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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입문(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35)(1935 프라이부르크 대학 강의 원문, 1953출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박휘근(1946-), 문예출판사, 1994, 330.
하이데거는 라이프니츠의 의문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Pourquoi y a-t-il l'étant, et non pas plutôt rien?]에서 시작하여, 이 책의 마지막에 하이데거는 “‘질문할 수 있다’라는 것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그것이 한 평생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Fragen können heißt: warten können, sogar ein Leben lang).”라면서 끝맺는다. 하이데거는 “기다릴 수 있다(warten können)”고 하는데, 벩송은 설탕물의 비유에서,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삶은 지속(시간)이며, 다음으로 철학이 상징(symbole)의 사유를 포함하게 된다. (55N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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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은 1903(마흔넷)에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03, 1월)(1902년에 썼다)을 발표했다. 그 실재성을 구체적 자료들을 제시하기 위해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을 강의하고, 열역학 제2법칙과 자기장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체의 변형과 생명의 도약을 실증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물질과 기억(1898)의 연속으로 기억이론의 역사(1903-1904)를 강의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하는 삶에서 인간은 노력에 의해 새로운 창발, 창안, 발명, 창조로 자유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유문제의 진화(1904-1905)를 강의한다. 창조적 진화(1907)에서 내재적 힘(뒤나미스)의 전개를 “유전”이라는 실증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면서, 무, 무질서, 부동이란 관념 또는 개념작업이 선전전 미해결의 오류 즉 악순환임을 제시한다. 언어는 기호이며 움직임을 부동으로 나타내는 한 방식이라 하면서 움직임을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세 가지의 실사, 명사, 형용사, 동사가 있다고 한다. 이 세 가지 철학사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운동을 부정하며 정지를 통해서 철학적 사고(사변)에 젖어있다고 한다. 벩송은 운동으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할 것을 권한다. 즉 형이상학은 운동 속에 자리 잡고서 시작해야 한다. 이런 형이상학(Métaphysique)을 영이상학(Métapsychique)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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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
1929(마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 1929년 7월 24일 취임 연설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진에게 처음 발표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강연이다.
[1931 카르납(Rudolf Carnaps, 1891–1970),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 durch logische Analyse der Sprache”, Erkenntnis. 2: 219–241. 1931.]
1935 형이상학 입문(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35), 이 책이 발표되는 시기에 그가 사유의 전회« tournant »)라 불렀던 순간이 일어났다고 한다.
1936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1936-1946), Dépassement de la métaphysique」,dans 강연들과 시론들(Vorträge und Aufsätze, Essais et conférences 1954)(1936-1953 소품들) - 번역: [부록] 형이상학의 극복 (Uberwindung der Metaphysik), 한국하이데거학회, 존재론연구 6권0호, 2001년 11월, 385-418(34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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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의 「형이상학 입문(1903)」과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1935) 사이에 차이는 한마디로 ‘이뭣꼬’를 다루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실재성에 대한 물음이며, 후자는 상징 또는 기표에 대한 물음이다. 흐름(flux) 대 언어(langue)라.
벩송이 그리스철학의 전반적 흐름을 알았다면, 하이데거는 그리스철학에서 형상론에 가까운 부분만 주목했다. 간단히 하이데거가 칸트 헤겔 후설을 잇은 관념론이라면, 벩송은 탈레스 이래로 자연주의이다. 철학적 시각에서 벩송은, 지남철의 남극과 북극을 함께 느끼고 사유했다면, 하이데거는 북극을 제외하고 남극만 보는 자본과 제국의 옹호의 길로 가는 사고에 젖어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가끔 우리나라에 해방 후에 독일철학이 성행하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학문 영향을 60여년이라고 했는데, 이번에 이것을 보면서 1894년 1980년 초반에 이른다고 보게 되면 거의 100년을 일본제국주의의 영향 하에 있다. 이 산업 제국에 이어 자본제국의 영향 하에 있는 경향은 이들의 철학소개와 언어소개(물론 논리실증주의 포함)에 영향이 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반성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서인 계보의 사장(詞章)파로서 이어지는 극우는 재빨리 일본과 독일을 받아들였고, 이런 영향은 3.1운동(조선독립운동)을 중요시하는 경우이다. 이에 비해 만주에서 2.1 대한독립운동을 실행하려고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공화국 성립을 바랐다고 할 때, 이들은 독일쪽 영향과 다른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업일본제국 다음으로 미국의 금융자본제국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로서 1931년 카르납의 논문과 하이데거의 논쟁, 그리고 하이데거의 1935년 강의 형이상학 입문(1935)으로 이어짐은 우연이 아니라 학문적 제도방식과 친화성이다. 이에 비해 벩송의 「형이상학 입문(1903)」은 학문적 창안과 창조성이 돋보인다. 프랑스와 독일의 교수제도의 차이에 있다. 프랑스는 25살에 교수자격을 획득하면 자유롭게 자기에 맞는 주제로 논문을 쓴다. 이에 비해 도제방식의 독일은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교수의 지도 아래 글을 쓴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학위논문이 나오는 기간은 거의 10년으로 비슷하다(서른다섯).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25살에 공무원으로 재정적 사회적 지위에 문제가 없다. 독일은 35까지 학문적 도제와 관례에 젖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제도 중에 후자의 제도를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수되었고, 요즘은 학위 이후 평균 10년에 이르러야 대학의 교수로 채용된다는 점에서 45까지 학문적 도제와 관례에 포섭되어 사회와 제도의 포획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제도의 변역은 체제의 혁명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철학이 제대로 자기 길을 가기위해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을 거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최소한의 자유 덕목으로 학문에 매진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도 기쁘고, 그 진심을 아는 이를 만나는 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물이선소이 불위(勿以善小而不爲), 물이악소이 위지(勿以惡小而爲之):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위선자 천보지이복) ·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위불선자 천보지이화). (55N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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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이란 용어가 물리학(자연학) 뒤에 실려 있다는 것은 안드로니코스(Andronicos de Rhodes, 전58-47 리케이온 마지막 학당장)의 편집에 의한 것인데, 이보 훨씬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Théophraste, Θεόφραστος 전371-288)의 단편들 중에 「형이상학에 관하여(Sur la Métaphysique)」가 있었다. 벩송도 이 후자의 형이상학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벩송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자연(φύσις, 퓌시스)의 기원 또는 근거에 대한 성찰에 있다. 벩송에게서는 자연이 ‘있다 또는 있음’에 대한 논의 차원이 아니라, 이 실재하는 자연이 무엇인지(이뭣꼬)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벩송은 말(le mot) 또는 용어(le terme)의 차원에서 존재자(ὤν, 또는 οὐσία)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가 실재하는 실재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l’etant, l’existence)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지며, 또 왜 그렇게 있느냐는 것이다. 존재의 정해진 형태가 없는 부정형으로 입말의 에이나이(εἶναι, être)라는 것을 어원적으로 또는 문법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에이나이를 명사화하여 존재(das Sein, l’Etre)가 실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것은 철학이 하는 것이라기보다, 문법적으로 여러 동사 활동도 있고, 그것을 분사화하여 관사를 붙여서 명사화하며 곡용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말로 있음, 있었음, 있을 것임, 있는 중임은 활용에 가깝지만, ‘있고, 이고’ ‘었고, 어고’, ‘일고, 아고’ 등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형식으로 쓸 수 있고, 나아가 ‘이밈’, ‘어밈’, ‘아밈’으로 머릿속에서 만들어서 과거의 지각작용, 현재의 운동작용, 미래의 상상작용이라고 표기하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개체적으로 ‘오임, 으임, 우임’은 장소의 위치에서, 공동체에서 ‘요임, 응임, 유임’으로 표기하고 기의를 달아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언어의 활용과 곡용은 거의 무한정하게 나아갈 수 있기에, 과거현재미래를 간략하게 ‘어이아’를 붙여서 약속하고, 여기, 공동체 세계-우주를 ‘오으우’를 붙여서, 쓰는 머릿속의 사고의 전개와 놀이를 할 수 있다. 언어로서 존재의 여기(집), 공동체, 우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만들고 조합하고 새롭게 조립하여 얼마나 많은 세상 이야기를, 상상소설, 공상 우주를 만들고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로고를 가지고 만드는 세계를, 만들어진 퍼즐을 맞추기, 만다라 그리기 등이 무한하게 확장되고 무한한 시간의 놀이라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 시간을 보내려고 그 조립과 조합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철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뭣꼬, 그 무엇의 소재와 힘, 의식자료들과 능력들이, 어린 시절을 지날 때 마다 지나가는 관례의 행사와 같은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 소재와 자료를 다루는 방식에서 손과 발로, 말과 글로, 개념과 관념으로, 이론과 체계로 이루어 가는 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있어, 있다. 이다, 임, 이, 일, 인, 등이 있을 수 있는 입말과 용어가 문제거리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런 현상들이 과거의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고, 이 현재는 살아있는 한 다음(아제)에도 비슷하게 재현된다고 여긴다. 이 재현은 무엇이 누가 실행하는가? 자연이, 자연 속에 사는 생명체가 또는 인간이, 하는 것인가? 이런 자연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래 인간이 다룬다고 인간 중에 누가? 나가, 너가, 그가, 우리가? 그러면 먼 어제(과거)에도 나, 너, 그, 우리가 있는가? 그래 있었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안다. 과거의 그, 그들이 있었지. 그래서 계속해서 올라가면, 인간이 있었던가? 이런 의문에서 인간이 없었으면 ‘이뭣꼬’가 문제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다. 인간이 없는데, 입말도 없을 것이고 물음도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 지구는 인간이란 종이 없을 때 지구는 없었을까? 태양계 은하계 우주계는 없었을까? 이런 물음자체가 물음이 안된다고 여기는 것은, 물음이 인간이란 종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물음을 올바로 제기하는 것이 ‘형(形)’이상학(Métaphysique또는 ‘영(靈)’이상학(Métapsychique)이다. 말장난이라고, 입말로 철학하는 것도 철학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그리스어 피(Φ)[형]와프쉬(Ψ)[영]와 s와 ch라는 철자 또는 음소를 바꾸었을 때, – 특히 ㅎ음소를 ㅇ음소로 바뀌면 레이몽 루셀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변형(變形)과 변영(變靈)이 발생한다. - 또는 입술이 새서 발음이 약간 달리 나왔을 뿐이에요 라고 말하면, 푸꼬가 제기했던 레이몽 루셀의 시들을 생각해보라고 할 것이다. (55N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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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상학 입문(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35)
* 목차
제1장.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 1절-16절
1절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그 품위에 있어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깊이 있고 가장 원천적인 질문이다.
제2장. “있음”[Das Sein]이라는 단어의 문법과 어원에 관하여: 17절-23절
22절 “있다/이다(sein)”라는 동사가 지니고 있는 세 개의 어간의 어원학적 기원과 그 일치성에 대하여
제3장. 있음의 본질에 관한 질문: 24절-33절
제4장. 있음의 제한 : 34절-59절
- [프랑스에서 현상학과 하이데거 전문가인 켈켈(Arion Lothar Kelkel, 1927-2015)이 보기에, 4장으로 구성된 내용이 사유 역사의 통시적 관점을 보여준다고 한다. 간략하게 <“존재와 생성(être et devenir)”, “존재와 현상/겉모습(être et apparaître)”, “존재와 사유(être et penser)”, “존재와 의무존재(être et devoir-être)”(Sollen)> 이라 한다. 벩송의 시간관념의 역사: 1902-1903 강의록(2016)와 기억이론의 역사: 1903-1904 강의록(2018)를 읽어보면, 존재와 현존을 다루는 방식을 구별하면서, 통시적 관점을 보여준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가 영혼에 관하여 상층에서 심층으로 내려오는 방식을 3가지로 달리 설명했음에도, 고대를 상층 중심이라 하면 “존재:생성”의 대비라 할 수 있다. 이 ‘존재:생성’을 근세에서 정신-물질의 대응적인 측면에 자아(개인 영혼)를 개입시켜 ‘신체:영혼’의 관계로 본다면, “현상:현존, 겉의식:속의식, 표상:지각(재인)”으로 연관시킬 수 있다. 이로서 문제상으로는 무의식(또는 기억)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계몽기를 지나면서 자아의 사유(개인영혼의 사유)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존재와 사유”를 뒤집어서 “인식:의식, 추억:기억, 물체:생명”으로 거꾸로 되돌려 사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사유 양식을 1953년 이래로 도래한 새물결의 흐름으로 ‘프롤레타리아:자본가’라는 정치경제의 한계를 넘어서, “계약:명령, 심층:상층, 노마드:위계질서, 총체적:전체적, 스키조:파라노이아, 인민:국가, 전쟁기계:제국(전쟁기구)”으로 바꾸어서 생각할 때,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1935)에서네 가지 분석에 대한 의미를 재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산업국가의 제국화 또는 파라노이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상층 사고로서 통시적 관점을 전개했기 때문일 것이다. (55NKF)]
* 하이데거가 제시한 그리스어에 관한 주제들을 모아 본다.
제1장
2절: 그리스인들의 φύσις(퓌시스)라는 근본단어를 통한 “전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질문시작
제2장
19절 부정형[(不定形, infinitif)] [εἶναι, être]
1. 그리스인들의 그리스어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된 서양문법의 기원: ὂνομα(오노마)[명사] 와 ῥῆμα(레마)[동사]
2. πτῶσις(프토시스, casus, 격변화)[곡용]와 ἔγκλισις(엥클리시스, declinatio, 동사변화)[활용]의 그리스적 해석
제2장
20절 그리스적 있음의 이해: 있음을 φύσις(퓌시스)와 οὐσία(우시아)라는 이중적 의미의 지속성으로 이해한 그리스적 있음의 이해.
21절 그리스적 언어의 이해
1. 단어의 부정형은 동사라는 것이 다른 경우에는 나타내 보이는 것을 더 이상 나타내 보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2. εἶναι(에이나이)라는 그리스 단어의 부정형
제3장
33절 “있다/이다(ist)”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다양성에 대하여, “있다/이다”(ist)로부터 이해된 있음의 이해: 지속적 출석(οὐσία/우시아)
제4장
39절 φύσις(퓌시스)와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사이의 유일무이한 본질적 관계성에 대하여: 진리는 있음의 본질에 속한다.
40절 δόξα(독사)의 여러 가지 의미: 있을 지키기 위한 가상에 대한 투쟁.
48절 λόγος(로고스)와 λέγειν(레게인)의 원천적 의미에 대하여
49절 서양철학의 그 시작 시기에 나타나는 λόγος(로고스)와 φύσις(퓌시스)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증명: 헤라클레이토스의 λόγος(로고스)
50절 φύσις(퓌시스)와 λόγος(로고스)가 그 원래적 일치성으로부터 갈라지게 된 그와 같은 내적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사색 속에 나타나는 λόγος(로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원천적 말(Ursatz)”
53절 소포클레스의 합창의 이해를 통한 파르메니데스 단편의 새로운 해석: νοεῖν(노에인)과 εἶναι(에이나이)의 서로 함께 속해 있음이라는 것은 τέχνη(테크네)와 δίκη(디케)의 상호 연관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두려운 것으로 의미되는 숨겨져 있지 않음. 결단으로 의미되는 알아들음. 언어 근거 그리고 필요로 이해되는 λόγος(로고스).
54절 처음 시작 시기의 인간 본질의 이해
φύσις = λόγος ἄνθρωπον ἔχων과 후기의 통상적인 인간의 정의
ἄνθρωπος = ζῷον λόγον ἔχον
ἄνθρωπος = ζῷον λόγον ἔχον(안트로포스 = 조온 로곤 에콘): 인간이란 생물[동물]은 이성[논리, 추론]이라는 것을 갖추고 있다(der Mensch, das Lebewesen, das die Vernunft als Ausstattung hat). .. φύσις = λόγος ἄνθρωπον ἔχων(퓌시스 = 로고스 안트로폰 에콘): 존재는 압도적인 나타나보임이며, 인간존재(목적격)를 소유하고 근거지워주는 모음을 필요로 한다(das Sein, das überwältigende Erscheinen, ernötigt die Sammlung, die das Menschsein(acc) innehat und gründet). (280-281)
이 능력이라는 것[로고스의 능력. 기능이 아닌 것으로 보아] 자체도 어떤 특정한 종류의 현존하는 생물에, 즉 ζῷον βέλτιστον(조온 벨티스톤)에, 가장 성공한 동물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Xenophon). (281)
55절 λόγος(로고스)와 φύσις(퓌시스)가 서로 갈라짐과 있음에 대해서 λόγος(로고스)가 그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과정에 대하여. 어떻게 해서 λόγος(로고스)는 있음을 심판하는 법정으로 군림하게 되고, φύσις(퓌시스)를 οὐσία(우시아)로 이해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285)
1. φύσις(퓌시스)가 ἰδέα(이데아)로 이해됨: 본질의 한 결과인 ἰδέα(이데아)가 본질 그 자체로 이해되고 진리는 정당성으로 이해됨. λόγος(로고스)가 ἀπόφανσις(아포판시스)로 이해됨과 카테고리의 기원. (288)
- [벩송이 철학사를 보는 시각과 하이데거의 시각의 차이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자의 경우에, 퓌시스와 이데아 사이에서 철학 또는 사유의 아르케(기원) 또는 아이티아(이유)가 자연이라는 쪽이다. 후자는 기본적으로 존재와 이데아를 등가로 생각하는 편에서 로고스 이데아 정의 판단의 방식을 중히 여긴다. 전자는 경험과 실증적인데 비해, 후자는 논리와 상징(수학적 부호)에 의존한다.
그러면 전자에서 자연이라는 쪽이 유물론이며 자연주의이며,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파이안(外敎徒, 외교도, païen)이라는 측면이다. 말하자면 크리스트교와 제국이 배척하는 사상으로서 유물사관, 자연창조설, 배교도(hérésie), 악의 축이라는 것을 보면, 하이데거도 마찬가지 사고에 있었기에 나치에 암묵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에 보다, 기계를 잘 다루는 전문기술자와 자본가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계를 긋는 용어들(un terme)로부터 일반화하는 개념작업을 거쳐서 상징화하는 관념작업의 길을 범주(카테고리), 정의, 판단, 논법으로 로고스를 파악하는 사고의 계열이 생긴다. 공간적 경계와 시간적 한계를 그을 수 없는 실재의 상태들, 이것이 무엇인가?, 실재성을 다루는 사유에서 ‘이뭣꼬’는 대상, 관념, 상징이 아니라, 현존하는 현실에서 일어나고 변하고 운동하고 활동하는 것을 다룬다. 이 실재성은 자연이며 영혼이며 상태로서 나타난다. 이를 다루는 ‘이뭣꼬’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에 대해 의식(즉 영혼)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영혼은 경계와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다루는 것인데, 이를 직관적, 지속적 사유라고 부른다. 이로서 논법의 사고를 로고스라고 부른다면, 지속의 사유를 누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벩송과 하이데거의 차이는 로고스와 누스(νοῦς)만큼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논리(분석)과 직관(종합, 플로티노스의 신아이스테시스)만큼의 차히가 있다. 칸트가 선천적 종합이라고 하여 분석과 종합을 함께 묶을 수 있는 것처럼 다룬 것은 착오이다. 이중성의 문제를 하나의 동일한 통합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을 이성(raison)이라고 번역한 것이 문제였다. 그 이중성을 다룰 수 있는 이유(raison)과 기원(originel)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기장처럼 이중성이 함께 묶여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운동(지속)에서만 가능하다. 판단과 결정의 사고에서는 둘을 다룰 수 잇는 방식이 없기에 한쪽은 진리이고 다른 쪽을 거짓으로 삼고 또는 명령하고, 그래서 거짓을 비교도로는 몰아붙이는 유일신 종교와 자본은 같은 한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 나로서는 이런 학문을 하면서 크리스트교에 봉사하는 것은 각자의 신앙이라 여기지만, 그 속에서 민주니, 진보니 하는 자들은 삿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 논리에 봉사하는 자들이 좌파의 진솔한 지속을 빨갱이화에 협력한 정도를 넘어서 그 속에 포획되어 투항한 것으로 여긴다. (55NKD)]
2. φύσις(퓌시스)와 λόγος(로고스)를 Idee(이데, 관념)[생각, 착상]와 서술문으로 이해하게 되었는가? / 숨겨져 있지 않음의 허물어짐 : 있음의 필요 속에 더 이상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를 근거 지워줄 수 없게 됨에 대하여. (302)
2) 이데(Idee) 또는 서술문이라는 관점, 그 어느 쪽에서 보았을 때도, 이 변화라는 것은 언제나 그 원래적인 의미에서의 진리의 본질이라는 것이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 (Unverborgenheit/숨겨져 있지 않음)라는 것이 정당성(正當性, Richtigkeit)으로 변화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숨겨져 있지 않음이라는 것이 바로 그 “안”, 다시 말해서 그 원래적인 의미에서 φύσις(퓌시스)와 λόγος(로고스) 사이의 지배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 다스림(Walten)이라는 것은 숨겨져 있지 않음-속으로-드러나-나타남으로써 존재한다(Das Walten west als das In-die-Unverborgenheit-hervor-kommen). (303) - [파르메니데를 잘 이어가지 못했던 소크라테스에 비해, 플라톤은 이데아를 아페이론에 적용하려는 데미우르고스를 끌어들인다. 데미우르고스는 이데아를 ‘숨겨져 있지 않은 채 [아페이론 속으로] 드러내’ 재현[표상]하려 하는 과정은 행동으로 지배이자, 언어로 명령이다. 하이데거가 지배와 명령에 따라, “언어는 존재의 집(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이라고 말할 때, 언어에서 형이상학을 보려했을 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집”이라기보다 기호(symbole)일 것이거나 이콘일 정도이다. “우주”라는 언어가 우주를 기거할 수 있게 하는 집이 아니며, 우주 속에서는 랑그(입말)이미지도 있고, 쓴글 이미지도 있고, 머리속의 지각이미지도 있고, 전달하면서 표정 몸짓을 써서 이야기할 때 언어의 기호(les signes)들도 있다. 벩송 식으로 보면 우주가 전체라면 언어는 부분인데,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관념, 착각, 망상에 빠진 것이다. 종교에서 천상의 묘사를 어떻게 하든 망상 또는 착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 천상의 묘사가 여섯 살 꼬마에게 필요하다는 것과, 천상의 묘사를 입말 또는 언어로 전달하는 학자는 공상을 넘어서 망상 또는 착란에 있으며, 흄이 말하듯이 공상은 교정할 수 있으나 망상과 착란은 교정이 될 수 없는 정신 나간(aliéné) 짓이라고 했듯이, 또한 들뢰즈가 파라노이아라고 비판했듯이, 이런 표현과 이야기 속에서 정당성과 합리성을 찾으며 이유(raison 일리)있다는 것을 이성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 광기라고 푸꼬가 말한다. 분단의 아픔이 있는데도, 이 아픔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광기에 가깝다. (55NKF)]
56절 숨겨져 있지 않음의 허물어짐이라는 사건이 이루어진 역사적 진행과정에 대한 고찰: “οὐσία(우시아)의 진리”라는 새로운 체계에 뒤따라온, 진리를 “정당성”으로 조정한 것에 대하여 (306)
우시아는 지속적인 출석(ständigen Anwesenheit), 단순히 존속할 뿐임(Vorhandenheit)이라는 의미에서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의한다면 진정으로 있는 그것이라는 것은 언제나-있는 것, ἀεί ὄν(아에이 온)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출석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모든 파악함과 모든 만들어냄에 있어서 그 모든 것에 앞서 미리 되돌아가야만 하는 모델(das Muster/ 원형, 原形), ἰδέα(이데아)인 것이다. 끊임없이 출석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모든 λόγος(로고스) 안에서, 서술함(Aussagen) 속에서 이미 그 이전에 그 (안)바닥에 놓여 있는 것, 그것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 ὑποκείμενον(휘포케이메논), subjectum, 주체(主體)인 것이다. 이 이미 언제나 미리 앞서서-높여 있는 것은 φύσις(퓌시스), 열려 펼쳐져 다스림이라는 것으로부터 보았을 때, πρότερον(프로테론), 앞서는 것, A priori(아 프리오리)인 것이다. (308)
- [하이데거는 영원(아이온)과 시간(크로노스) 관계를 논리적인 측면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벩송은 실재적이고 경험적으로 시간이 철학사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를 설명한다(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 강의록).
57절. 있음이 ἰδέα(이데아)로 규정됨과 동시에 당위라는 것이 있음에 대립되는 것으로 등장하게 됨에 대하여. 이 대립의 형성과정과 완성: 가치철학. (313)
58절 일곱 개의 방향 지시 사항에 비추어 지금까지 보아온 네 개의 가름을 다시 한번 간추려 봄 (318)
1. 네 개의 가름 속에 나타나는 있음의 근본적 특성: 지속적 출석: οὐσία(우시아)로서 ὄν(온) (320)
59절 인간 본질(현-존재)이라는 것이 바로 있음의 성역이라는 것에 대하여. 존재와 시간: 있음의 해석을 위한 “눈길”로서 시간 (327 마지막 절)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것은 서양철학의 그 시작 시기에 있어서 있음(存在, Sein)의 열어보임을 이끌어준 눈길이라는 것이 바로 시간(時間, Zeit)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눈길이라는 것, 바로 그것은아직도 숨겨져 있는 것으로, 그리고 숨겨져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그렇게 마물러 있는 것이다. (328) -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의 입장에 머물고 있다. 벩송은 이보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 플로티노스의 ‘영혼에서 종합과 분열로서’ 의식에서 설명하려 한다. 즉 하이데거는 철학사적 작업의 시작에서 신화적으로 멈추고, 이데아를 상징으로 (사용) 하는 논리적 규정으로 나아가서, 도덕적 정당성을 찾는 윤리적 측면을 부여하려 한 것이다.]
과거라는 것은 그래서 “더-이상-지금이-아닌 것(Nicht mehr-Jetzt)”이 되고, 미래라는 것은 “아직-지금이-아닌 것(Noch nicht-Jetzt)”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속한다(출석한다) (Vorhandeheit / Anwesenheit)라는 의미에서 있음(존재存在/Sein)이라는 것이 시간(die Zeit)이라는 것을 규정해 주는 눈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은 있음을 해석하기 위한 독자적인 눈길을 열어주지 못한 것이다. (328-329) - [존재가 시간을 규정하는 데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이 변형하고,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을 재현(소개)하기 위해서 사유가 그린 선을 세는 것이다.]
‘질문할 수 있다’라는 것은, 그것이 비록 한 일생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기다릴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Fragen können heißt: warten können, sogar ein Leben lang). 그러나 단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단지 두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는 것들만이 실재(實在, das Wirkliche)로 통용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는 질문함이라는 것은 그 비용을 수금할 수 없는 실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Wirklichkeits-fremd)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수(數)라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올바른 때와, 다시 말해서 올바른 순간과 올바른 인내라는 것이 중요하다(Aber nicht die Zahl est das Wesentliche, sondern die rechten Zeit, d.h. der rechte Augenblick und das recht Ausdauer). (329) [마지막에서 수(數)가 등장하면서, 하이데거도 시간과 수와 연관성을 알았을 것이다. 벩송은 ‘보다’에서 이데아를 아페이론에 재는 것이라기보다(플라톤), 점으로서 헤아리는 데서(아리스토텔레스), 즉 수로 환원된 데에서 시간의 개념작업이 성립한다고 본다.]
-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들뢰즈 표현으로 형상론으로 환원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박홍규 선생님은 학문, 철학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플라톤은 형상(정지)과 운동(시간)을 동시에 놓고 사유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정지)을 다루고, 벩송은 운동(시간)을 다룬다고 한다. 선생님 식으로 보면 하이데거는 플라톤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사전을 들고 문법과 어원을 따지다 말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움직이는 변화하는 ‘이뭣꼬“를 묻는 것인데, 움직이지 않는 이데아, 형상, 불변사유로 시작하는 것은, 벩송에 의하면, 원리를 먼저 정하고 그 원리를 아는 지성(하이데거는 이성이라 부르겠지만)이 먼저 있다고 것인데, 이 원리와 지성이라는 두 가지 설정(요청)이 악순환에 빠진 것이라 비판한다(EC 3장). 하이데거가 벩송의 EC를 읽었다고 하지만, 그는 벩송 사유에서 철학사적 기원(arche)과 이유(aitia, raison)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언젠가 정암학당이 벩송이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주목하게 될 때, 하이데거의 철학사 겉보기(현상)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55NKE)]
“Denn es hasset
Der sinnende Gott
Unzeitiges Wachstum” - Hölderlin, Aus dem Motivkreis der ‘Titanen’(IV, 218) (329)
“왜냐하면 깊이 숙고하는 신(神)은
때 아닌 성장을
증오하기 때문에” - 횔더린, ‘거인들이라는 주베로부터(IV, 218)(330)
(9:29, 55NKE) (10:06, 55NKF) (10:16, 55N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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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548 탈레스(Thales, Θαλῆς ὁ Μιλήσιος/Thalễs ho Milếsios 기원전 640-548)(fr.Wiki 전625경-547경): 신화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한 탐구. 원질(arche)을 물(l'eau). 7현인.
544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e, Ἠράκλειτος, 기원전 544-480) 이오니아 에페소스 출신, 불(le feu), 투쟁의 변증법.
540-450 파르메니데스(Parmenide, Παρμενίδης/ Parmenides, 기원전 540-450) 존재가 있다(L'Etre est) / fr.Wiki 520/510 - vers 450-448[2].
440 크세노폰(Xenophon, Ξενοφῶν / Xenophōn, 전440경-전355경) 그리스 철학자. 장군 소크라테스 제자. 라케다이몬의 정체론 / 430 크세노폰 (Xenophon, Ξενοφῶν / Xenophōn, v. 430- v.355) 그리스 역사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e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탈레스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이에 100여년, 이 두 학자들과 플라톤 사이에 100년, 고대의 학문은 느린 것 같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O
18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철학자. 전체 마을이 가톨릭 신도인 동네에서 태어나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 울나라 하이데거 연구자들 -
1925 최동희(崔東熙? 1925-2013) 고려대 교수, ‘도이치고전철학’, ‘현대독불철학’, ‘실존철학’을 강의 했다.
1932 이정복(李貞馥, 1932-), 한양대 철학과 교수, 후기 하이데거와 자유현상학: 玄菴 이정복 교수 정년퇴임 기념 논문 특집(1997)
1934 소광희(蘇光熙, 1934-)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원회원, <시간과 시간의식: Augustinus와 Husserl을 중심으로, 1977, 서울대, 최재희.>
1936 백승균(白承均, 1936-) 외대, 고려대, 독일 박사학위, 하이덱거의 哲學理論(Martin Heidegger)(1980, 博英社).
1937 황문수(黃文秀, 1937-) 고려대 학위 석박사, 경희대 명예 교수, 실존과 이성, 실존철학을 넘어서.
1946 박휘근(朴輝根, 1946-) 서울, 프랑스 앙제 카톨릭대학 철학과 졸,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연구 네델란드 레이든 대학 철학과 대학원 소속(1979) 「불교에서 변신론 문제(Question de théodicée dans le bouddhisme)」(Angers, 1970), 「하이데거 철학에 나타나는 동일성의 의미(Sin von Identität bei M. Heidegger)」(Hamburg, 1972), 「한글의 기원으로(Zum Ursprung der Koreanischen Buchstabenschrift ‘Hangul’」(Leiden, 1976), 「르네 데카르트에 있어서 무한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as Unendliche bei Rene Descartes)」(Leiden, 1978).
1947 이기상(李基相, 1947-), 외대 교수,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존재와 시간”. 현상학을 통해 학문적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 독일: Hochschule fuer Philosophie, 1985, Gerd Haeffner.>
(10:29, 55NKE) (11:06, 55NKF) (11:19, 55NKJ)
* 소크라테스의 이“뭣”꼬의 뭣에 대한 하이데거의 생각
하이데거는 이“뭣”꼬 이전에 뭣이 있을 수 있는 기반(토대)로서 존재를 다루는 것이 철학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 존재의 성질과 특성을 지닌 현존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존재론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존재가 신의 세계와 같은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 것인데, 존재의 완전성과 불변성에 현존을 연결 또는 연관 시키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은 신과의 접속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현존에 앞서 존재, 현존의 인식 능력으로서 이성(지성), 이 둘이 인간에 또는 인간에게만 먼저(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을 것으로 가정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에서 기술과 창안의 길은 존재와 접촉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서, 현존의 자주성과 고유성은 존재를 해명하고 존재와 하나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는 현존이 디디고 있는 터전이 “뭣”과 연관 속에서 삶의 구체적 터전이라는 측면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삶의 터전과 활동에 관한한 소크라테스를 다루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문제를 다루었기에, 기원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e, Ἠράκλειτος, 기원전544-480)와 파르메니데스(Parmenide, Παρμενίδης, 기원전 540-450) 사이의 관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변화 대 부동에서 존재의 완전성과 동일성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현존자는 변화하고 추구하고 있다. 이 현존이 둘 사이의 연관보다, 현존자도 존재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 현존이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존재자임을 알았으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쟈는 인식능력과 도덕적 역사적 실천능력이 완전을 향하는 것으로 보려고 하여, 존재자는 존재에 끈을 달고 사는 동안 현존인 셈이다. 현존으로서 불가분인 것, 개별자, 인격성은 하이데거 존재론에서 부차적인 것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현존자(Dasain)는 주어져 있는 물체들의 편리성, 유용성, 일반성에 쉽게 동화되어, 새로운 실행(실천)의 장을 다른 사유에 맡기려 한다. 그 사유는 전통적으로 고대 소크라테스이전의 시적 창조에 기대하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삶의 주의의 기원 또는 최종심급은 개인의 영혼이었을 것인데, 그 개인의 특이성에 관해 하이데거는 깊이 탐색하지 않은 것 같다. 결국 최종심급으로 물자체 같은 것이 있을 것이며, 물 자체의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 너울을 벗기면 본질이 드러난다고 하게 되면, 물자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을 찾는 것이 진리(aletheia)처럼 들린다. 그가 그래도 현존자에 관심은 그 너울을 걷어내는 작업에 역사적으로 사실들을 은폐한 것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55O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