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20:17-34
요절 /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런 중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들의 장래에 대해 좋은 자리를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다른 제자들이 분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 뒤에는 두 사람의 소경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구원을 요청하여 마침내 눈을 뜨고 예수님을 좇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더 섬기는 삶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그리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운명을 개척하는 삶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당하게 될 일을 말씀하십니다. 내용은 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연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매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끔찍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할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벌써 세 번째였습니다. 그 만큼 확실히 일어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결코 잊지 말도록 당부한 말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대역죄인처럼 이방인의 손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리스도가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그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은 사흘 후에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의 치욕적인 죽음으로 인해 사흘 후의 희망은 듣기지 않았을 겁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길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치욕과 무시당함과 죽음이 아니라 영광과 잘 되는 것과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감당할 수 없는 수치와 매맞음과 왕따와 죽음이라니 참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갈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그러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세속적 영광을 구했습니다. 자기 아들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요구가 얼마나 황당하고 얼마나 믿음없는 요구로 들렸을까요?
그러나 심하게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너희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지 못하고 구하는구나.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는 먼저 예수님의 잔에 동참하는 것이 먼저임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좌우에 앉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예비하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에 달려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쓴 잔에 동참한다고 해서 반드시 나중에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그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은 이런 제안을 한 그 자체에 대해서 몹시 기분이 나빴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자기들만 나중에 좋은 자리를 꿰차고 영광을 누리겠다는 말인가? 우리들은 고생만 하고 나중에 찬밥신세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이를 볼 때 열 두 제자 모두 마음은 늘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있고 조금만 빈틈이 생기면 그곳으로부터 세속적 부귀 영광의 생각이 스며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콩밭에 있다는 말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상이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것을 고쳐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생각하는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미워하는 그들을 너희들도 똑같이 되고 싶으냐?” 이런 꾸지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세속의 생각과 도무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권세를 부리는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배우고 고생한 것이 아닙니까? 마침내 예수님처럼 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들은 바뀐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마음 깊은곳에는 세속의 욕망이 용암처럼 버티고 있었습니다. 언제든 틈만 나면 용암을 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래선 아니될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해야할 것이다. 큰 자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라면 오히려 종과 같이 되도록 하라.” 이것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하늘 나라의 교훈입니다. 하늘 나라는 분명 세상 나라와 달라야 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임의로 권세를 부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임의로 권세를 부리는 자들로 말미암아 얼마나 괴로움을 당합니까? 함부로 하고 함부로 큰 소리치는 것이 세상입니다. 배려와 공감이 없습니다. 이해할려 하거나 함께 고통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어찌든지 위로 올라가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려 합니다. 약자는 영원히 대우받지 못하고 고통당하다가 죽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문제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의 큰 자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큰 자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큰 자입니까?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자입니다. 섬김받고 경배받아 지극히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는 창조주와 함께 하셨으며 창조주 본체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섬기시기 위해 낮은 곳으로 임하시고 여러가지 수고를 다 감당하셨습니다. 너무도 유명하고 너무도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2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경우를 말씀해주십니다. 인자는 이 땅에 섬김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사용되는 대속물로 주고자 한다, 어떠냐, 너희들도 그렇게 살지 않을텐가?
우리는 왜 이 땅에 왔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이 땅에 온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섬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겨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렇게 말씀하심은 제자들의 가치관을 바꾸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삶의 근본목적이 섬김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는 데에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이고 종처럼 일하는 사람이 으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섬김받는 것을 멀리하고 섬기고자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인생의 목적입니다.
죄인이 말씀을 통해 얼마나 섬기는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자인지 고백합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만 하나님 나라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사는 지 발견합니다. 죄인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나 갈 때에 두 맹인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무리가 이들을 꾸짖었습니다.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될 일을 왜 구하는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왜 구하느냐? 소경으로 사는 것은 매우 운명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지워진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소경, 곧 맹인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큰 소리로 긍휼을 구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안될 일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들로 보게해주셨습니다.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사람들 앞에서 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을까요? 또 긍휼을 구하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에 이런 질문을 바로 하실 수 있는 분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은 어떤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도록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닫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열어 하나님의 비밀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까? 영적인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하나의 운명입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간절한 소원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소경의 고백처럼 “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이런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주님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을 줄 믿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 안에서 늘 이 희망을 품고 믿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주님 앞에서 간절한 소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28절 요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경주 UBF 이모세 2020.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