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란지교(金蘭之交)
물질문명으로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데는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래선지 자연을 소재로 하는 난(蘭)이나 수석, 분재, 산야초같은 취미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난(蘭) 취미는 수석과 분재와는 달리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커다란 장점이다. 베풀고 나누어 갖는 즐거움, 이는 어디다 견줄 바가 아니다. 우정에 대하여는 전해오는 얘기가 많다. 우정은 산길과 같아서 서로 아끼는 마음이 오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져서 이내 산길은 묻히어 도로 산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 가면서 속까지 툭 터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얘기가 나온다. 춘추시대에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수가 있었고,그 친구인 종자기(鍾子期)는 듣는 명수였다. 두 사람은 마음이 맞는 탄수(彈手)요, 청수(聽手)였지만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백아는 금도(琴道)에 정혼을 쏟아 넣어 일세의 명인이라 불리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자기가 죽은 후 두 번 다시 거문고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종자기라는 얻기 어려운 청수를 잃은 바에야 이미 자기의 거문고를 들어 줄만한 상대가 없는 비탄에서 온 것으로 참다운 예술정신을 시사하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백아파금(伯牙破琴) 혹은 백아절현(伯牙絶絨)이라 하고 있다.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 한다는 송무백열(訟茂柏悅)은 친구의 잘됨을 시샘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뻐한다는 말이며, 간과 쓸개를 서로 내 보인다는 간담상조(肝膽相照) 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숨김 없이 친하게 사귄다는 뜻이고, 옛날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서로 사귄 고사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문자가 생겨나고, 문경지교(刎頸之交)는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 사이를 나타내는 말 등, 우정에 관하여 전해지는 성어에는 아름다운 사연이 담겨져 있다.
우정은 곧 믿음이다. 믿음이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자의 믿을 신(信)자는 사람(人)의 말(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말에는 믿음이 실려 있어야 함을 시사하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옛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행일치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그런 사람이고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입이 있다고 하여 아무 말이나 지어 내는 것을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다운 품위가 없는 말도 '사람의 말'이 되어도 안되겠지만 실현하지 못할 허언을 '사람의 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선 눈앞의 이익 때문에 눈이 어두어 '사람의 말'로 믿음을 심지 못하면서 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금란지교(金蘭之交)라는 말이 있다.
친구사이가 너무 친밀하여 그 사귐이 쇠보다 굳고 그 향기가 난과 같다는 말이며, 친구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금란지계(金蘭之契)라고 일컫고 있다. 이는 당나라 대홍정(戴洪正)이라는 사람이 밀우(密友)를 사귈 때마다 그것을 장부에 기록하고, 향을 피워 조상에게 고하였는데, 그 장부를 '금란부(金蘭簿)'라 이름 붙인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
역경(易經)엔 '이인동심 기리단금 동심지언 기취여란'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즉,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과 같다.'하여 사람과 사람의 사귐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난을 하게 되면 난을 기르고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난우들과 친교를 갖는 즐거움도 이에 못지 않다.
난우와의 우정은 친하게 지내되 예의가 있는 친교이기에 더욱 돈독해진 우정은 귀한 난(蘭)도 서슴치 않고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어 그야말로 '금란지교(金蘭之交)' 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