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우월한 신분, 지위, 직급, 위치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에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행동을 말합니다. 굳이 이런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뉴스에서 나오는 갑질관련 기사는 우리를 화를 돋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나이가 더 많은데...’ 어쩌면 남보다 어떻게든 더 우위에 서려는 인간의 본능이 만들어낸 극단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우리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 하느님의 삶을 살아갈 것을 대림의 두 번째 주일인 오늘 전례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곧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대림시기에 특별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첫 선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가 나뉘어 있고,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분리되어 먼훗날 언젠가, 막연한 어느 곳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서 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의 시점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그 시간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된 것이고, 이제 우리가 그 시작된 곳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묻게 됩니다. 여기에 세례자 요한이 강조했던 바가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는 ‘넘어서다’는 뜻의 ‘μετά’와 ‘마음, 태도’를 뜻하는 ‘νοῦς’의 변형 ‘νοια’의 합성어로 “지금까지 갖고 있던 마음과 태도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회개’는 무엇보다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걸어오던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아닌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한 걸음 발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한참 다른 길로 와버린 우리 발걸음의 방향을 다시 하느님의 길로 돌리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가? 내가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지고, 더 건강하고, 더 예쁘고 등등’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면서, 남과 나를 분리하고, 남보다 더 우월한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여기에 회개란 이처럼 나에게 집중되어 있는 관심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남보다 어떻게든 더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하면서, 정작 남은 미워하고 증오했던 마음, 시기, 질투했던 마음, 용서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고 있던 마음,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지 못했던 마음. 그런 마음들에서 벗어나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돌아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대림시기에 해야 할 “회개”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는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었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의롭게 다스려지는 나라,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늑대, 표범, 새끼 사자가 새끼 양, 새끼 염소, 송아지와 함께 지내는 평화의 나라이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을 쳐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 화해의 나라입니다. 인간적인 논리로는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인간 논리 안에서는 사자와 늑대는 강자로서 우월한 ‘갑’의 자리에 서고, 양과 염소, 송아지는 약자로서 ‘을’의 자리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그런 경계가 무너지는 나라,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또, 이 이미지 속에서 흥미로운 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라고 해서 늑대가 양이 되고, 표범이 염소가 되며, 사자가 송아지가 되지는 않습니다. 모두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하느님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는 갑이 되어 웃고, 누군가는 을이 되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만 가득 찬 곳, 나를 내세우던 논리에서 회개하여 그 열매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제2독서에서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하느님 나라 건설의 비결을 알려줍니다. 인내와 위로, 희망의 하느님께서, 당신 뜻에 따라 서로 다른 우리가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함으로 비로소 평화로운 일치의 공존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 사도는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습에 우월을 두고, 잘난 이는 사랑하고, 못난 이는 벌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해주시고, 오히려 우리에 대한 사랑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있는 그대로’ 서로 받아들일 때 환하게 드러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세상도 성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성탄은 늘 그래왔듯 휘황찬란한 불빛들 속에서 즐기고 흥청거리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정작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사회적인 냉담 속에서 힘들어합니다. 우리 내면의 갈망은 채워지지 않고, 분열과 끝 모를 고통이 넘실대는 현실이 계속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오시는 주님을 이렇게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걸어가는 길, 내가 밟고 있는 땅, 그리고 내가 있는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는 따뜻한 한마디 말과 존중과 배려 섞인 행동하나로써 하느님의 빛으로 채워가도록 조금씩 바꾸어 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가운 세상을 따뜻하게 품어주실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하도록, ‘회개’로써 그분의 길을 잘 다듬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첫댓글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돌아서는 것.
한주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