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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1. 예수님의 이야기인 복음서는 하나님과 함께로 서사됩니다. 일반 사람들의 전기와 같이 서술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역사적 인물에 대해 세상 자취를 고증하듯이 읽으려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고증될 수 없는 탄생으로 시작해서 역사적으로 고증될 수 없는 부활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은 하나님의 함께로 서사하는 복음서의 시작과 마침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서의 예수님은 존재론적 대상이 아닌 언약의 하나님 아들로 읽어져야 합니다. 처음과 마침이 하나님과 함께로 서사되니 그 가운데 예수님의 생애도 하나님과 함께로 서사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2.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의 영에 의한 잉태,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사도행전 13:30)으로 서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서술될 수 없음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독자적으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같이 독자적으로 사신 예수님으로 읽으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나님과 함께로 전개된 것을 묵살하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산 내용으로 풀이해서 읽으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시각을 갖지 않은 채, 예수님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사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3. 하나님의 함께는 언약의 기본 설정입니다. 언약이, 하나님의 함께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로 전개되면, 더 이상 언약의 내용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세상에서 사는 일반 사람들이 질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의 함께를 무의미하게 혹은 상징적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함께로 서사되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구원을 보입니다. 세상에서 사실로만 사는 삶은 조건적인 향상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삶의 조건적 향상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개인의 실존적 관심이나 변증법적 정신의 고양을 보이더라도, 구원을 향하지 않습니다.
4. 예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구원이 선포되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함을 하나님 나라로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 나라로 사는 삶은 세상 나라로 사는 삶으로부터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뜻은 하나님 나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나라로 살면서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로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함께가 허구로 배제되면, 구원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구원 대신 세상에서 나아짐(betterment)만 말해집니다.
5. 지성, 도덕성, 종교성은 사람의 속성입니다. 사람이 지닌 속성을 신장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속성을 지니든 세상에 속한 삶을 살 뿐입니다. 즉 지성, 도덕성, 종교성으로 보이는 것은 세상의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구원을 보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지성, 도덕성, 종교성으로 복음을 읽으면, 복음을 지성, 도덕성, 종교성을 증진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성숙하게 되더라도 구원되지는 않습니다. 종교적인 해탈은 성숙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복음이 들려주는 구원은 일상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표현되는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후자는 개인성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전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내용입니다.
6. 헤겔은 변증법으로 정신세계를 고양하고, 하이데거는 실존으로 의식의 지평을 열어갑니다. 그들이 보이는 것은 성경을 통한 지성의 신장입니다. 칸트가 실천 이성으로 도덕성을 확립한 것은 성경을 통한 도덕성의 확립입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느낌으로 종교성을 주창한 것은 성경을 통한 종교성의 확장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개되는 철학적 탐구는, 인간의 속성을 계발할지 모르지만, 구원의 내용을 보이진 않습니다. 헤겔, 하이데거, 칸트, 그리고 슐라이어마허가 보인 철학적 상설은 어떻든 철학의 기본 설정, 곧 지혜의 사랑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은 복음이라는 구원의 내용을 세상 속성을 신장하는 지혜로 풀이합니다.
7. 과학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학적 설명 시각으로 복음을 접하려 합니다. 과학이론을 이해하듯 복음을 이해하려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불가능함으로 허구나 상상의 소산이라고 단정합니다. 과학이론은 사람들로 굳건하게 세상에 서게 하며 그들의 지경을 넓힘으로, 그들의 현실적인 삶의 추축이 됩니다. 그들은 과학이론에 근거해서 그들의 삶을 세상에 안착하려 합니다. 과학이론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그들의 활동을 열어줍니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만큼 그들의 정신세계도 확장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복음의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8. 그리스 철학이 의식을 지배하던 중세 시대 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으로 복음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으로 풀이된 복음이 교리로 정립되게 됩니다. 초대 사도들과는 달리 중세 신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를 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종교 기관인 교회를 근거로 복음을 교리로 정립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현실적인 삶의 지혜를 세우는 그리스 철학을 입어 복음을 풀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로 구원의 메시지는 중세 교회에서 보일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이라는 세상 나라로 사는 삶의 내용으로 복음은 풀이되어야 했습니다.
9. 로마 제국이라는 세상 나라로 사는 삶엔, 그리스 철학으로 풀이된 복음이 더 적합했습니다. 로마 제국으로 사는 세상 나라의 삶엔, 현실적인 지혜를 들려주는 내용이 적절하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내용은 수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로 구원은 현실적인 내용이 아닌 사후의 내용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 나라로 구원은 죽은 후에 갈 곳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현실적인 삶에 충실해야 사후에 하나님 나라로 살게 된다는 조건적인 부착으로 전락됩니다. 이렇게 지금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 생각하는 죽은 후의 천국이 구원이 되게 됩니다. 죽은 후의 구원은 현실적인 삶에 아무런 내용을 주지 않습니다.
10.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이 영성으로 전개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은 서사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보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는 영적임으로, 구원은 영성으로 서사되어야 합니다. 지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다루더라도 하나님의 함께를 다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성적인 추구는 개인의 정신적인 고양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지성에 의한 건전한 개인적인 삶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이 말해지지 않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함께를 율법으로 말하려 했지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복음만이 하나님의 함께를 영성으로 온전히 들려줍니다.
11. 철학적 지성은 세상에 있는 속성임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다루더라도 하나님의 함께는 다루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하나님과 관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관계는 존재하는 개체 사이에서 말해집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의 관계로 말해집니다. 이 경우 하나님과 ‘나’는 각기 존재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분 백성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 택해진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택하신 백성에서 함께하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12.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름으로 쓰입니다. “신”이라는 개념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로 말해질 때, “하나님”은 “신”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와 같이 이름으로 쓰이면, “하나님의 존재”는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십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대상에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언약으로부터 제기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언약을 떠나 대상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다루는 것은 이미 언약을 떠난 것입니다.
13. 성경은 하나님의 함께로 하나님에 대해 말해집니다. 성경 첫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나라”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과 함께로 서사된 것입니다. 언약의 표현이지 신화적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이 함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함께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믿는 예수님은 창조 전에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이 성육신된 분이라고 합니다.
14.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하나님에 대해 말하게 된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약속을 하나님의 이름을 주어로 서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서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어로 사사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이야기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으로 서사됩니다. 예수님의 서사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으로 서사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된 이들만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으로 서사할 수 있습니다.
15. 하나님과 함께는 영성으로 서사됩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지성으로 하나님과 함께는 말해질 수 없습니다. 지성은 사람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는 지성에 담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영으로 인도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는 조건적으로 표명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의 속성으로 지켜짐으로, 사람의 속성은 하나님과 함께를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전제이지 조건적인 결과가 아닙니다. 전제된 하나님의 함께는 복음에 내포됩니다.
16. 사람은 세상에 존재함으로 존재를 기본으로 의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려 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하나님을 존재로 의식하려 합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사람의 지성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지성으로 하나님을 재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존재를 다루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존재로 다루면서, 하나님을 존재하는 ‘나’와 관계된 분으로 설정하려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지성적 재현입니다. 지성적인 재현은 하나님과 함께를 하나님과 관계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서사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며 ‘나’와 관계된 하나님으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17. 하나님과 함께를 하나님과 관계로 재현함으로 ‘나’의 지성은 신장됩니다. 그러면서 ‘나’를 구원으로부터 떠나게 합니다. ‘나’의 지성은 ‘나’의 독자성을 신장하더라도, ‘나’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존재는 존재로 머물지 구원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관계의 내용이 아닌 함께의 내용입니다. 관계에서 함께로 구원입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구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지성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지성적인 존재로 의식될 수 없습니다. ‘나’를 존재로 의식하고 나아가면 하나님도 존재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존재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게 됩니다.
18.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개시된 내용입니다. 창세기 시작이나 요한복음 첫 부분은 이 점을 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개시는 하나님의 함께로 전개됩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개시되는 언약입니다. ‘나’로부터 개시되면 존재론적으로 전개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개시되면 언약으로 전개됩니다. ‘나’를 실존으로 의식하면, 존재하는 하나님과 관계 설정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틸리히의 실존 신학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구원은 하나님과 관계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나’에게 부여될 구원의 내용은 없습니다. 혹은 ‘나’의 구원은 ‘나’의 의식에 담아질 수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실존적 의식일 수 없습니다.
19. ‘나’의 의식은 인간 의식의 근거이지만, ‘나’의 구원은 세상에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죽음에 속박되어 조건적으로 처해진 삶에서, ‘나’의 구원이 어떻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은 후에 천국으로 ‘나’의 구원이 말해지게 됩니다. ‘나’는 세상에서 의식되는 실존이니, ‘나’는 실존으로만 의식되지 구원으로 의식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의 의식으로 나아가면, 구원의 ‘나’는 죽음 후로 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후의 천국은 국가 종교의 체제에서, 그리스도교가 ‘나’의 의식에 반영되며 등장하게 됩니다. 국가 종교 체제에서 사는 ‘나’들의 구원은 세상에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하늘나라가 아닌 사후의 하늘나라로 구원이 말해집니다.
20. 구원은 언약으로 제기되지 존재로 제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말하는 것도 구약에서부터 언약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로 서사되는 흐름에서 예수님은 구원자로 말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가 온전히 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성으로 서사됨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이 영성으로 서사되기에 구원이라고 하게 됩니다. 즉 구원은 사람의 지성에 내포될 수 없고 사람이 지성으로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구원의 여정입니다. 즉 구원의 여정은 영적으로 인도되는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