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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2016년 8월 24일 광명시 ‘詩眼同人會 초청 강연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무너지는 인본사회(人本社會),
다시 사랑을 생각합니다
소설가 김익하
사람이 사랑을 사용할 줄 알까요?
오늘은 이런 질문부터 던지면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이란 개념 용어로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으로 정리합니다. 한국인들에게는 관례로 ‘정을 주고받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성질에는 애틋함, 그리움, 간절함, 열렬함 따위들이 버무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성(靈性)의 본질은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말을 하고 문자를 사용한 이후 가장 많이 언급한 게 ‘사랑’이 아니었나 그렇게 여겨집니다. 아마 문학의 소재로서도 동서고금을 통하여 빈도도 많게 널리 회자했을 어휘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이 그 본질을 향하여 탐구하고 새로운 형태로 나름대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아무리 위대한 문호라도 그 본질에 관하여 간단명료하게 정의하여 ‘이것이 곧 그것이오.’ 하고 분명하게 문자로 계량화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화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달무리 진 구름만을 거둬내는 일에 열중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책을 읽고 웬만큼 감을 잡아 바로 이것이다, 라고 실체를 형상화하러 들면 새로 출시되는 갤럭시 시리즈처럼 언제나 새로워 그래서 서툴러서 사용하기가 불편하기 짝없습니다. 진화 논리에서 따져보면 손에 서툴거나 습속에 불편한 것은 마땅히 버려야 하고 생리상에서 응당 퇴화 소멸해야 하는데도 그것을 발뒤꿈치에 박힌 티눈처럼 안고 살아가니 이 또한, 이율배반이라 상당히 골머리가 아픈 무형의 물질 임인 이것을 마음으로 ‘주고받는다.’는 게 때로는 번폐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매우 고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살아가는 사회에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을 보면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의구심이 들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사람들은 이것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가? 사용하기에 따라서 때로는 득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그것에 사용법조차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하, 물신주의(物神主義)에 치닫다 보니 그것은 이미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린 지도 한참이나 되었구나. 아,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도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고, 부모 형제를 만나도 피 속에 흐르는 혈연의 정보다 먼저 유산을 탐하면서 손은 주머니 안에서 칼끝부터 만지는구나, 사람과 사람의 맞닥뜨리고 부딪칠 때 마음을 주고받는 게 아니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있구나, 그렇게 막다른 곳으로 향하여 거침없이 굴러가는 세상입니다. 이쯤에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막말로 막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사회 구조적인 여러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아닌 지상 제일의 물신주의, 빈부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 ‘사다리’마저 걷어차인 채 상류의 진입이 ‘유리천장(琉璃天障 Glass Ceiling )’이라 여기는 ‘흙수저’인 다수 서민의 패배의식, 예,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70년대 농경시대에서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너도나도 중동에 나갔다면 너도 집 한 채 나도 집 한 채’ 그런 결과를 얻었습니다. 평수에서 조금 차하(差下)가 졌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어떠합니까? 너는 기득권을 이용하여 권력층과 짬짜미로 돈을 벌어 빌딩을 두세 채씩 올리는데, 철야까지 마다치 않고 일한 나는 딸랑 하나만 낳은 아이를 데리고 서울 전셋집에서 쫓겨나 수도권 변두리 지역 사글셋방으로 가야 하는 게 민생 국가인 대한민국의 민낯입니다.
문제는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급격하게 팽창된 국력을 감당해낼 국가운용 능력의 미숙에 있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눈앞에 갑자기 짜 갈라진 ‘흥부네 박’입니다. 공리보다 사리를 더 밝히는 국가지도층의 모럴해저드(moral hazard) 만에서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역량이 학습도 안 된 채 국력 신장으로 졸지에 쌓인 부를 감당하려다 보니 낡고 작은 부댓자루처럼 여기저기서 인간 능력이 왜소하게 느껴질 만큼 툭툭 넘쳐 터지는 것입니다. 사전에 능력배양이 되지 않은 우듬지들이 국가경영에 나서다 보니 닳아빠진 멜빵으로 짐을 지는 결과를 낳은 거지요. 먼 날을 위하여 국가를 경영하는 게 아니라 가득 쌓인 곳간의 것을 당장 쓰고 보자면서 겨울 벌통 속의 벌 떼처럼 좁은 안목에서 쌓인 꿀맛에 빠져 벌통 밖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작금에서 ‘5개년 계획’이니 ‘백년대계’란 말을 들어본 지도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꿈에 대한 비전마저 없는 현실입니다.
또한, 어떻습니까? 우리만큼 민주주의가 좋다고 말끝마다 끌어다 쓴 민족도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다른 개발 도상국보다 빠르게 민주화를 이뤄 근사한 완장은 일찍 찼지요. 그런데 그렇게 끌어다 쓴 그 민주주의는 어떻게 분화했습니까? 민주주의 이론에서 장점보다 단점 쪽으로 더 빠르게 분화한 국가권력의 분산화로 동력을 상실한 채 단기적인 인기에 편승하려는 지방권력 왜곡된 풍조는 본말이 전도되어 방종․ 방임에 흘러 사람을 게으르게 버릇 들이고 있는가 하며 민주주의를 진걸레 조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법도 골라가며 지키는 풍조에 익숙한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판단하고 집행하려니 낫을 벼리려다가 낫자루마저 태우는 격이어서 법질서란 말을 우리의 뇌리로 이제 생경하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또 거리를 걸어가는 지금 기분은 어떻습니까? ‘묻지 마 폭력, 묻지 마 살인’이란 표현을 누가 처음 언급했는지는 모르나, 참으로 모진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갑자기 나탄 샤란스키(Natan Sharansky)의 민주주의 이론인 ‘마을 광장(Town square)’보다 더 불안한 사회 네거리의 복판에 서 있는 듯한 두려움에 소름이 끼칩니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낯선 사람 손에서 칼이 날아들고 돌들이 날아들어 위해를 당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것들이 뒤섞여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원인이 되어 사회 전체가 마이클 레빈(Michael Levine)의 ‘깨진 유리창 법칙(Brake Window Theory)’처럼 일시에 무너질지도 모르는 공포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또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모든 불안 요소들을 눈여겨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면 보이지 않은 것이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바로 사랑이 소통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현상으로 인간들이 사랑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결론에 쉽게 이르게 됩니다. 이제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자면 그것의 성질부터 한 번쯤 파악해봄도 외곬으로 기우는 사랑을 보완하여 평형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물론 대답은 성숙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랑이란 어떤 것들로 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여러 형태의 사랑 간의 차이와 그에 따른 애정 관계를 밝히는 데 자주 언급하는 것이 예일대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가 1986년에 발표한 『사랑의 삼각 이론 Cupid’s Arrow : The Course of Lover through Time』인데,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위의 저서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여 사라지는가. (이상원과 류소 옮김. 사군자 간. 310쪽)』로 간행되어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스턴버그는 사랑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인 ‘친밀감 요인’, ‘열정 요인’ 그리고 ‘결심/헌신 요인’ 등으로 구성된다고 도형으로 나타내고자 했으며 정삼각형 꼭짓점에다 그것들을 배치하여 일곱 가지 사랑 형태를 조합해내고 있습니다. 상부 꼭짓점에다 친밀감(intimacy), 좌우 꼭짓점 대칭에다 결심/헌신(Commitment), 열정(Passion)을 배치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친밀감’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스턴버그와 그레젝(Grajek. 1984)은 사랑하는 사이의 경험하는 따뜻한 느낌을 친밀감이라 정의한 다음 그에 대한 증상을 아래와 같이 열 가지로 열거했습니다.
(1)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하는 욕망
(2)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일
(3)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갖는 일
(4) 어려울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
(5) 사랑하는 사람을 서로 이해하는 것
(6) 상대와 자신 및 자신의 소유물들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갖고 싶은 것
(7)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정서적 지원을 받는 것
(8)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서적 지원을 보내는 것
(9) 사랑하는 사람과 친밀한 의사소통을 하는 일
(10) 자신의 생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이 친밀감의 속성은 1978년 평등관계에 관한 이론을 조사한 미네소타대 심리학 교수 엘런 버샤이드(Ellen Bercheid)에 따르면 처음에는 꾸준히 증가하나 어느 수준에 이르면 속도가 줄어들면서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한 연구가 소와 쥐에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래전 쥐들의 성행동을 연구한 학자들은 적극적인 암컷 쥐가 들어있는 우리에 수컷을 집어넣었더니 졸려 쓰러질 때까지 즉,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교미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암컷을 집어넣자 이번에는 수컷이 다시 활기를 되찾아 더 열정적으로 나섰습니다. 또 다른 암컷을 집어넣었더니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 명명한답니다. 이 신조어는 1955년 생태학자인 프랭크 비치(Frank A. Beach)가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미국 제30대(1923∽1927)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의 우스갯소리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잠깐 소개하면 이런 우스갯소리입니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과 영부인이 정부가 새로 만든 농장을 따로 시찰했습니다. 영부인이 닭장에 가보았더니 수탉이 매우 자주 교미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그녀가 관리인에게 수탉이 얼마나 자주 하느냐고 묻자 그는 매일 수십 번은 합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관리인에게 ‘대통령이 들를 때 그걸 꼭 얘기해 주세요.’ 하고 부탁을 했지요. 그 말은 전해 들은 대통령이 물었습니다. ‘매번 같은 암탉하고 하나요?’ 관리인이 고갯짓을 흔들며 대답했지요. ‘아닙니다. 매번 다른 암탉과 한답니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걸 영부인에게 꼭 전해주세요.’
동물의 성행동연구 결과에서 보듯 친밀감은 새로운 호기심을 느끼는 처음에는 차차 상대방을 잘 알게 되어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점차 친밀감을 덜 느끼게 되고 그 표현도 줄어들게 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 때문에 어떤 연인이나 부부들은 헤어지거나 이혼을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서로가 얼마나 친밀했고 또 얼마나 서로 의지하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답니다. 이런 친밀감만 있는 것을 로버트 스턴버그는 ‘좋아하는 사랑’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삼각형 좌측 꼭짓점에 놓인 ‘열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정이란 로맨틱한 감정, 신체적 매력, 성적 결합 등 사랑하는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을 생기게 하는 욕망을 통괄합니다. 성적 욕구가 대부분의 열정에서 주된 역할을 하지만 다른 욕구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욕구들이 있습니다.
(1) 자기 존중 욕구,
(2) 다른 사람과의 친애 욕구,
(3)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 욕구,
(4) 다른 사람에의 복종 욕구,
(5) 자기실현 욕구 등입니다.
로버트 스턴버그는 열정 요소만이 있는 사랑을 ‘도취성의 사랑’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첫눈에 홀딱 반한 사랑’이 바로 이런 유형입니다. 이 열정적인 속성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상화시켜서 확대하여 보는 망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게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으로 도취에 빠진 사람이 또 다른 도취성 사랑에 중복하여 빠져들지는 않는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높은 수준의 정신적 육체적 흥분하는 특성이 있는 열정은 갑자기 일어나서 어떠한 환경에서는 갑자기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즉 친밀감과 달리 매우 빠른 속도로 생겨나 금방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얼마 못 가서 그 열기는 식어버리고 곧 그것에 익숙해지고 습관화되어 버리는 속성이 있습니다. 마치 풍선에 바람이 들어갔다가 빠져나간 형상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측의 꼭짓점에 놓인 ‘결심/헌신’입니다. 여기서 결심과 헌신을 왜 같이 묶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묶을 이유가 있습니다. 단기적 측면으로는 누구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결심이며, 장기적으로는 그 사랑을 계속 지키겠다는 것은 헌신이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순서가 그대로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무턱대고 맞선을 먼저 보고 결혼한 후에 하는 사랑은 결심은 없고 헌신만 있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결심/헌신을 로버트 스턴버그는 ‘공허한 사랑’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속성은 두 사람이 만나서 알게 되기 이전의 영(零)이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증가한다고 합니다. 장기적인 관계에서는 보통 결심/헌신의 수준은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 속도가 빠르게 증가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따라서 관계가 장기적으로 지속하면 헌신의 양은 대체로 감소하기 마련입니다. 관계가 김빠지기 시작하면 헌신의 수준은 급격하게 감소기에 접어듭니다. 관계가 실패하면 즉 종말을 향해 다가가면 헌신 수준은 본디대로 영점으로 회귀하게 마련인 게 결심/헌신입니다. 식당에서 함께 조용히 앉아 밥만 부지런히 먹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의무감에서 하는 수 없이 서로 사랑합니다.
그러면 이제 일곱 가지 ‘사랑의 방정식(love style) 대하여 간략히 다시 정리해 봅시다.
스턴버그는 친밀함, 열정, 헌신을 삼각점에 놓고 각각 ‘좋아하는 사랑’, ‘도취성 사랑’, ‘공허한 사랑’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유형을 조합하여 다른 세 가지 유형을 만듭니다. 즉 친밀감과 열정이 있는 것이 ‘낭만적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친밀감과 결심/헌신이 조합된 것을 ‘우애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더 스스럼없이 지내게 되고 성욕도 잦아들면서 유지되는 장기적 결혼생활의 전형적이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열정과 결심/헌신이 조합된 것을 ‘얼빠진 사랑’이란 것입니다. 처음에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불을 뿜지만, 짝 가운데 하나나 둘, 모두 자기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는 걸 슬프게 깨달으면서 흐지부지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인 ‘성숙한 사랑’입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이것은 친밀감, 열정, 결심/헌신이 같은 농도로 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대다수 관계는 친밀함과 열정과 헌신의 수위가 시간과 환경이라는 변수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기 마련입니다.
자, 여러분. 지금 국가와 나, 사회와 나, 이웃과 나, 부모와 나, 자식과 나, 부부인 우리 사이에는 어떤 사랑이 진행되고 있습니까? 분명 일곱 가지 유형 어디에 처해 있을 겁니다. 아마 하나거나 둘이 조합된 것, 그도 아니면 세 가지가 조합되어 있을 겁니다. 혹 기울어져 있다면 부족분을 채우면 ‘성숙한 사랑’으로 복원될 것입니다. 결코, 늦지 않은 지금이라 여기면서 노력해 봅시다.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사랑(情恨)
이제 머리 아픈 이야기를 접고 문학으로 담아낸 사랑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도 여러 유형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시작(詩作) 생활을 하시는 시인이므로 시선을 좁혀 우리나라 옛 시가에 나타나는 사랑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케케묵은, 호랑이가 담배 피웠던 시절의 시가들입니다. 옛 시가에 나타나는 사랑은 대개 열정과 헌신만 있는 ‘넋 빠진 사랑’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 정서에서는 곧 이것을 정한(情恨)이라 명명합니다. 물론 그 히로인은 당연히 정에 한이 서린 여인들입니다. 고려 시대를 지나 성리학이 그 시대의 사상으로 모든 것을 지배했던 조선 시대에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음사(淫辭)로 취급하기도 했던, 당시 ‘16금(禁)’ 작품들입니다.
여기서 우선 고조선 시대의 고대가요 1편, 고려가요 1편, 조선 시대 가사 2편을 두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기어이 건너시다가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죽으니
當奈公何(당내공하) 님을 장차 어이할거나
잘 아시듯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인데, 바로 가요에 담긴 공후(箜篌)를 타는 여심(女心)입니다. 백수 광부(白首狂夫)가 험한 강물을 건너다가 익사하자, 그를 만류하지 못한 그의 아내가 공후(箜篌)를 타면서 이 노래를 지어 슬픔을 나타낸 뒤에, 남편을 뒤좇아 강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곽리자고(藿里子高)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목격담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여옥이 하도 사연이 애절하여 공후를 타면서 노래로 옮겨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입니다. 원래의 가사 모습은 전하지 않으며, 한역(漢譯)된 가사가 중국의 진(晉) 나라 최표(崔豹)가 엮은 『고금주(古今注)』에 관련 설화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후를 타는 여인은 가슴을 치며 울부짖습니다. 서사로 옮겨보면 이런 것일 테지요.
“이 머저리 같은 양반아. 아, 글쎄 그 물을 건너지 말라고, 그만큼 말렸건만 맹꽁이같이 내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니 이 일을 장차 홀몸인 내가 어이할 것인가? 아이코 내가 못 살아.”
다음은 일명 돌아오라고 소리친다 해서 ‘귀호곡(歸乎曲)’이라고도 부르는 ‘가시리(嘉時理)’를 부르는 여심입니다. 미상으로 알려진 고려 가요인데, 원문을 번안으로 적어봅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大平盛代 (대평성대)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大平盛代 (대평성대)
잡사와 두어리마나는
선하면 아니 올셰라
위 증즐가 大平盛代 (대평성대)
셜온 님 보내옵노니 나는
가시는 듯 도셔 오쇼서 나는
위 증즐가 大平盛代 (대평성대)
아시다시피 『악장가사(樂章歌詞)』에 가사 전문이,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1장에 대한 가사와 악보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또한 이형상(李衡祥)의 『악학편고(樂學便考)』에 ‘嘉時理(가시리)’라는 제목으로 가사가 실려 있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부른 노래로 애절한 심정을 가시리의 여인은 숨이 막히도록 매우 곡진하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내용을 곱씹어보면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버림받을 경우 외롭고 쓸쓸한 삶을 두려워하는 심정을 1, 2연에서 노래한 뒤, 이어서 임의 마음이 상하여 다시 오지 않을까 두려워 떠나는 임을 잡지 못하는 여심(女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다음, 홀연히 떠난 임이 곧 돌아오시기만을 애처롭게 호소하는 것으로 시상(詩想)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별리(別離)를 가슴에 담아 풀어내는 여심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가시렵니까, 그리 가시렵니까
나를 버리고 꼭 가시렵니까
혼자인 나는 어찌 살라고
이리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으나
귀찮을 정도로 잡아두면 간 뒤 아니 올까 두려워
나도 서럽고 님도 서럽지만 보내 드리오니
가시자마자 냉큼 돌아오십시오
다음은 『이상곡(履霜曲)』에서 서리처럼 밟히는 여심입니다.
비가 오다가 개고 눈이 펄펄 휘날리는 날에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고불고불 돌아나가는 좁다란 길에
잠을 앗아간 내 님을 생각할 사이거늘
그처럼 무시무시한 길에 자려고 오시겠습니까.
때때로 천벌을 받아 영락없이 지옥에 떨어져
그곳에서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이내 몸이
내 님 두고서 다른 산에 올라가겠느냐
이 모두가 하늘이 낳은 연분의 기약인데
님이시여, 함께 지내고자 하는 기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소 님이시여
함께 지내자고 했던 기약이 있을 뿐이외다.
이 노래의 가사는 1연은 여자가 묻고 2연에서 남자가 답하고, 다시 3연 마지막으로 여자가 다짐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어, 여자와 남자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부르는 노래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곡(履霜曲)』의 ‘이상’은 밟는다는 의미의 ‘이(履)’와 서리 ‘상(霜)’ 자를 써서 서리를 밟는다는 뜻입니다. 곧 그것은 ‘서리를 밟게 되면 장차 단단한 얼음의 계절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경계의 교훈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람 사이의 정듦도 그러하겠지요.
이 말의 출처는 『주역』곤괘초육(坤卦初六)에서 따 왔습니다. 이 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땅의 바탕을 나타내는 것으로, 남자와 여자를 두고 말할 때 여자 쪽이 되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순하면서도 정조를 굳세게 지키는 것이 땅의 이치며 곧 여자가 걸어가는 길이라고 가르쳐준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려가요인데, 14세기 충숙왕 때 채홍철(蔡洪哲)이 지은 노래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음악은 조선조에 이르러 『자하동(紫霞洞)』·『동동(動動)』과 함께 향악을 연주할 악공취재(樂工取才)의 시험곡(試驗曲)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성종 때에 가사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음사(淫辭)로 취급되어, 1493년(성종 24) 8월까지는 곡조만 남았다가 그 시기에 완성된 ≪악학궤범≫에는 ‘이상(履霜)’이라는 노래의 이름마저 삭제하는 외설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서경별곡(西京別曲)에서 강둑에서 버들잎을 꺾어 들고 몌별(袂別)의 정한을 담아내는 여심입니다.
서경(평양)이 서울이지마는
중수한 곳인 소서경의 모습을 사랑합니다마는
임을 이별하느니보다 차라리 길쌈하던 베를 버리고서라도
사랑만 해 주신다면 울면서 따르겠습니다.
(끈에 꿴)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임과 헤어져) 천 년을 홀로 살아간들
(임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이야 변할 리가 있겠습니까?
대동강이 넓은 줄을 몰라서 배를 내어놓았느냐 사공아
네 아내가 음란한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떠나는 배에 (나의 임을) 실었느냐 사공아.
(나의 임은) 대동강 건너편 꽃을
배를 타면 꺾을 것입니다.
시경(詩經)에서도 그럴 듯 예로부터 강둑에서 부르는 노래가 많습니다. 지금 이별의 플랫폼은 KTX역이나 인천 국제공항이지만, 예전에는 배가 떠나는 강둑입니다. 그곳에서 버들을 꺾어 건네고 언약하며 손 흔들어 이별을 나누고 눈물을 가슴에 묻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기 무섭게 강둑에 나가 돋아나는 버들잎을 원망하며 정인(情人)을 기다립니다.
서경별곡도 대동강 강변을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이별을 노래한 것입니다. 『악장가사 』,『시용향악보』에 악보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성종실록 成宗實錄』권 215, 19년 4월 조에 "『서경별곡』과 같은 작품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종묘악(宗廟樂)으로 불가(不可)하다."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금지곡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노래에서는 사랑의 명세와 믿음을 나타내는 1.2연보다도 사공을 어르고 달래면서 떠나보내는 남자의 바람기를 걱정하는 3연이 해학적이어서 압권입니다. 도저히 임을 잡을 수 없자 사공을 원망하지요.
“이 어리석은 사공아, 그 넓은 강을 건너갔다 올 때면 네 아내가 음란한 짓을 충분히 할 짬인데 그것도 모르고 나의 정든 임을 배에다 실었느냐? 내 임 또한, 어떤 남자인지 너는 아느냐? 필시 배에서 내리면 건너편 꽃을 꺾을 사내다. 어이쿠, 이 어리석은 사공아!”
오늘, 제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같이 시간을 보내주신 데 대하여 감사함을 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