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이번 영화는 혼자서 봤습니다.
그 영화를 추천하는 사람도 있어서 보기는 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가족들은 모두 본 상태여서 나 혼자 봤습니다.
천만을 돌파한 영화.
천만을 돌파하기까지 메스컴을 타지 못한 영화라는 것에서 '무슨 내용이기에?' 하고 궁금했었다.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훌쩍이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느껴졌다.
(보통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 50대 아저씨들이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보이는 영화입니다.)
나도 당시를 생각하면서, 눈물 좀 흘렸습니다.
내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내가 당했던 억울함도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수입자유화 여파로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서울로 와서, 취직도 안돼서 놀고 있을 때,
직업도 없이 대학교 다니던 고교동창들과 어울려 다닐 때였습니다.
그날은 친구 중에서 한 아이가 자기 형이 하는 탁구장이 있다고, 놀러가자고 해서 공짜 탁구를 치자고 1시간도 넘게 버스타고 가서 탁구치고 나오던 길이었습니다.
탁구치고 나오는데,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검문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들을 검문하였습니다.
친구 4명 중에서 나만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
친구들은 모두 풀려나고, 나만 파출소로 연행.
친구들에게 나를 확인하지도 않았고,
집에 전화가 있었는데도 집으로 확인도 안한 상태에서 그냥 파출소에 대기 시킴.
왜 그곳에 왔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파출소에 잡아둠.
몇시간 후에 호송차에 태워서 경찰서로 이송.
호송되면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별로 걱정도 안하고 따라갔는데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수백명이 줄지어서 앞사람의 뒤를 잡게하고 열지어서, 학교교실보다 약간 큰 정도의 방들(경찰서 안에 그렇게 많은 공간이 있는지 몰랐었다)로 한 방에 몇십명씩 집어넣었다.
들어가자 마자, 한쪽 벽을 향해서 모두 쪼그려 앉게 하고, 뒤에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있는 상태.
여기 저기서 숨죽이며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우리들은 '삼청교육대' 갈 것이라고.
이게 뭔가?
탁구치고 나와서 집에 가던 길이었는데, 동네 친구집(집에서 1정거장 거리)에 갔던 것이어서,
신분증을 챙기지도 않았는데(당시에는 지갑도 없었슴) '삼청교육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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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서)
한 사람씩 불러서, 상의를 벗겨서 확인한다.
큰 흉터만 있어도,
"이거 무슨 흉터야?" 물어보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퍽퍽'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는 소리.
모두 벽을 보고 있으므로 보이지는 않지만, 맞는 소리가 계속 들리며 공포감 고조.
내 차례.
아무 흉터가 없어서 맞지 않고 다시 돌아와 벽을 향하여 쪼그려 앉혀진 상태.
앉아 있는데, 2cm 정도되는 구리동선 잘라진 조가리가 보여서, 그것으로 바닥에 슬적 낙서를 했다.
특별한 의미 없는 심심할 때 하는 그런 낙서였다.
"너 나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퍽퍽'
개머리판으로 가슴을 친다.
넘어지면
"일어서! 장난해?"
'퍽퍽'
넘어지면
"일어서!"
'퍽퍽'
.....
한참을 맞은 후에야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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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된 것이 겨울 어둑해질 무렵이었으므로 5시쯤?
연행된 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식사시간이라고 돈 있는 사람은 신청하란다. 식사비는 2,500원.
주머니에는 5천원이 있었다. 두끼는 먹을 수 있겠다고 신청했다.
신청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었다.
신청한 사람에게만, 식사가 나왔다. 고등학교 때 가지고 다니던 양은 네모도시락이었다.
쌀과 보리가 5:5쯤 섞인 밥에, 반찬은 단무지. 그것을 2,500원이나 받았다.
스스로 온 것도 아니고 강제로 끌어다 가둬놓고 밥을 사먹게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있었던 광경이 우리를 황당하게 했다.
2,500원을 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도시락을 주는 것이었다.
다른 점은 그들이 받은 밥은 쌀이 하나도 없는 보리만의 밥이라는 것. 반찬은 단무지로 동일.
미리 설명을 통해서 선택하게 하지도 않고, 사먹지 않으면 굶을 것처럼 해서, 돈 있는 사람은 다 사먹게 하고 나서야
사먹지 않은 사람들에게 꽁보리밥 도시락을 지급하는 상술.
잡아다가 가둬놓고 밥 장사를 한 것이다.
길가는 사람 잡아다가 때리고,
그 사람들을 상대로 밥장사까지 했다.
(지나가는 사람 잡아다가 패면서, 비싸게 밥까지 사먹으란다. 단무지반찬 하나에 보리밥)
그리고
심심치 않을 만큼 한 사람씩 불러내서, '퍽퍽'.....
.....
그리고 두 사람을 짝지어 등을 대게 하고, 잠을 자란다.
둘이 등을 대고 쪼그려 앉아서, 서로 머리를 어긋나게 기대서, 서로 상대의 어깨를 베게삼아서 자라는 것이다.
발은 펼수도 없는 정도로 빽빽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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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틀밤을 보내고 나서
한 사람씩 불러서 (그 방에서) 심문을 한다. (물론 돌아서 벽면을 한 상태이므로, 볼 수는 없다)
"이랬지?"
"아니요!" '
퍽퍽'...
"이랬잖아?"
"아니요!"
퍽퍽 퍽퍽퍽
.....
식으로 한참을 해야 한 사람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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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례.
여기서 잘못하면, 삼청교육대라는 생각에 버티기(아니 사실대로 말하기)로 다짐.
꿇어 앉힌 상태에서 심문을 진행한다.
"유흥가를 배회한 이유가 뭐야?"
"아니요! 친구.형 탁구장에 갔다가 집에 가려는 중이었습니다" 라고 말하려는데
'아니요' 에서 퍽퍽하므로 나머지는 말할 겨를도 없이 맞기만 한다.
"친구" 퍽퍽퍽
"탁구장" 퍽퍽퍽
"유흥가를 배회한 이유가 뭐야?"
"친구.." 퍽퍽퍽
머리든 무릅이든 심문에서 원하는 대로 답하지 않으면, 맞는다.
그래도 잘못하면 '삼청교육대' 라는 생각에
결국 1시간 거리되는 곳에 집이 있고, 친구집도 우리집 근처에 있는데, 공짜 탁구치자고 친구 형이 운영하는 탁구장에 들렸다가 탁구치고 나오는 길에 잡혀왔다는 설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작성된 문구에는
'복장불량에 유흥가를 배회하다가 잡혀왔다' 는 식으로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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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심문을 받고 나니, '삼청교육대'라는 것이 더 확실해지는 느낌에서 더욱 불안에 떨었다.
그런데, 다 끝나고
호명하는대로 가보니
이제 집으로 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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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나와서 억울한 마음에 어찌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알아보는데,
'그나마 다행'
이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는 이상, 어떤 길도 없다는 생각으로 포기할 수 밖에.
이것이 80년에서 8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내가 겪었전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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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영화를 봤던 아내와 고등학생인 두 아이들의 반응.
'영화가 너무 어두워서 재미없었다' 였다.
특히 아이들의 반응은 '지나간 옛날의 이야기' 정도였다.
내가 경험했던 것을 비추어보면, 영화의 내용은 80년대 당시에는 얼마든지 현실이었을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시골서 농사짓다가 수입자유화 때문에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서울로 왔는데,
취직이 안돼서 노는 때에
친구들하고 친구형네 집에 공짜탁구치러 갔던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것인가?
죄가 된다고 치자. 그렇게 맞을 일인가?
맞을 일이 어디에 있는가?
죄인도 때리면 안되는게 법인데, 죄도 없는데 가둬놓고 구타가 말이되는가?
지나간 과거의 일?
과연 과거의 일일 뿐일까요?
과거의 일일 뿐이라면, 왜 이렇게 메스컴에서 조용한가?
쉬리나 다른 영화들은 천만을 돌파할 정도가 되면, 메스컴을 많이 탓던 것 같은데,
어떤 힘이 작용해서 조용하게 입에서 입으로 전파될 수 밖어 없었는가 궁금하다.
지난 시간에 겪었던 억울함이 더해져서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이런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이 얼마나 우리들을 속박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적극적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여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해서,
정치인들이 국민의 눈치를 보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