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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원형(原型)에 대한 향수의 시적 형상화
-김명숙의 시 세계-
유 승 우(시인, 문학박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1. 때(時)는 때(垢)가 될 수 있다.
시를 창작하는 것은 마음의 때를 씻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때가 묻어 있다. 이 마음의 때는 새로운 생명의 피어남을 가로 막는다. 생명의 피어남을 가로막는 이 마음의 때를 생명의 차원에서는 허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운명적으로 이 허물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알에서 태어나는 병아리의 허물은 그 알의 껍질이고, 씨앗에서 싹튼 새 싹의 허물은 그 씨앗의 껍질이다. 그런데 이 허물들은 저절로 벗겨진다. 자연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의 허물은 결코 생명의 피어남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의 허물들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오직 사람의 마음에 묻은 때인 허물이 문제이다.
사람의 허물에는 육체에 묻은 때와 영혼에 묻은 때가 있다. 그런데 육체에 묻은 때는 자연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고, 오직 영혼의 허물인 마음에 묻은 때가 문제이다. 이 육체에 묻은 때(垢)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의 허물인 마음의 때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숨기고 산다. 영혼의 허물인 마음의 때는 눈에 보이는 때(垢)라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때(時)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의 때는 곧 시간의 때이다. 이 시간의 때가 인간생명의 피어남을 가로막는다.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은 새롭게 피어나야 한다. 시간 따라 새로 피어나는 목숨은 식물의 새순처럼 풋풋하다. 인간의 새순은 어린아이다. 시간마다 거듭나는 영적 생명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마음에 시간의 때가 묻어 동심을 떠나 똑똑해졌다. 그래서 시의 동산에서 쫓겨났다. 인간은 시의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고향과 원형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고향과 원형을 상실한 인간은 운명적으로 향수에 젖어 있게 마련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존재의 본질적 구조를 ‘걱정(Sorge)'이라고 했다. 이 인간존재의 본질인 ‘걱정’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향수’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 걱정이나 향수를 인간 스스로 해결하게 하기 위해 신은 인간에게 언어를 주었다고도 했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이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언어예술을 하는 시인이다.
먼지를 털어내어
창을 닦듯
손끝에
정성을 모아
새해에 새 각오로
마음을 닦는다
먼지는 또 다시
쌓여지고
흐릿한 창가엔
세월이 내려앉아
가쁜 호흡 가다듬는다.
물기어린 세월 안고
창가에서
오늘도 난
쉼 없이 창을 닦는다.
-<창(窓)을 닦는다> 전문.
시인의 삶이 자연인의 삶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자연인은 눈에 보이는 몸에 묻은 때는 잘 씻어내지만 마음에 묻은 때는 보지 못한다. 시인은 자연인이 못 보는 마음의 때를 본다. 이 마음의 때는 ‘물기어린 세월’ 곧 시간의 때이기 때문에 닦아내야 한다. 몸에 묻은 때를 씻어내는 것은 목욕(沐浴)이라 하지만, 마음의 때(時)를 닦아내는 것은 수신(修身)이라고 한다. 마음의 옷을 벗는 일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마음을 닦아내는 사람이다.
나는 김명숙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 시인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짙은 향수에 젖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자연인 김명숙, 한 남자의 아내 김명숙, 누구의 어머니 김명숙은 시인 김명숙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김명숙은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다. 내가 처음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 그의 작품에서 무언가 허물을 벗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는 꿈과 그리움, 그리고 짙은 향수를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이 아무리 걱정이나 향수가 운명적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시인이 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이다. 마음의 때를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감각이다.
바다가 길을 내어 놓는다.
포구를 떠나간 사내가 돌아오지 않자
바다를 통째로 마시겠다던 그녀
사내를 기다리다 썰물이 되어 나섰다.
바다 끝자락까지 가면 사내가 있을 것 같아
질퍽한 갯벌의 사타구니도 마다하고
수평선을 향해 내닫는다.
바다만 바라보다 섬이 되고팠던 여자
그 사내에게만 치마를 벗고 싶었던 여자,
덕지덕지 바위에 붙어 있는 따개비 같은 상처가
그녀 안에서 구획을 넓혔다.
뚝심 좋은 사내가 미끼를 던져도
아랫입술 질끈 깨물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던 날들이
그녀 앞에 쌓여갔다. 깻단에서 깨 쏟아지듯
섬을 떠난 그녀
어부가 된 남자의 바다가 된다.
-<그 여자의 바다> 전문.
위에 인용한 작품은 내가 받은 원고의 첫 작품이며, 시집의 표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한 시집의 첫 작품은 그 시인의 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다시 말해 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집의 표제는 그 집 현관에 붙은 문패이다. 어떤 집의 현관에 들어서서 문패만 보아도 그 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시인의 시 세계라는 집은 영적 교감의 자장(磁場)이기 때문에 한 작품만으로도 여타 모든 작품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위의 작품의 제목은 <그 여자의 바다>이다. 여기서 ‘바다’는 ‘시간의 바다’이며, 여자를 상징하는 은유이다. 원래 우주는 <땅-하늘, 음-양, 여자-사내>와 같은 2항 대립의 조화로 생명을 기른다. 땅은 여자이고 하늘은 사내라는 원형상징이다. 그런데 땅을 대표하는 것이 바다이다. 그래서 바다는 여자를 상징하는 역동적 이미지이다. 하늘은 실체가 없다. 그래서 “포구를 떠나간 사내가 돌아오지 않자 / 바다를 통째로 마시겠다던 그녀 / 사내를 기다리다 썰물이 되어 나섰다.”에서 보듯, 역동적인 바다의 이미지인 썰물이 되어 나선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추상적이지만 바다는 구체적인 생명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바다 끝자락까지 가면 사내가 있을 것 같아 / 질퍽한 갯벌의 사타구니도 마다하고 / 수평선을 향해 내닫는다.”에서 보듯, 구체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여자의 생명감을 형상화한다. 결국 추상적인 사내는 어부로 구체화되고, 그 여자는 “어부가 된 남자의 바다가 된다.”로 마무리 된다.
이미지는 상상의 산물이다. 상상은 우리말로 ‘그리다’이다. 그런데 이 ‘그리다’는 ‘없다’를 전제로 한다. 부모가 없는 고아는 부모의 모습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애인이 없는 사람은 애인의 모습만을 그린다. 그 모습을 구체화 하면 그림이 되고, 마음속으로 그리면 그리움이 된다. 마음의 때에 갇혀 고향과 원형인 존재를 상실한 인간은 존재에 대한 향수로 인해 언제나 존재 자체를 그린다. 이것을 말로 그린 것이 이미지이며,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 바로 현대시이다. 김명숙의 시세계를 상징하는 현관과 문패는 <그 여자의 바다>이다. 이 현관에서부터 우리는 김명숙의 시세계에 대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분위기가 바로 원형에 대한 향수이다.
2. 시심(詩心)은 향수(鄕愁)이다.
인간의 고향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공간적인 고향이고, 두 번째는 시간적인 고향이다. 공간적인 고향은 출생지를 의미하고, 시간적인 고향은 유년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고향을 상징하는 것이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과 이브는 남자와 여자라는 인식도 없었고, 옷을 입지 않고도 벗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과도 대화를 했던 것이다. 여기서 대화란 곧 교감(交感)을 의미한다. 그런데 공간적인 고향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귀향할 수 있지만, 시간적인 고향에는 결코 돌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젊어지는 샘물’을 과학의 힘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적인 고향에는 결코 귀향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간적인 고향에는 시라는 샘물로 귀향할 수 있다. 에덴동산의 주인공이었던 아담과 이브는 시인이었으며, 그곳은 모든 자연과의 대화가 가능한 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시인만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바로 인간존재의 원형인 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시인만의 특권이 바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인 향수(鄕愁)이며, 향수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바로 젊어지는 샘물이며, 시간적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랑의 문이다. 김명숙의 시에는 어머니가 많이 등장한다. 김명숙이 사랑의 시인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어여 가거라. 어여 가.”
뿌연 흙먼지 일으키며
버스가 동구 밖을 돌아갈 때까지
손 흔들며 서 있던 어머니.
버스가 시야에서
한 점으로 없어질 때까지 손 흔들다
비로소 뒤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어머니
“난 걱정 말고 너희나 잘 돼서 편히 살거라.”
여섯 식구 등짐이
바윗덩이만큼 무거웠을 어머니.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의 그 등짐이 자꾸만 내 발치에 채입니다.
주목은
살아서 백년
죽어서도 백년이라 했던가요.
하지만 어머니!
당신은 내게 있어 천년입니다. 억겁입니다.
사랑입니다. 무한입니다.
-<어머니> 전문.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에 시간의 때가 묻게 된다. 시간(時間)은 우리말로 때 사이이며, 이 때 사이는 곧 인간관계이다. 이 때 사이(時間)에서 살다 보면 때가 묻게 마련인데, 이것이 곧 마음의 때이며 영혼의 허물이다. 이 마음의 때로 인해 인간은 그 원형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영적 생명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대에는 집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고 한다. 영적 교감이 없기 때문이다. 김명숙은 <어머니>란 제목으로 향수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어머니로 인해 시간적인 고향인 유년으로 돌아간 것이다. “당신은 내게 있어 천년입니다. 억겁입니다. / 사랑입니다. 무한입니다.”에서 보듯, 시간을 넘어선다.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는 시간이 무한이 된다. 실제로는 시인도 이미 어머니가 되었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그 시간이 소멸되고, 시인은 <어머니> 앞에서 어린이가 된다. 시인 자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여섯 식구 등짐이 / 바윗덩이만큼 무거웠을 어머니”라고 상식적인 효심의 깨달음을 표현했지만, “오늘은 그 등짐이 자꾸만 내 발치에 채입니다”로 마무리함으로써 시적 형상화의 감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지를 삶으려고 가운데를 잘랐다.
갈라진 가지 속,
꼬부라지고 쇠진 가지의 까만 씨가 빼곡하다.
수돗물로 떨어내려 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가지 속에 꼭꼭 박혀 떼어지지 않는 씨를 보며
내가 살아온 길을 들여다본다.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내 잘못도
누구에겐가 저렇게 까만 씨 한 점으로 박혔으리.
-<가지를 익히며> 전반부.
김명숙의 이런 시적 형상화의 감각은 쉽고 간결한 작품에서 훨씬 돋보인다.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인 것을 제재로 한 작품인 <가지를 익히며>에서, “가지 살 속에 꼭꼭 박혀 떼어지지 않는 씨를 보며 / 내가 살아온 길을 들여다본다.”와 같은 표현이나, “살아오는 동안 /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내 잘못도 / 누구에겐가 저렇게 까만 씨 한 점으로 박혔으리.”에서 보이는 그의 시적 형상화의 감각은 참으로 놀랍다. 가지의 살 속에 박힌 까만 씨를 자신의 마음에 박힌 시간의 때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비유적 이미지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는 회개라는 윤리적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을 비유적 이미지로 재미있게 형상화한 것이다. “꼬부라지고 쇠진 가지의 까만 씨가 빼곡하다. / 수돗물로 떨어내려 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에서 보듯, 눈에 보이는 몸에 묻은 때는 물로 씻으면 잘 떨어지지만, 마음에 묻은 때는 물로 씻어낼 수 없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까만 씨가 “수돗물로 떼어내려 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시인이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내 잘못”을 비유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에 묻은 까만 때를 상징하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봄꽃이 벙근
운주사에 가면
꽃향기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은 돌부처가 있고,
꽃향기를 너무 맡아 콧등이 문드러진 돌부처도 있고,
꽃향기에 어지러워 산 중턱에 드러누운 와불도 있고,
-<봄 운주사> 전문.
이 작품은 5행의 단시이다. 시적 표현의 간결미와 함께 시적 긴장감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천년 세월에 의해 주저앉은 돌부처를, 현재의 꽃향기에 취해 주저앉은 것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로 돌아온 것이다. ‘꽃향기’야말로 천년 세월까지도 뛰어 넘게 하는 시적 제재이다. 천년 세월에 의해 “콧등이 문드러진” 게 아니고, “꽃향기를 너무 맡아 콧등이 문드러진 돌부처”라든가, “꽃향기에 어지러워 산 중턱에 드러누운 와불”이란 이미지는 시간철학의 시적 형상화라는 묘미를 맛보게 해준다. 참으로 놀라운 시적 표현의 감각이다. 이런 것이 현대시를 읽는 재미이다.
죽음에는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 있다. 육체의 죽음은 죽을 사(死)자로 표현하고, 영혼의 죽음은 망할 망(亡)자로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사(死)의 반대는 생(生)이고, 망(亡)의 반대는 흥(興)이다. 그렇다면 흥(興)이란 곧 영혼의 삶을 일컫는 말이다. 존재에 대한 향수는 곧 인간에 대한 향수이며, 인간에 대한 향수는 곧 시에 대한 향수이다. 공간적 고향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으나 시간적 고향에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마음에 때가 묻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 논리일 뿐이다. 시의 나라에는 젊어지는 샘물이 있다. 시인은 상상력으로 이 샘물을 찾아 헤맨다. 공자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흥어시(興於詩)라고 분명히 말했다. 오직 시에서만 마음의 때를 씻고 영적 생명이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다. 위의 작품에서는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현재의 <봄 운주사>로 가서 돌부처와 함께 꽃향기에 취할 수 있는 것이 시인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행복이며, 시의 나라에서 떠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다.
공자도 흥어시(興於詩) 다음에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고 했다. 시심(동심)으로 돌아간 다음에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시의 형식을 세워서(立於禮) 음악적 울림의 감동으로 완성한다는 뜻이다. 김명숙은 자신의 시적 영감(興於詩)을 시적 형상화(立於禮)를 통해 음악적인 울림으로 완성(成於樂)하기 위해 가곡 작사도 하는 놀라운 시인이다.
3. 마무리
시는 언어예술이다. 언어(言語)가 그 재료이다. 그런데 언어(言語)의 언(言) 자는 혀의 움직임을 상형한 글자이다. 혀의 움직임은 의미 이전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신과 대화하던 그 울림이며, 어린 아이가 엄마와 옹알이하는 그 울림이다. 이 울림에 나(吾)라는 의미가 살아나서 언어(言語)가 되었다. 언어는 신과의 대화보다는 인간과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쓰는 도구이다. 이것을 우리는 일상어라고 한다. 이 일상어에서 나(吾)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절(寺)을 들여놓으면 일상어의 어(語)가 시(詩)가 된다. 여기서 나(吾)를 제거하고 들어앉은 절 사(寺) 자는 원래 관청 시(寺) 자이다. 그런데 가장 높은 관청은 황궁이고, 황궁에는 천자(天子)가 있었다. 옛날에는 제정일치였기 때문에 관청은 곧 신전이다. 그러나 천자는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이러한 천자에게 신의 뜻을 전하는 사명이 시인에게 있었다는 것이 시(詩)라는 글자의 의미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황제는 용(龍)이고, 누구든지 용이 되면 귀가 먹어버린다. 용의 귀는 귀머거리(聾)이기 때문이다.
신과 대화하고, 바람과 구름과 꽃과 지껄이는 동심이 곧 시심이다. 그래서 시인은 꽃밭에 가서는 꽃의 요정과 대화하고, 숲에 가서는 숲의 요정과 대화하며, 바다에 가서는 파도의 요정과 노래하며 춤춘다. 누구나 이런 에덴의 시기가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음에 때가 묻고 어른이 되어 똑똑해진다. 이 시심에 묻은 때가 곧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 빠지지 않는 예술이 그림과 노래이다. 색채와 소리에는 의미가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과 음악은 순수예술이다. 시는 그림과 같이 보여주고, 노래와 같이 들려주기를 원한다. 시가 그림과 같이 보여주는 것이 시각적 이미지이고, 노래와 같이 들려주는 것이 청각적 이미지이다.
나비 한 마리
풀밭에 날아와 앉았다.
날았다.
앉았다.
앉았다
날았다 하다가
한 참 후
한 쌍 되어 날아왔다.
-<나비> 전문.
김명숙 시인이 다다른 그림과 음악 같은 시의 나라이다. 살아 있는 것의 특징이 느낌(感)과 움직임(動)이다. 감동(感動)이란 말이다. 김명숙 시인은 <나비>에 이르러 마음이 살아난 것이다. 이른바 흥어시(興於詩)가 된 것이다. 이 감동을 그림과 같이 보여주는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해서, 마침내는 “앉았다 / 날았다” 하는 <나비>의 생명의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생명의 춤은 동심으로 돌아가 혼자 노래하며 춤추는 등신이 되어야 한다. 등신(等神)은 신과 같다는 뜻이다. 팔랑팔랑 나비와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등신이 된 것이다. 김명숙시인은 이러한 시의 나라에서 영원히 등신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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