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는 말 그대로 소규모 성을 의미한다.
산성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성의 기능을 다하지 못 하는 것이 사실이다.
확실한 주거공간과 기타 생활공간이 보루 안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보루 운영에 대한 일종의 약점이랄까. 예상으로는 보루 주변 구릉선상에서 경작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방앗간 유구와 함께 가래 같은 牛耕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고구려군이 그 곳에서 상당기간 주둔하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밭이나 논 유구(개인적으로 논 유구보다는 밭 유구가 나올 듯 싶지만)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고구려군의 경제생활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보루를 산성의 축소판으로 직결시켜 이해하는 것도 문제가 될 듯 하다.
이것이 첫번째 맹종이다. 보루는 보루일뿐, 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 같이 주민들이 살면서 모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오해하기 때문에 보루를 두고 행정구역으로서의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억측에 불과하다. 보루는 고구려의 면적인 지배력과는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던 흔적이 나온다면 이 문제는 충분히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고정적인 사고는 불필요하다.
두번째 맹종은 출토 토기에 대한 지나친 편년 의존도이다.
고구려 토기는 분명 집안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고 남한에서는 몽촌토성에서 삼족기와 광구사이장경호가 출토되면서 그 존재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토기는 의례용보다는 자비용으로서 쓰던 생활용기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몽촌토성에서 엄청난 개체분의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이는 그 곳에서 발견되던 백제토기의 1/10을 넘는 상당한 수치였음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보루군의 경우는 그것과는 다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보루에서 출토되는 각종 토기들 중에서 완형으로 나올만한 개체분은 극히 소량인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고구려 보루 내에서 일종의 신앙 생활을 했던 공간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정해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몽촌토성과 같이 고구려 보루에서 의례용으로 쓰던 토기의 비율이 높다고 보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고구려 토기들은 분명 쓰던 것들이고, 보루가 폐기될 무렵에 같이 폐기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토기는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분에서 출토되지 않는 이상, 동시폐기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즉, 보루의 축조~폐기와 토기의 제자~폐기가 동일한 기간으로 편년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현학계에서는 토기를 위주로 한 편년에 지나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매장용기가 아닌 생활용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구려 토기, 특히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토기에 대해서는 양식적인 분류가 아직 불가능할 정도로 완형이 많이 출토되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폼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고구려 토기가 갖고 있는 특징은 이런 것이다~라고 알려질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기들을 이용해서 양식분류를 통해 시대를 나누고 편년을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토기에 의한 편년시, 역사적인 사실이 잣대가 되어 비교검토되기 때문에 100% 토기에 의한 편년도 불가능한 실정이다. 즉, 토기로 보루의 축조시기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폐기시기 정도는 확인이 가능하다고 본다. 토기는 고구려군이 쓰다가 폐기된 상태로 발견된 것이지, 잘 모셔놓은 전세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보루 축조를 장수왕의 한성 공함과 무조건 연결시켜 이해한다는 뜻이다.
즉, 장수왕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인 것과 보루 축조가 동시기에 이뤄졌다는 개념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장수왕의 한성 공함이 이뤄진 475년부터 제-나 동맹군이 한강 일대를 빼앗는(혹은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차지하는) 551~553년까지를 고구려의 한강 일대 지배시기로 파악한 바 있다. 그러다가 최종택에 의해 보루군의 존재가 확실히 알려지면서 475년 한성 공함 직후가 아닌 그보다 뒷시기인 500~551년까지, 50여년간으로 보는 편년이 나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왜 500년으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뚜렷한 증빙자료는 없는 듯 싶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공석구 등에 의해 한성 공함 이후, 500~551년 사이에 백제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문헌 기록을 근거로 22년 정도로 고구려의 한강 지배 시기를 극히 짧게 파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고고학적인 근거만으로 판단한 것일뿐, 문헌사학과 기타 주변상황을 비교해본다면 어불성설이라 할 정도의 무리한 주장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언급된, 한반도 남부의 2/3에 해당하는 무수히 많은 고구려식 지명은 대체 뭘로 증명한다는 말인가? 물론 이런 흔적은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그대로 계승됨이 확인되고 있다.
최종택은 장수왕의 남진과 더불어 보루 축조 시기를 파악했고, 한성 공함 이후 그 주변을 확보한 고구려군이 보루를 축조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서영일은 그에 대해서 장수왕의 공격은 단기전이고 기습전이었기 때문에 보루 축조를 하면서 차근차근 남진했다는 최종택의 견해와 반대되는 의견을 피력했다. 오히려 5~6세기 무렵에 뒤늦게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은 듯 하다.
보루는 분명히 영토를 점령해 그 지역을 영역화하면서 남진한 흔적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는 첫번째 맹종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보루는 그 규모나 크게 남-북 구도로 연결되는 형상을 본다면 교통로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 교통로라는 것을 확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근대까지 이뤄진 대부분의 전투에서 교통로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확정짓는 중요한 요소였고, 고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런데 문헌과 고고학적 근거를 갖고 고구려의 한강 지배 시기를 자꾸 줄이는 학계에서 어째서 장수왕이 단숨에 한강까지 내려와 백제 도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목베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고구려군은 날아왔단 말인가? 아니면 배를 타고 왔는가?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육로로 3만이라는 대군이 남진해 한강 이남까지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시기, 경기도 일대는 백제의 영토였으며, 일부 주장에 의하면 그 이후로도 백제 영토였는데 3만이나 되는 고구려군을 그냥 보내줬던 말인가? 우리 도성 함락하시오~라고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떤 연구자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최종택의 경우, 그나마 보루를 축조하면서 남진했다고 하여 어느정도 설명이 되지만 장수왕의 공격이 단기전이자 기습전의 성격을 지녔으니 그 축조 시기는 더 올라가야 할 것이지, 500년 이후는 말이 안 된다. 서영일의 의견은 수용할 가치가 별로 없을 정도인데, 장수왕이 단기전을 벌였다고만 했지,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남하해 백제 도성까지 이르렀는지는 별 얘기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자료만 취한다면 이것처럼 문제되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보루가 영역 지배도 아니요, 남진 이후 연락체계 확보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왜 굳이 장수왕의 남진을 기점으로 이해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보루에 대한 세번째 맹종이라고 생각한다.
고정된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될 부분도 안 되는 법이다. 당시 한강은 지금 1000만의 인구가 사는 국가의 중심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각축전을 벌이던 동네였으며 지금으로 치면 DMZ로 구분되어 있는 군사작전 지역(Militery Zone)이었다. 당연히 그 지역의 인구는 많지 않았을 것이며 삼국의 성과 보루들이 개이빨처럼 얽키고 설켜 있었으며 각국의 행정 구역을 선처럼 구분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중심에 보루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파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안될 말이다. 앞으로 보루에 대한 보다 다양한 연구성과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첫댓글 예전에 다른 까페에 썼던 글인데 옮겨와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