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의 크고 작은 열등감과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삽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그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회 속에서 개인은 타인의 존재를 항상 인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장단점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열등감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열등감의 결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성공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거기에 매몰된 삶을 살게 됩니다. 열등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왜소하고 열등한 존재로 느낍니다. 또 지나친 열등감은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반사회적인 태도를 갖거나, 병적인 우월욕구를 갖게 만듭니다. 이러한 욕구를 확보하려는 과도한 행동으로 이런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는 데만 급급해서 공동체성이 결여됩니다. 궁극적으로 타인을 압도하려는 적대감을 낳게 됩니다. 결국 긍정적인 관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열등감의 극복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성경에서 열등감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인물인 ‘자캐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전해듣게 됩니다.
이 ‘자캐오’라는 인물에 대해 복음이 전하고 있는 정보는 세 가지입니다. 직업은 세관장이었고, 돈많은 부자였으며, 외모는 키가 작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세관장’이라는 직책은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철저히 죄인으로 취급받는 자리였습니다. 세리 마태오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동족인 유다인들을 배신하여 로마 제국의 하수인 역할을 하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 거두어들여야 하는 이상의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세리들은 유다인들로부터 철저히 불결한 죄인 취급당하며 성전 출입도 금지되었고, 가족들에게까지도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캐오는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고 철저히 배척당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였습니다. 당시 매우 풍요로운 도시의 대명사인 ‘예리코’에서도 굳이 ‘부자’라고까지 표현한 것으로 보면 그는 굉장한 재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눈여겨볼만 한 점은, ‘세리들에게 제시된 회개의 조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직업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은 몫에 5분의 1을 더해 되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건을 충족한다면, 죄인으로 판단받던 세리들의 회개를 인정하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보통의 세리들에게 결코 쉽지않은 조건이지만, 복음이 자캐오의 특징을 ‘부자’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때, 그리고 뒷부분에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그의 발언으로 볼 때, 그는 충분히 ‘회개할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를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캐오가 예리코에서 키가 작은 유일한 사람이었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굳이 이 사실과 함께, 그래서 자캐오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기록해 둔 이유는 그의 사회적,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캐오에게 단지 작은 키만이 문제였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앞을 비집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과 문제가 없는 관계였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목마를 타는 방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 사이에 있지 못하고 따로 나무 위로 올라가야 했던 그의 처지는, 결국 그의 ‘외로운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관장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었고, 사람들에게 죄인취급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재산을 모으려 부단히도 애를 써 부자가 되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은 키’가 가지고 있는 상징은 단순한 그의 외적인 특징이 아니라, 그의 ‘열등감’이라는 내면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열등감’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재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회개할 가능성의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산’을 놓을 수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전하는 이 자캐오라는 인물은 ‘열등감’의 상징이고, 우리 각자 안에도 이런 자캐오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 자캐오는 루카복음만이 전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루카복음사가의 신학적 특징 안에서 이러한 ‘열등감’을 대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더욱 아름답게 그려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이 자캐오의 만남에는 총 네(4) 가지의 ‘바라봄’(시선)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키가 작은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지만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았던 ‘선망(羨望)의 바라봄’입니다. 이 때 자캐오의 바라봄은, 일방적으로 먼발치에 서 관찰하는 호기심 가득한 그런 바라봄입니다. 하느님을 보고 싶고, 소문처럼 대단한 분이신지 알고 싶어 하지만 이런 저런 장애들과 열등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고 망설이는 모습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바라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간 자캐오를 ‘올려다 보셨’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을 잘 살펴보면,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올라갔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올려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흥미로운 표현으로서 ‘보는 주체’가 예수님께로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바라봄은 저 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낮은 곳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바라봄’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어이 거기!’와 같은 식으로 자캐오를 부르시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자캐오야’라는 그의 ‘이름’을 명확하게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상징성이 갖는 맥락에서 살펴보자면, 자캐오라는 이름의 뜻은 ‘즈카르야’에서 파생된 말로 ‘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여겨 배척하고 공동체에서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그를 구원의 대상으로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마음은 제1독서의 지혜서에서도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셋째는 예수님과 자캐오를 향한, 사람들의 ‘판단의 바라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심이나 자캐오의 진심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도, 자캐오의 열등감도 그들 바라봄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눈에 비친 대로, 곧 ‘보고 싶은 대로만’ 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라는 그의 이름을 분명히 불러주신 것에 비해서, 군중들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죄인'으로만 판단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의 진심을 알고자 하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판단하며 비난하는 행동, 때로 질투나 미움같은 자기 감정에 휩싸여서 바라보고 단정짓는 그런 시선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다시 ‘자캐오의 바라봄’입니다. 이것은 처음의 선망의 바라봄과는 사뭇 다른 바라봄입니다. 회개한 자캐오의 이 바라봄은 ‘아멘의 바라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제 자기 삶에 주님을 초대하고 그분의 뜻을 그 중심에 놓는 바라봄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꼭 쥐고 놓지 못하던, 자신의 유일한 무기와도 같은 ‘재산’을 얼마든지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한 마음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보여드리고, 또 자신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결국 ‘바라봄’이 곧 ‘함께 살아감’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점점 하느님께로, 그래서 깨지 못하고 똘똘 뭉쳐 갖혀 있던 ‘열등감’과 ‘자기 상처’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먼발치에서 그저 주저하던 ‘선망’에서, 하느님의 ‘수용’을 느끼고, 자기만의 ‘판단’을 넘어서, 이제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바라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마음 한켠에 자기만의 자캐오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하루, 한해. 그렇게 여태껏 인생의 소중한 시간의 선물을 받았지만 돌아보면 별 수확을 거두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빈손’, 무언가로 채우려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나의 열등감, 그래서 누군가를 공격하고, 다른 무언가로 감싸려 해도 결국 상처만 남게 되는 우리의 ‘빈 마음’. 그런데 그 ‘비어있는’ 우리의 공간에 예수님께는 당신 사랑의 메아리를 채워주십니다.
“이제 더 이상 거기에 머물지 말고 (나에게로) 내려오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뛰어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도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모자람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의 절반이라도 나누고 사랑하려는 마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더 사랑하려는 마음을 봉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빈 곳 그 어딘가든, 우리를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가는 소중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그 시선, 그 사랑을 외면하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바로 이 마음에 구원이 내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