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에 보면 메타포어(metaphor)란 단어는, ‘메타포어는 은유라는 뜻으로 사용자의 적절한 연상 작용을 유도하여 어떤 개념이나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는 쉽게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만, 성경에는 메타포어의 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룻기에 보면 보아스는 자신의 타작마당에 들어와서 밤새도록 발치에 누워서 잠을 자고 일어난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룻3:15) 그리고 시모인 나오미는 궁금하여 룻에게 어찌되었냐고 물었고, 룻의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나오미는 알겠다는 듯 잠잠히 앉아 있으면 그가 다 알아서 할 것이라고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마치 보아스와 나오미가 서로 짜고 한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보아스는 왜 일곱 번이 아닌 여섯 번 만 되어 주었으며, 그 사건을 전해들은 나오미는 왜 안심하였는가 하는 점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완전수(完全數)는 7이나 12인데 왜 보아스는 6번을 되어 주었는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사건을 전문적인 용어로 ‘식스 메타포어’(six metaphor)라고 합니다. 즉 6번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6이란 인간의 숫자요, 7은 하나님의 숫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가 여섯 번을 되어 주었다는 것은 자기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의 노력을 다 했고, 이제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이 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던 보아스의 입장에서는 룻을 살리고 자신의 기업으로 삼기 위해서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므로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에게 여섯 번을 되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통했던 나오미는 그의 행동을 보고 안심했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아니면 성경 저자가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기록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보아스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인정한다면, 그 당시 신앙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즉 행위 하나하나에 하나님 중심적인 개념을 가지고 살았고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