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듯 라캉에게 거울 단계는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 단계에서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 신체의 시각적 이미지로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적 에고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결국엔 허구에 다름아닌 거울 속 자기 이미지에 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나는 우리의 자아상이란 이러한 점에서 처음부터 ‘환영적’이며, 이러한 ‘오인’에 근거하고 있는 에고란 허구적이라는 것이 이로부터 도출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울단계 이론에 대해 나는 정말 자아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라캉이 이야기하듯 이렇게 근원적으로 ‘시각적’인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물음에 하나의 해방적인 해답을 줄 수 있을 책이 나왔다. 오스트리아의 라캉 연구자 Peter Widmer 의 신작 “자신의 이름과 그 철자”이다. 그는 여기에서, 거울단계가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부모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불리기 시작하는 우리의 이름, 그 청각적 인상이 우리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더 큰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아이 스스로가 말을 할 수 있기 훨씬 전부터, 아이가 거울에 자신의 신체를 비추어볼 수 있기 훨씬 전부터, 아니, 어떤 경우엔 그가 태어나기 전, 태아의 순간에서부터 반복해서 ‘불리워지는’ 이름의 청각적 인상이, 아이의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적 에고의 형성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으리라는 가정은 오히려 어색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 - 이 단어의 ‘시각적’ 근원을 좀 더 확장시킨다면 - 에, 이처럼 수없이, 다양한 양태로 불려진 자신의 이름이, 거울에서 본 자기 신체의 시각적 이미지보다 더 크게, 혹은 더 깊게 작용한다는 이 가설은, 그렇게 타자 - 주로 부모 - 에 의해 발화됨으로서만 아이에게 들리는 음성의 상호 주관적, 그러니까 사회적 본성으로 인해 에고의 형성에 상징적 질서가 개입해 들어오는 과정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첫댓글갑자기 거울이 없던 시대에는 거울단계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군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제가 어렸을 적에도 집에 거울이 별로 없었던 것도 같구요. 이름도 어렸을 적에는 본이름이 아닌 별명이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는 경우가 좀 달라질 수도 있지 않나요? 아무튼 늘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그런 점에서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은, 많이 잡아도 거울이 대량생산되어 일반에게 보급될 수 있었던 근세 이후에야 적용될 것이라 생각해요. 아니면 그 비싼 거울을 집에, 어린 아이도 볼 수 있도록 갖추고 있었을 귀족들에게나. 벤야민이 남긴 짧은 글 중에, 그가 나중에 작가가 될 것이라 생각한 부모님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 - 그를 밝히지는 않고서! -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불리는 이름'이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그 이름의 '의미론' 보다 음성성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첫댓글 갑자기 거울이 없던 시대에는 거울단계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군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제가 어렸을 적에도 집에 거울이 별로 없었던 것도 같구요. 이름도 어렸을 적에는 본이름이 아닌 별명이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는 경우가 좀 달라질 수도 있지 않나요? 아무튼 늘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그런 점에서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은, 많이 잡아도 거울이 대량생산되어 일반에게 보급될 수 있었던 근세 이후에야 적용될 것이라 생각해요. 아니면 그 비싼 거울을 집에, 어린 아이도 볼 수 있도록 갖추고 있었을 귀족들에게나. 벤야민이 남긴 짧은 글 중에, 그가 나중에 작가가 될 것이라 생각한 부모님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 - 그를 밝히지는 않고서! -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불리는 이름'이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그 이름의 '의미론' 보다 음성성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