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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 신고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마무리 투수였다. 그러나 그가 일본에서 가장 야구를 사랑했던 선수란 걸 아는 이는 드물다 |
다카쓰 신고. 별명은 ‘피니셔(finisher)’ 즉 마무리다. 대개 일본야구 역대 최고의 마무리하면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정작 일본프로야구 개인 통산 최다세이브 보유란에는 313세이브를 기록한 다카쓰의 이름이 올라 있다.
다카쓰는 마무리로는 모든 걸 이룬 투수다. 1993년 사이드암 투수로는 역대 3번째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붙박이 마무리가 된 뒤 "구속이 너무 느리다"는 모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994년 최우수구원투수상을 획득하며 강속구 투수 일색이었던 마무리 투수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1999, 2001, 2003년에도 각각 최우수구원투수상을 차지한 다카쓰는 특히나 2001년 일본시리즈에서 2세이브를 거두며 야쿠르트의 우승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2004년 35살의 나이로 FA(자유계약선수)자격을 얻은 다카쓰는 연봉 2억 엔(20억 원)을 제시하는 야쿠르트의 유혹을 뒤로 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해 200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뛰며 24경기 연속 무실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 6월 29일 에는 목동 LG전에서 세이브를 기록하며 한·미·일 통산 700경기째 출전에 성공했다. 여기다 사상 처음으로 한·미·일에서 세이브를 성공한 일본인 투수가 되기도 했는데.
언뜻 화려한 듯 보이지만 다카쓰는 늘 2인자였고 화려한 조명 뒤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데 능한 사내였다. <스포츠 춘추>에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숨겨진 모습을 취재했다. 다카쓰가 그의 구종을 직접 그립을 잡으며 설명한 건 일본에서도 유례가 없던 일이다. 다카쓰의 싱커를 배우고자 하는 야구소년들에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요즘 무척 덥다. 일본과 비교해 한국 날씨는 어떤가.
이즘이 한국에선 장마기간이라고 들었다. 비가 많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리지 않고 있다(웃음). 전체적인 기후는 일본보다 선선하다는 느낌이다.
고향이 히로시마다. 고교 때까지 줄곧 히로시마에 살았는데. 당신이 나온 기다하라 중학교 선배 가운데 유명 야구선수들이 꽤 있다.
하리모토 이사오(한국명 장훈)씨와 일본 올스타전에 3번이나 출전했던 후쿠도매 구니오 씨가 대표적이다. 내 할머니가 후쿠도매 씨 집안을 잘 알아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있었다. 나중 프로에 입문했을 때 후쿠도메 씨가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감독을 맡고 있어 뜻 깊은 재회를 하기도 했다.
하리모토와 후쿠도메 씨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이젠 당신 차례인데.
음,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하리모토 씨는 한국인이 아닌가. 후쿠도메 씨도 1990년대 한국프로야구에 잠시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주:1996년 쌍방울 타격코치 역임)거기다 나까지 왔으니 우리 중학교 출신들은 정말 한국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웃음).
당신을 가리켜 일본야구전문가들이 ‘넘버 2의 남자’로 부르던데.
(고개를 끄덕이며)아마 그럴 것이다. 내 야구인생을 다룬 책 제목도 ‘넘버 2의 남자’였다(웃음).
‘넘버 2의 남자’란 무슨 뜻인가.
히로시마공업고 시절 고시엔 대회(전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2번이나 진출했지만 에이스 투수가 따로 있어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아세아대학에 입학해서는 ‘고이케 히데오’라는 투수 때문에 역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해서는 훌륭한 동기생들이 많아 초반까지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언뜻 보기에 내가 다른 투수들 때문에 항상 존재가 가려져 있어 넘버 2의 남자‘로 부른 게 아닐까.
고이케 히데오는 노모 히데오 이후 유일하게 1989년 일본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은 아마추어 최고의 투수였다. 이런 투수가 있다면 누구나 2인자가 되게 마련이다.
대학시절 내 성적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었다. 대학 통산 11승에 평균자책도 2점대(주:2.34)였고 대학리그에서 우승도 맛보았다. 하지만 당시 고이케는 정말 훌륭한 왼손 강속구 투수였다.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좋은 투수가 있었으니까 내 이름도 알려진 게 아니겠는가 싶다. 대학시절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괜찮은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래 프로에 간다면 히로시마 도요카프를 가겠다고 공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1990년 정작 입단한 팀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였다.
나도 히로시마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프로세계가 아니지 않는가. 아세아대학 입학 이후 줄곧 도쿄에 머문 까닭에 야쿠르트에 입단하게 됐을 때 그리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야쿠르트에 입단한 뒤 1992시즌까지는 무명의 중간계투요원이었다.
프로 데뷔 뒤 2년간은 그저 열심히 일하기만 했다. 당시 노무라 가쓰야(현 라쿠텐 이글스)감독이 그런 내게 기회를 줬다. 그 이후부터 조금씩 위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회라면 마무리 투수를 의미하는가.
그렇다. 노무라 감독이 내 적성을 파악해 마무리 투수로 뛸 것을 지시했다. 그게 아마도 1993년부터였을 거다. 그때 노무라 감독이 내 보직을 바꿔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다. 아마 이렇게까지 이름을 알리진 못했을 거다.
노무라 감독이 당신에게 싱커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과 싱커는 빼놓을 수 없는 관계인데.
직접 가르친 건 아니었다. 노무라 감독이 어떤 선수를 보다가 “다카쓰, 너도 저 선수처럼 싱커를 던져야한다”고 강조했을 뿐이다. 사실 그분(노무라)이 없었다면 싱커의 필요성을 누가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 역시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을 거다.
야쿠르트 스왈로즈 마무리 당시의 다카쓰 |
노무라 감독이 말한 ‘저 선수’가 혹시 전(前)세이부 라이온즈 투수 시오자키 데쓰야가 아닌가.
(고개를 끄덕이며)그렇다. 1992년 일본시리즈에서 야쿠르트와 세이부가 만났을 때 시오자키 투수 때문에 야쿠르트 타자들이 꽤 고생했다. 그때 인상이 강렬해서인지 노무라 감독이 내게 “시오자키처럼 싱커를 던지라”고 주문한 게 아닌가 싶다.
감독이야 그렇다손 쳐도 본인 생각은 어땠나. 새로운 구종을 익히려면 시간과 정성을 말도 못하게 쏟아 부어야 한다.
음(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난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그러니 다양한 공배합과 로케이션으로 타자를 제압할 수밖에. 어쩌면 그런 내 한계가 싱커에 주력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됐을 지 모른다.
싱커는 언더핸드나 사이드암 투수에게 제격이다. 당신은 처음부터 사이드암 투수였나.
아니다. 원래는 언더핸드 투수였다. 대학 2년 때 사이드암으로 변신했다.
싱커는 배우기가 힘든 구종이다. 그립도 다양하고. 직접적으로 가르쳐준 이는 누구인가.
내 경우는 텔레비전으로 시오자키 투수가 던지는 걸 보면서 스스로 익혔다. 그의 투구를 머릿속으로 이미지화해서 참고로 삼았을 뿐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우문(愚問)일 수 있지만 싱커를 잘 던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 싱커 그립 잡는 법이나 던지는 법 혹은 싱커 각도는 누가 가르쳐준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따라 해도 완성하기가 무척 힘들다. 평범한 대답 같지만 오직 연습만이 살 길이다. 나도 싱커를 익히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인터뷰 내내 다카쓰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국 야구소년들에게 당신의 싱커를 알려주고 싶다"고 했을 때는 그간 영업비밀이라며 숨기던 자신의 구종을 숨김없이 공개했다 |
엄청난 노력이라면 어느 정도인가. 감이 오지 않는다.
사실 싱커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조금씩 익혔다. 당시 하루 200~300개씩 공을 던지며 싱커를 익힌 것 같다. 그 정도 공 개수면 자칫 팔에 무리가 와 위험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도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게 싱커다.
당신의 싱커는 구속에 따라 100, 120, 130km 3가지로 나뉜다. 미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뛸 때 ESPN 해설가 조 모건은 당신의 싱커를 가리켜 “체인지업”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어떻게 하면 싱커의 구속을 달리할 수 있나.
‘공을 세게 던질 것인가, 느리게 던질 것인가’의 차이다. 어떻게 던지나 공의 회전수는 똑같다. 지금까지 그렇게 싱커를 많이 던졌지만 나도 회전이 덜 먹은 싱커를 던질 때가 있다. 내 싱커는 그런 점에서 아직 완성품이 아니다.
지나친 겸손이다. 혹시 한국 야구소년들을 위해 싱커 그립을 잡아줄 수 있는가.
(선뜻 고개를 끄덕인 뒤 공을 잡으며)싱커는 이렇게 잡아 던진다. 투수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투수들은 검지로 싱커 회전이나 강약을 조절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중지와 약지를 활용한다. 중지 혹은 중지와 약지 두 손가락을 이용해 공의 회전을 조절한다. 세게 회전을 줄 때는 물론 두 손가락을 다 쓴다.
다카쓰가 직접 그립을 잡으며 설명한 싱커. <사진 1>부터 <사진 3>까지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싱커이고 <사진 4>는 변형 싱커다. 다카쓰 싱커의 특징은 공의 회전과 구속 조절을 검지가 아닌 중지와 약지로 한다는 것이다 |
당신의 슬라이더와 커브도 인상적이다.
이렇게 잡고 던지면 슬라이더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잡으면 직구다.
<사진 1>은 다카쓰의 슬라이더. <사진 2>는 직구다. 그립만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실제로 다카쓰의 슬라이더는 컷패스트볼에 가깝다 |
그립으로는 직구와 슬라이더를 구분하기 힘든데.
혼동하는 분들이 많다. 이것 역시 투수마다 다르겠지만 난 슬라이더는 이렇게 잡아서 던지는 게 좋다.
공을 잡기야 좋겠지만 공이 휘는 각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좋은 지적이다. 난 슬라이더는 가능하면 직구 느낌이 나도록 던지려 한다. 그래서인가 내 슬라이더는 원반처럼 ‘획’하고 꺾이는 스타일이기보다는 공 한 개 차이로 타자 배트 끝에 살짝 맞는 식이다. 컷패스트볼처럼 타자 앞에서 휜다고나 할까. 음, 개인적으로 좋은 슬라이더는 타자가 느끼기에 ‘슬라이더가 와서 쳤다’가 아니라 치고 나서 ‘아, 그게 슬라이더였구나’하고 생각하는 공이라고 본다.
커브는 어떤가.
(그립까지 성실히 잡다가 활짝 웃으며)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오늘 영업 비밀을 너무 많이 털어놨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번복하고 싶다.
다카쓰의 명품 커브 |
다시 싱커로 돌아와 당신의 싱커를 닮고자 하는 젊은 선수들에게 마지막으로 노하우를 전수한다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싱커는 오직 연습만이 살길이다. 어차피 야구는 몸으로 익힐 수밖에 없는 스포츠가 아닌가. 반복훈련으로 손끝과 몸으로 싱커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습득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야쿠르트 시절 후루다 아쓰야라는 당대 최고의 포수가 있었다. 우리 히어로즈에는 베테랑 포수 김동수가 있는데.
(후루다가)1년 선배다. 그는 무척 머리가 비상하다. 나를 잘 리드해줬고 나중에는 서로 사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됐다. 하지만 아직 한국 포수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일본프로야구시절 별명이 ‘퍼니셔’와 ‘다카쓰 극장’이었다. 전자보다는 후자로 유명했는데.
(깜짝 놀라며)오, 어떻게 알았나. 아, 이거 한국에서까지 알려지면 되는데…(웃음). 7월 8일 경기(주:목동 롯데전)에서처럼 9회 등판해 주자를 루상에 내보내는 일이 일본에 있을 때도 가끔 있었다. 그럴 때면 일본 스포츠신문에서 ‘다카쓰 극장’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혹시 ‘다카쓰 극장’을 연출한 건 아닌가.
(기분좋게 손을 흔들며)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도 늘 3타자만 상대하고 경기를 끝내고 싶다(웃음).
6월 29일 목동 LG전에 출전하며 한·미·일 통산 700경기째 출전에 성공했다. 여기다 사상 처음으로 한·미·일에서 세이브를 성공한 일본인 투수가 됐다. 당신의 1호 세이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3년(주:5월 3일)이었을 거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경기를 벌였는데 내가 운 좋게 데뷔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다른 선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게 누구였나.
요미우리 타자 마쓰이 히데키(현 뉴욕 양키스)였다. 그날 내가 마쓰이한테 홈런을 맞았는데 그게 알고 보니 마쓰이의 프로 데뷔 1호 홈런이었다. 세이브를 기록한 나는 뒷전이고 카메라가 온통 마쓰이한테만 향했다(웃음). 당시는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는데 지금은 좋은 추억이다.
그때 홈런이 노무라 감독의 지시에 의해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홈런이야 아픈 기억이지만 되레 이 홈런으로 당신의 제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준 계기도 됐다.
음, 당시 노무라 감독은 마쓰이가 홈런을 잘 친다고 알려진 배팅존이 과연 사실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내게 그쪽으로 공을 던질 것을 지시했다. 난 정확히 그쪽으로 투구했고 마쓰이는 보란 듯이 홈런을 쳤다.
다카쓰는 야구를 계속 하고 싶어 한국에 왔다. 그리고 뜻을 이뤘다. |
2006, 2007시즌 때 이승엽(요미우리)과도 대결을 벌인 것으로 아는데.
이승엽은 매우 훌륭한 타자다. 그래서 그와 승부한 걸 잘 기억하고 있다. 아마 4, 5번 만난 것 같다. 삼진도 잡고 1루 땅볼 아웃으로 처리한 적도 있다. 안타를 맞았었던 것 같기도 하고. (주: 이승엽 상대 5타수 1피안타, 1탈삼진 기록)
당신의 몸을 보고 우리 히어로즈 선수들이 깜짝 놀랐단다. 생각보다 근육이 없고 말랐다고 하던데.
나는 시즌 중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몸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웨이트트레이닝은 1~3월 비시즌 기간 동안 잠시 하는 게 전부다. 그래서 근육이 없다고 본 모양이다.
그럼 시즌 중엔 어떤 식으로 체력관리를 하는가.
시즌 중엔 주중 쉬는 날 위주로 딱 한 번 체력훈련을 한다. 아무래도 그런 날은 대개 월요일이다. 주로 월요일에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수준이고 화요일에는 러닝을 한다. 이 나이에 뛰려니 정말 힘들다(웃음).
웨이트트레이닝을 둘러싸고 효용에 대해 말이 많다. 한국은 적극 하자는 분위기고 일본은 반대인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웨이트트레이닝을 하지 않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고 본다. 나도 예전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해 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인터 캠프에 갔다 온 뒤 하게 됐다. (신중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어느 것이 좋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무리하지 않는 선이라면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근래 내 생각이다.
올시즌 전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에 참여하며 빅리그 진입을 재차 노렸으나 결국 무산됐다.
메이저리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리그다. 당연히 나도 그곳에 가고 싶었고 2004, 2005년 실제로 뛰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이번에는 내 실력이 부족해 떨어진 것이라 크게 아쉽지는 않다.
말이 나왔으니 200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에는 62이닝을 던지며 6승 4패 19세이브 평균자책 2.31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다.
그때는 한창 앞뒤 분간 못하고 던질 때다(웃음).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불펜포수로 이만수 SK 수석코치가 있었는데.
당시 이 코치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나 내 공을 많이 받아줬다.
2005년 뉴욕 메츠 시절의 다카쓰 |
혹시 한국에서 이 코치와 만난 적이 있나.
아직 없다. SK와 경기를 치르지 않아 볼 기회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빨리 만나고 싶다.
지난 2월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SK선수들을 직접 본 적이 있지 않나.
그렇다. 그때 몇몇 젊은 SK선수들에게 싱커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름(이한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 한국에 와서 SK 정대현 선수가 '싱커에 능하다'라고 해서 텔레비젼을 통해 몇 번 봤다. 무척 좋은 싱커를 던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시리즈 통산 11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 0.00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2004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미 언론에서 당신을 ‘미스터 제로(Mr.Zero)’로 불렀는데. 큰 경기에 강한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다 운이었다(웃음). 굳이 비결을 꼽자면 일본시리즈와 같은 큰 경기는 정규시즌 경기에 임할 때와는 마음가짐이 다르고 긴장도 무척 많이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난 그런 긴장감이 좋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한다면 긴장을 즐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한국에는 혼자 있는가.
그렇다. 구단에서 구한 숙소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우리 히어로즈 입단 전까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는 걸로 안다. 어떤 경로로 한국행을 선택하게 됐나.
3월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에서 빅리그 진입이 좌절된 뒤 개인 훈련을 하면서 때를 노렸다. 그 와중에 좋은 조건으로 나를 원하는 구단이 있단 걸 들었다. 그곳이 바로 한국의 우리 히어로즈였다.
6월 17일 우리 히어로즈에 입단한 다카쓰(사진 왼쪽)와 이광환 감독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우리 히어로즈는 일본으로 치면 퍼시픽리그 라쿠텐 이글스와 상당히 비슷하다. 유니폼이나 재정이나 역사가 그렇다.
돈이 많다고 매일 이기는 것도, 돈이 없다고 매일 지는 것도 아닌 게 야구다. 돈이 없어도 이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팀이다. 지금 우리 히어로즈가 어떤 팀이냐 보다는 내가 어떤 팀을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늦게 팀에 합류해 현재 5세이브 평균자책 0.84, WHIP(이닝당 출루허용수)0.94를 기록 중이다. 매우 좋은 성적인데 혹시 올시즌 호투하면 선수생활을 계속할 생각인가. 만약 그렇다면 한국에 남을 수도 있나.
야구선수로서 언제까지 야구만 계속 하고 싶다. 올시즌 성적만 좋으면 다음시즌 어디든 갈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다른 리그에 갈 때 가더라도 한국에서 뛸 때는 열심히 이곳 리그를 존중하며 뛰고 싶다.
당신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천천히 입을 열며)솔직히 야구는 그다지 즐거운 대상은 아니다. 내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대개 루상에 주자가 있는 등 불안한 상황들 아닌가. 당신이 생각해도 별로 재미없을 것 같지 않나? 하지만 야구는 내 몸의 일부분이다. 내 몸으로부터 자르래야 잘라낼 수가 없다.
경기가 곧 시작하는데 아직 유니폼을 입지 않고 있다.
대개 5회가 될 때까지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난 마무리 투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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