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라는 이름으로 오랜만에 글 써 본 김에 게시판 활성화를 위해 잡문 하나
SF나 미스테리는 절대 아님...
회색 – 온기를 찾음.
지하철을 타는 시간이 모호하면서도 희미한 중간 지대의 시간일 경우에는 나는 묘한 이질감에 휩싸이곤 했다. 빈 자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희미한 시간의 지하철 안. 너무나 바쁘고 세상에 맞는, 혹은 너무나 늘어져서 세상조차 거들떠 보지 않는 삶들 속에서 간신히 연명하는 희미한 회색빛의 사람들이 조금씩 기지개를 펴는, 그 시간이 떨리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를 길러낸 시간을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빈 자리를 찾아 앉는, 이 바쁘고 검은 빛으로 덮인 텁텁한 도시에서는 흔히 닿을 수 없는 경험을 할 때면 언제나 오르가즘 같은 가슴설렘을 느끼곤 하였다.
참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는 있었다. 책을 펼치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면서, 항상 마음은 밖을 향해 열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향한 동경이 나의 독서열이 되었던 것처럼, 무엇인가를 향한 열망은 가슴 속 깊이 내재한 마르지 않는 욕망의 샘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도 지하철의 그 희미한 시간이면 눈을 감는다. 모든 감각을 열어두고, 사소한 공기의 떨림, 예리한 후각의 느낌 등을 곤두세우며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이었다. 언제나 사람은 가장 필요한 것을 앞에 두고 그것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택하는 법은 없다. 어쩔 수 없는 기다림에 대한 기대와, 세상의 빛을 본 이후로 항상 가지고 있었던 알 수 없는 것에 관한 어리광이 그 모든 감각의 홍수 속에서,,, 가장 민감한 시각을 둔감하게 하는 것이다.
어깨를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 예전과 같지 않게 서투르게 느껴지는 현상이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었다면 이 도시가 주는 일상의 지루함은 분명 사기치기 좋아하는 이가 만든 허구다. 적어도 이 도시에서 십 여 년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껍질 하나쯤은 쓰고 있는 법이었고, 그것을 건드릴 경우 받는 가슴의 상처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그러듯이 가장 민감한 것은 닫아둔 채, 그 다음의 것부터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말투가 신경을 자극했다. 이 도시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를 이용해 자기의 것을 얻을 뿐, 줄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그 어리고 여린 말투 속에서 느낀 것은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피의 냄새였다.
오래 전, 군복을 입고 휴가를 나오면 항상 만나는 것이 헌혈을 하는 차였다. 지나쳐도 될 것을 제복이 주는 묘한 억압감과 의무감에 밀려 발길을 올려놓고 하는 그 차 속에서 느끼는 것은 피가 엉겨 붙어 숨을 가로막는, 질식할 것 같은 구토감이었다. 내 피를 나누어주면서 이상한 배설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히 영혼이 든 피를 나누어주는 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속의 영혼을 파는 이들에게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우연히 어깨를 치고, 사과의 말을 한 이의 말 속에서 맡은 피의 냄새는 생명이 든 피의 냄새였다. 직장과 가정을 오가는 이에게는 결코 맡을 수 없는, 생의 모든 것에서 우러나오는 긍정과 여유가 든 피의 냄새였다. 물론 자리에 끼어드는 것에 어깨를 받힌 두 사람-나와 또 다른 한 사람-은 말이 없었다. 도시 속에 관심을 주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뿌리는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람도,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서울 역 앞에서 보퉁이 짐을 들고 불안스레 주위를 둘러보는 여자들을 잡아다가 유곽에 팔아 넘기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요즈음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분명 이 도시의 악취가 수 십 년의 기간을 거쳐 성장하기는커녕 사라지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당하는 자와, 가하는 자 모두를 변화시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스럽게 어깨를 붙이지 못하고 등을 뗀 채 앉아 있는 사람에게서는 아주 오래된 시대에서 넘어온 모습이 들어있었다. 불안해하고, 가슴설레하고, 또 안도하는 모습이 있었다. 어깨를 조금 좁혀서 자리를 내어 주면서 얼핏 마주친 눈에서 작은 감사의 뜻을 읽었다.그리고 당황스럽지만 이상한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가슴 서늘한 불안을 느꼈다. 그 불안은 나뿐만 아니라 회색의 지하철 안에 탄 모든 이들에게 전염되어서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인생이 회색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도시 자체와 마주친 사람들은 그 단단한 외벽에 밀려 튕겨나가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그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도시와 마주치기 전에회색의 사람들과 먼저 만난 이들은 그 회색이 가지는 불명확성과 모호함 앞에 무엇을 주고, 무엇을 주지 말아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만다. 타의적으로 끌려간 도시에서도 밀려나고, 그렇다고 튕겨나와 예전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은 점차 도시의 걸쭉한 검은 피를 가진것도 아닌, 그렇다고 예전의 붉은 피를 가진 것도 아닌, 무채색의 서늘한 회색 피를 가진 존재로 변모해나가는 것이다.
도시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더욱 어렴풋한 시간에 지하철을 타는 것이다. 그 시간에는, 아니 시간이 공간과 합쳐져서 경계조차 모호해지는 장소 아니면 무엇인가의 시간에서는, 맑은 눈으로 말을 하는 불안한 앉음새의 사람들과, 그들이 풍기는 생명의 피 냄새가 난다.
그날, 그 회색빛 지하철 안에서 회색의 우리들은 소리없이 불타오르는 붉은 생명의 냄새를 맡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초리로 서로의 기색을 몰래 몰래 살피면서 저마다의 생각으로 빠져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그 따뜻한 온기와 생명으로 자신들의 서늘함을 가시게 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면서...
하지만 맹렬히 회전하는 머리의 한쪽 구석. 아직도 회색의 빛으로 물들기에는 온기가 다소 남아 있는 작은 부분은 희미하게 그 따뜻함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기와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것이 머릿속의 차가운 방정식 계산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을 때, 결국 그날 그 지하철 칸에 있던 우리들 모두는 정말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불안감을 느끼기 위해 그 어스름한 시간과 장소를 우리들이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절대로 가질 수 없었던 생각들. 행여 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욕망의 발견. 회색빛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약같은 온기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들은 그것을 찾아 헤며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찾던 그것-따뜻한 온기를 가득 품은 피를 만난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갈망의 욕구가 그날의 지하철 한칸 전체를 뒤덮고 마침내는 우리들 앞에서 뭉처져 하나의 거대한 괴물처럼 변모했다.
우리들은 모두 그 거대한 회색의 괴물 앞에서 무력하게 희생당한 존재들이었다. 이제는 붉은 피와 그 피가 가진 온기를 모두 뺏기고, 그렇지만 걸쭉하게 찐득거리는 검은 피를 갖기엔 부족한 존재로서 도시를 살아가고 있었다. 매번 새로운 존재들에게서 온기를 빼앗아오지만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식어버리고 마치 끝없는 '절망의 늪'에 빠진 것처럼 아무리 새로운 온기를 넣어도 다시는 따듯해 질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스스로들 생각했다.
어깨를 살짝 밀어보았다. 반대편 옆의 사람도 어깨를 밀었으니 자리가 좁아지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는 것을 싫어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는 것 보다는 단단하게 받아 치는 것 또한 배워왔다. 어깨가 닿은 곳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살을 맞대는 것이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었던가? 근육이 긴장하며 수축하는 떨림도, 육감적으로 느끼는 경계심도 없는, 조용히 자신을 내려놓은 부드러움. 더 이상 밀 수조차 없는 나른함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나른함이 마침내는 우리들의 욕구가 만들어 낸 회색의 괴물을 둘러싸버렸을 때, 머리 속 어딘가 잠자고 있던 한 부문이 조용히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자신들 속에 아직 온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아직은 회색이 아니라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 깨달음이 일시적이 것이 아니라 예전에도 경험한 것이었으며 일상의 가면을 쓰기 위해 애써 외면해 왔지만 바로 그것을 위해 붉은색 생명의 피가 도는 시각-장소를 유령처럼 찾아 헤메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자마자 모두들 자신들이 느낀 나른함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번득이는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도 사라져 버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의 작은 온기가 만들어내는 나른함 속에 심취해 있던 그곳에서는 붉은 빛은 띈 한 사람과, 마지막 붉은 희미함을 움켜잡은 채 조용히 자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열 두어명, 그리고 불안감만 남아 공간을 떠돌아다녔다.
우리들은 열차에서 내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우리들은 하나의 '인간'의 모습을 가진 채로 내릴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기억을 지우고 회색의 빛깔로 살고 있지만, 우리의 빛깔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른함을 만나는 그 순간 모든 욕망을 잃고 단지 그 온기가 만든 작은 지붕끝 아래에서 비맞은 고양이들처럼 웅크릴 수 밖에 없었다. 만일 우리가 그곳을 나서는 순간, 머릿속의 작은 부분은 기억에서조차 사라지고 오직 무의식이 만드는 알 수 없는 느낌에만 의존해 다시 온기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목적지도 모르고 내리지도 못한 채 단지 불안해 하면서 자신의 작은 온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내가 가는 목적지는 내가 가는 곳이 될 수 없다. 거기서 또 다른 곳으로 바뀌고, 다시 바뀌고, 회색의 시공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는 브라운 운동을 하는 입자처럼 튕겨다닌다. 에너지를 잃고 멈추기에는 아직은 가슴의 온기가 그립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온기를 뺏기만을 바라기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온기를 빼앗으려 하는 순간 그것이 결국은 온기와 색깔을 그리워 할 마지막 머리속 작은 부분까지 식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 어스름한 순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랜만의 마약같은 온기에 취해 단지 불안해하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목적지가 없는 희미한 안개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처럼 영원히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본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그곳이 그녀의 목적지였다.
선명한 눈동자와 선홍빛 피를 가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내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갈 곳을 잃기도 하고 잃지 않기도 하는 ‘찬 분자’의 하나인 내가 그녀가 내린 자리의 온기를 느꼈을 때, 나는 회색 빛이 내는 다채로움을 얼핏 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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