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메뉴 <쉐우민의 스승들> 코너에 [19991021 쉐우민 큰 사야도 법문..사띠 하나만을 끈질지게 붙잡고 있을 것 같으면 마지막에는 닙바나를 이룰 수 있다]의 with사랑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을 따로 게재하여 수행자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요즘 사사나 스님의 2014년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탐진치를 버려야할 대상이 아닌 담마로 보시는 견해가
혹시 대승의 ‘번뇌즉보리’라는 말씀과 같은 견해이신가요?
초보불자라 모르는 게 많습니다.(20.04.02 with사랑)
[답 글]
2014년도 법문이라면 6년 전 법문일텐데 사당동법문인가요?
본 질문에 대한 답변을 그냥 견지되는 대로 자연스럽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행 초심자 시절.. 보는 법을 잘 몰랐을 때는 ‘번뇌즉보리’..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극히 상반되는 두 단어가 섞어져 있기에 그저 고개만 좌우로 갸웃둥거리게 했을 뿐이었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마음’에 대해서.. 낄레사를 비롯하여 많은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그것들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자꾸자꾸 보다가 보니까 그것들의 이치, 성품, 성질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집니다.
보는 견해와 보이는 대상들이 점차 바뀌면서 ‘번뇌-Kilesa’도 三毒이 아니라 그것들도 단지 마음이며 그저 일어나는 성질로서 작용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집니다.
좀 더 나아가 단지 ‘대상’일 뿐이라고 보는 견해로 Update/업데이트 되어집니다. 바른 견해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즉 낄레사 또한 대상, 담마라는 사실(법념처)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사띠의 다시 알 수 있는 힘(사띠빳따나)과 지혜의 알 줄 아는 반조의 힘으로서 그 역량이 지대합니다. 사띠의 기능적 역할(능력)과 지혜로서 보는 견해(삼마딧티)가 일어나는 일체를 다 대상으로 볼 줄 아는 이치로서 제 3자적,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이는 담마, 다 대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상으로 아는 지혜는 빤냐띠와 빠라마타 양쪽을 다 볼 수 있어야 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①처음에는 사띠가 수행을 합니다; 두는 사띠 때는 빤냐띠를 대상으로 열심히 사띠 연습을 합니다. 즉 사띠 두는 법과 대상 잡는 법을 배우는 수순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②중간에는 사띠와 지혜가 함께 수행을 이끌어갑니다; 사띠가 이어져 사띠사마디가 생기고 알아차림의 가속도가 붙게 되면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함께 ‘있는 사띠’로서 일하게 되는데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까지 있어서 HOW-WHY, 원인/결과를 조사하면서 관계, 이치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으로 인하여 대상과 마음, 대상에 대한 보는 견해를 올바르게 잡아가는 과정이 됩니다.
③나중에는 아는 지혜가 法으로서 수행을 이끌어갑니다; 法念處가 됩니다.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지혜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지혜가 지혜를 대상으로 하는 이치에서 더 넓은 이해의 차원까지도 도모될 수 있습니다. 법이 일한다는 것은 제 할 일을 제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인데, 법의 조사/정사유..일어나는 대상에 기울여 위딱까&위짜라를 자연스럽게 해 나가면서 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게 됩니다. 작은 지혜들의 금싸라기를 모으는 작업(聞/思/修)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른 견해로서 확립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띠빳타나.. 대상으로 아는 四念處 수행의 과정이 ‘번뇌-낄레사’를 三毒이라고 설정해 놓고 불변의 고정관념으로서 보는 잘못된 견해, 즉 빤냐띠를 대상으로 하는 모하의 견해에서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아는 넓은 시야의 관점으로 보는 바른 견해, Samma-Ditthi/삼마디티를 확립하는 지혜의 계발과정이요, 그 증장의 성숙도입니다.
法念處로서 할 줄 아는 지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것을 다 담마(法)로 볼 줄 아는, 대상으로 볼 줄 아는, 이해하는 지혜, 능숙한 알아차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통찰수행이란 일어나는 마음이거나 작용하는 마음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그것들이 하는 일에 간섭과 상관, 억제 조절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서 이해를 하는 것이지, 마음이 제 성질대로 일하는 것을 못하도록 누르거나 억압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한다면 대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일을, HOW-WHY, 원인/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가 생겨날 수 없게 됩니다.
비록 낄레사가 생겨나서 작용을 하더라도 지켜보면서 그것의 이치-그것이 하는 일과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어떻게 하니 사라지는가를 통찰하게 될 것 같으면 ‘번뇌-낄레사’ 라는 것도 하나의 마음작용, 마음이 일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대상으로 아는 통찰지혜가 수행하는 일로서 ‘있는 그대로-법의 성질대로-그것의 이치대로’ 알고 보는 지혜의 일입니다. 여기서 사마타와는 전혀 다른 길임을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래는 <오늘의 사야도 말씀> 중 일부를 첨부해 봅니다.
<그것의 이치>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좋다거나 나쁘다고 규정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법은 그것의 이치입니다. 자신의 이치가 아닙니다. 자신의 이치라면 비법(非法)이 됩니다. 자신의 이치를 우선시 한다면 비법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것의 원인과 결과에 따른 진행과정이 되어야 법의 이치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된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으로 수행한다면 절대 법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적인 성품을 자연적인 성품으로, 근본이치를 근본이치로, 즉 바른 견해로써 수행해야 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른 견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견해와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한 상태에서, 올바른 정보 없이 수행한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견해가 바르고, 마음가짐이 바르고, 수행을 할 줄 안다면 그때는 간단없이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기 안을 보고 자신을 바꾸는 일입니다. 다른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충분한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이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자신을 바꾸는 일이 가장 쉽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꿔지는 것은 앎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앎의 지혜가 없다면 힘듭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사띠를 두고 자신의 책임을 진다면 일이 해결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평온한 것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괴로운 것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오직 마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어느 누구(상대)도 이 마음(자신)을 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원인이든지, 그 누구이든지 이 마음을 괴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이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것도, 평온하게 만드는 것도 이 마음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와 아주 많은 상관이 있습니다...(오늘의 사야도 말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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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사두사두~^^*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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