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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372년 고구려를 시작으로 뒤이어 백제와 신라로 전해진다.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찰이 세워지고 또 사라져 갔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전국의 폐사지는 총 5,400여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중 문화재로 지정된 폐사지는 103곳이다.
폐사의 원인은 화재와 전란 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적 요인들이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사찰 중에는 똑같은 혼란을 이겨내고 유지해 온 천년 넘는 고찰들도 많다.
이를 풍수인의 입장에서 보면 터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을 막아 화재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물길이 좋아 재정이 넉넉한 곳은 오랜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반면에 장풍득수를 이루지 못한 사찰은 많은 풍파와 함께 기운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요즈음 들어 전원주택 붐과 함께 귀농귀촌이 증가하면서 복잡한 도심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이전하는 사례가 급속히 늘고 있다. 그러나 처음의 부푼 꿈과는 달리 그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3년 내에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비율이 40%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이 온전히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득을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통·교육·문화·의료 등의 서비스가 미흡하기 때문에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풍수인의 입장에서 보면 무분별한 입지 선택도 큰 원인이 된다.
주요 폐사지의 입지를 살펴보면서 주거지로 불리한 지형은 어떠한 곳인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익산 미륵사지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혼인을 한 후 용화산에 있는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솟아오른다. 이에 연못을 메우고 그 터에 절을 지은 것으로 미륵사는 당시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내 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의하면 무왕 40년 사찰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건립 시기는 639년이 된다.
미륵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1600년 대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뒤편의 미륵산(용화산)을 주산으로 삼아 남향으로 자리했다. 그러나 미륵사 좌우에 있는 청룡백호가 앞으로 나란히 하듯 벌어진 상태다. 그 가운데로 미륵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절 앞으로 4km 직수로 빠져나간다. 이러한 경우 물길은 곧 바람길이 되므로 장풍득수의 반대인 입풍파수(入風破水)가 되어 크게 불리하다.
인근에 있는 학교와 공공건물도 모든 산줄기가 물을 따라 도망가는 모습이므로 불리하긴 마찬가지다.
2. 덕산 가야사지
가야사는 고려 중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골짜기 전체를 가야사가 차지하면서 암자가 99개에 달했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흥선군 이하응이 1846년 자신의 부친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우면서 폐사되었다.
남연군 묘가 있던 지점은 대웅전 앞 석탑이 있던 곳이었다. 매천야록 기록에 의하면 흥선군 이하응이 묘를 쓰기 전날 밤 탑신이 그의 형제들 꿈에 나타나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흥선군은 그의 재산을 모두 팔아 현금 2만냥을 마련 한 후, 그 절반을 가야사 주지에게 주고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절이 모두 타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모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그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다.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塔神인데 너희들이 어찌 내가 사는 곳을 빼앗느냐?
만일 이곳에 葬事를 지내면 제사가 끝나기 전에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돌아가거라.“하고 말했다고 한다.
가야사지 앞으로는 덕산천이 2.5km 직수로 빠져나간다. 물이 터 앞으로 길게 빠지면 천만금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흩어진다고 하였다. 또 가장 꺼리는 것이 물 나가는 땅이니 즉시 집안이 쇠퇴한다고 했다.
3. 보령 성주사지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 때 지어진 것으로 연도는 850년 무렵이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 때 불타면서 그 후 폐사되었다.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는 국보 제8호이고 석탑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터 앞에서는 3개의 물길이 합수된 후 600m 직수로 빠져나간다. 물이 모이는 곳은 일시적으로 유리했지만 합수된 물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하게 된다.
물길은 가기 싫은 듯 크게 꿈틀거리며 나가야 좋은 물길이 된다.
4. 경주 감은사지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 금당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언제 절이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금당 앞의 3층 석탑 2기는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유흥준은 그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3층석탑의 규모와 웅장함에 극찬을 하기도 했다.
감은사지 앞에는 대종천이 흐르는데, 당시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의 물길을 보면 물 빠지는 수구가 V자로 벌어진 상태다. 수구는 좌우의 산이 막아주어 물 빠짐을 단속해야 하는데, 이곳은 수구가 열려 설사하듯 기운이 속수무책 빠지는 곳이다.
수구는 배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아야 한다고 했다.
5. 경주 황룡사지
신라 진흥왕 14년(553) 경주 반월성 동쪽에 늪지를 메워 왕궁을 지으려했는데, 홀연히 늪에 깃들어 있던 황룡이 승천하는 것이다. 이에 그곳에 궁궐이 아닌 사찰을 짓기 시작해 17년 만에 황룡사가 건립되었다.
선덕여왕 때는 외적을 막기 위해 자장율사의 권유로 9층 목탑을 세우는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 완성되었다. 이처럼 황룡사는 93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조성된 초대형 국가사찰이었다.
그 후 황룡사는 685년 동안 사세를 유지하다가 고려 때(1238)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았다.
황룡사는 북천을 등지고 남향으로 자리했는데, 들어오고 나가는 물길이 모두 직수가 되어 불리하다. 그 뿐 아니라 주변에는 바람을 막아줄 산이 전혀 없어 공허한 곳이다. 결국 황룡사지는 배산임수와 장풍·득수 그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은 애초에 늪지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데, 좁은 면적에 많은 건물로 지나친 하중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85년간 유지된 것은 불교를 숭상한 신라와 고려가 호국사찰로 철저히 관리했기 때문이다.
6. 부여 능산리사지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조성한 왕실사찰이다. 이곳 목탑터에서 발견된 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에 적힌 명문에 의하면 백제 창왕 13년(567)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옆에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리는 백제 왕들의 능이 있는데, 창왕의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왕실사찰이었다. 그 후 660년 백제 멸망과 함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발견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연꽃 모양의 향로에는 용과 봉황 등 25마리의 동물이 표현되어 있는데, 신라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을 금관이라고 한다면 백제는 금동대향로라고 할 정도로 빼어난 걸작품이다.
금동대향로는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다. 1993년 12월 능산리 고분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공사를 하기 위해 본래 있던 논에서 터를 파던 중 물이 고인 진흙 웅덩이 속에서 금동으로 된 향로가 발견되었다. 무려 천 년을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덕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였다.
능산리사지는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뜸뱅이고개로 불리는 정면의 산이 고갯마루 지형이다. 뜸뱅이고개는 전면에 있는 안산 역할이지만 바람을 막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바람을 안내하는 바람길이 되고 말았다. 풍수에서 바람은 만병의 근원이라 하였고 특히 지속적인 바람길은 풍파가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100년에 불과한 사찰의 역사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7. 경주 사천왕사지
사천왕사는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되었다. 사천왕사는 낭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했는데, 낭산의 정상에는 선덕여왕릉이 자리하고 있어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로 추정할 뿐이다.
사천왕사지 앞을 흐르는 남천은 멀리서부터 구불구불 들어오는 조수(朝水)의 형태지만 터를 감싸며 흐르지 못하고 무정하게 빗겨가므로 오히려 불리한 물길이 되었다. 마치 줄 듯 줄 듯 하다가 약만 올리고 가는 물길이다. 이러한 지형은 안산이 없는 관계로 물길을 따라 바람이 치게 된다.
결국 사천왕사지는 장풍과 득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입지가 되었다.
한편 일제는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사이를 가로지르는 철로를 만들어 양분시켰는데, 이는 경주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선덕여왕릉을 훼손하여 패배감을 주려는 술책이었다.
8. 경주 원원사지(遠願寺址)
경주시 외동읍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신라의 영웅 김유신이 사찰을 세우는데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원원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고 조선 후기까지 명맥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밀교란 자신을 중생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곧 부처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사적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절터에는 2기의 3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 있다. 석탑에는 12지신상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는데, 그 수준이 매우 높아 보물(제132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봉서산(350m)의 깊은 계곡에 자리하였는데, 사찰 좌우에서 합류한 모화천은 3.5km를 길게 빠져나간다. 특히 좌측계곡이 깊고 험해 터에서 물소리가 심하게 들린다. 풍수에서 물소리는 곡소리라 하였는데, 물이 빠르게 빠져나가기 때문에 극히 흉하게 여긴다.
물소리가 심하다는 것은 계곡 지형의 경사가 심하다는 의미로 만약 이곳이 사찰 터가 아니었다면 하루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물소리가 요란한 곳이다.
9. 경주 장항리사지
토함산 계곡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추정되지만 절을 지은 연대나 폐사된 시기는 알 수 없다.이곳 절터에는 근래에 쓰여 진 묘가 있다. 대체로 폐사지에는 묘소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좋은 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터 앞에는 좌우 계곡에서 두 줄기 물이 합수되어 빠져나간다.
이곳 또한 물소리가 심하게 들리는데, 이곳처럼 계곡이 깊은 곳은 골바람 또한 심한 곳이다.
宅邊常有水潺溪 喪禍日連綿(집 주변에서 여울물 소리가 들리면 흉한 일이 계속된다)
10. 양주 회암사지
인도에서 온 지공선사가 1326년 창건했고 그 후 지공의 제자인 나옹선사가 중창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런 관계로 조선전기까지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명종(1534-1567) 때 문정왕후가 죽고 난 뒤 유생들에 의해 불 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회암사지부도탑은 국보급일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웅장하지만 누구의 부도탑인지 알 수 없다. 인근에는 무학대사 부도탑도 있으니 답사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 주산은 천보산(423m)인데, 대웅전에서 보면 살짝 넘겨다보이는 규봉이 되었다. 규봉은 도적봉으로 불리면서 터에서 보이면 기운을 빼앗아 간다고 해서 크게 흉하게 여긴다.
규봉은 전후좌우 어디에 있어도 마찬가지인데, 회암사지에서는 하필 대웅전에서 천보산이 규봉이 되었다. 그러나 대웅전이 좀 더 뒤쪽으로 가던가 아니면 앞으로 나왔다면 규봉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터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건물은 규봉이 보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상을 정리하면 물길이 직수로 빠지는 곳, 수구가 벌어진 곳, 주변에 산이 없어 바람에 무방비 상태인 곳, 앞산이 허해 바람길에 자리한 곳,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곳, 깊은 골짜기 지형, 규봉이 보이는 곳이었다.
모두 풍수에서 흉하게 여기는 지형인데, 만약 사찰이 아니고 일반 주거지였다면 훨씬 빨리 폐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들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터를 정할 때 참고하면 훨씬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일었습니다. 지교수님의 풍수적 안목에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게 됩니다. 풍수를 공부하는 학인으로써 교소님의 좋은 의견에 동조하는 바가 크지만 그와 함께 의문점도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장을 명쾌하게 분석하신 글에서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도 드려 보고 제 의견도 개진해 볼까 합니다.
1. 익산 미륵사지
이 자리는 한남금북정맥의 지맥이 마이산 근처에서 나와 미륵산까지 이어지는데 절의 위치가 용맥에 제대로 기대지 못하고 골짜기에 들어 있지 않는지요? 어짜피 지맥의 끝에 달린 자리인지라 조안이 비산비야로 펼쳐지니 오히려 골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현 사찰지의 청룡맥에 기대어 가람을 조성했다면 어떨까요? 제 견해로는 물길이 문제가 아니라 골바람이 문제인 것으로 보이고 거기에 더해 사찰터 자채를 기운이 없는 곳에 정했다고 봅니다.
2. 가야사지에 대하여
최근에 가야사지를 발굴한다고 이 용맥을 파헤쳐 놓았습니다. 지금 가 보시면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웠다는 전설같은 말을 믿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남연군 묘소 자리가 탑의 위치로 추정은 되는데 그렇게 본다면 탑 뒤의 금당터는 어디일까요? 남연군묘소가 사랑방 야화 수준의 전설들이
난무하지만 묘 이장 당시에는 가야사는 아마도 폐사지나 다름이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자리에 대하여 말들이 많지만 적어도 사찰이나 양택지를 ㅂ조성할만한 자리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이 자리가 변화가 심한 용맥상이고 자리가 협소하기에 사찰터로는 쓸 수가 없다고 보는 거죠. 남연군묘에서 흘러나가는 물은 직거수가 아니라고 봅니다. 청룡방의 서원산과 백호방의 가야산군들이 거수로 빠지는 물을 계속적으로 휠터처럼 흐름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죠. 국을 크게 보면 남연군묘는 커다란 장풍국임에 틀림이 없다고봅니다.
3. 보령 성주사지에 대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사찰인 성주사는 사찰터의 물의 흐름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오히려 금당자리가 너무 물쪽으로 붙은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물가에 조성을 한 것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전체적으로 보면 성주산 만수산 옥미산 등으로 잘 둘러 싸여 있고 수구 또한 잘 막힌 곳인데 금당터에서 보면 만수산이 위압할 정도로 물쪽에 붙어 있더군요. 성주산의 주된 맥에 기댈 생각을 하지 못하고 평지에 대웅전을 지었는데 근나마 기운조차 없으니 그 넓은 들을 소유했어도 사세를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hyunjae 제가 답사를 다 하지 못한 부분은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황룡사 부분에 대하여는 의견을 내 보겠습니다. 건립 당시에 9층의 목탑을 세웠다 하는데 아마도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었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 그 엄청난 무게를 견딜 수 있는 터가 뒷받침 되었으니 탑이 수백년을 유지하다가 몽고침입으로 불탔다고 하죠. 만약에 사찰터가 좋지 않았다면 그 거대한 건축물이 수백년을 지탱할 수가 있었을까요? 사찰이 불탄 후 문제는 어청난 재원을 조달할 수가 없었던 거죠. 터의 문제가 아닌 자금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봅니다. 지금도 엄청난 자금과 기술력의 문제로 복원이 쉽지 않은 것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