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2.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28)
요한복음 6장 41~71절
영생난독현상(永生難讀現狀)
■ 신앙은 신비(神祕)입니다.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라, 영생(영원한 생명), 지옥, 영원한 형벌, 성육신, 부활 등과 같은 것들은 일반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현실과 물리를 넘어서는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늘 난독현상을 일으킵니다. 난독으로 인한 다양한 오해와 시비를 불러일으킵니다. 심지어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스토커들처럼 예수님을 집요하게 뒤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앙해서 온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진단에 의하면,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밥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더 이상 썩을 밥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한 밥을 위해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밥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신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자 이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우리의 신앙 안에서 이들의 수군거림을 보면 이들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이 정도 이해밖에 못하나 하고 말입니다. 겨우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덩어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고도 남을 만큼 역사를 일으킨 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은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이고, 이 기적을 생생하게 전해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의 눈에는 믿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몰이해(沒理解)의 현상은 ‘영생난독현상’으로 현실과 물리의 한계 안에 머무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상식이고 물리는 이성이기 때문입니다. 상식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만 이해하기로 하는 한, 영생은 난해(難解)의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생의 문제에는 늘 수군거림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저의 설명은 예수님의 43~44절 말씀에서 꺼내온 설명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상식과 이성으로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신앙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45~46절은 보충 설명입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 두 분과 관계된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47~48절은 결정적인 설명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밥)이니라.” 누가 영생을 가진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믿는 자”입니다. 신앙만이 영생과 영생에 관련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인류의 구속을 위해 보내신 분임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신앙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신앙은 매우 과격하셨습니다. 51절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밥)이니, 사람이 이 떡(밥)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밥)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신앙의 완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밥인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과격한 말씀입니까? 당연히 이 말씀을 들은 신앙 없는 유대인들 사이에 다툼이 날 수밖에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살을 먹으라는 것으로 이해한 이들 사이에 다툼이 난 것은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도대체 이 양반 뭐냐?’며 이들 안에 논쟁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 논쟁에 예수님은 기름을 부어 더 뜨겁게 만드셨습니다. 53~5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밥)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밥)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을 끝으로 스토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요한복음이 더 이상 그들을 설명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요? 그들이 더 이상 스토커, 광팬의 입장을 포기한 것일까요?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들이 더 이상 복음서에 거론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요한복음은 그들의 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들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런데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절)는 말씀을 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말씀이 걸림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제자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12제자만이 아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걸림이 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61~64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설명에 일종의 시험 든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나의 승천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이는 ‘너희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아직 나의 말에 의문을 갖느냐? 그러면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보아도 역시 의문을 갖겠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63절을 말씀하신 것인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내가 한 모든 말을 썩을 밥의 관점에서 읽었다면 잘못 읽은 것이다. 내가 한 모든 말은 성령의 말이고 생명을 만들어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모든 말은 영적으로 읽고, 신앙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생난독현상’을 보이는 모두를 향해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63절에서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신 후, 64절을 말씀하시자 65절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64절은 무엇입니까?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신앙이 없이는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 중에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 곁에 얼씬도 안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교회/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교회를 나왔지만 예수님을 신앙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말씀이 이해불가였고, 영생난독현상을 보였던 것입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여기 이 사람들처럼 교회/예수님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교회/예수님을 떠난 것이 교회의 비도덕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신앙 없이 지내다가 견디지 못하고 신앙 없는 자유의 땅으로 되돌아 간 것뿐입니다. 물론 이 현상으로 전적인 위로를 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현상은 단지 일부분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고민은 영생난독현상을 보이는 이들이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데 있어야 합니다.
■ 떠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요? 인간인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이시니 별 감정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67절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이 대목을 제자들에게도 떠나갈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읽자는 분이 계십니다. 충분히 그렇게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떠나감을 안타까워하시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으로 읽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다행스럽게도 베드로의 대답이 위로가 됩니다. 68~69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고백에 예수님은 위로를 받으시고 안심을 하신 듯 합니다. 7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떠나가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 끝까지 남겠다는 고백을 하는 제자들, 이 고백을 가슴에 담으시는 예수님, 그러나 자신을 팔 가룟 유다를 바라보셔야 하는 예수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영생난독현상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영생난독증이 없는가?’
■ 사랑하는 여러분, 영생에 관련된 것들이 영혼의 피부에 잘 닿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말씀들이 현실과 자꾸 다툼이 되고 있습니까? 혹시 간혹 가다 떠나가는 제자들 무리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나도 영생의 밥을 떠나고 싶다? 여러분의 영혼이 영의 말씀과 만나는 일을 멀리할수록 이런 현상, 영생난독현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 나라에 여러분의 두 발을 다 들여놓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영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