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학계의 통설은 모두루 묘지명의 완전치 않은 기록을 추론을 하자면 모두루의 선조인 대형 염모는 반역을 평정한 공이 있으며 모용선비의 북부여 침공을 격퇴한 공을 세웠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모용선비가 북부여지역을 침공한 기록은 진서와 자치통감에 나오는데, 그 시기는 각각 달리하여 전자는 서천왕 연간인 285년의 상황을 후자는 국강상태왕(고국원왕) 연간인 346년을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현 통설은 346년인 자치통감 기록에 의존하여 염모의 활약시기를 고국원왕 시기로 보고 있다. 즉 고국원왕 연간인 346년에 모용선비가 추모왕의 탄생지인 북부여를 침공하자, 고국원왕이 염모를 보내 이를 격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설인 346년 설을 따르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통설인 자치통감에 의하면 346년에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을 보내 부여를 공격하여 현왕과 5만 명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부여는 본래 녹산에 거주하다가 백제의 침공을 받고 서쪽으로 옮겨 전연과 가까워졌기 때문에 전연의 침공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통설에서는 전연에 앞서 부여를 침공한 백제를 고구려의 오기로 여긴다. 그리고 모두루 묘지명의 "
上聖太王之世"라는 기록과 "祖大兄
牟壽盡"라는 기록을 통해 염모는 모두루의 할아버지이며 그가 활약한 시기를 고국원왕 재위시기로 간주하는 근거로 들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 모두루 묘지명에는 결자가 매우 많기 때문에 통설에서처럼 "
上聖太王之世"라는 기록만으로 염모가 활약한 시기를 고국원왕 시기로 보는 것은 매우 근거가 빈약하다. "上聖太王之世" 라는 기록으로부터
牟라는 기록이 등장하기까지 무려 30개에 가까운 결자가 있기 때문에 이 결자들이 염모의 활동시기를 기록한 것인지 아님 모두루의 탄생시점을 기록한 것인지 아님 다른 어떤 것을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祖大兄
牟壽盡"라는 기록도 염모가 모두루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같은 이유로 "祖大兄
牟壽盡"라는 기록 앞에 7개의 결자가 있기 때문에 염모가 모두루의 할아버지인지 증조 할아버지인지 고조 할아버지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도 고구려는 342년에 전략실패로 전연에 대패하여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과 모후인 주씨태후와 왕후가 사로잡힌 이후 전연에 칭신하고 345년에는 전연이 고구려의 남소성을 빼앗았음에도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355년에도 조공을 대가로 주씨태후의 반환을 요청할 정도로 전연이 전진에게 패배할 때까지 전연에게 일체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못 했다. 346년에는 고구려가 전연에 대하여 염모가 큰 공을 세울 정도로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叛逆▨▨之▨▨▨▨▨
牟"라는 기록으로 볼 때 염모는 반역사건을 평정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데, 고국원왕 재위 기간에는 반역의 흔적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346년 설은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잠깐 삼천포로 새자면 모용선비가 부여를 공격하기에 앞서 백제가 부여를 공격했다는 기록도 고구려의 단순 오기로 치부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오기의 계기가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예맥계열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당시 중원 측이 고구려와 백제가 동류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백제와 중원 측의 정식 교류도 372년 근초고왕이 동진에 사신을 보낸 것이 시초이다. 물론 고이왕이 중원 측에 사신을 보냈었으나, 어디까지나 마한제국의 일원 중 하나로 보냈기 때문에 중원 측에서는 백제를 고구려와 동류인 예맥계열 보다는 한계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더 크므로 346년 당시 백제와 고구려를 같은 예맥계열이라는 이유로 헷갈려할 가능성은 적다. 중원 측 사료상 고구려와 백제를 동류로 인식한 것은 위서가 최초이다.
또한 진서 모용황 재기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우문과 단부를 병렬적으로 기록하였으므로 고구려와 백제를 헷갈려할 개연성은 더욱 떨어진다. 전연과 백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백제 요서진출설과 별도로 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해 학계에서 논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며 이도학 교수가 만주 백제설을 주장했지만, 아직은 좀 더 보완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346년 설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면 진서 부여전의 285년 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서에 의하면 285년에 모용외가 부여 도성을 함락시키자, 의려왕이 자살하고, 왕족들은 옥저 지역으로 피난하였는데, 부여는 이듬해인 286년에 서진 동이교위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나라를 수복하였다고 한다.
346년 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285년 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285년은 염모의 활동 시기와 멀리 떨어져 있고, 고구려가 개입한 흔적도 보이지 않다는 것을 들었지만, 전자는 앞서 살펴봤듯이 염모의 활동시기를 뚜렷한 근거없이 고국원왕 시기로 속단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반론의 근거가 약하며, 후자 역시 고구려가 개입한 흔적이 없다고 했지만, 왕족들이 고구려의 영토였던 옥저지역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 고구려가 깊숙히 개입한 흔적이기 때문에 부여 복국에 있어 고구려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부여를 복국하는 데 있어 진서에 나온 서진의 역할이 과장되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서진은 통일한 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으로 자국 추스리기도 바빴는데, 거리도 상당히 먼 부여를 복국시켜 줄만한 여유가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든다. 이제 막 통일을 이룬 서진이 대내외적으로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고구려의 역할을 축소하고 제후인 부여의 복국에 깊숙히 개입했다고 과장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염모가 서천왕 재위기간에 활동했다는 또 하나의 근거로는 모두루 묘지명의 "叛逆▨▨之▨▨▨▨▨
牟"라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기록으로 볼 때 염모는 반역사건을 평정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서천왕 17년인 286년 2월에 서천왕의 아우인 일우와 소발이 모반했다가 걸려서 죽임을 당한 기록이 있다. 이 때 염모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모두루 묘지명의 "叛逆▨▨之▨▨▨▨▨
牟"라는 기록이 남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두루 묘지명에서 반역이라는 기록 뒤에 모용선비 관련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고구려가 북부여 방면에 파병한 시기는 일우와 소발의 반역 사건을 처리한 후로 볼 수 있다.
사실 모두루 묘지명에는 결자가 많으므로 서천왕 연간으로도 단정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현존하는 글자와 여러 기록들을 교차검증하고 정황을 분석을 했을 때 염모가 활동한 시기는 고국원왕 연간 보다는 서천왕 연간일 가능성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