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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잘 생긴 마애물, 남원이도령 불상을 찾아서 남원땅을 밟으며 남원은 삼국시대 이래 남부 내륙지방의 정치, 교통, 군사상 중요 거점이며 영호남을 연결하는 도시로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인 지리산이 감싸고 있어 뛰어난 자연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자연을 닮아서일까 애틋한 사랑과 인간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남원사람들의 염원이 찬란한 고전문학을 꽃피우게 하였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사랑지침서인 ‘춘향전’, 박씨 물고 온 ‘흥부전’, 음양을 통해 하층민의 삶을 그린 ‘변강쇠 타령’, 김시습의 최초의 한문 소설인 ‘만포사저포기’의 무대이자 발상지다. 소리가 있으니 소리꾼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지리산의 맑은 기상을 온몸으로 받아 들여 힘차고 기상 높은 동편제 소리는 우리 판소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거문고의 명인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은거한 후 남원은 국학의 발상지가 되었고 동편제 판소리의 탯자리로써 송흥록, 김정문, 이화중선, 박초월, 안숙선등 위대한 소리꾼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원은 감상적이고 풍류의 땅만은 아니었다. 백제와 신라가 힘을 겨루던 시기에는 국경지대로 하루아침에 주인이 뒤바뀌는 전쟁터였고, 고려시대에는 극성스런 왜구들이 전라도 평야지대를 약탈하기 위해 이 곳을 교두보로 삼았으니 그 유명한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를 얻은 곳도 남원이다. 정유재란 때는 남원사람 모두가 하나되어 왜적과 맞서 싸웠지만 1만 명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으니 이때 순국한 사람들의 뼈를 한 곳에 모아 만든 것이 ‘만인의총’이다. 현존하는 30여 개의 산성 그리고 수 많은 효열비가 남원사람들의 국난극복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한말에는 민초들의 단내 나는 숨소리가 요동쳤던 동학혁명의 발굽이 지나갔고 해방 후에는 빨치산과 토벌대의 이념의 피가 계곡을 물들인 곳도 남원 지리산이었다. 사랑과 한숨이 비빔밥처럼 비벼지고 눈물과 한이 깍두기처럼 버무려진 곳이 바로 남원땅이다.
이도령부처, 신계리 마애불 콧날도 오똑, 입술도 도톰. 귀는 얼굴 전체에 흘러내려 민초들의 얘기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고 지긋이 감은 눈은 큼직하다. 피부도 고운 아이돌 불상이 남원에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고려시대 남원지방에서 가장 잘 생긴 청년을 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오늘날 춘향제처럼 이도령제가 있다면 분명 1등을 먹었을 것 보물 제 423호 신계리 마애불. 전국 곳곳에 수많은 곳을 답사다녔지만 이 명품을 이제야 만나다니~~ 아이돌 같은 미모에 탄성만 내쉰다.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중에 하나다. 군청에서 스토리가 있고 숨겨진 볼거리를 10개를 정했는데 하트문양. 사랑의 도시 남원답다.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입구에서도 땀을 흘려야 불상을 친견한다. 하늘 향해 뻗은 소나무가 향기를 품어낸다. 세파에 찌든 때가 훌훌~ 솔 숲에 사랑스런 보물이 숨어 있다. 후대에 단을 쌓았을텐데~~예전 모습이 궁금하다. 금강역사같은 소나무의 환대를 받으며 돌계단을 오른다. 바위를 깎아 만든 마애불이다. 두툼한 눈구덩. 유난히 육계를 강조했다. 남원에 인물이 많은 곳은 이 육계덕이 아닐까 싶다. 왼쪽 선정인의 수인은 넉넉하며 오른손은 검지손가락이 꿈틀거린다. 광배의 연꽃잎이 두툼하며 구슬모양의 머리광배는 그 예가 별로 없다. 불꽃 화염문양도 생동감이 넘친다. 두툼한 입술에서 나오는 온화함. 국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경주 보리사 불상을 많이 닮았다.. 오똑한 콧날~~이 불상의 키 포인트 무릎에는 누각 아니며 마루를 끼워 넣었던 흔적이 보인다. 부석..큰 바위에서 저 바위를 떼어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뒤쪽에 마애불을 새기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내 상상력은 통하지 않았다. 미스테리 불상~~~신비롭고 놀라워. 두 번째 하트..대곡리 암각화. 고령. 포항을 제외하면 호남지방에서는 유일한 문양이라는데 과연 고대인들은 무슨 의도로..이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겨넣었을까.
금오신화의 만복사지 고려 문종 때 융성했던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각각 법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식 배치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1597)때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화난 듯한 표정의 석두. 늘씬한 기둥과 고개를 돌린 모습이 그리 어울리지 않지만 팔뚝만은 제 몸임을 말해준다. 숨은 보석 10선에 들어간다. 절 입구를 말해주는 당간지주(보물 32호) 투박함이 매력이다. 남원사람의 질박한 성격을 보는 듯 유난히 상승감이 돋보이는 오층석탑(보물 30호)이 절 가운데를 지키고 있었다.1층 몸돌이 유난히 길어서 돛대마냥 치솟아 보인다. 2층부터 받침돌을 끼어 넣은 것이 특이하다. 정림사지 5층석탑마냥 처마를 슬며시 반전시켰다. 백제인의 손재주가 시공을 초월하여 이어지고 있었다. 고려때 석불이지만 부드럽고 유려한 백제의 손맛을 느껴본다. 물이 흘러가듯 천의의 옷자락이 미끄러진다. 손은 떨어져 나갔어도 입가엔 만면의 미소를 보여준다. 특히 화려한 광배조각이 돗보인다. 뒷면에는 약사여래를 음각해 놓았다. (보물 제43호) 만복사지의 유물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전화가 휩쓸고 가면 늘 깊은 상처를 입는 곳이 남원이고 그 한복판에 만복사가 있었다. 좌대(보물31호 )도 마찬가지다. 불상은 온데 간데 없고 그 받침돌만 쓸쓸히 남아 있는 셈이다. 1.41미터의 이 거대한 좌대 위에 올라 지리산을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가슴이 두근. 팔각이 아닌 6각 좌대다보니 보물로 지정된 것 같다. 화첩기행의 작가 김병종선생의 갤러리가 남원에 생겼다. 특히 바보 예수는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생명의 노래등 유년의 시간과땅의 기억들을 작품에 반영했다. 조용히 앉아 작품을 음미하는 호사를 누려도 좋다. 특히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이채로운데 100만불짜리 작품이 창문밖으로 펼쳐진다. 화첩기행관 카페 겸 도서관도 볼 만하다. 자연을 건물에 끌어 들인 건축이 감동적이다. |
첫댓글 이런 석불들은 절에 모신 불상들과 다른 느낌을 받곤해요.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
해학도 있고 따스함도 있어요.
마애불의 오른손가락이 어색해서 한참 봤어요ㅎ
고개 홱 돌린 삐진듯 한석불
백제 석공들은 정말 실력 뛰어나네요.
그러니 일본으로 많이 잡혀갔나봐요 ㅠㅠ
전 석불들 보면 발가락부터 보는 버릇 .
발가락들이 길쭉 길쭉 ㅎ
불상이 대장님 닯지 않았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