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꺼낸 말을 다시 입 속에 넣다’는 뜻의 “식언(食言)”은, 곧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옛말이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에 있어 사실 이 ‘식언’에 익숙해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것만 들어주신다면...’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후의 우리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정작 하느님 앞에서 내뱉었던 수많은 약속들을 지키지도 못하고, 참 많이 잊고 삽니다.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마 시작부터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그 약속은 신학교 뒷산 바람에 실어 보냈습니다. ‘제대만 하게 해 주신다면…’ 군대에서의 그 간절한 약속은 군대에 남겨두고 왔나 봅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토록 바랐던 기도들, ‘사제가 되게만 해 주신다면…’, ‘유학생활만 잘 마치게 해 주신다면...’. 저와 하느님만이 알고 있는 기도는 어느덧 말할 수 없는 저만의 비밀로만 수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은총과 구원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핵심에는 ‘감사의 마음과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레위기의 규정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시에 나병환자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낟인 찍혀 마을 밖으로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육체적 고통보다도 ‘하느님께 벌 받은 죄인이라는 낙인’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라는 더 큰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마주친 장소가 사마리아도 아니고 갈릴래아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이고,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기 전의 한 지점이라는 장소적 배경은 바로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마을 공동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들의 슬픈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징입니다. 그렇게 사회 공동체에서 소외시켰던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이전에 나병환자를 고쳐주실 때에는 모두가 피하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 직접 대시며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직접 치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제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그 이유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 이 명령은,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 상태가 호전되면 사제에게 보여 치유를 확인받는 율법 규정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앞서 말한, 그들의 ‘잃어버린 사회적 자리’를 되찾아주는 치유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그들 사이에 비천한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인이 포함되었기에 이들또한 율법의 규정을 넘어서는 치유의 대상임을 상징하고, 무엇보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하느님의 구원은 율법의 규정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나병환자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발길을 돌렸고, “그들이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믿고’ 가는 동안 치유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한층 더 나아가 이 치유의 체험은 이제 그 은총을 받은 무리를 두 방향으로 가르게 됩니다. 아마도 아홉 명은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서둘러 마을로 바삐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온전해진 육신으로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과 소속에 대한 결핍과 갈망이 무엇보다 컸던 것입니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았다는 ‘사실’만이 이제 남았고, 그에 대한 기쁨에 취한 것입니다. 특히나 그 돌아간 공동체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여겨지던 유다인 공동체였고, 어쩌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자비를 청할 때와는 달리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당연한 은총’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도적 확인과 소속의 회복보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보다, 그렇게 만들어 주신 힘이 하느님께 있다는 ‘원인’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에게는 ‘소외’되어 왔지만, 그 누구도 ‘소외하지 않고’, 자신에게도 ‘은총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홉 명의 유다인 나병환자들은 외면적인 것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고친 분이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미숙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완성시키는 참된 믿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 그것은 거저 주어졌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내가 자격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신 자비로 인해 선물로써 거저 주어졌음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인이 감사할 수 있던 것은 그에게 일어난 치유가 오직 주님의 자비로 주어진 선물임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업적을 참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놀랄 수 있는,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일수도 있고, 때로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커서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관건은 이런 삶의 무게와 세상의 기쁨이라는 관문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감히 그분께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 높여 청했던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알고,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던 것처럼, 감사의 마음으로 ‘깊이 다가설 수 있는 것’. 그 것이 구원을 완성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분의 자비가 아니면 그 어떤 은총도 누릴 수 없는 우리에게 무한한 은총의 선물을 자비로이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