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혼(夢魂)
요사이 우리 님은 어찌 지낼꼬
달 밝은 창가에서 님 생각 한이 많아
님 그려 오가는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님의 집 문 앞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을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이옥봉(李玉峰/1554?~?)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문인이다. 사후 타고난 감성과 글재주가 기이하다 여겨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소개되었다. 재주 많던 여인이 성리학에 발목 잡힌 불행했던 삶, 어설픈 페미니스트들의 반감을 사기 딱인 그녀지만 지아비에게 순종하는 조선 여인네의 선택할 수 없는 삶의 억울함보다 슬픔조차 찬연하게 표현한 맑은 님이라 머리속에 머문다.
이름은 숙원(淑援) 이며 아비는 옥천군수인 이봉이다.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의 아들인 이봉은 젊어서부터 이름난 한량으로 당대의 문장이었던 정철.이항복 등과 어울렸다.옥봉은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기 넘쳐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글을 가르치니 남다른 데가 있고 특히 시문에 재주가 있었다. 해마다 책을 사주며 '옥돌이 솟아오르듯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의 옥봉이라는 호를 그의 이름 한자를 넣어 지어주는 등 딸에 대한 사랑이 특별하였다. 옥봉은 성장하고 출가를 했으나 남편이 요절한다. 청상이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 딸이 혼인을 하더라도 첩실 자리밖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녀가 계속해서 시를 쓸 수 있도록 한양으로 데리고 간다. 시인묵객들과 어울리며 그녀의 삶은 유려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녀의 시문은 답습하지 않고 고상했으며 빛나는 재주는 문망이 높아 규수 중에 최고였다.
그런 그녀가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다.
본관이 임천(林川)인 조원(趙瑗/1544~1595)은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로 율곡이 생원시 장원할 때 진사시에 장원한 인물로 이미 승지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선비로서 언행이 바르고 자세는 고고하고 자식들에겐 엄격했다. 옥봉은 그의 인품에 매료되어 상경할 때 시만 쓰겠다는 결심을 던져 버리고 풍류반려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조원한테 거절당하고 상심하자 아비인 이봉은 그를 찾아가서 딸을 소실로 맞이하기를 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또다시 이봉은 당대 최고의 무인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조원의 장인 이상서을 찾아가 간청, 이상서는 사위에게 과거가 있긴 해도 시재주가 뛰어나 풍류반려자로 맞아들일 만 하니 그 뜻을 내치지 마라고 권유한다. 뜻을 받아들인 조원은 그녀에게 조건을 달았다.
"나에게 부담되는 글을 절대로 쓰지 말 것을 맹세할 수 있느냐?"
"시에 대한 집념이 강한 당신이 가능하겠느냐?"
옥봉은 몇 번을 물어도 그리 하리다고 대답한다.
그와 함께 한 시절의 시가 있고 그를 대신해 정치적인 이해 관계의 지인에게 보낸 활기찬 시들이 있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내조는 하되 나대지 말라는 뜻이다.조원은 용모도 빼어나고 글재주도 뛰어난 옥봉을 나름 사랑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외직으로 갈 때마다 그녀를 데리고 갔으며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동석시켰다. 조원의 친구인 윤선각의 만필집 <문소말록>에서 옥봉에 대한 느낌을 "시를 읊고 생각하는 동안에 손으로 백첩선(白疊扇)을 부치면서 때로는 입술을 가리기도 하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처절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고 썼다.
조원과 함께한 세월속에 타인에 대한 삶을 속 깊이 바라보는 여러 편의 시들이 있지만 단순히 조원과의 관계의 시만 몇 개 소개하고프다. 그녀의 소생은 없었지만 본처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자인 본처의 아들을 사랑했나보다. 자기 글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러 행복했던 그녀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