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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e
Liverpool exhibition – Francis Bacon
사람들은 흔히들 예술가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활동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고뇌 등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며, '눈에 보이는 작품, 몸으로 풀어낸 작업'이라는 '조형언어'로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등의 삶에 대한 온갖 자신의 이야기를 관람자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작업에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은 오늘날 단순히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을 떠나서 삶의
고통을 가장 극렬히 전달한 20세기 최고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을 선택,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 내부의 비천함과 마주하도록 하였다.
테이트 리버풀의 6 번째 기획전시Invisible
Rooms의 두 번째 전시장에서 만난 프란시스 베이컨의 30여 점의 회화작품과 좀처럼 보기
힘든 그의 드로잉 및 작업노트는 베이컨의 숨막힐 듯 화려한 색감, 그러나 인간적이기 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처절한 비명이 그의 삶 전체에 관통하고 있는 고통과 절망, 사랑에 대한 갈망, 두려움, 욕망, 광란
등을 보여주었다.
<전시 포스터_Isabel Rawsthorne을 그린
작품을 전시의 메일 포스터로 제작하였다 /
우측은 그녀를 모델로 제작한1966년도 작품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미셸 레리는 베이컨을 작품의 독창성으로만
평가한다면 어느 화파에도 속하지 않은 게릴라다 라고 말했다. 작가 다니엘 파슨은 베이컨을 아주 괴팍한
사람이며 매력적이고 무자비하다고 회상했고, 동료화가 클라크는 '내가
아는한 가장 철저한 불량배였다’고 기억한다. 비록 베이컨
자신도 "내가 죽으면, 나를 비닐봉지에 넣어 시궁창에
던져라"라고 말했지만, 베이컨이 죽을 때 모든 것을 상속받은 젊은 게이 파트너 에드워즈는 '베이컨이
아무리 술을 많이 먹고 잠들었어도 다음날 일찍 일어나 작업에 열중했다"고 회고했다.
이렇듯 관람자를 가장 당황시키는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인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0.28 – 1992.04.28)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잉글리시 태생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제 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으로 전쟁 휴유증에 시달리던 그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 베이컨은 늘 폭력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다. 결국 16세에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있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켜서 쫓겨난 후 베이컨은1926년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 이듬해인 1927년 파리와 베를린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그는
결코 여러 직업과 '사기꾼'으로
퇴폐적인 삶을 살았던 것을 감추지 않았으며 파리에서 1928년 숙명적으로 피카소의 그림과 푸생의 '무고한 어린이의 학살'을 만난 후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런 그가 작품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 1920년대 후반 런던에 정착해 택한 직업은 인테리어
및 가구 디자이너였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캔버스에 등장하는 공포스러운 형체, 화려한 색감이 관람자를 그의 작품 앞에 계속 머물게 하는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및 가구 디자이너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에서 비롯된 치밀한 공간감, 색채에
대한 통제력, 대담성 등이 베이컨의 조형언어를 뒷받침하며 관객에게 말을 쏟아낸다. 이때 알게 된 호주 출신의 무명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는 베이컨의 재능을 알아보고, 작품 활동을 하도록 권유했고, 피카소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자신의 그림에서 자신의 동성애를 숨긴 적이 없었고, 동성애는 그의 작품의 주제이기도 했다. 정규교육은 못 받았으나 철학자 베이컨의
후손답게 문학, 시, 사진,
예술 등에 폭 넓은 지식을 습득하며 그 지식에서 끌어낸 생각, 개념, 이미지 등이 그의 작품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티에스 엘리엇의 시가 자신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도 했는데 실제로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주제로 한 '황무지의 한부분'을 1982년에 그린다. 그의 지저분한 작업실에는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40대초에는 잠시 왕립 미술학교에서 강의한 경력도 있다.
<베이컨의 화실, 그는 단 한번도 화실 청소를 하지 않았으며 팔렛트를 쓰는 대신 판지든, 그릇이든, 접시든 또는 작업실의 벽면이든, 눈에 띄는 모든 것에 물감을 섞었다. 베이컨은 이를 두고 '나의 유일한 추상작품'이라 하였다
1933년에 베이컨은 신체의 왜곡된 표현, 고통, 두려움 등을 표현한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을 선보였다. 베이컨은
이미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미술계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낙담한 베이컨은
그림에 흥미를 잃었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작품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1944년까지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1943년에는 스스로 대부분의 작품을 파괴해 버려서
현재 1944년 이전에 그린 작품 중 남아 있는 작품은 15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천식을 앓고 있어 후방에서 근무했던 베이컨은 전생의 참상에서 느낀 공포감과
고통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45년 전시회에서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삼부작 습작〉을 선보였다. 평론가들은 기다란 목, 튀어나온 입, 공포감과 고통에 사로잡힌 뒤틀린 몸을 본 사람들은
그 노골적인 표현에 경악했지만, 세계 대전 이후 파괴된 인간성과 전쟁에 대한 공포 등을 예리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주목을 끌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Francis-Bacon-Three-Studies-for-Figures-at-the-Base-of-a-Crucifixion-c_1944
/
이 작품이 1945년 런던에 있는 Lefevre Gallery에 걸리면서 크게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작품 앞에서 숨막히는 느낌을 전달받은 것은 평론가들의 해석에 앞서 베이컨이 보여준 탁월한 공간 점유 능력 때문이었다. 충분히 괴기스럽고 공포로 가득한 이미지였지만 형체를 흐린 모호성과 원작의 색감이 주는 신비함은 이러한 공포와
폭력성을 상쇄시키며 작품이 전하는 정작 너무 슬프고도 비참한 감정에는 눈물이 메말라 웃음이 이를 대신하는 느낌을 받았다.
Crucifixion
<Francis Bacon, Crucifixion, 1933>
그의 초기 작업에서 베이컨은 형상을 위치시킬 공간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 십자가형 주제에 대한
그의 관심으 미학적 관점과 인간행동에 잠재된 무자비함으로부터 출발하여, 십자가형이 형체를 고립시킬 수
있는 구조적 장치로서 의미하는 바에 관심을 두었다. 1960년대 그의 반복되는 관심사를 설명하며, 베이컨은 ‘우리 모두는 고깃덩어리들이다. 우리는 도살된 몸통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베이컨은1933년 작
Crucifixion에서 인간의 신체를 한 조각의 고깃덩어리, 어두운 실내 해골 구조 위
사체의 축소된 형태로 다루었다.
Cage
베이컨은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이미지를 캔버스에 가두는 모습을 보였다. 정상적 패턴이 아닌
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일부러 구겨 넣은 듯한 모습이다. 캔버스에 입방체 공간 프레임을 배치시킨 첫
작품 중 하나는 1949년에 완성한 Study for Portrait이다. 울부짖는 인물의 처절함이
보는 이에게도 느껴져 그 먹먹함에 눈물이 고인다. 그러면서도 얇디 얇은 아사면을 이용, 색이 섬세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한 베이컨의 감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뒷걸음치게 하는 것을 막아준다. 처절한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소리치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의
심경을 커튼 효과로 표현, 베이컨 스스로 형상과 배경을 함께 작품 표면에 붙들어 매며 처절함과 공표의
효과를 상승시킨다. 그는 이후 작품에도 cage는 반복적으로
이용한다.
<Francis Bacon, Study for
Portrait, 1949>
<Francis Bacon, Portrait of
Lucian Freud, 1951>
베이컨 스스로 20세기 폭력의 역사를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예술적 접근법에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하였다. 비명소리에 모티브를 얻어 그는 인간 경험에 내재되어 있는 동물적 충동을 끄집어내 관객과
소통시킨다. 인간 또한 단순한 다른 동물일 뿐이라고 여긴 그는 육체에 대한 욕망, 공포, 절망을 주제로 작업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베이컨은 인간을 우리에 갇힌
동물의 모습으로, 억제 대상이자 폭력의 구경거리 묘사한다. 그의
사진 자료에서 그는 이미지를 자연세계로 환원시키는데 1955년 작품
Chimpanzee역시 관찰에서 느껴지는 그의 힘과 관객이 가질 수 있는 관음증의 충동을 이끌어 낸다.
<Francis Bacon, Chimpanzee,
1955>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글의 용량이 초과되어 두 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첫댓글 이 글은 읽을 만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