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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 스피노자 -
1.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내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치 무엇인가 급한 일이 있는 듯한 몸짓이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자 아내는 잠시 몸을 멈칫했다. 마치 의외의 반응을 마주한 듯 한 당황한 몸짓이었다.
“무슨 일이야?”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다소 지쳐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은 밤 늦게까지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터라 목구멍에서 약간 단 내가 올라오도록 피곤했다.
“훈이가 아파요”
아내의 얼굴은 방금 전의 당황함에서 벗어나 이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도 같이 아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태어난 지 채 돌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은 아픈 것도 말이 아닌 울음과 몸짓으로 표현해야 했다. 행여나 부모가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 듯 하면, 아이의 아픔은 배가 되었고, 거기에 맞추어 부모의 답답함과 아픔도 더해갔다.
나는 아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에 맞추어 산뜻한 조명과 환한 벽지를 바른 방은 들어서면서부터 새로운 생명이 가진 생동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 놓인 이부자리 위에 아들 훈이가 누워서 눈을 꼭 감은 채 상기된 볼을 밝히고 있었다.
“열이 나나?”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지만 열은 만져지지 않았다. 어느 새 뒤따라 들어온 아내가 말했다.
“열은 없는데 잘 놀지도, 먹지도 않아요. 좀 힘들어 하는 것 같은데……”
아내의 설명을 뒤로 하고 나는 물끄러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은 눈과 작은 코, 나와 아내를 닮은 작은 생명이 누워 있었다.
“병원에 가자. 오늘은 좀 기다려 보고……”
이 밤에 문을 여는 병원은 없었다.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응급실은 우리 아이가 아니더라도 밤낮 없이 돌아갈 것이 뻔했다. 아이가 아픈 것은 부모에게는 하늘이 노래지는 큰 일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그들의 사정이 더 급한 법이었다.
“훈이가 많이 아픈 것 같아요.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 지금 가요……여보”
아내는 내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엄마의 마음은 아빠보다도 더 간절한 듯 했다. 그런 아내와 나는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을 향해 출발했다.
응급실은 만원이었다. 근처 병원들이 모두 문을 닫은 터라 그나마 제대로 문을 연 병원이 드문 탓인지 사람들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교통 사고로 피를 흘리는 사람. 멀쩡하게 보이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픈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그 사이로 정신 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 오늘의 응급실은 어제까지 세상에서의 응급실과 별반 다른 없는 모습이었다.
“아이를 볼 만한 의사가 없어요”
접수대의 간호사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피곤한 얼굴을 서류에 박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득 나는 퇴근 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퇴근시간 즈음해서 걸려온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가입자의 전화를 받고 나도 같은 방식으로 대답했었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허탈한 감정의 피해자인 통시에 가해자인 셈이었다.
나는 걱정과 허탈이 겹친 혼란스런 마음이었지만 아내는 좀 다른 듯 했다. 아내는 응급실에서 아이를 볼 만한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고, 그러면서 그나마 조금 한가해 보이는 의사들을 찾아 다니며 아이를 봐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멍하게 서 있는 나에게도 화살이 돌아왔다.
“여보! 나만 훈이 부모에요? 당신은 왜 멍하게 있는데! 좀 의사들에게 사정 좀 해 봐요. 아이가 아프잖아!”
아내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공기를, 분위기를, 사람들의 얼굴을. 고통과 아픔 때로는 죽음이 있는 동시에 삶이 교차하는 응급실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일상적인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내게서는 먼 일인 양 지독히 객관적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자식의 아픔마저도 무엇인가 홀린 듯한 느낌으로 멀게 여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 이질감에 몸을 떨었다. 아내의 일갈이 어쩌면 몸에서 이탈된 듯한 내 정신을 몸 안으로 불러들였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큰 숨을 들이키며 나를 잠깐 동안 텅 빈 채로 있게 한 장면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옆 쪽 긴 의자에 한 사람이 멍하게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의 눈은 신문을 보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 것이 전혀 신문에 집중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듯이 눈은 멍하게 뜬 채로 귀로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지구의 마지막까지 153일 전-
큼지막하게 써 있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며 나는 다시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은 엄마의 눈물을 따라 가다가 이내 습한 울음기를 담고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모습을 보면서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가 아픈 것 보다 아픈데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지금의 상황에 가슴이 메어져 왔다. 처음 겪는 감정이 아니었지만 이 감정은 매 번 절대로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찌할 수 없는 삶 전체에 대한 끊임없는 무력감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모두들 쉽게 적응할 수 없기에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피식-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가슴의 메어짐이 사라지고 내 앞에 멍한 눈으로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과 같은 헛웃음이 나왔다. 삶의 미래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이란 지금까지 걸어왔던 발걸음을 그 끝을 향해 끊김 없이 부지런히 놀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새삼 우스웠다.
2.
나는 지구가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멸망해야 하는 이유 따위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너무나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인간들 대부분은 자신은커녕 주변 사람들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겨워한다. 죽음, 종말, 멸망. 끝을 암시하는 이런 모든 단어들은 호기심에서 발로된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흥미로운 존재이지 결코 내 일상에 직접 끼워 넣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개념이다. 그래서 과거 언젠가 믿을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 지구의 마지막이 30여 년 남았다고 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매일 매일을 살아왔다.
물론 준비는 있었다. 나와 아내는 지구의 마지막을 알고, 그것을 준비하게 위해 전 세계가 합심하여 노력하던 시기에 이 세상을 바라보며 성장해 온 세대였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을 눈앞에 둔 인간들이 자아낸 온갖 무질서, 파괴, 전쟁, 종교적 탈출 등등을 성장하면서 모두 보았고, 마지막으로 더 이상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화성으로 떠나버린 이후의 세상도 살아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자들. 아니 종말의 시계 속에 미래가 갇혀버린 자들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나와 아내도 그 속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갔다. 나와 아내는 끝이 정해진 세상 속에서 자라나 그 속에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지고, 그리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신문은 매일 지구의 마지막 시점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는 기사를 앞면에 배치했다. 아마 그 신문기사를 담당하는 기자는 역사에 가록된 언론 역사상 가장 쉽게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기록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기록은 지구에 남는 우리들이 보관하는 게 아니라 화성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보관할 것이었다. 그들이 그럴 마음이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지난주에도, 어제도, 오늘도 발전소에서 전기를 공급하는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전기라는 존재가 내가 살아가는 지금 시점에 얼마만큼 필요한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설사 지금 전기가 모두 나간다 할지라도 주변에 쌓인 온갖 것들을 태무면 적어도 153일 동안은 지구를 대낮같이 밝게 밝힐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이가 아픈가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머리를 한 목소리가 깨웠다. 눈을 들어보니 의사 가운을 입은 한 여자가 나와 아내 앞에 서 있었다. 아내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열은 없는데 아이가 자꾸 힘들어 해요.”
“다른 증상은 없구요?”
“네. 그 병이 아니면 좋겠는데…”
아내는 아이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중력과다물체접근에 따른 소아청소년 신체이상증후군’이라는 해괴한 이름을 달고, 속칭 ‘종말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단 증상이 우리 아이에게도 다가온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병의 원인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인류가 처음 겪어보는 달 이외의 거대 천체의 중력장에 지구가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증상이었기 때문에 막연히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사태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었을 뿐이었다. 병의 증상은 간단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은근한 불편함’. 이것이 종말증후군의 증상이었다. 안 그래도 곧 멸망해버릴 세상에서 생의 마지막 날을 확정 받은 채 태어난 아이들이 거기에 더해 그 날까지 온몸의 불편함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한다는 점에서 혹자는 이 병을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마지막 자비라고도 표현하곤 했다. 짧은 미래를 가진 아이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 할 어른들과, 채 살아보지도 못하고 지구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고통을 아주 없애는 방법은 아이를 낳지 않는 방법 밖에는 없었고, 종말증후군의 발병은 어른들 스스로 행할 수 있는 훌륭한 자기 통제의 근간이 되었다. 물론 나와 아내 같은 대책 없는 사람 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의사는 아내의 말을 듣고 손에 든 터치패드에 무엇인가를 적고는, 어딘가로 갔다 오더니 훈이를 응급실 한 켠 작은 침대에 뉘인 후에 주사를 한 대 놓았다.
“일단 주사를 놓았어요. ‘그’ 병인지 아닌지는 몰라요. 정확한 진단을 해봐야 하는데, 이제 그 병을 진단할 수 있는 의사나 장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시잖아요? 6개월도 안 남았어요. 어른들과 이미 발병한 아이들을 위해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에요. 지금으로선 별 일이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요.”
의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훈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종말은 너무 가혹하죠?”
훈이를 쓰다듬고 있던 우리를 바라보면서 던진 의사의 말 한 마디에 나보다도 아내가 먼저 움찔했다. 아이를 가지자고 한 것은 아내가 먼저였다.
“종말이란 언젠가 누구에게나 닥칠 것이지만, 그것을 빤히 바라보면서 사는 것은 참 어려워요.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더 힘들구요.”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왜 신은 우리에게 살아갈 자유를 주었을까요? 왜 멸망의 징조를 우리에게 확실하고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아이들을 낳고자 하는 마음은 거둬가시지 않았을까요?...”
의사는 훈이를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왜, 자신의 아이와 이 세상을 함께 마감하게 하는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을까요?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로는 우리 어른들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담담하지만 약간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우리가 아닌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듯이 중얼거리는 의사의 팔목에 걸린 팔찌에는 아이와 함께 찍은 작은 가족사진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이에게 미래를 선물할 수 없는 가장 가혹한 부모가 된 세대 중 한 명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은 왜 아이를 가지셨어요? 다른 선택도 있었잖아요.”
아내가 의사의 팔목을 흘끗거리며 조심스레 묻자 의사는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에는 우리 부부를 향한 가벼운 힐난도 조금 들어가 있는 듯 했다.
“미래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미래 때문에 오늘을 버리기란 쉽지 않았어요. 닫힌 미래를 가진 지금 세상에서조차 오늘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 오늘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내 아이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었구요. 아시잖아요? 부부들에게는 불임 수술이 기본적으로 장려된다는 것을……그 수술은 처음 인간이 지구 종말의 시간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강제적으로 행해졌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결국 모든 사회적 파국을 거친 후 세상이 안정되었을 때 그것도 예전으로 돌아갔죠. 지금은 강력하게 권하는 정책 중 하나지만 강제하지는 않잖아요? 아, 이제는 의미가 없죠. 다섯 달 후면 모든 것이 끝나는 데 무엇이 소용이 있겠어요?”
의사는 잠시 훈이의 손을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이게 제가 신에게 궁금해하면서도 원망하는 것이에요. 내일 멸망을 주면서 오늘 이렇게 아이의 손을 만지는 것 만으로도 내 마음이 따뜻해지게 해 주는 것.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오늘의 삶에 대한 기쁨과 희망. 왜 이 모든 것들을 우리 세상의 마지막을 선고하면서 함께 거두어 가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고 원망스러워요. 왜 내일의 파멸을 눈앞에 둔 채로도 오늘의 삶이 평온하고 때로는 작은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하였는지…… 그게 정말로 궁금해요. 그리고 마음 속 깊이 우리에게 아직까지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을 남겨둔 신을 원망하고 있죠.”
같은 범죄자가 된 듯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단은 주사를 놓았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은 약이 필요해요. 약이 있으면 바로 괜찮아질 것이지만, 그게 없으면 고통스러워 할지도 몰라요. 미안해요. 지금 세상에서 아이들을 위한 약을 만드는 회사는 별로 없어요. 특히나 이 병은요.-
그녀는 약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한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종이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3.
“회사를 며칠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팀장은 내가 내민 휴가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의문의 기색이 잠시 어른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는 볼펜으로 내 휴가계 한 켠에 서명을 했다.
“일이 끝나면 돌아와. 할 일이 많아”
서류를 나에게 내밀고 난 후 팀장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나로 인해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방해 받은 양 그는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자세로 다시 돌아갔다. 동료들에게 작은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사무실 문을 나오면서 멀리 팀장의 것인 듯한 시선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정식 퇴직하려면 사직서를 직접 제출해야 해!”
등 뒤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사직서를 내면 가만 안 둔다는 말투로 들려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인력 감축, 업무 효율화, 자동화……사람들을 직장에서 쫓아 내지 못해 안달이던 시절이 언제였냐는 듯한,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서 일상의 생활을 지탱해주던 것 중 하나를 허탈하게 떠나 보내는 데 대한 씁쓸함이 묻어 있을 것 같은 어조였다. 종말의 시계를 종말의 그날까지 보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일상의 소중함이 등 뒤의 말에 묻어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잠시 돌아서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고개를 작게 꾸벅 했을 뿐이었다. 세상의 끝이 오기 전 그렇게 나는 내 생활 중 중요했던 것 중 하나를 마무리했다.
“약을 만드는 곳을 찾았는데 절차가 좀 이상해요.”
회사 밖으로 나오니 아내가 아이를 차에 태우고 나와 마중하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운전석으로 바꿔 타서 차를 출발시키자 뒷자리에 아이와 앉아 연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분명 약을 만드는 곳은 맞는데, 이상한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 있어요.”
“뭘 요구하는데?”
내가 묻자 아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종말 이후에는…… 아이들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는데……”
나는 잠시 어이가 없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이비 종교 아니야? 약을 만드는 데가 맞아? 거기밖에 없다고 해서 유일하게 믿고 있었는데 무슨 말이야?”
아내는 자기도 혼란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특별히 지금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간단한 서류에 서명을 하고, 아 그 서류에 아까 말한 내용이 있대요. 종말 이후에는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 그 병원에 소속된다는 내용이고. 그리고 종말 며칠 전에 병원에 와서 아이를 놓고 가야 한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정확히는 잘 몰라요. 아무튼 내가 알아본 바로는 병의 진단도, 처방도 제대로 하는 곳은 맞는 것 같아요. 그 이상한 내용을 담은 서류에 서명을 하는 것만 빼놓고.”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가보자. 우리에겐 종말 이후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잖아?”
지금 세상의 유일한 장점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약속된 미래 속에서 현재는 가능한 한 가장 비참하게도 또는 가장 아름답게도 변할 수 있었고, 인간은 많은 희생 후에 비참한 현실보다는 아름다운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종말을 맞는 더 합리적인 자세라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서류에 서명하세요”
아내와 나는 눈앞에 있는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훈이는 주사를 몇 대 맞고는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진단도 처방도 효과도 그 동안 보아온 어느 병원보다 빨랐다. –아이들에게 오늘을 주십시오 – ‘병원’ 이라하기도 뭐하고 사이비 종교 시설이라하기도 뭐한 투의 표어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 로비를 지나 있는 한 방 안에서 아내와 나와 훈이는 ‘종말증후군’의 처방 대가로 놓인 서류를 맞이했다.
“삼일 전 까지 아이를 데려오라구요?”
내가 딱딱하게 묻자 우리 앞에 앉아 있던 친절한 얼굴의 여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늘부터 딱 150일 후 아이를 여기로 데려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그 때까지 비밀이구요.”
“만약 데려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요?”
아내가 급히 끼어들면서 물었다. 많이 완곡하게 말했지만 내 눈에도 ‘데려오기 싫으면요?’라는 본심이 뚝뚝 묻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웃는 친절한 얼굴의 여자는 전혀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를 화성에 보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적어도 부모와 함께 마지막까지 삶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니 아이를 보내지 않으셔도 저희로서는 불만은 없습니다. 쉬운 선택은 아니니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여기서 치료를 받은 것 자체로 저희의 의도한 바는 대부분 이루었으니까요. 나머진 그냥 부록이라고 여겨 주세요. 딱히 강제할 생각도 방법도 없습니다.”
여자는 흘끗 훈이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화성으로 가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것은 아니잖아요? 들으셨다시피 최단시간 항로는 우리 지구의 종말 즈음이나 열리고, 그렇게 화성으로 간다 해도 변화된 항로 환경 때문에 동면 없이 견디긴 어렵죠.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긴 동면을 견딜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종말증후군’에서 회복된 어린이들 뿐이구요. 신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좀 절묘하죠? 저는 아이가 없지만 저라면 한번 아이의 미래를 위해 도박을 걸어볼 것 같아요. 아 죄송해요.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이 말을 들은 부모들 상당수가 화를 내셨는데……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니 용서하세요”
여자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을 마쳤다. 그리고 우리가 주저주저 하며 서명을 하고 건넨 종이를 받고는 다 끝났다는 듯이 고개를 모니터로 돌렸다. 아내와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이를 안고 건물을 나섰다.
“적어도 세상이 끝날 때 까지는.”
“응? 뭐라구요?”
“적어도 세상이 끝나기 삼일 전 까지는 훈이는 우리와 함께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있겠네.”
내가 혼잣말하듯 말하자 아내가 대답했다.
“당신은 그러면 훈이를 화성에 보내고 싶어요?”
“그건 남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지금 결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직 150일이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 때까진 온전히 시간은 우리 것이잖아”
“아까 그 할아버지 같은 말투로 당신 이야기하는 거 알아요?”
아내는 훈이가 아픈 이후 처음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편안한 모습으로 잠을 자는 훈이의 모습에서 우리 부부는 세상의 종말 따위는 모두 잊고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다.
병원에서 훈이를 진단하고 치료하던 도중 만난 할아버지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말했다.
- 적어도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는 아이들은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소. 아이들을 그렇게 해 줄 우리 어른들의 책임도 말이요. 그건 누라 뭐래도 신이 우리에게 앗아갈 수 없는, 바로 온전한 우리만의 것이지. 세상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순 있겠지만, 그 날이 올 때 까지는 세상에 우리가 심은 것을 앗아갈 수는 없소. 그게 내가 이 약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주는 이유요.
화성으로 갈 수 있는 기회…… 우리 연구진 중 일부는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자비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윈 믿지 않아. 우리 모두의 희망을 빼앗아 간 주제에 새삼 작은 희망의 조각 따위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소? 나는 당신들이 아이와 함께 종말의 그 날까지 종말 따윈 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면 족하다고 봐요.-
그리고 그는 훈이를 치료해줬던 병원의 운영자였다.
4.
“노아의 방주 말이야……”
룸 미러로 바라본 아내는 훈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노아의 방주에 타지 못한 사람들이 멸망의 그 날까지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다 하잖아……그거…… 우리랑 많이 닮은 거 같지 않아?”
내 말에 아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그들도 물에 휩쓸려가기 전 까지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고, 기뻐하고 걱정했겠네요.”
나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겠지. 그리고 적어도 그 할아버지의 말처럼 세상에 우리가 심은 훈이와의 삶은, 그 날까지 온전히 당신과 내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시간이 될 수 있겠지.”
“종말 이후에는요?”
아내는 거울 너머로 내 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내도 그렇게 생각할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록 적지만 아내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혹시 알겠어? 우리가 얼마나 남은 시간을 잘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이 낳고 사느냐에 따라 신께서 후하게 심판해 줄 지도……. 노아의 방주에 우릴 태워주진 않겠지만 훈이를 태워줄 수는 있을지도 몰라. 그건 내일 다시 출근해서 일하면서 생각해 볼게. 그리고 나서 이야기 하자구.”
“야근하지 말고 퇴근이나 일찍 하세요. 얼굴을 봐야 이야기를 하지.”
아내의 핀잔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았다구……훈이도 괜찮아졌으니 오늘 저녁이라도 근사하게 먹을까?
아내가 웃었다.
“좋아요”
-2015년 1월-
첫댓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그런생각 해봤었어요. 내가 죽을 날짜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고 사는것도 좋겠다고.......뭔가.......마지막까지 쭈욱 읽어가면서 휴우~ 하고 간신히 숨쉴정도로 꽉 쥐어잡혀있는 기분이 드네요. 정말 마지막이 언제인걸 안다면 ..... 사과나무 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