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선교”
(사도행전 17:22~31)
우리는 지금 부활주일 이후 성령강림주일까지 순례의 길에 서 있습니다. 순례의 길을 출발했던 곳은 주님이 부활하신 현장인 빈 무덤이고, 도착해야 할 곳은 사도행전 2장에서 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던 다락방입니다.
이 두 곳을 비교하여 보면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무덤은 온갖 부정과 거짓, 욕망으로 진리를 죽인 죄된 인간 승리의 표로서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덤은 하나님의 아들을 더 이상 가둘 수가 없어서 차라리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가려고 하는 그 다락방은 반대로 실의, 절망, 힘없이, 낙담하고 있던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을 나가는 사람들은 실의와 절망 모든 것을 다 극복하고 힘차게 세상을 향해 뛰쳐나갔던 방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서 믿음의 신비한 능력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감격하며 외치면서 뛰어나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역사 하여 그렇게 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도마를 향하여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 전 주에 명상했던 하늘을 바라보았던 스데반 등등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오늘의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렇게 예수의 부활은 낙심했던 제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하늘을 바라보며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음으로 순교를 신호로 전무후무하고 참혹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만큼 교회사에 커다란 획을 그어주는 사건은 없습니다. 그분의 직분은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인 집사라는데 의미가 있으며,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악의 세력과 교회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는 교회에 커다란 의미를 가진 중요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주후 30여 년부터 그리스도인을 향한 박해가 있었고, 주후 313년 로마 정부에 의하여 종교로 인정받고 자유가 허락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박해가 지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어떤 이들은 5대에 걸쳐서 무덤 속에서 살았다고도 합니다. 이런 박해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세계 도처로 흩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쫓겨 다녔던 그들은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목소리를 높여 복음이 전파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의 역사가로 알려진 유세비우스라고 하는 분이 당시 기독교의 확산에 대하여 ‘염병같이 퍼져갔다’ 표현하기도 한 ‘디아스포라’의 신비한 역사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선교, 전도를 외치기는 하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나무 가지마다 새로운 생명이 움터 오는데 ‘칼릴 지브란’이라는 분의 봄의 사랑이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봄이 오면 나는 초조해집니다.
무엇인가 미지의 것을 향한 굶주림이, 나를
온통 휩싸고 맙니다.
차라리 들판으로 나가 꽃들과
더불어 자라고 싶은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철학의 도시 아덴에 들렸을 때 크게 실망했습니다. 아름답다고 자랑하던 아덴의 문화는 완전히 우상의 문화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이름까지 지어서 제사를 드리며 의지하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발붙이고 살고 있는 주변의 상황과도 같은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각 종교와 민족을 곱해보면 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리라 봅니다. 이러한 아덴을 향해 설교했던 바울의 자세와 메시지는 많은 교훈을 줍니다.
1)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 깊이 담겨있는 종교성을 인정했습니다.
누구나 그 마음 한 구석에는 무엇인가 믿지 않을 수 없는 심성들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지혜인줄로 압니다. 요한계시록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꾸중을 들었던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이것은 서로를 인정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박해를 피하여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현지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습니다. 며칠전 어느 분과 차이나타운의 중국 식당에 들렸던 일이 있었는데 각 나라 민족들이 많이 와서 점심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극심한 불경기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 속에서 어느 나라를 가도 요식업에 성공을 이루는 중국인들의 요리 속에 담겨있는 지혜와도 같습니다.
요사이 우리 교회를 알고 있는 분들을 만나면, 저희 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표현합니다. 한인교회들이 몇 개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를 보면 자기네들이 잃었던 선교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민족이 민족을, 교파가 교파를 용납하고 수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우리 교회가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돕고 싶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파가 다른 두 교회가 합하여 가고 있는 우리 교회는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을 받을 일들도 있지만 한 가지 부족함으로 꾸중을 들은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을 기억해야 될 줄로 압니다.
2) 가정이 함께 하는 교회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는 모두가 집에 있는 교회(가정 교회)로 출발했습니다. 빌레몬서도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향하여 집을 열어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했던 집들을 사도행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부모님 주일로 가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를 향하여 아름다운 카네이션을 준비하고, 또 식사를 마친 후에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가정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줄로 압니다. 또 사랑하는 디모데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그의 거짓 없는 믿음에 대하여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로이게로부터 유산으로 이어져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실 때 아버지라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부모와 자녀와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때, 우리 믿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신비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하나님은 더듬어도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멀리 계신 것도 아니고, 숨어 계신 것도 아니고,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가까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깜깜한 방에서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더듬어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동안 군목으로 근무하면서 연대장과 가까이 지냈던 일이 있습니다. 한 번은 그분을 찾아갔었는데 마친 그분이 저녁 식사를 마친 후였습니다. 그 분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참으로 신기하지요, 저는 지금 밥을 먹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이 머리카락이 되기도 하고, 손톱이 되기도 하고, 뼈가 되기도 하는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러더니 누가 그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시지요. 저는 밥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와 절망, 무서워 피하여 방안에 있었던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확신을 주고, 담대하게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하여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라고 증거 할 수 있도록 힘주셨던 성령께서 또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믿음의 순례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시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