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다 큰 어른들의 싸움
- 은유시인 -
싸움, 그것도 상대와 맞붙어 주먹을 휘둘러가며 치고받는 싸움이 꼭 애들만의 짓거리가 아니다. 50이 넘은 인간들도 때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주먹을 휘둘러가며 싸움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 때 모처럼 대판 싸움박질을 했다.
내게 지불각서까지 써주고는 1주일만 쓰자며 사정하여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400만원을 빌려줬는데, 돈을 그리도 갚지 않으려는 인간이 바로 옆 건물에 있다. 돈을 주기로 약속한 날, 휴대폰으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전화벨이 아무리 울려도 받지를 않았다. 계속 울려대고 또 울려대는 전화기를 끄지도 않고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멍청한 짓거리인데, 안 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계속 전화질을 했던 것은 일종의 오기였다.
“인간아,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니?”
그런 한숨 같은 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렇게 수십 번 넘게 전화질을 하다 보면 마지못해 전화를 받긴 받는다. 그리고는
“형님, 좀 있다 들릴게요.”
그러면서 이쪽에서 뭔 말인가를 하기도 전에 ‘툭!’ 끊어 버린다. 그렇게 약속을 했다하여 들르는 법도 없다. 그러면 다음 날에도 똑같은 전화질과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 될 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인간아, 왜 그렇게 사니?”
참으로 피곤하게 사는 인간이다. 독촉 당하고 있는 자신도 피곤하겠지만, 전화질 할 당시 혹 주변에 있을 수도 있는 다른 사람도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물론, 나 피곤한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겠지만…….
내겐 돈을 떼어먹혔다는 증거로 온갖 잡놈들한테서 받아놓은 지불각서와 차용증들이 뭉치로 보관되어 있다. 많을 땐 거의 10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주로 내가 부도나던 해인 1992년6월경까지 빌려줬던 돈인데 부도났다는 소문 때문인지 갚으려드는 사람이 없었다. ‘부도난 사람 돈은 떼어먹어도 된다’는 이상한 심리가 작용했던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부도가 났을까’라는 마음에 빌린 돈을 자진하여 갚아야하는 것이 인지상정임에도 부도를 빌미로 오히려 생돈을 떼어먹으려하는 도둑심보가 작동한 모양이다. 걔중에는 ‘부도가 났으면 도망가지 않을까’라는 추측으로 내가 도망가고 영영 나타나지 않으리란 생각에 떼먹겠다고 작정한 인간도 있었을 것이다.
순순히 내놓은 사람은 몇몇에 불과하였고, 1년 후엔 민사소송으로 겨우 3분지1 건졌을 것이다.
빌려 갈 땐 한결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아쉬운 소리를 주절댔던 인간들이 빌려가고 나서는 빌렸던 돈을 되갚기가 죽기보다 더 싫어지는 법인가 보다.
아직까지도 수중에 돈이 있다면 누군가가 필승을 다짐하며 빌려달라면 거절 못하는 것이 내 성격이다. 일도 안하고 오로지 글만 썼던 지난 3~4년간은 그야말로 내 수중에 돈이 있을 리도 없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돈을 빌리러온 사람이 있으면 있는 대로 털어놓는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 사람한테 돈을 빌려주고는 아직 못 받은 것으로 다음과 같다.(혹 그들 중 누군가가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한 사람은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어김없이 내 사무실에 놀러오는 사람이다. 같은 직종에 오래 종사했던 사람으로 그 역시 거덜 난 사람으로 현재의 그의 처지나 나의 처지나 궁핍하기론 막상막하로 아주 흡사했다. 따라서 그가 놀러오는 것도 일종의 동병상린(同病相隣)인 것이다.
언젠가 내 감천동 사무실 1층에 자리한 금호타이어에서 자신의 승용차 타이어를 새 것으로 교체한 뒤 두세 달이 지나도록 타이어 값을 지불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결국 볼멘소리를 지껄이는 타이어집 주인에게 내가 대신 갚아줬으나 그 사실을 알고도 2년 넘도록 내게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갚을 생각을 전혀 않는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은 별 쓸모도 없는 디자인 서적 두 권을 들고 찾아왔기에 두 권을 10만원에 사주면서 먼저 5만원을 주었다. 그리고 3일후엔가 다시 찾아왔기에 나머지 잔금 5만원을 지불하였는데 마침 돈을 주는 자리에서 내 손에 쥐어진 돈다발을 보더니만…….
“울산에 수금하러 가야겠는데, 여유 있음 한 5만원만 더 빌려주소.”
그러는 것이다. 물론 선선히 빌려줬다. 그리고는 1년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양반은 디자인서적만 전문으로 취급해온 사람인데, 내가 부도나기 전까지 거의 20년 동안 신간 디자인 서적만 나오면 한 아름씩 들고 왔으며 단 한 차례도 구입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보통 책 한 권에 3만원에서 10만원을 호가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서 부산권에서는 내가 외제 디자인 서적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되었고, 그에게서 구입한 책이 책장 12개에 그득 꽂힐 정도였는데 물경 수천만 원어치가 넘었다.
빌렸던 돈이 차라리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 같으면 능력이 안 되어 못 갚겠거니 할 수도 있겠는데, 고작 몇 만원 따위를 갚지 않는 사람들은 뭔가? 설마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노라 못 갚는단 말인가. 그러니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윤리관이 붕괴된 현상이 아니고 뭐겠는가.
돈이 아쉬울 때 말 한 마디로 돈을 쉽게 빌릴 수만 있다면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람 간에도 빌려달란다 하여 선뜻 빌려주려 하지 않는 이유가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이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일수록 행여 빌려주면 의리고 뭐고 사람도 잃고 결국 돈도 잃는다는 진리처럼 되어버린 관행이 문제 아니겠는가.
옆 건물에 있는 인간도 400만원 중에 2월 말까지 갚겠다는 200만원 받기를 무척 애를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200만원도 4월 말까지 갚겠다고 했으나 하루하루 미뤄오기를 오늘이 12일이다.
가뜩이나 수입이 없어 궁핍할 대로 궁핍해진 나였다. 때문에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학수고대하였건만,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차라리 “열흘 후에…….” 라든가 “돈 없어 당분간 못 갚겠다.” 라든가 “아예 떼어 먹겠다.”라 했더라면 그깟 돈 스트레스 받으며 받을 바엔 벌어 쓰는 게 더 빨랐으리라.
헌데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서려는 찰라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 이의 쌍통을 보니 그 인간이었다.
“아무개 씨!”라며 불러 세웠지만 제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힐끗 쳐다보기를 모래 씹은 상이라 갑자기 화가 울컥 치밀었다.
‘얼레? 지깟 놈이 뭐라고 나를 무시해?’
그래서 내 사무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전화를 걸었더니 녀석의 마누라가 받는 것이었다.
“그 친구 계단 올라가는 걸 봤으니 빨리 바꾸라.”
여자에게 다그치는데
“그 새끼…… 어쩌고…… 전화 바꾸지 마!”
그러는 것이 아닌가.
똥 뀐 놈이 먼저 화를 내는 꼴이었다. 그래서 그 인간의 사무실로 쫓아갔고, 쌍욕지거리를 교환했고, 엉겨 붙었다. 그 와중에 그 인간 콧등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고, 내가 내리친 원탁 유리가 박살이 났다.
그리고…… 여자가 112로 전화하여 “기물을 마구 부수고 사람을 때린 사람 잡아가소.”라고 신고하여 경찰 둘이 들이닥쳤다. “내가 사람을 팼고 기물을 때려 부순 사람이라오. 날 잡아가소.”라며 두 손을 경찰에게 들이대니 그렇듯 순순하게 자백하는 피의자 신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군다나 “한 2~3년 콩밥을 먹게 해 주오.”라 자청하고 나서니 나 같은 범인들만 있다면 순경생활도 마냥 편해질 것이고 해볼 만할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 경찰이 “이 사람 처벌하기를 원합니까?” 라는 두 번에 걸친 질문에 아득바득 대드는 지 여편네와는 달리 두 번 다 “괜찮슴다. 고발 안하겠슴다.”라 하여 화해는 하기는 했다.
그 인간 아마 좀 시끕했을기다.
“그런데 내 돈, 내 돈은 언제줄끼고?”
- 끝 -
(200자원고지 22매 분량)
2005/05/12/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