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재목이 괜찮아서 빌려왔습니다. 글쓴이는 박기홍이라는 분으로 1996년에 쓰여진 레포트입니다. 한번 살펴 보시고 필요하신 부분만 적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의 선교정책
서론
예수님의 승천 이 후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서슴없이 사도 바울을 꼽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 초창기의 사도 바울의 선교가 없었다면 아마 현재의 이러한 기독교 선교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신학과 아울러서 그의 선교의 방법 내지는 선교의 전략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사도 바울의 선교의 영향역이 그만큼 컸고 위대했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은 현재의 선교 전략과 방법에 도입하고자 하는 마음도 많이 있겠다.
1. 교회개척을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바울의 전략의 핵심은 교회다. 바울의 선교는 그 결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회중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 준비가 되고 선교 사역에 있어서 바울을 도울 수 있게 되면 그들을 떠났다 (살전 1 : 8).
2. 바울은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선교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바울의 전략은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선교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로마에 있는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해 준다. 바울이 죄수로서 그 도시에 도착하기 오래 전에 교회는 이미 로마에 세워져 있었다(행 28 : 15).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벌써 그 도시에는 몇몇 가정교회 신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롬 16장). 로마의 기독교 교회는 바울이나 그의 동역자들의 어떤 특별한 협조 없이 설립되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 자신이 개종시킨 로마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완전히 종결한 후에(롬 1 : 18-15 : 3),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그의 의도를 전한다. 그의 동방 선교는 종결되었다.(15 : 17-23). 그는 그의 목적지인 서바나로 가는 도중에 로마에 들르려고 했다(15 : 24). 마침내 그는 그들이 그의 현재 사역과 계획 중인 미래 사역에 동참하기를 권면한다.
3. 모교회와의 긴밀한 연락과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이것은 언제나 명심해야 될 중요한 요령이다. 특히 교통 통신수단이 불편했던 시대에는 모교회와의 연락이 단절되어 고립될 경우 순수한 복음의 유지가 곤란했던 때가 많았다. 현대 선교에서도 모교회, 또는 세계적 교회의 바른 흐름과 연관이 원만치 못한 선교운동은 정도에서 이탈될 가능성이 있다.
4. 일정한 지역에 집중하였다. 바울 선교의 대상 지역은 산만하지 않고 일정한 영역을 제한하여 집중적으로 수행하였다. 엷게 여러 지역에 씨를 뿌리기보다 일단은 많은 씨를 여러 차례에 걸쳐 몇 군데에 집중적으로 뿌리려고 하였다. 이는 복음을 처음 전파하는 선교사로서 현명한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어느 때나 적용될 전도의 일반적인 요령이 된다.
5. 회당에 접근하였다. 바울은 대개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전도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복음을 유대인에게 우선 제공하는 것이고, 다음은 회당에 사람들이 집결하여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군중을 모을 필요가 없는 이점이 있었다.
6. 반응이 좋은 곳에 집중하였다. 그의 설교에 반응이 약한 곳보다 반응이 좋은 곳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근거를 잡고 설 때까지 체류하면서 돌보았다. 제한된 시간과 인력 및 자원으로 어떤 지역에 선교적인 노력을 경주하느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제기되는 일인데 반응이 빠른 곳에 집중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원리이다. 다만, 반응이 비교적 좋은 지역에 너무 많은 선교사들이 과밀하게 집중하여 무모하고 건전치 못한 경쟁에 빠지는 것은 삼가야 한다.
7. 자립하는 교회가 되게 하였다. 교회가 조직되면 자치, 독립, 자력 전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였다. 행정적으로 자치하며 경제적으로 외부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전도에 힘쓰는 교회가 되도록 하였다. 우리 나라에 흔히 삼자원리로 알려진 자치, 자립, 자력 전도의 방법은 사실상 바울의 전도전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며 이같은 원리는 19세기말부터 많은 지역에서 기본적인 선교 정책이 되어 왔다.
8. 접근방법에 융통성이 있었다. 바울은 상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대하면서 전도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대하고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없는 자처럼 대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접근하였는데 그는 이를 사람들을 구원하는 자신의 요령이라고 하고 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는 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그의 소신 때문에 어떻게 듣도록 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실제로 복음은 진공상태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특별한 상황 속에서 독특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전파의 방법은 상황을 따라 다양한 융통성이 창안될 필요가 언제든지 있다. 근대 선교 운동에서도 다원화되는 상황 속에서 군선교, 학원선교, 산업선교, 교도소선교 등으로 특수화시켜 선교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은 똑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9. 메시지 자체는 융통성이 없었다. 전파하는 모양은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형태로 바꿔가면서 시도했지만 그가 전하는 복음 자체는 아무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복음 자체는 그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다만 복음을 위탁받아 전하는 자에게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질시킬 수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복음을 변질시키면 화를 받으리라고 했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메시지를 바꾼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엄정하게 단언하였다. 이것은 핵심적인 이야기이다. 아무리 신속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해도 그 메시지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어느 때나 명쾌한 메시지의 소유와 전파는 선교의 기본적인 요건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 이방선교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한 유대인 대상의 전도자들의 대표가 베드로인 것 같이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대상의 전도자의 대표는 바울이었다. 이러한 이방인을 위한 세계선교의 인물이 바울이 된 것은 그의 복음적 해석에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바울은 첫째로 하나님을 유대인 독점으로부터 해방하고 세계 만민의 하나님으로 믿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메시야일 뿐 아니라, 세계 인류의 메시아요, 구주로서 해석해 왔고 그렇게 믿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는 유대 민족의 종교라는 개념에서 전세계 인류의 종교로 해석하였다. 둘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상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몸인 것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몸의 지체로 보았다. 그러므로 한 몸의 지체가 된 세계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할 책임을 느낀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전도할 책임을 느껴 이방전도에 일생을 바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이방선교의 사상과 이념을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 (롬 1 : 14)라고 했고,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롬 15 : 20)고 했다. 이러한 이방선교를 위한 그의 사명과 이념은 마침내 최초의 에큐메니칼회의였던 예루살렘 회의에서 정식으로 공인되어 이방인 전도의 교회의 정치적 뒷받침과 교리적 기초가 확고해 졌고 이로 인하여 이방선교의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11. 순회선교 바나바와 바울은 본격적인 세계 전도를 위하여 출발하였다. 그들의 순회전도는 선교의 특색으로 주후 46년에서 56년까지 3회, 십년 간에 걸쳐 일만 5천 6백리나 다녔다. 이러한 순회전도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는 구체적인 전략에 관한 일이었다. 이들은 순회전도를 시작함에 있어서 보다 효과를 거두기 위한 노력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 선교지가 구브로인 것과, 사울이라는 이름을 바울로 사용한 것과, 각 도시의 유대회당에 들어가 설교한 것 등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첫 선교지로 구브로를 택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계획적이었다. 왜냐하면 안디옥교회의 초창기 회원들 중에는 구브로인들이 많았고, 또한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 섬의 형편과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지중해의 3대 섬의 하나인 이 곳은 유대인과 로마인 그 외의 남방의 여러 인종이 혼합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섬은 세계 도시의 축소된 곳이라고 할만큼 다양성이 있는 곳이다.
둘째로는 “바울”이라고 하는 로마식 이름을 불렀다. 그 이유는 바브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이 회개한 기념으로 바울이라고 개칭했다고 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가 이제부터 접촉하는 세계는 로마였고, 또한 로마 시민이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개척전도의 무대에서 그는 로마의 공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이 더욱 적합했을 것이고, 그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사울, 헬라어로 파울로스인 것은 세계의 이질적인 문화권, 즉 아랍어를 사용하는 히브리인 사회와 구브로섬 선교 이후 줄곧 활동 무대가 될 헬라 문화의 사회, 그리고 당시 세계의 제국을 이룬 로마 사회 등 다양한 삶의 차원에 거침없이 적응하기 위하였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교회 개척을 위한 선교 여행이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기 위하여 이방 세계의 선교 여행을 통하여 교회를 개척했고, 또한 그는 일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데베에서 멀지 않은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를 방문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의 가까운 노정이었지만 그 길을 돌이켜 전날 핍박을 받았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 등지를 다시 찾아가면서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교회를 조직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행 14 : 22), 또한 교회의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저들을 주께 맡겼으며(행 14 : 23), 그의 2차 전도여행의 목적이 세원진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었고, 또한 3차 전도여행의 여정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2차 여행시 계시를 통하여 그을 유럽으로 보냈다. 이것은 곧 전도자는 세워진 교회를 돌볼 뿐 아니라, 한편 새로운 전도를 항상 쉬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2. 교회의 토착화 사도 바울의 선교 방법 중의 하나가 토착화의 문제이었다. 처음부터 교회가 시작되자 곧 자치와 자체 교육에 대한 책임은 그들 자신들에게 주어졌고, 새로 개척된 교회에 대한 바울이나 그 밖의 사도들의 방문은 특별한 경우에 한하였고 처음부터 지방 교회에 인식되기는 사도들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 자체 문제를 스스로 처리해 나가도록 했다. 그래서 첫 선교여행 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는데 (행 14 : 21 - 23), 이것은 사도들의 제명이 아니라 자체 교회의 회중이 선택하고 사도들이 안수한 것이며,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진리를 떠났거나 죄 가운데 빠진 자들에 대한 권징이었다. 또한 바울은 이 교회의 징계와 아울러 형벌의 미덕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후 2 : 6 - 10) 이들의 교회는 처음부터 자치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바울은 개심자들에게 재정적인 지원할 하지 아니하였고 자체 교회가 교역자를 지원할 것과 (갈 6 : 6), 교회 건물 설립과 재산 관리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은 없으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주동 교인들의 이름을 따라서 “.....의 집에 있 는 교회”(롬 16 : 15)라는 말이 여러번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교회 건물은 선교 단체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방 교인들의 요구에 따라서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13. 서신선교 바울은 정기적인 순회전도를 통하여 교회를 조직하고 격려했으나 지역마다 자주 순방할 수 없었으며, 문제가 생긴 교회가 있어도 일일이 찾아갈 수 없었기에 세워진 교회들의 뒤처리 문제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가 전도한 교회 중에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충분히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교회도 있었다. 또한 바울을 훼방하는 유대주의자들이 그의 전도를 훼방키 위해 갈라디아까지 와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 등의 당면한 문제로 인하여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바울 서신이다.
그의 최초의 서신이 데살로니가서이다. 그는 불과 2개월밖에 머물지 못한 교회였기에 충분한 복음이해와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염려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의 박해가 저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몇 번이나 가고자 했으나 갈 수 없어 참다 못하여 디모데를 보내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염려를 놓을 수 없으므로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하려고 고린도에서 전도하고 있는 동안에 편지를 쓰게 된 것이 데살로니가전후서이었다. 또한 그는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이르자 바울이 생명을 걸고 전도한 갈라디아교회가 유대주의자들의 계책과 거짓 전도자의 속임에 바울을 배반하고, 복음을 반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자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의 전운명이 여기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유대교의 연장이 아니라는 복음의 참뜻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끼게 되어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급히 붓을 들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당파와 분쟁 그리고 윤리문제와 교회문제 등의 복잡성을 가진 고린도교회에게 그는 고린도서를 보냈으며 후에 갈라디아교회 같이 바울 자신을 비방하여 배반하려는 사람들이 유대주의자와 합세하여 일어남으로 분개함으로 바울은 참을 수 없어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내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의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 헌금을 가지고 오는 것을 고린도에서 3개월간 기다리는 중에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일대를 전도할 계획으로 로마교회의 후원을 원기 위하여 기록한 편지가 로마서이다. 또한 옥중에 있으면서 그는 빌립보서와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 그리고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 디도서 등 일곱 권을 기록하여 평화적인 교회의 선교만이 아니라, 수직적인 교회 생활의 깊이를 효율적으로 나타내므로 교회의 기반을 더욱 깊고 튼튼하게 다지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울은 서신을 통하여 교훈과, 교리, 예수님의 부활과 그 증거의 의의 등 철저한 신앙교육을 통한 성실한 목회자의 심정을 나타내 보였다.
14. 관계 중심의 선교 바울은 그의 선교의 방법으로써 동질집단 단위의 접근을 이용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성장학의 아버지 도날드 맥가브란 교수는 동질집단과 수용적인 사람들과 동일어군에게 선교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고 하였다. 맥가브란 박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가교”라는 책에서 집단개종에 대해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맥가브란의 동질집단 원리에 의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들과 동질의식을 느끼는 부류끼리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근린집단이나, 직업 집단 또는 사회 계층 등의 집단들로 구분되어지면 이러한 집단 내에서 동질의식을 느끼게 되어 그 결속력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동질집단 내에 복음이 전해진다면 그들끼리 형성되어 있는 네트웍크로 통해서 복음이 훨씬 더 잘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맥가브란 박사는 집단개종을 중요시하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전략을 사용했었다. 그는 회당의 유대인들이나 가족 단위의 선교를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가. 친지에 의한 선교 바울은 회심한 집단의 거주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 선교의 연결점을 찾았다. 바울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씨를 뿌리지 않고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과 연결된 친지와 가족들을 통해서 두루 복음을 전했다. 그의 이러한 선교방식은 사회학적 근거에서 계획적으로 수립한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의 선교방법은 이러한 경향이 짙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바울이 로마에 이르기 전에도 거기에 여럿의 친척과 이름으로 아는 최소한 26명의 친지가 있었다. 바울은 항상 동료 크리스천과의 연관을 통해서 복음선교의 거점을 삼았음을 사도행전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서버나에 가고자 열망했을 때도 그곳이 불모지였기 때문에 그곳에 복음을 심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바울은 이미 거기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려 열망했다는 것이 함리적일 것이라고 맥가브란 박사는 말한다.
나. 가족단위의 선교 혈연으로 뭉쳐진 가부장적 사회에서 크게 부각되는 것은 결정권을 가진 의사결정자이다. 바울은 이 결정권을 가진 어른에게 먼저 접근하여 복음이 전가족에게 확산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어린이 전도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전도의 제 1차적 목표는 결정권이 있는 어른이었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로 그녀의 전가족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61 : 31)라고 전도했을 때 간수와 그의 전 가족이 구원을 받았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8절에도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을 더불어 주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선교의 특색은 가족단위를 통한 집단개종에서 결정권자를 통한 가족전체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 청중 중심의 설교를 통한 선교 바울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그가 설교하려는 대중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개념을 접촉점으로 하여 청중의 마음에 접근해 갔다. 말하자면 바울은 청중들의 사전 이해를 십분 이용하여 회당을 거점으로 하여 복음을 증거했다. 그 예로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와 선지자의 예언과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서를 반복 인용하여 예언의 성취를 입증하려했다. 루스드라에서는 비를 내리시고 해를 주시고 만물을 자라게 하시는 하늘에 계신 위대한 분이라 하여 만물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예로 들었다. 또한 아덴지방의 설교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메시야에 대한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아덴 사람들의 신념과 이념 체계로부터 시작하였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 : 22-23) 하면서 아덴 사람들의 신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여 선포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아덴설교를 실패한 경우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는 청중 중심의 설교의 한 패턴이라고 하겠다. 메시지와 청중의 이해관계에 있어 바울은 그들의 이해와 문화체계에 맞게 적응하려는 성실한 노력을 기울였다. 바울의 이러한 심정은 아마도 고린도전서 9 : 19 이하의 말씀대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여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같이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 같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하여 구원코자 하는 간절한 열망에서 이러한 성실한 청중 중심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성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앉은뱅이된 자를 고쳤을 때 그들이 허메와 쓰스라고 신격화하였으나 바울은 그들 자신이 신이라던가 예수는 다른 신들 중에 하나라던가 하는 시도를 근절시켰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에 대한 어떠한 선포라도 결코 안된다는 명확한 경고를 주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청중 중심의 설교를 행할 때에도 바울은 성령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가 구약 예언의 핵심이며 중심인물인 것을 증거하였다.
16. 대도시 중심의 선교 바울은 항상 상업적 문화의 중심지를 방문하곤 했다. 그가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한 것은 작을 마을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을들과 연결되어 있는 도시의 영향력이 커서 쉽게 마을까지 파급되어 가는 원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으며 빌립보는 그 지역의 행정의 중심지였다. 에베소도 소아시아의 대도시였으며 데살로니가도 큰 상업도시였다. 바울이 도시 우선으로 전도한 것은 제한된 시일 안에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의도에서 인구가 집중된 곳, 보다 개방적인 곳, 공용어를 잘 이해하는 곳인 도시에 힘을 쏟은 것이다.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면 그 주변과 사이의 지역들은 도시교회들의 전도활동에 의해 이차적으로 복음화 될 수 있다고 계산한 듯하다. 이같은 원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방법으로 보다 신속한 복음화를 가능케 한다.
17. 농업의 원리에 의한 선교 와그너는 기독교 선교전략에서 바울이 농업의 원리를 적용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농업의 원리는 파종, 전지 그리고 추수의 원리이다. 파종의 원리란 좋은 씨라도 수용성이 좋은 옥토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전지의 원리는 열매의 비젼을 흐리게 하는 감정적 애착심의 제거와, 추수의 원리란 추수해야 할 적기에 추수할 일군을 보내야한다는 것이다. 와그너가 말하는 농업의 원리를 크게 요약한다면 첫째가 수용성이 좋은 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다는 것이요 둘째가 추수해야할 적시에 추수한다는 원리이다.
가. 수용성(Receptivity)의 원리 바울은 수많은 지역을 분주히 다니며 선교하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복음에 호의적인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동한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바울은 가능한 한 희어져 익은 밭에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3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추수 밭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장중열은 현대의 과학적 영농방법은 토양검사를 중요시한다고 지적하면서 수용과 저항의 식별기준을 도표로 설명하고 있다. 맥가브란 박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가교라는 책에서 바울은 복음에 수용적인 주변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교로 해서 그들이 원하는 기존 공동체로 복음이 확산되어 가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한다. 그는 회당공동체 주위에 살던 유니게와 디모데를 예로 들어 설득력있게 이론을 제시한다.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할 때 유대인의 극심한 반대를 받은 적이 많았다. 바울이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선교하기 전에는 이방인에게 자유롭게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회당을 다니며 설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건 후에 결정적 행동을 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을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 향하노라”고 하였다.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그들 반대하고 욕설을 퍼부었을 때 바울은 옷을 떨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은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그는 자기백성을 뜨거운 열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렇게까지 말했다. “내가 큰 근심 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더 중요한 것은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다. 그는 복음을 끈질기게 거부하는 곳에 아무리 복음을 전한들 별 소용이 없는 것을 알고 할 수없이 이방인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수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바울은 수용성이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우선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나. 추수의 원리 바울이 사용한 농업의 원리 중의 또 하나가 바로 이 추수의 원리이다. 말하자면 만물에 때가 있듯 이 추수의 시기도 제한되어 있으며 이러한 추수의 적시에 선교의 자원이 총동원되어 집중투자를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장중열은 이렇게 선교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가 있어 역사, 정치, 종교적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때가 있다고 한다. 그는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로마의 군사력에 굴복했을 때와 1945년 이후 일본이 패전했을 때를 역사의 교훈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카이로스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카이로스는 맥가브란의 말에 잘 함축되어 있는데 “구원받을만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 때 구하라”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추수의 때를 잘 분별하여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찾아 총력을 기울여 선교에 임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교회들은 현지인에 의해 스스로 처리해 가는 자립선교가 되도록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바울 자신이 설립한 교회일지라도 방문하지 않았고 사도에 의지하지 말고 성령에 의지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여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현지인에게 책임을 주었다. 바울은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신속하게 교회를 세우고 떠나곤 하였다. 바울은 첫 선교여행에서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지에 여러 교회를 세우고 돌아오는 길에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주께 부탁하였다. 이같이 바울은 개종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일지라도 성직에 임명하여 신속히 교회조직을 만들고 성령의 지도에 맡기도 스스로 성장하도록 하는 현지인 교회설립의 모본을 보였다. 바울은 교회를 설림함에 있어 남의 터 위에 세우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또한 현지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도록 하는 바람직한 현지인 교회 설립의 본을 보여 주었다.
18. 인물별로 정리한 바울의 선교전략
가. 로런드 앨런 1895년부터 1903년까지 중국 선교사로 활약했던 롤런드 앨런은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바울의 전략을 논하고 있다. 첫째는 바울에게 전략이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로마서 15 : 23을 지적하여 바울에게는 분명한 선교 전략이 있었음을 논술하고 있다. 바울의 선교 지역의 대부분은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이며, 교통의 중심지요, 국제 교역의 중심지였다. 바로 이러한 전략 지점을 교두보로 하여 당시 도시 주변의 소도시나 시골 지역을 대상으로 방사원식 선교를 실시하였으며, 또한 도시에서 세계로 선교를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에베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선교 사역을 마쳤고, 스페인 선교를 위해서 로마로 가기를 원하는 전략적인 염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선교의 특정 대상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선교 사역에 있어서 규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회당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회당 안에 누가 있었는가? 유대교의 회당은 바벨론 유수 이후 종교 생활의 생존을 위하여 비롯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세워 신앙을 유지하였고 후세에 신앙을 전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와 고상한 도덕적 우월성 등으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기도 하였고 많은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을 성경은 개종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지칭하고 있다. 회당 안의 이러한 이방인들은 구약적 복음의 메시지에 이미 그 마음이 열려 있었으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렌뿐 아니라 칼빈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로 있는 리처드 리더도 이러한 바울의 회당 중심 선교를, 개종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음에 수용성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전략적 접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는 선교에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요인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앨런은 당시의 헬레니즘 문명 아래에서 민족 종교의 발흥으로 일반 서민들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노예 제도나 검투 시합을 즐겨 하는 잔인성 등으로 인하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흔들였음을 언급한다. 이러한 제요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수용성 있게 준비시켰다고 믿는 것이다.
나. 로버트 스피어 그는 특히 1890년대부터 1910년까지 미장로교 극동 지역 선교 총무로 수고하였고, 한국 선교사들을 관할하는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인간 바울의 연구”라는 책에서 일곱 가지의 바울 선교 전략의 특징을 논하고 있다. 첫째로 바울은 단독 선교가 아닌 팀선교를 하였으며, 둘째로 지역 교회를 세운 후 반드시 토착 지도자를 키웠고, 셋째로 선교 사역에 경직성이 아니라 융통성 있는 탄력을 가졌으며, 넷째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 설립 이후에 곧 미복음화 지대로 옮겨갔으며, 다섯째로 전략적인 차원에서 대도시에서 시골로 선교 방향을 잡았으며, 여섯째로 토착민과 경제적으로 비슷한 생활을 유지하였고, 일곱째로 말씀 선포에 최우선성을 두었다.
다. 딘 길리런드 풀러 신학교의 아프리카권 담당 교수로 있는 딘 길리런드의 바울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그이 대표적 저서인 “바울 신학과 선교”에서 그는 특히 바울의 선교사로서의 인격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권위나 지배 의식이 없었고 일보다는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였다는 사실이다.
라. 데이비드 헤셀그레이브 미국의 일리노이 주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의 데이비드 헤셀그레이브는 바울의 동심원의 모델을 보여 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바울의 선교 사역에는 후대 교회가 그대로 따라갈 수 있는 선교 모델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선교사의 부름에서부터 시작하여 선교사 위임, 토착민과의 관계, 메시지의 적응, 청중의 개종, 토착 교회 설립, 지도자 위임 후에 선교 교회와 피선교 교회와의 관계 등으로 과정화하여 바울의 선교 전략을 논하고 있다. 그는 특히 바울의 복음 메시지의 적응과 효율을 타문화권 전달학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마. 마이클 그린 런던 대학의 신학부 학장으로 있는 마이클 그린은 초대 교회의 선교 방법을 네가지로 논하고 있다. 첫째는 대중 선교로써 회중 전도와 노방전도, 간증 등을 열거하며, 둘째는 가정 선교, 셋째는 개인전도, 넷째는 문서 선교를 언급하는데 초기 바울 서신 등의 경우를 그 예로 들고 있다.
<참고서적>
1. 조상환, 바울의 선교에 관한 연구, (안양 : 한국보수신학원, 1983) 2. 유동식, 예수, 바울, 요한,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2) 3. 안병한, 성경보감, (서울 : 교문사, 1955) 4. 유웅렬, 사도 바울의 선교에 관한 연구, (안양 : 성결교신학원, 1988) 5. 도날드 맥가브란, trans by 한국복음주의선교학회, 교회성장의 이해,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년) 6. 전호진, 선교학, (서울 : 개혁주의신행협회, 1987) 7. 죤.M.L 영, trans by 김진홍, 선교의 동기와 목적, (서울 : 개혁주의신행협회, 1980), 8. 서정운, 교회와 선교, (서울 : 도서출판 두란노, 1988) 9. 피터 와그너, trans by 전호진, 기독교 선교전략,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84) 10. 장중열, 교회성장과 선교학, (서울 : 성광출판사, 1978) 11. 루스 터커, trans by 박해근, 선교사 열전, (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12. 김성태. 세계 선교 전략사 - 교회사 속에 나타난 선교 전략과 사례 연구.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