것은 백만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그 얼굴이다.” 나의 얼굴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문학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자기 얼굴을 존중하고 바로 세우는 것이 정치문화적 예속과 굴종에서 벗어나 사상과 정신의 주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의 주체적 사상은 겨레 얼과 민중적 삶의 자주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 억압과 사대주의, 외세의 지배와 문화적 예속에 빠져서 상실된 겨레 얼과 자주성을 일으켜 세우는 데서 그의 사상은 시작한다.
함석헌에게 생각은 인간의 속힘을 길러주는 것이고 생활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의 빈곤이 모든 빈곤의 근원이다. 속에 생활력이 없으므로 모든 빈곤과 폐해가 몰려드는 것이다. 속에 생활력이 없는 것은 생각하는 힘이 없음을 뜻한다. 생각하는 것이 사는 길임을 함석헌은 이렇게 갈파하였다. “생각이란 다른 것 아니요, 물질을 정신화 함이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을 창조해 냄이다. 고로 약한 놈, 병든 놈, 불리한 조건에 있는 놈일수록 생각하는 것이요, 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하면 서로 떨어진 것이 하나가 될 수 있고, 생각하면 실패한 것이 이익으로 변할 수 있다. 인도를 인도로 만든 것도 생각이요, 히브리를 히브리로 만든 것도 생각이다. 철학하지 않는 인종은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유철학이 없는 나라다. 그러면 이 비참은 당연한 것 아닌가? 물질적 가난은 정신적 가난의 상징적인 표식일 뿐이다. 정신이 끊어지는 때에 이집트 문명은 땅 속으로 들어갔고, 정신이 일어나는 때에 아테네는 세계를 얻었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결점은 생각이 깊지 못한 것이다.” 생각은 생명의 속힘을 기르는 것이므로 생각이 없으면 개인의 생활도 쪼그라들지만 나라도 쇠퇴하고 망한다. 생각하면 살고 생각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생각은 생명의 자발(自發)이다. 피어나는 것이다. 고로 그것[생각]이 있으면 모든 더러운 것이 거름으로 되어 꽃으로 피고, 그것이 없으면 모든 밖으로 온 꽃이 누르는 점이 되고 썩히는 누룩이 된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제 생각, 제 철학, 제 종교를 가져야 한다. “살려거든 생각해야 한다. 제 철학을 가지고, 제 종교를 가지고, 제 역사를 가지고, 제 세계를 가져야 한다.”
함석헌에 따르면 생각하는 것은 씨ᄋᆞᆯ의 본분이고 사명이다. 그리고 세계의 장래 생명의 운명은 생각하는 씨알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은 겸허하고 절실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 생각하는 것이 씨알이다. 생각밖에 못하는 것이 씨알이요, 생각해야만 씨알이다.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는데, 생각은 항상 못났어야 할 수 있다. 생각하던 사람도 스스로 잘났거니 하는 의식에 빠지면 생각하기를 그치고, 또 생각해도 그것은 참 생각이 아니요 거짓된 망녕된 생각, 곧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생각이 돼버린다. 생각은 못난 자리에 있어야 할 수 있다. 인간의 인간 됨은 스스로 못났다는 의식, 그래서 늘 알아차리고, 적응할 준비 태세에 있고, 가르쳐주면 들을 수 있는 심정에 있다...항상 못난 줄 알아야 인간적일 수 있다...사람이 스스로 잘났다 생각할 때는 사람에서 멀어지고 발달을 그친다. 가장 본질이 된다는 도덕에서조차 스스로 잘났다 할 때 정반대의 악마의 지경으로 떨어진다.”
생명의 본성, 주체성, 전체성, 창조성을 실현하는 생각
생명이 스스로 하는 자발적 주체이면서 하나로 통일된 전체이듯이, 생각은 생명의 주체인 나의 고유하고 창조적인 행위면서 생명 전체의 행위다. “오늘 내가 있고 내 머리에 생각이 솟는 것은 전에 억만 생명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요, 억만 마음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무한 바다의 한 물결이다. 내가 일어선 것은 내가 일어선 것이 아니요, 이 바다가 일으켜 세운 것이다.”
생각해야 산다.
함석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는 신이며 ‘나’에게 자기 생각을 주시는 신이다. “나는 지금도 ‘그이’가 내 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생각을 하는 씨알에게는 그이가 자기 생각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삽니다. 땅속에 들어가 썩어도 생명으로 폭발합니다. 속에서 주시는 ‘그이’의 이 생각을 받은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도 살고 세상을 살립니다.”
생각하는 것은 나의 속힘을 기르는 것이고 생각을 깊고 높이 할수록 정신은 깊고 힘 있어진다. 인간사회의 부패와 쇠퇴, 혼돈과 분열은 넓고 크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병이 생각이 넓고 크지 못한데 있다. 비겁도 이래서 있고 싸움도 이래서 많고 부패도 이래서 있다.”
한민족이 뜻을 잃고 하나 됨에 이르지 못한 까닭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남의 생각을 빌어다 쓰는 것으로 만족하고 스스로 제 생각을 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될수록 백성을 눌러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네도 중국생활을 빌어다가 손쉽게 해먹으려고만 했다.” 좋은 정치는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가장 아쉬운 점은 ‘생각의 빈곤’에 있다고 보았고, 한민족의 과제는 “깊은 종교를 낳고, 생각하는 민족이 되고, 철학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깊은 생각과 굳센 믿음을 가질 때 주체적인 자아가 확립되고, 민족이 하나로 되고 인류가 하나로 될 수 있다.
우주에서 물질의 정보는 결코 소멸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남아 있다고 한다. 인간이 하는 생각도 결코 소멸하지 않고 인류사회에 남아 있는 것이고 영향을 주는 것이다. 생각은 인식주체인 이성의 관념적 사유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다. 생각은 개인의 주관적 행위에 머물지 않고 전체 인류가 공동체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하는 생명 전체의 행위다. 개인이 죽은 다음에도 개인의 생각은 전체의 생각에 합류하여 생각을 풍부하게 한다. “발달은 결국 정신의 발달입니다. 사람은 줌이요 받음입니다. 산 담에는 그 남는 정신을 훗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난 다음에는 전 사람의 살고 난 정신을 전해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생각이 그것을 원하거나 말거나 간에 그것은 그렇게 됩니다. 우리 생각 뒤에 보다 크고 보다 어진 엄청난 생각이 있어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어진 생각이 잘나고 못난 모든 사람의 살고 난 결과를 정신이라는 한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 가지고는 다시 새 세대로 새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신비입니다.”
마치는 말: 생명과 영혼을 살리는 생활철학
오늘 우리가 함께 이루어야 할 철학과 사상의 전환은 인도 유럽어족의 물질, 관념, 기계 중심의 철학에서 한국어족의 생활철학으로, 당파와 진영 논리에서 상생 상육(相育)의 철학과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데카르트가 생각(관념)의 세계와 육체(물질)의 세계를 엄격히 분리함으로써 육체(물질)와 정신(생각)의 차원이 통합된 생명(생활)의 세계는 해체되었다. 과학주의자들은 경험하고 실험하고 검증하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참과 존재의 세계에서 추방하였다. 그리하여 언어와 생각은 존재의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추방되었다.
유발 하라리가 인간의 언어와 생각을 한갖 상상으로 보는 것도 물질론과 기계론의 과학주의를 전제한 것이다. 이런 과학주의는 인간의 생명과 생활을 해체하고 생의 주체인 나(영혼)를 부정한다. 언어와 생각이 상상뿐이라면 인터넷, 게임, 메타버스의 세계와 현실 생활의 세계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언어는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신체구조(성대와 구강의 발성구조)와 심리구조(몸, 맘, 얼)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늘의 공기와 생명의 숨과 인간의 육체가 어우러져 내는 소리다. 인간의 생각과 감각은 몸, 맘, 얼의 주체와 전체가 참여한 것이며, 물질, 생명, 정신의 알맹이, 속알, 뜻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것이다. 내 손이 무엇을 감각할 때 손만이 아니라 맘과 얼도 그 감각에 참여한다. 내가 말하고 생각할 때 이성만이 아니라 몸과 얼도 함께 나의 말과 생각에 참여한다.
오늘 인류를 지배하는 물질론과 기계론은 생명과 영혼을 부정함으로써 자치와 협동의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생명과 정신을 해체하고 제거하고 죽이는 물질론과 기계론에서 벗어나 생명과 영혼을 살리는 생활(生活)철학을 확립해야 한다. 기계, 물질, 관념에 매인 과학주의 인문학과 철학, 고대의 고전과 경전 중심의 철학은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철학과 사상, 생명과 영혼, 인간 중심의 생명철학으로 전환해야 한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철학은 생명과 인간을 살리고 영혼 ‘나’를 높이는 주체적인 생명철학이고 전체의 자리에서 나라와 문명을 바로 세우는 공공철학이다.
4차산업혁명 이후 인공지능 기계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과 생명 중심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물질, 기계, 관념의 철학은 생명과 영혼이 없는 평면 철학이다. 생명과 영혼을 살리고 높이는 철학은 입체적이고 심층적이며 심오하고 고결한 철학이다. 생명과 영혼을 파괴하고 죽이는 문명에서 생명과 영혼을 살리고 높이는 문명에 이르려면 깊은 생각을 하는 깊은 철학을 낳아야 한다.
함석헌은 하늘과 민족을 동일시하는 한민족이 그릇된 낙관주의에 빠져 깊은 철학을 낳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릇된 낙천주의, 이것이 태고시대에 있어서 우리를 잘못 만든 원인이 아닐까? 한[太, 韓], 밝[白, 明, 朴]하는 사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그 종교에 넓고 큰 것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나 그것이 깊은 뿌리를 국민의 정신 속에 박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한 개 흔적으로만 남았다. 지금의 산 생명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생명과 정신을 새롭게 하는 생각을 깊이 하려면 먼저 생각과 삶을 분리하는 서양의 거짓된 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함석헌은 생각이 삶에서 우러난 것임을 이렇게 갈파했다. “글은 말의 닦이운 것이요, 말은 생각의 엉킨 것이요, 생각은 살림의 피어난 것 아니냐?”더 나아가서 생각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정신의 근본적인 행위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 뚫어 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생각은 삶에서 우러난 것이며 삶을 깊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함석헌에게 생각은 신과 소통하고 신의 생각과 말씀을 받는 것이며 인간의 속알을 살리고 알차고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속알은 감성, 이성, 영성이다. 감성, 이성과 영성을 통합하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함석헌은 감성과 이성과 영성, 철학과 종교를 통합하여 깊은 철학과 종교에 이르려 했다. 이성과 영성을 통합함으로써 인간의 속알을 살리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70년대에 대표적인 진보적인 지식인들(송건호, 박현채, 백락청 등)은 민족주의자였다. 생활방식과 사고는 서구적으로 하면서도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던 사람,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함석헌은 세계평화주의를 내세웠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제 인류역사는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민족국가들을 넘어서 세계가 하나로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동(복종, 통일, 되풀이 지킴)의 역사와 서(저항, 자유, 진보)의 역사가 만나고 있다. 역사는 중도(中道)를 지키고, 한(韓; 큰 하나)을 붙잡고 밝히면서, “비폭력평화주의, 세계국가주의, 우주통일주의”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