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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분 비설소설분에서는 설하되 설한 바가 없다,라는 가르침.
다 나왔던 이야기이지요. 전체적으로 한번 읽어보고 나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내가 법을 설했다’는 생각을 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내가 법을 설했다’는 그런 생각을 내시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고 하지만 법을 설한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에 다만 이름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있어서 다음 세상에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이 분에서는 비설소설이라는 분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설하되 설한 바가 없는 그런 부분, 가르침을 이야기를 하고 있구요. 여래가 스스로 내가 법을 설했다 그런 생각을 내겠느냐? 그런 생각을 여래는 내지 않는다는 거지요. 즉 여래는 내가 여래다. 나는 깨달았다. 너희들은 중생인데 나는 부처다. 이런 생각 자체가 없지요. 나다 너다,라는 둘로 나뉘는 그런 생각이 없기 때문에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하면, 여래가 따로 있고 설할 법이 따로 있다. 이렇게 여러 개로 쪼개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여래가 따로 없고, 또 설할 법이 따로 없고, 또 여래가 설하는 법을 듣는 중생이 따로 없다.
이걸 다 나누어서 여래는 중생에게 법을 설한다. 이러면 벌써 여래와 중생이 나뉘고 그 사이에서 법이 왔다 갔다 한다,라는 게 자꾸 둘로 나뉘고, 셋으로 나뉘는 그런 분별하는 법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다,라고 만약에 한다면, 여래가 법을 설했습니다,라고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을 부처님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래를 곧 비방하는 것과 같아서 여래가 참되게 설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낙처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로는, 우리 중생들의 언어, 개념, 말, 이것은 분별의 도구입니다. 언어라는 거 자체가. 그러니까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은 전부다 분별입니다.
아, 그래서 설법을 하는 것을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쓴다. 뭐 이런 표현을 쓰는 것처럼.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모든 얘기는 전부다 방편입니다. 전부다 스스로 똥물을 끼얹는 일이에요. 그래서 만약에 제가 설법한 모든 것을 한 마디 한마디를 다 재생을 하면서 그걸 반박을 하라 그러면, 똑같이 반박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제가 하는 말은 전부다 반박했을 때, 누군가에게 반박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말입니다. 왜? 전부다 여법할 수 없는 말이지요. 왜?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은 전부다 온전하게 여법할 수 없습니다. 다 방편이기 때문에. 말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즉 부처는 법을 설했다.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부처도 없고, 설한 법도 없고, 법을 듣는 중생도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법을 설했다,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법문을 설하십니다. 그거 자체가 벌써 허물이고, 분별이고, 그래서 참, 이 설법하는 것이 잘 들어야 되지요. 그 말 자체에 끌려갔어도 안 되고. 그리고 설법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저도 이제 상당수는 그럴 겁니다. 이제 전제를 깔고 있지요. 이건 방편입니다,라는 걸 전제로 깔고 있어서 굳이 그 얘기를 지금 방편을 할 때는 방편만 얘기하고 있지, 계속해서 그 말 하고 나서 방편이에요.
이 말하고 방편이에요. 계속 그렇게 얘기하긴 뭐 하니까, 그냥 전부다 방편이라고 퉁치고, 그냥 얘기하는 것을 알아서 그냥 들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보면요. 많은 큰 스님들이 설법을 하시는 것이라든지 또는 이 스승이 저 스승에 대해서 평가하는 거라든지, 또 저 옛날 선사 스님들이 했던 어록에 대해서 평가한다든지, 뭐 이럴 때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아무리 육조 혜능 스님이라도. 그 어떤 선사 스님들이 써놓은 어록도 전부다 깨뜨리려고 마음먹고 깨게 되면, 다 깰 수 있지요. 여러분들이 어떤 스승 앞에 가서 점검을 받으려고 할 때 바르게 점검을 받게 된다면 말 한마디 뻥긋 못합니다.
말 한마디 뻥긋하는 모든 것이 전부다 30방을 맞을 일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저도 이제 옛날에 공부할 때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야, 왜 이렇게 선사 스님들은 서로 이렇게 좀 좋게 좋게 화합하고. 좋게 좋게 얘기하고. 다 스스로 인정해주고. 야, 너도 훌륭하다. 너도 훌륭하다. 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이렇게 서로서로 인정해주면 얼마나 훈훈하냐?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선사 스님들이나 이런 분들은 보면 서로서로 인정해주는 법이 없어요. 다 깨기만 하지. 그래서 언뜻 봤을 땐 왜 저렇게 부정적이지? 약간 우리 세속적인 생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뭐 하나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그냥 깨뜨려버리고. 저것도 틀렸다. 저것도 틀렸다. 그래서 뭐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라는 얘기가 그 조사에게도 그냥 너무 거기 취해버리면 그것도 안 된다. 이렇게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방편을 깨뜨릴 때는 뭐든지 그냥 낱낱이 다 깰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또 세울 때는 방편을 세울 때는 또 무슨 방편이라도 또다시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우고 무너뜨리는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세우고 무너뜨리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라는 얘기가 뭐냐 하면, 절대적으로 이거는 세워야 되는 그런 법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거 하나만은 절대적이라서 이거는 무너뜨리면 안 된다,라고 할 만한 어떤 정해진 법이 따로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지요. 이게 참 불교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상, 철학, 사람들이 내가 한 말도 이것도 다 방편이다. 이것도 다 거짓이다. 진실이 아니다. 이 말도 의심해라. 이렇게 얘기하겠어요. 부처님 팔만 사천 대장경이 전부다 방편이다. 전부다 달 자체가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이 얘기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거든요. 어찌 보면. 그런데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불교는 이런 얘기들을, 이『금강경』이라는 경전이 정말 인류,
제가 이 책에서도 써놓았듯이 아, 정말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무수히 많은 지혜의 서적 가운데도 너무 놀랍다,라고 하는 얘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모든 분별을 전부다 모조리 다 깨뜨리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법을 설한다고 하지만 법을 설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없기 때문에 그냥 법을 설한다,라고 방편으로 말하는 것일 뿐이지요. 또 중생이 있어서 법을 듣는 중생도 마찬가지예요. 이 진리의 말씀을 중생이 듣는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중생도 중생이 아니다. 그래서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라는 말은 법을 설하는 나도 공하고, 설하는 법도 공하고, 법을 듣는 중생도 공하다.
실체가 아니다. 이제 이 세 가지가 다 텅 비어 공하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법이 도대체 왜 공하냐? 사실은,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여러분 인생 주변에, 무수히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삶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TV만 켜도 TV 뉴스만 봐도 뉴스 안에는 정말 입에 담지 못할 만한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있고. 엄청난 일들이 막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뉴스 하나에 마음이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울고 웃다가 욕도 했다가 칭찬도 했다가 우리는 그러고 있지요. 그 TV 안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게 길을 걸으면 길을 걷는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온갖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구요.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여기에는 제가 하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지만, 제가 여기 빔 프로젝터에다가 어떤 TV소리를 켜 놓는다든지 영화를 틀어놓는다든지 뭐 온갖 여러 가지 소리들을 다 틀어놓고, 여러분들이 스마트폰을 전부가 켜서 여러분들이 스마트폰으로 들을 수 있는, 유튜브로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채널들을 다 켜놓고 여기서 듣는다,라고 봤을 때, 엄청난 소리들이 지금 막 중첩돼 가지구 여기를 가득 메우겠지요. 엄청난 소리들이 막 시끌시끌하게 이 공간을 가득 메울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보는 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구요. 어떤 사람은 이 뉴스를 보면서 이 사람을 막 욕을 하면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 사람과 저 사람 두 사람이 막 싸움을 하면서 욕을 할 수도 있고. 무수히 많은 소리가 왔다 가고 있는데, 우리는 전부다 그 소리 하나하나에 이제 다 반응을 하며 지내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 소리를 진짜라고 여기고 실체라고 여겨서 그 소리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그 소리 하나하나를 분별하고, 그래서 어떤 소리는 듣고 싶어, 더 듣고 싶어 하고 칭찬은 더 들으려고 집착하고. 왜 저 사람은 나에게 칭찬해주지 않을까? 나도 저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다.
이런 마음을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난 저 사람의 저런 행동, 저런 목소리는 너무 듣기 싫어. 이러면서 막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소리에 우리는 다 울고 웃으면서 반응을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금 이 공간에서 어떤 소리가 울려도 여러분들이 마음에서, 나는 지금부터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겠다.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당연히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거지요. 왜냐면 영화가 나온다고 해서 그 영화에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영화에 엄청나게 심각한 장면이 나오거나 아주 명장면이 나오더라도 거기에 막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심각한 장면이라 “조용히 좀 해.” 하고 거기 몰입할 수 있지만, 그거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즉 어떤 소리가 들려도 우리는 거기 반응할 수도 있고,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소리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고,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어떤 소리, 어떤 말이라고 할지라도 무수히 많은 소리가 왔다가 가는데도 불구하고, 일어나고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소리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그 소리의 내용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그렇잖아요? 아무리 많은 소리가 하루 종일 들려오더라도 내가 그 소리에 개입되지 않으면, 그 소리에 몰입하지 않으면, 그 소리를 내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소리는 그냥 왔다 가는 소리일 뿐이에요. 지나가는 새가 짹 거리고 짹 짹 짹 거리고 지나가는 것이 나에게 큰 상처를 남기거나 날 할퀴고 지나가거나 그러지 않는 거처럼. 그러니까 이 얘기를 잘 들어보세요. 이것과 똑같이 어떤 소리가 들려도 사실은 아무 일이 없지요. 그 소리를 좇아갈 때만, 소리를 따라가서 소리의 의미를 좇아갈 때만 우리는 괴롭거나 즐거울 수 있지.
거기에 내가 반응하지 않겠다. 하고 그냥 한 발짝 떨어져서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난 그냥 구경꾼으로 남게 됐을 때, 그 소리를 그냥 듣더라도 내가 그 소리를 취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을 때, 아무 소리가 지나가도 상관없어요. 이 소리(어떤 소리가 들린다.)도 상관없습니다.(웃음) 이런 소리가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우리들이 보면은 얼마나 그 소리라는 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앉아계시면 중간에 스마트폰 소리가 어쩌다 들리는 거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요. 실수로 끄지 않은 사람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제가 들고 오지 않아 그렇지, 저도 만약에 들고 온다면 제 핸드폰 소리가 들릴 때도 있을 거 같애요. 신기한 점이오. 이렇게 마음공부하기 위해서 아주 집중하고 마음공부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끼리 않아있는데, 여기서 갑자기 스마트폰 소리가 한번 나면 그 정도는 내가 음, 그 정도는 내가 봐줄 수 있어 하고 웃으며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 들리고 세 번 들리고 네 번 들리면 누구나 상당수가, 저는 여러분 얼굴을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딱 보이거든요. 이게 두 번 세 번 네 번 울렸을 때 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인상을 딱 쓰는 게 대번에 보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되는데 이 소리에 집중해야 되는데 저렇게 예의 없는 사람이 있느냐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서, 그 스마트폰 소리 때문에 되게 신경을 쓰고 되게 막 짜증스러운 마음을 내는 거지요. 그런데 그 소리에 반응해도 되고 반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소리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 소리가, 무수히 많은 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나를 괴롭힐 수 없어요. 내가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자리 않는 자리에 딱 서 있으면, 그 어떤 소리가 왔다 가고 왔다 가고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수백수천 가지 소리가 왔다 가더라도, 나는 거기 영향받지 않습니다.
즉 무수히 많은 소리가 있음에도 나에게는 있는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소리는 있었는데 나에겐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에요. 들렸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거기 끌려가거나 그 소리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있었으나 있지 않은 소리가 되는 것이지요. 즉 있지만 있지 않은 것이다. 본바탕에 있으면 본 자리에 있으면 아무 일이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일이 왔다가 갈지라도 사실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윗집 사람이 꽝 꽝 꽝 꽝 이렇게 뛰는 소리를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이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 칼 들고 쫓아 올라갈 만큼 그렇게 막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냥 너무 아름다울 수도 있지요. 그냥 그런 소리 자체도. 제가 만났던 어떤 분은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혼자된 지가 너무 오래돼서 너무 외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아파트로 이제 이사를 갔는데 혼자서 이렇게 살지요. 그런데 이사를 갔는데 위에서 막 아이들 뛰는 소리가 너무 밤낮으로 나고 막 피아노 소리도 나고 이러는데, 너무너무 듣기 좋고 너무너무 행복하고 막 살아있는 거 같고.
야, 정말 나 혼자 있지 않구나. 누군가 함께 있구나. 뭐 이런 “외로움이 이렇게 그걸 통해서 위안을 받는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똑같은 소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좋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스트레스받게 느끼는 것이지요. 이처럼 내 식대로 그 경계를 해석하는 해석자가 없으면, 판단 분별하는 자가 없으면, 모든 일이 일어나도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일어나도 일어난 바가 없어요. 여러분 인생에 돈이 많아졌다가 없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남편이 성공했다가 실패하는 일도 생깁니다. 자식이 성적을 좋게 받아왔다가 안 좋게 받아오는 일도 생기구요.
수많은 70억 인구 가운데 수많은 사람, 내가 만나는 무수히 만나는 사람은 나를 좋게 생각할 겁니다. 나를 칭찬할 겁니다.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은 나를 욕할 수도 있어요. 뜬금없이 나를 욕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건 그냥 소리가 일어났다 사라진 거예요. 내가 반응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일에.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아닌데요. 내가 돈이 많아지면 나는 행복하고 실질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내가 돈이 없어지면 나는 실질적으로 괴로운데, 그걸 어떻게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건 그냥 생각입니다. 돈이 많으면 나는 행복하다 부자다 돈이 없으면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건 완전한 생각이지요.
돈에 행복과 불행이 절대 담기지 않습니다. 만약에 돈에 그 행복과 불행이 담긴다면, 우리나라에서 되게 가난한 사람 나이 한 40, 50 됐는데 내 전 재산이 한 천만 원밖에 없다. 그럼 돈이 별로 없는 사람이잖아요. 거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프리카나 인도에 가서 본다면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일 수 있고. 또 심지어 빚이 엄청 많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빚을 겨우겨우 다 갚아서 이제 제로가 됐다. 그것만으로 너무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 난 이제, 이제 제로가 됐다. 이제부터는 나는 그냥 열심히 벌어서 조금 조금씩 벌면 되지 않겠나? 그러면서 되게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의 유무가 내가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결정하지 않구요. 돈의 유무가 내가 돈이 많아서 행복할 건지, 돈이 없다고 괴로워할 건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천억 가졌던 부자가 백억으로 떨어졌잖아요. 그러면 가난한 것 때문에 자살할 수도 있어요. 오천억에서 백억으로 떨어졌으니까 얼마나 인생이 정말 나락으로 떨어진 거예요. 당연히 그거 때문에 자살할 수도 있지요. 엄청난 가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속도 모르고, 제가 옛날에 아는 어떤 분이 한 십몇 억 재산이 있다 그래요. 한 15억 정도 있었나 봐요. 왜냐면 그분이 저한테 뭐라 그랬냐면, 사기꾼한테 사기를 당했다는 거예요.
친한 사람한테 사기를 당했는데, 그 사람이 자기한테 투자를 하면 두 배 세배로 불려주는 건 일도 아니다. 확실하다. 확고하다. 나만 믿어라. 그래서 7억을 투자를 했는데, 들고 튀어버린 거예요. 나중에 겨우겨우 잡았는데, 그 사람이 “나는 진짜로 너를 위해서 이걸 해주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까 이게 잘 안됐다.” “투자가 잘 안돼서 이래 돼서 어쩔 수 없다.” “나도 다 날렸다.” “돈이 없다.” 그런데 그걸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알고 봤더니. 본인은 이제 그렇게 믿고 있는 거지요. 실제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 사람은 그 7억을 받아가지고 숨겨놓고, 날렸다.
나도 투자를 정상적으로 해서 몇 배 벌고 싶었는데 날렸다. 그리고 이제 그 돈을 숨겨놓고. 고소를 해가지고 그 돈을 찾으려고 했더니. 변호사를 썼는데, 우리나라 최고 비싼 어마어마한 변호사 군단을 몰고 와가지고. 해서 그때 그분이 한 7억을 날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한 1년인가 뭐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끝나더래요. 그러면서 막 속이 터져 죽으려는 거예요. 나는 진짜 내 평생을 바쳐서 번 돈을 다 날렸는데, 저놈은 그냥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그 돈 가지고 그냥 재밌게 사는데. 더 억울한 건 이런 짓을 나에게만 한 게 아니다. 너무 충격을 받으셔서 정말 거의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게,
막 시체같이 아무 일도 못하고, 모든 걸 다 그만두고, 그냥 일을 제대로 못하셨어요. 한 1년 가까이. 그때는 제가 그렇게 얘기를 했지요. “아니 거사님 한 15억 있으시다 면서요?” “그런데 한 7억을 날리셨다면서요.” “아직 7, 8억은 있으시네요.” 이랬더니. “그거야 있지요.” “아 그럼 뭐 7, 8억 있으면 그래도 최악은 아니잖아요.” 이렇게까지 시금을 전폐하고 정말 막 몸에 병이 나고 이렇게 할 문제가 아닌, 빨리 일어나야 될 텐데. 그런 얘기를 좀 했었지요. 그런데 그 얘기를 제가 좀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때만 해도 제가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그분 입장에서는 정말 죽을 수 있을 거 같이 괴로울 수 있거든요. 왜냐면 이거는 자기가 분별하는 크기니까. 나는 알 수 없어요. 그분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그 상황이 안 돼 봤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은 그분도 1년쯤 지나니까 그냥 털어버렸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새롭게 일을 시작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이 일 저 일 막 시작한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그 일은 어떻게 마음 정리는 하셨어요.” 이랬더니 뭐 한 1년 고생할 거, 마음공부 실컷 해보고 나니까, 어차피 답도 안 나오고 그 사람을 증오해봐야 뭐 법적으로도 끝났고. “뭐 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내가 뭐 원망하고 미워해 봐야 소용이 없더라.” 그러고 “그냥 내가 열심히 사는 거 밖에 없겠더라.” 그러구 이제 정신을 차리셨어요. 1년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1년 안에 두 내외분이 몸도 아프고 되게 힘드셨어요.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그냥 통장에 이렇게 15억이 이렇게 쓰여 있을 돈의 잔고가 7로 바뀌었을 뿐이고. 내 마음을 정리하는데 엄청난 시간은 필요했겠지만, 사실은 그 일이 일어났지만 7억을 날리는 일이 일어났지만 사실은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본바탕에서는. 아까 말한 것과 똑같애요. 무수히 많은 소리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깊이 개입되지 않으면 아무 일이 없듯이.
돈이 생겼다가 없어져도 사실은 돈이 많아지고 돈이 적어졌기 때문에 괴롭거나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분별했기 때문에 괴롭거나 즐거운 것이지. 그 돈이 많다,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행복하고, 돈이 적다,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지. 진짜 돈의 유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거나 괴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성적을 잘 받아서 행복하다? 이것도 진짜가 아니에요. 내가 분별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자식이 처음 딱 태어났을 때는, 얘가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왜냐하면 서울대 나온 부모님 밑에도 공부 지질 나게 못하는 얘들이 있더라구요. 저는 봤거든요.
부모님은 정말 그렇게 학벌이 좋으신데, 아이가 학벌이 영 안 좋은 얘들도 있어요. 또 애들끼리도 형제들끼리도 첫째 둘째는 또 되게 잘하는데 막내는 못한다든지, 이러는 일들도 있구요. 또 그 반대도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변변찮은 학벌이 없는데, 자식은 너무나도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아이를 낳자마자 얘가 잘할지 못할지는 다 모르는 상태인데, 얘가 공부를 조금 잘하면 부모님이 이제 그때부터 욕심이 생기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지간히 성적이 잘 하는데도 내가 못했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다 분별하는 겁니다. 실제라는 게 없어요.
아까처럼 소리가 있을 뿐이지. 내가 그 소리에 영향을 받을지 말지는 그냥 나에게 달린 일이지, 그 바깥 경계 자체가 좋거나 나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바가 없어요. 아까 그 소리가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바가 없듯이. 그런데 그 소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있습니다. 나는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 큰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딴사람만 칭찬하고 나를 칭찬하지 않았을 때는 엄청난 상처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칭찬받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사람에게는 남들이 칭찬해주는 것도 별 의미가 없고, 그렇지 않습니까?
칭찬을 받으려고 생각하면 칭찬 안 해주면 괴롭겠지만, 난 별로 칭찬받을 의도가 없어 이런 사람은 남들이 나를 칭찬해줘 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의미가 없습니다. 남들이 날 칭찬해주는 게, 내 마음을 막 휘두르고 이럴 필요가 없어요. 그 말 한마디가. 이와 같이 사실은 제가 지금 비유를 들었지만, 이 비유는 사실은 작은 비유를 들면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지만, 큰 비유를 들면 이해를 잘 못해요. 어떤 분은 이제 그러시데요. 제가 이렇게 설법을 할 때, 너무 쉽게 쉽게 얘기를 하니까 세상을, 인생의 쓴맛 단맛을 못 봐서 그렇다.(웃음)
스님은 편하게만 살아봐 가지구 인생의 쓴맛을 몰라서 그렇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 그렇다.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웃음) 그 삶의, 아이 저도, 저도 정말 힘든 일 많이 겪어봤어요. 많이 힘든 일 겪어봤고. 뭐 이런 얘기, 뭐 하여간 다하지 못할, 뭐 우리 형제들도 워낙 바람 잘 날이 없어서, 온갖 뭐 사건 사고를 칠 때마다, 제가 또 약간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같은 게 있어요. 착한 사람 병이 있어요. 착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옛날부터 하도 저를 지배하고 있어서, 하다못해 친구들도 사고 치면 저한테 와서 그냥 하면, 그냥 다 퍼줬습니다. 그때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았고. 그러니 모르는 사람도 그랬을 진데,
가까운 사람은 더 심하지 않았겠어요? 그런 것뿐 아니라, 하여간 뭐 많은 일들이 저도 있었어요. 당연히.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게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모든 괴로움이라는 것은. 자기 분별의 괴로움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게 덩치가 크면 어마어마한 괴로움이다. 너는 이렇게 큰 괴로움은 못 경험해봐 놓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얘기하느냐? 하고 막 화를 내지요. 저도 제가 사랑하는 조카가 교통사고로 죽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뭐 그거 말고도 말하지 못할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봐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본질. 이 모든 생사법.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 본질은 다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천만 원이 내 전 재산인데, 그게 없어졌다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요. 여자 친구랑 헤어지는 것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지요, 당연히. 그런데 천억을 날렸는데도 자살 안 하는 사람도 있지요. 당연히. 그런데 그 구조는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똑같습니다. 바다 위에 드러나는 파도라는 것은 똑같애요. 파도가 크게 치든 작게 치든 그것이 파도라는 그 사실은 똑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우왕좌왕 길게 얘기를 했는데요.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여러분 인생에,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 동안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라져갔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일도 생겨났다 사라졌구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도 일어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무수히 많은 일들은 일어나고 사라질 겁니다. 이걸 생사법이라고 해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 내 눈앞에서 무수히 많은 즐거운 일들 괴로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고, 벌어져 왔었고, 그걸 내가 앞으로도 감당해야 될 것인데요.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리에, 딱 자기 자리에, 본성의 자리에 딱 서 있게 되면, 아까 그 어떤 소리가 일어나도 그 어떤 소리에도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는, 어떤 소리에도 내가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런데 한번 동일시되기 시작하면, 한번 그 소리에 끌려가기 시작하고, 한번 말에 끌려가기 시작하고, 한번 취하기 시작하고, 집착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거기 휘둘리게 됩니다. 확 휘둘려가다가 문득 정신 차려서 어이구 내가 흘러갔구나. 하고 되돌아오는 일들, 이런 일들이 이제 공부인들은 계속해서 벌어지게 되는데요. 정말 모든, 아무리 큰 괴로움이라 할지라도 오십 보 백 보일 뿐이지. 똑같습니다, 구조는. 즉 그 괴로운 일에 끌려갈 수도 있고, 끌려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끌려갈 수도 있고, 끌려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끌려가지 않을 수 없어요.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끌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모든 건 다 분별이 만들어낸 괴로움입니다. 진짜배기 괴로움이라는 건 없어요. 아까 그 소리가 일어났는데, 내가 그 소리에 괴로워할 건지 말 건지 내가 선택하듯이. 삶에서 등장하는 모든 괴로운 일에 내가 마음을 개입할 때 분별심을 개입할 때만 괴로울 수 있습니다. 개입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습니다. 확실합니다. 이 분별의 세계는 이해하지만, 분별 너머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불가사의하다고 해요.『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 되어 있다. 우리는 뒤바뀐, 완전히 뒤바뀐, 거꾸로 된 꿈과도 같은 생각에 빠져있다.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생각해요.
제가 지금 한 얘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 괴로움을 자기는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전도몽상 되어 있어요. 왜?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 전도몽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이 부처님 가르침을 그냥 일반인들,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에게 막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쉬운 방편은 얘기하지만, 좀 높은 방편을 얘기할 수가 없어요. 다 욕하기 때문에. 제가 지금 이런 말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 듣고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서 오는 거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떻게 마음에서 오는 거냐?” 하고 막 화를 내지요. 왜?
나는 실체적인 괴로움이다. 저놈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나는 괴로운 게 확실하다, 이렇게 믿거든요. 우리는 책임을, 책임 소재를 바깥으로 돌리고 싶어 해요. 나의 괴로움의 문제를 저쪽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나는 나쁜 놈이 안 되거든요. 이 괴로움의 문제는 나 때문이 아니라 세상 때문이 되기 때문에, 나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게 되거든요. 모든 문제는 내 문제고, 내가 만든 문제입니다. 분별이 개입돼야지만 괴롭지, 분별이 개입되지 않으면 개입되지 않으면 괴롭지 않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벌어져도. 엄청나게 스트레스받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하루 종일 너무 스트레스받았습니다.
그런데 밤에 집에 들어가서 녹초가 돼서 쓰러져서 잤어요.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잠자면서도 괴롭습니까? 잠자면서 안 괴로워요.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안 괴로워요. 왜 안 괴롭지요? 그 괴로움이라는 게 실체라면, 내가 자든 깨어있든 무조건 괴로워야지요. 심지어 아무리 괴로운 일이 일어나도, 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를 때, 그렇게 서글프게 우시는 모습이 저를 너무 짠하게 만들었어요. 저희 아버지지만, 야, 아버지도 저렇게 짠하게 우시는구나.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데 좀 있다 친구들이 우르르 와가지고 술 먹고 이러다가 그 옆에 같이 앉아 술을 드시더니,
막 재밌게 까르륵까르륵 웃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어린 나이에 이건 뭐지? 아버지는 왜 저렇게 이중적이시지. 도대체 진심은 뭘까? 왜 저렇게 울다 웃다 하시는 것일까? 웃을 때 보면 화통하게 재밌게 웃으시는 거예요. 또. 그리구 죄의식 같은 게 없이 웃는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 지금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저렇게 웃을 수가 있지? 이런 딜레마가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그 당시는, 당연하지요. 그런데 괴로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는 생각을 할 때만, 괴롭습니다. 친구랑 딴 얘기 할 때는 또 즐겁게 웃어요. 염불을 하고 한글로 염불할 때 참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탁 나올 때,
그때 또 막 눈물을 흘리시구요. 내가 생각할 때 괴롭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아요. 아무리 괴로운 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10년, 20년 전에 괴로웠던 일을 지금 생각하면, 지금 또 괴로울 수 있어요.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내가 가난해지면 어쩌나? 병이 나면 어쩌나? 생각만 해도 괴롭기 시작해요. 생각이 만든 괴로움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돈을 10억 날렸다,라고 해도 무조건 괴롭지 않아요. 내가 10억을 날렸다,라는 그 생각에 빠져있을 때만 괴롭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15억 재산이 있던 사람이 7억을 날렸는데도, 사실은 하루하루 현실은 7억을 날리기 전이나 후나 똑같애요.
그전에도 똑같이 아침, 점심, 저녁밥을 먹고 살아야 되고. 아침, 점심, 저녁 일과를 하고. 7억을 날렸는데도 똑같이 아침, 점심, 저녁을 똑같이 먹고. 똑같이 일과를 똑같이 해요. 눈앞에 목전에는 사실 달라지는 게 별로 없습니다. 똑같이 아침에는 눈을 떠야 되고. 일을 해야 되고. 밥을 먹어야 되고. 친구들과 농담을 할 때는 웃고. 똑같애요. 그런데 내 생각 속에서만 7억을 날렸어 하는 걸로 스트레스받는 거지요. 손이 잘리면 절대적인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손이 잘리면 이게 절대적인 괴로움이지, 어떻게 마음이 가야지만 괴롭습니까?” 손이 잘려도 마음이 가야지만 괴로워요. 전쟁에 참석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 전쟁 통에 막 정신없고 이럴 때는 자기가 폭탄 맞아서 발이 잘린 지도 모른다, 그래요. 막 정신없이 싸우고 싸우다가 나중에 이제 일어나려고 보니까 다리가 하나가 날아갔고, 발목이 날아갔고, 뭐 손가락이 잘렸고,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때는 모르는 것이지요. 저도 태권도 시합, 옛날에 격투기 시합 이런 거 할 때, 그렇게 줘 패고 두들겨 맞고 해도 아픈 줄 모릅니다. 시합하는 동안은. 시합이 끝나고 나야 그때 가서 통증이 오기 시작해요. 그때는 하나도 안 아파요. 그런데 시합보다 더 안 아픈 때가 있습니다. 진짜 싸울 때.
아, 제가 고등학교 때, 학교 전체 야간 자율 학습을 하는데 누가 불을 전체 껐다 켰다 껐다 켰다 계속하는 거예요. 우리 학년 전체가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데, 불을 끄면 다들 막 그렇잖아요. 그런데 껐다 켰다 반복을 하는 거예요. 그래 보니까 얘가 깡패 조직에 있는 그 우두머리 아이라 다들 말을 못 하고 있는 거지요. 제가 오지랖이,(웃음) 무슨 쓸데없는 오지랖인지. 사실은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서 부린 게 아니라, 제가 이제 “뭐 하는 짓이냐.” 하고 화를 버럭 내고 나서 보니까 그 친구라. 내고 나서 보니까 그 친구인데, 그렇다고 해도 뭐라 그러지요? 가오가 있지. 그 말을 다시 넣을 수가 없잖아요.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짓 하지 마라.” 하고 했지요. 그때 또 제가 격투기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뭐 크게 붙으면 크게 지지 않겠다 이런 생각도 있었고. 어, 얘가 아니나 다를까 “나와라.” “뒤로 나와라.” 그랬을 때, 제가 아주 큰소리로 “좋다. 뒤로 나와라.” 나왔습니다. 나갔는데, 말로만 듣던 전설의 oo인 조가 쫙 도열해 있는 거예요. 정말, 정말. 야, 진짜 영화에만 보던 일이, 와 그래서 걔네들한테 요. 정말 거기에는 영화에만 보면 넘버 2가 보면은 한 100킬로 넘는 얘들이 있잖아요? 야, 진짜 100킬로가 넘는 얘가 옆에 있다가 달려 들어가지고 저를 막 패는데,
제가 그야말로 시궁창까지 빠져가면서 얻어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백몇 십 킬로짜리 얘가 저를 위에서 누르면서 막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하나도 안 아프더라구요.(웃음) 야, 희한하게 그렇게 맞는데, 하나도 안 아프더라구요. 난 이게 내가 눌려가지고 어떻게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이상하게 하나도 안 아프데요. 저쪽에서 친구들이 일과를 끝내고 하교를 하고 있는데, 겁이 나서 저를 차마 도움을 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까 창피할 뿐 창피할 뿐. 하나도 안 아프더라구요. 아프지 않습니다.(웃음) 아프지 않을 때는 아프지 않을 수 있어요. 이처럼 실제로 우리가,
저는 지금 이런 얘기를 그냥 즐겁고 재밌게 하잖아요. 실제 저는 그걸 지금 떠올려도 그게 하나의 에피소드예요. 젊었을 때 있었던, 어릴 때 있었던, 아주 재밌는 에피소드였고. 물론 이제 그 다음날 걔네들도 양심이 있는지, 쟤네한테 덤비는 애도 없었고 또 그렇게까지 팬 게 미안했는지, 제가 이놈을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하는데, 그 친구들이 저한테 와가지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건 진짜 자기네들이 생각해도 가오가 아닌 일이었다. 하면서 이제 뭐 그렇게 얘기를 해가지고 어쨌든 오히려 또 친해졌어요. 그 친구들 하고 되게 이제 내가 친하게 지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다 화해하고 지냈고 이래서,
저도 뭐 그렇게 큰 저기가 없었고. 그런데 이제 그런 모든 것들이 어떤 사람들은 되게 상처로 남거나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전혀 상처로 남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처럼 다양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겐 그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고, 엄청난 스트레스일 수도 있구. 어떤 사람에겐 별일 아닐 수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사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내 마음의 해석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 어릴 때의 어떤 남다른 추억같이 느끼고 말아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손이 잘리는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절대적인 괴로움이라는 건 없습니다. 내가 마음이 갈 때만 괴로운 것이지요.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는 나도 없고 너도 없습니다. 나라고 생각할, 내가 의식이 일어나지 않잖아요. 분별심이 일어날 때가 없잖아요. 그때는 내가 없고 너도 없고 세상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이 우주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때 여러분 어디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주도 같이 깨어납니다. 모든 삼라만상 모든 것이, 같이 일시에 생겨나버려요. 실제 생기는 바가 없고, 사라지는 바가 없거든요. 불생불멸이거든요. 본래는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게 다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무생법인이 진실이에요. 본래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분별심이 일어났다,라고 해석하는 겁니다. 내가 태어났다고 해석하는 거예요. 여러분 언제 태어났을까요? 여러분 나이만큼의 해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때, 여러분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거를 그 경험이, 그 생각, 그 기억이 있습니까? 그 기억이 없거든요. 그냥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건 생각이고 기억일 뿐입니다. 실제 그때 태어난 게 아니에요. 아침에 눈뜰 때 태어납니다. 분별이 일어날 때 태어납니다. 분별이 없을 때는, 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분별된 세상이 없어요. 유식무경이라고 하듯이, 오로지 의식밖에 없이 바깥 경계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게 따로 없어요.
너와 나라는 게 따로 없어요. 아상과 법상 이런 게 따로 없습니다.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 나도 따로 없고 법도 따로 없다. 본래 텅 비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마음을 일으킬 때, 그 모든 것이 있는 것처럼 창조되는 겁니다. 여러분 삶을 여러분이 창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분별심이 일어날 때 괴로움도 창조되지, 분별심이 없을 때는 괴로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와 같이 실제로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별할 때만 있습니다. 이처럼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실제 실질적인 괴로움이 아니라, 내가 괴로움이라고 해석한 괴로움입니다.
그러니까 무수히 많은 소리가 일어나고 있고 무수히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거를 내가 분별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마음을 거기다 두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특정한 무수히 많은 소리 가운데 어떤 한 가지 소리를 나는 저 소리 듣기 싫어,라고 마음먹기 시작하면, 그 소리를 듣기 싫은 소리라고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화가 나고 못 살겠고. 내가 평생을 벌어서 정말 힘들게 힘들게 한 5억, 10억짜리 아파트를 사서 딱 입주를 했는데, 그 윗집에서 막 미치듯이 뛰어다니는 윗집이 왔다. 얼마나 스트레스받겠어요.
스트레스를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지만, 내가 받기로 작정하면 그때부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겁니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은 내가 만들어내요. 내가 쥐었기 때문에, 내가 취하거나 버리려고 애쓰기 때문에, 좋은 거를 취하려고 애쓰거나 싫은 걸 버리려고 애쓰기 때문에, 내 의식이 만들어냅니다. 모든 괴로움 100%.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이라는 걸 따로 설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뭘 하는 분이냐면, 여러분 가운데 무수히 많은 소리들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바다에서 파도가 무수히 치고 있는데,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아까부터 사실은 바깥에서 계속해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지요.
뭔 소리입니까? 뭔 소린지 모르지만 뭔가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이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아휴 저 소리 때문에 내가 집중이 안 돼, 미치겠네. 하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신경 쓰지 않고 듣고 있는데 그 사람만 유독 그 소리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혹은 이렇게 앉아있는데 옆 사람이 숨을 거칠게 쉬고 있다. 아, 이 사람 숨 쉬는 거조차 듣기 싫다. 이런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리고 어떤 분이 머리를 자꾸 만진대요. 그럼 뒤에 앉았던 분이 아 저 사람 진짜 2시간 내내 설법하는 건 안 들어오고 앞에 사람 머리 만지는 것만 자꾸 들어오더라 이러면서,
설법을 제대로 못 들었다는 분도 있었어요. 그걸 신경 쓰기로 시작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게 문제가 되어서 제대로 들리지가 않아요. 부처님은 어떤 분이냐면,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냥 소리는 왔다가 가는 거기 때문에 소리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소리는 있는 그대로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갑자기 그 소리를 듣기 싫은 소리로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분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리는 듣기 싫어 죽겠다,라고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혹은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전부 다 그냥 멀쩡한 사람들인데, 그중에 어떤 한 사람이 나는 뚱뚱해 실제 뚱뚱하지 않아도 나는 뚱뚱해,라는 한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나는 다이어트 안 하면 정말 남들이 나를 뚱뚱하다고 볼 거야’ 하는 이런 어떤 스트레스에 빠져 있습니다. 허망한 생각, 자기가 만든 생각에 빠져 있어요. 그랬을 때 부처님은 어떤 분이냐면, 괴로운 사람에게 그 괴로움이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당신은 뭣 때문에 괴롭습니까?” “아, 저는 이 소리 때문에 괴롭습니다.” 이 소리를 없앴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것이 진짜 저 소리 때문에 괴로운 것이냐? 아니면 네가 그 소리를 문제시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냐?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저 소리는 그냥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거라 실체가 아닙니다. 저 소리를 보세요.
저 소리는 비실체성입니다. 공한 겁니다. 무아고 무상한 겁니다. 왔다 가는 거라서 비실체성입니다. 만약에 그게 진짜 여러분을, 당신을 괴롭히는 거라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도 똑같이 그 소리에 괴로워해야 되는데, 딴 사람은 괴로워하지 않지요. 당신만 괴로워하지요. 이건 어디서 나온 걸까요? 내가 만든 내가 붙잡은 것이고, 내가 취사간택한겁니다. 내가 분별한 것이지, 실제 저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실상은. 아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당신이 문제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라고 부처님은 얘기해줬을 뿐이에요. 여기에 어떤 법이 있습니까? 어떤 진리가 있지요, 여기에?
여기는 어떤 진리도 없습니다. 뭐만 있느냐면, 사람이 왜곡한 시선으로 바라본 분별 망상이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부처님은 이 사람에게 있는 이 분별 망상을 깨줬을 뿐입니다. 나는 너무 뚱뚱해,라고 스트레스받는 사람에게 뚱뚱하다는 거는 그냥 생각에서 나온 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지요. 당신은 뚱뚱하다,라는 그 생각 때문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너무너무너무 홀쭉해서 나는 자꾸 뭔가 살이 더 쪄야 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또 그 사람에게 맞는 이야기를 해주겠지요. 다른 얘기를 해주겠지요.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무(無)라고 얘기해주고.
무(無)에 집착한 사람에게는 유(有)라고 얘기를 해준단 말이지요. 이렇게 방편을 달리해서 그 사람이 집착해 있는 부분을 깨뜨려줄 뿐입니다. 그 사람이 사로잡혀 있는 부분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뿐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법은 없어요. 그냥 중생의 망상이 있고, 부처님은 그 망상을 깨뜨려줄 뿐이지요. 그런데 이걸 법이라고 생각해서 부처님이 세상은 있는 거야,라는 데 집착한 사람에게 세상은 없는 거야. 공한 거야. 이렇게 설법해주고, 또 세상은 없어. 공해서 텅 비었어. 이런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에겐 왜 없냐? 참자성이 있다. 본래면목이 있다. 주인공이 있다. 이렇게 설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말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걸 법이라고 생각해서 법상에 빠져 있는 사람은 어! 부처님은 무아를 얘기하셨다. 그래서 무아가 불교의 진리야. 이렇게 쥐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니야. 부처님은 진아를 설명하셨어. 참나를 설명하셨어. 그래서 참나라는 게 불교의 교리야,라고 딱 쥐고 있습니다. 불교교리는 무아인가요? 참나인가요? 무아가 법입니까? 참나가 법입니까? 법이 없어요. 부처님은 그 사람이 취해 있는, 그 사람이 분별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깨뜨려줄 뿐입니다. 그 사람의 망상을 깨뜨려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방편을 쓸 뿐이에요.
환상의 병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환상의 약을 지어줄 뿐입니다. 그거를 쥐어서 이것만이 절대 진리야,라고 쥐게 되면 큰일 나지요. 나는 A라는 병에 걸렸는데, 딴 사람에게 B라는 병에 걸린 사람에게 부처님이 B라는 병에게 맞는 약을 줬는데, 이게 법이니까 이건 부처님 법이니까 절대적으로 맞아. 하고 A라는 병에 걸린 사람이 B라는 약도 먹고, C라는 약도 먹고 그러면은 더 병이 나지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뭐랄까, 문자 그 자체로써 ‘이건 절대 진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법을 설했지만 법을 설한 바가 없습니다. 그리구 보세요.
아까 이 무수히 많은 소리가 있지만, 여러분들은 많은 소리들 가운데 어지간한 소리는 그냥 흘러버리고 살아요. 누구나, 거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소리에 꽂혀서 그 소리를 좋아하거나 그 소리를 싫어해요. TV 홈쇼핑이 막 나옵니다. TV 홈쇼핑이 나와서 막 우리를 꼬셔요. 사라고 막 꼬시는데, 그걸 보고 여러분들이 전부다 반응하지는 않지요. 다 흘려보냅니다. 아무리 너네가 꼬셔봐라. 너네가 꼬시는 거 내가 다 안다. 하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요. 걸려들지 않아요. 그걸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개중에 이제 나에게 뭔가 꽂히는 게 하나가 생겨버려요.
그런데 갑자기 거기서 야, 1분밖에 안 남았고 이게 막 매진이 되고 있다. 야, 이게 몇 천 개가 나갔다. 이번에 안 사면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이런 게 없다. 뭐 이렇게 얘기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막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이건 사야 되나? 하는 마음이 생기고 했단 말이지요. 예를 들어. 그러면 보세요. 여러분은 모든 홈쇼핑에 다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즉 반응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지요. 끌려가지 않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지요. 집착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취하거나 버리지, 어떻게 하면 취하거나 버리지 않지요? 이미 다 알아요, 우리는. 여러분들 다 취하거나 다 버리지 않잖아요.
대부분은 취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냥 흘려보네요. 내버려 둡니다 허용해줍니다. 그런데 그중에 특별한 몇 가지를 뭐에 따라? 자기 업에 따라, 자기 업이 어떠냐에 따라서 난 특별히 이런 거에 자꾸 꽂혀. 나는 저런 게 자꾸 나를 끌어당겨. 그런 자기 업에 따라서 자기가 꽂히는 게 달라요. 그게 무명, 행, 식,입니다. 12연기에서 말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과거 행이 있었고, 그 행에 따라서 자기의식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자기의 업에 따라서 자기가 꽂히는 그 의식, 분별하는 게 달라요. 취하고 버리는 게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한 걸 취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괴로움이 생겨요.
난 이걸 가져야 되는데 못 가져서 괴롭다. 내가 이걸 갖고 싶은데 못 가지는 건 못 가져서 괴로운데, 이게 이제 생각이 막 굴러가는 거예요. 이걸 내가 못 갖는 건 옆에 보니까 옆집 엄마는 막 갖는데, 나는 못 갖는 거 보니까 내 남편이 무능해서 그래. 그리구 내 부모님이 무능해서 그래. 돈을 안 물려줘서 그래. 내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와서 그래. 이런 식으로까지 막 확장이 됩니다. 자기 분별이 문제라고 생각 안 하고, 내 탓은 안 하고, 남 탓을 하기를 좋아하거든요, 우리는. 그러면서 무수히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요. 생각 속에서. 그러다가 남편이 갑자기 딱 들어오면은 갑자기 화딱지가 나기 시작합니다.
얼굴만 봤는데. 남편은 갑자기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갑자기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만들어내는 거지요. 그런데 즉 우리는 본래 부처였습니다. 본래 흘려보낼 줄 알아요.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방법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왜?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부처라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남들이 특정한 거에 막 집착을 해도 여러분들은 크게 집착을 안 하면서 그 사람을 어떻게 봐요? 야, 저 사람은 뭐 저런 거에 집착하냐? 참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시잖아요? 그게 한 발짝 떨어져서 있는 그대로 비춰봤을 때는 명확히 보이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집착해 있는지가 명확히 보여요.
그 사람이 허망한 집착에 빠져있구나,라는 게 명확히 보입니다. 20대, 30대, 이제 돈을 막 벌기 시작한 사람들이 괜히 겉멋 들어서 막 외제차를 사야 되겠다. 이러면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아, 참 어이가 없다. 어떻게 저런,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느냐? 보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게 이제 안 보이는 거지요. 그거처럼 여러분은 본래 부처라 취하고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늘 취하고 버리지 않는 자리에 있는 법을 알아요. 나는 취하고 버리는 것만 할 줄 알아요. 이러지만, 취하고 버리는 것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사는 방법,
부처의 자리에 있는 방법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 자리에서 살고 있고, 늘 부처 자리에 있어요. 그런데 많은 부분들이 이제 중생 자리에서 자꾸 끌려가는 것들이 내 삶을 더 크게 지배하니까 더 크게 지배하니까 그게 진짜인 줄 알고 그게 주인인 줄 아는 거지요. 내가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주는 이 자리는 작게 느껴지고 내가 정말 갖고 싶은데 못 가진 거 때문에 괴롭다,라고 느끼는 그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로 괴롭다,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본래 부처이고. 그러니까 부처다 중생이다,라는 상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부처다 중생이다 이런 상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잠깐 분별 망상에 끌려가는, 끌려가는 순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중생이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가 중생에게 법을 설해줘야 되고, 그런 어떤 뭔가 실체적인 뭔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은 아무 일이 없이 텅 비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분별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이 세상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이 얘기를 좀 있다, 다시 조금 더 하고.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 비설소설분의 이야기는 설하되 설한 바가 없다,라는 것에서는. 우리 보시할 때 보시하는 자, 보시 받는 자, 보시하는 물건이 청정해야 된다,라고 하듯이. 비설소설분에서는 법을 설하는 자도 따로 없고, 법을 듣는 자도 따로 없고, 설해질 법이라는 것도 따로 없다. 그게 전부다 실체가 없어서 공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제 설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졸려서
내일 읽을게요
_()()()_
제가 하는 말은 전부다 반박했을 때,
누군가에게 반박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말입니다.
왜?
전부다 여법할 수 없는 말이지요.
왜?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은 전부다 온전하게 여법할 수 없습니다.
다 방편이기 때문에.
말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모두 정독하시기를 강추합니다. 오늘의 녹취 법문에 집착하는가 봅니다. ㅠㅠㅠ
감사합니다._()_
부처님은 그 사람이 취해 있는, 그 사람이 분별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깨뜨려줄 뿐입니다. 그 사람의 망상을 깨뜨려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방편을 쓸 뿐이에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