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주말이라 일찍 귀가했다. 선린이가 반기며 선생님 놀이를 하잖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손을 잡아끌고 작은 방에 있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더니 다짜고짜,
“김원중, 선생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세요. 첫 시간은 영어입니다.”
한다.
선린이가 선생님이고 내가 학생이다.
“오늘은 단어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겠습니다. 오늘 배울 단어는 수, 동물, 음식, 장소, 탈 것, 운동, 날씨입니다. 선생님이 쓰는 단어를 잘 보세요.”
하고는, 제가 학원에서 배우는 영어 교재를 들여다보면서 열심히 판서한다.
칠판에 쓴 단어는 다음과 같다. 주제별로 5개씩이다.
수: one, two, three, four, five
동물: cat, dog, tiger, dinosaur, monkey
음식: cheese, juice, chicken, pizza, milk
장소: house, school, park, bank, hospital
탈것: car, bus, taxi, bike, subway
운동: soccer, baseball, basketball, volleyball, table tennis
날씨: wind, snow, cloud, fog, rain
(와! 내가 아직까지 모든 단어를 다 기억하고 있네. 내 기억력도 아직 안 죽었구먼.)
판서를 다 하고나서 지시봉으로 하나씩 짚으며 나 보고 읽으란다.
나는 이렇게 항의했다.
“선생님, 저는 아직 배운 적이 없는데 선생님이 읽는 법과 뜻을 가르쳐주셔야 따라하지요”
선린이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하세요.”
하고 단어 하나씩 읽으며 뜻을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대로 복창했다.
한 번 읽자마자 선린이는 판서를 다 지우고 바로 시험을 보았다.
A4 용지를 주고,
“부르는 단어를 받아쓰고 그 뜻도 쓰세요.”
하면서 단어를 하나씩 불러나갔고 나는 받아썼다.
받아쓰기가 끝내자 선린이는 붉은 색 연필로 동그라미를 쳐가며 열심히 채점하기 시작했다. 받아쓰기 시간보다 채점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한참 후,
“김원중, 나와서 시험지 받고 점수 확인하세요.”
한다.
나는 두 손으로 시험지를 받고,
“와, 백점이다. 너무 기분 좋네요.”
하며 기뻐했더니, 선린이는
“네, 참 잘 했어요.”
하고 칭찬을 해 준다.
채점한 답안지를 되돌려 받고 보니 틀린 단어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dinosaur을 dinosour라고 잘못 썼다.
바로 자수했다.
“선생님, 지금 보니까 내가 단어 하나를 잘 못 썼습니다. 공룡을 틀렸어요.”
선린이는 당황하면서 제 교재의 단어와 내 시험지를 꼼꼼히 비교하더니,
“아, 그렇군요. 한 개 틀렸군요. 그럼 95점입니다. 그래도 참 잘 한 거예요. 우리 반에서 백점은 아무도 없고 한 개 틀린 사람이 일등이에요.”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것으로 공부를 마친 줄 알았다. 그런데 옆에 앉은 선린이는,
“아빠랑 선생님 놀이 하니까 참 재미있다. 같은 집에 사니까 계속 할 수도 있고. 친구들이랑 할 때는 친구들이 빨리 집에 가기 때문에 오래 못하거든.”
한다.
그 말을 듣자 속이 철렁했다.
‘아이고, 이제 무슨 소리야. 계속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선린이는 혼자 말로.
“이번에 무슨 공부를 할까?”
하고 종알거리더니 다시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가며 이렇게 선언하였다.
“네. 두 번째 시간은 수학입니다. 오늘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공부하겠습니다. 선생님 설명을 잘 들으세요.”
다시 꼼짝 없이 붙잡혀 김선린 선생님에게 가감승제 계산법을 배웠다.
그런데 수업 중에 약간 문제가 생겼다. 덧셈, 뺄셈, 곱셈까지는 잘 나갔는데, 나눗셈을 설명하는 중에 선생님이 착각을 했다.
두 자리 수 나누기 두자리 수의 계산 방법을 가르치다가 몫을 쓰는 자리가 잘못되어 답이 틀렸다. 선생님은 자신이 틀린 걸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선생님, 나눗셈 답이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나누는 수와 몫을 곱해서 검산을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당돌한 제안을 하였다.
김선린 선생님은 검산을 한 후 ‘어, 이상한데. 어디가 틀렸지?’ 하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곧,
“네, 여기가 잘 못 되었네요. 그래요. 나눗셈의 세로 풀기를 할 때는 몫의 자리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하고는 다시 올바른 계산법을 보여주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선생님 그럼 이 문제도 더 풀어주세요.”
하면서 두 자리 수 나누기 두 자리 수의 문제를 몇 개 더 칠판에 썼다.
이제 김선린 선생님은 아빠 학생의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자신도 조금 헷갈리는 나눗셈 문제를 계속 풀어야 했다. 얼마 후 다행스럽게 선생님도 나눗셈을 잘 하게 되었다.
그때 선빈이가 노크도 없이 교실에 쳐들어와,
“야, 김선린, 너 아빠랑 뭐하는 거야?”
하면서 방해하기 시작했다.
선린이가 선생님 놀이 중이니 빨리 나가달라고 하자,
“네가 선생님이면 나는 교장 선생님이다. 김선린 선생님이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내가 감독해야겠어.”
하고는 본격적으로 행패를 부렸다.
나도 이미 2 과목 수업을 연강으로 들어 지쳤을 뿐 아니라 수업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해,
“선생님, 저도 오늘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지쳤습니다. 쉬고 내일 다시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제안하였다.
그제야 김선린 선생님은,
“아빠, 내일도 선생님 놀이 꼭 해야 한다.”
고 다짐을 단단히 놓은 후,
“그럼, 오늘 공부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수업을 마쳐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