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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 이야기 스크랩 걸명소(乞茗巢)|
東昊 추천 0 조회 31 15.02.22 13: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걸명소(乞茗巢)

                 글: 추사 김정희


나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버러지가 되어 약을 겸해 마신다네.
보내주신 육우의 다경 세 권을 통달하고는
병든 큰 누에처럼 노동(蘆同)의 칠완다(七碗茶)를 들아킨다네.
비록 정기가 쇠약하고 기력이 부족하나
기모민(基母旻)의 말을 잊지 않았고
막힌 것을 삭이고 헌데가 낫도록
이찬황(李贊皇)의 차 마시는 버릇이 생겼네.
아! 아침 햇살 피어날 때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떴을 때,
낮잠에서 갓 깨어났을 때, 명월이 시냇물에 드리워졌을 때에
달이는 찻물은 윤택할진저..
차 맷돌에 차를 갈 때면잔 옥구슬이 눈발처럼 휘날리네.
산골의 등잔불로써는 좋은 차 가리기 아득해도
자?빛 어린 차순 향내 그윽하네.
불 일어 새 샘물 길어다 집 밖에서 차를 달이니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이 남다네.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노공의 호사스러움 따를 길 없고
돌솥에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에 미치지 못하나
산에 나무 하러도 못가는 쇠약한 몸이라
차를 얻고자 하는 뜻을 전하네.
듣건대 고해(苦海)를 건너는 데는
보시(布施)를 가장 중히 여긴다는 데
차는 명산의 진액이며 풀 중의 영약으로 으뜸이 아닌가.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헤아려
달빛같은 은혜 아끼지 말기 바라네.



*추사가 제주도 유배중에 초의 선사에게 차를 청하는 편지

1786(정조 10) 충남 예산~1856(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개요
김정희 /김정희 영정,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
관직생활
 
 
김정희 고택 /김정희 고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
 
.
할아버지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이주(毗柱)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노경(魯敬)이며,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兪氏) 준주(駿柱)의 딸이다.
장남이었던 김정희는 대사헌인 큰아버지 노영(魯永)의 양자가 되었다.
1809년(순조 9)에 생원이 되었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예문관검열을 거쳐,
1823년 규장각대교·충청우도암행어사와 의정부의 검상(檢詳)을 지냈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뒤 헌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48년 만 9년 만에 풀려났으나, 다시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났다.
2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학문체계의 형성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고증학(考證學)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이때 당시 연경 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명의 이학(理學)을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송(漢宋)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대 경학의 대사(大師)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한학 체계의 수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김정희는 영조·정조 시기 실학의 학풍을 바탕에 두고 청대 학풍의 정수를 혼융시켜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의 경학은 성현(聖賢)의 도(道)의 본원(本源)을 궁구(窮究)하여 실현하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따라서 학문방법은 그 실현의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經傳)에 나타난 사실에서 옳은 것을 찾는 것,
실사구시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실사구시설〉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일삼아 근거가 없는 공소(空疎)한 술수로 방편을 삼고,
옳은 것을 구하지 않으며 선입견을 위주로 학문을 하면 성현의 도에 배치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사실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존고의식(存古意識)의 표현이었다.
존고의식이란 고거적(考據的)인 객관을 중시하는 것으로,
옛것에 박학(博學)하기 위해 사설(師說)과 가법(家法)을 수단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공평한 견해의 유지를 위해, 즉 옛것에 구애되어 빠지지 않도록
심기(心氣)의 평정(平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경학관에서 볼 수 있는 점은 '한송절충론'이다.
성현의 도에 이르는 것이 학문의 목표라면, 한학(漢學)이 갖고 있는 실제성과
옛 학자들이 밝히지 못한 부분을 설명한 송학(宋學)의 논리성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견해였다.
그는 '존덕성이도문학'(尊德性而道問學)하여 주객(主客)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견해를 주장했다.
이처럼 그의 경학 체계는 옹방강의 논리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문집에 대진(戴震)의 이욕설(理欲說)을 그대로 따른 사폐변(私蔽辨)을 싣고,
예악(禮樂)의 경우에는 능정감(凌廷堪)의 〈예경석례 禮經釋例〉를 많이 참고하는 등,
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섭렵하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청의 학자들에 의해 '해동(海東) 제일의 통유(通儒)'라 불렸던 명망에 비해 예에 관한 저술은
완성되지 못했으며, 독보적인 경학체계의 수립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가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부분은 금석학이었다.
당시 연경 학계에서는 고증학이 점차 발전되는 가운데 금석학·역사학·음운학·지리학 등이 경학의
보조 학문의 위치에서 벗어나 독자의 영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김정희는 청에 다녀온 뒤 금석 자료의 수집 및 연구에 몰두했다.
우선 함흥 황초령(黃草嶺)의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관하여 고석(考釋)했고,
1817년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가서 진흥왕 정계비의 실체를 밝혀냄으로써,
그때까지 막연하게 조선 초기의 승려 무학(無學)의 비라고 여겼던 설을 뒤집기도 했다.
'진흥'이라는 칭호가 죽은 후의 시호가 아니고 생시의 시호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비의 건립연대를 진흥왕 29년 즉 남천주(南川州) 설치 이후로 단정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금석과안록 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 眞興二碑考〉와 같은 저술을 남겼고,
국내 금석학파의 형성에 기여했다.

 
금석에 대한 연구는 실사구시를 지향하는 학문 방법이 적용된 것이며,
단지 감상과 감별(鑑別)을 주로 하던 청대 학자들의 태도에 비해 한 걸음 앞선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학
그는 불교학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12년에 걸친 유배생활 후 정계 복귀가 여의치 않자, 말년에는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머물며
선지식(善知識)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사실 그의 집안은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증조부인 한신(漢藎)이 충청도 예산에 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근처에 화엄사(華嚴寺)가 있어서
가족들의 신심을 돈독히 해주었다.
연경에 갔을 때에도 현지 및 서역의 승려들과 접촉했고,
수많은 불경과 불구(佛具)를 국내에 반입하여 마곡사(麻谷寺) 등 여러 사찰에 분배해 주었다.
문집을 보면 〈천축고 天竺考〉를 비롯하여 사찰의 상량문(上樑文)·게구(偈句) 등 불교에 관한
다수의 글이 보인다.
 
그는 특히 당시의 고승인 백파(白坡) 및 초의(草衣)와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는데,
그 중 백파와는 심도있는 선(禪)논쟁을 벌였다. 백파가 〈선문수경 禪文手鏡〉을 저술하여
선에 관한 새로운 설을 제기했을 때 15조항에 걸친 〈변망증 辨妄證〉을 통해 반박했고,
초의 또한 저술을 통해 그의 설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에 관한 이해는 범인의 정도를 넘은 것이었다.
이밖에 지리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의 글씨 /김정희가 종이 바탕에 쓴 ...
서예에서도 조선 후기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상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글씨 솜씨로 세인의 극찬을 받았고 20세 전후에 이미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있었다.
연경에서 옹방강 등의 대가와 접촉하고 수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글씨에 대한 안목은 더욱 향상되었다.
국내의 서도에 대해 "구서(舊書)의 어떠한 것도 모르고 그 후에 자기류의 서법으로 널리 자랑하며
가(家)마다 진체(晉體)요, 호(戶)마다 왕희지(王羲之)라"하여 철저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원래 명(明)의 동기창(董基昌)의 서법을 따르고 있었는데, 연행(燕行) 후 농후하고
기골이 강한 옹방강의 서체를 본받게 되었다.
이후 옹방강이 숭상하는 송의 소식(蘇軾)과 미불(米)의 서체를 따르게 되었고,
훗날 해서(楷書)의 모범이 되었던 당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까지 익혔다.
더 올라가 한예(漢隷)의 서체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이를 숙달하는 데 심혈을 쏟았다.
"흉중(胸中)에 고아청고(高雅淸高)함이 없으면 예법(隷法)을 쓸 수 없고 흉중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낼 수 없다"고 하여
예서를 서의 조가(祖家)로 보았다.
이처럼 모든 대가들의 장점과 다양한 서체를 집성하여 스스로 독자의 서법을 이룬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박규수(朴珪壽)는 추사체의 독특함에 대해 "신기(神氣)가 내왕하여 마치 바다와 같고 조수처럼 보인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서론 書論〉에서도 완원의 설을 받아들여,
〈서파변 書派辨〉을 통해 법첩(法帖)·묵·붓·종이 및 선인들의 서체와 금석비문에 대해 논하고 있다.
 

 
시와 그림
김정희의 인장들 /〈완당인보〉, 김정희의 여러 인장들, ...
시도(詩道)에서도 〈시선제가총론 詩選諸家總論〉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하며,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두보(杜甫)에 이르는 관심의 폭을 보여준다.

 
김정희는 고증학의 경향에 따라 시·서·화 일치의 동일묘경(同一妙境)을 항상 주장했는데,
화풍(畵風) 역시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따랐다.
특히 난법(蘭法)은 예(隷)에 가깝다고 보고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밖에 대나무와 산수(山水)를 표현하는 데 고담하고 아름다운 필선(筆線)을 사용하여 고상한 기품을 드러냈다.
현존하는 작품 중 〈세한도 歲寒圖〉(국보 제180호)와 〈모질도 ??圖〉·〈부작란 不作蘭〉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 전각(篆刻)의 분야에서도 추사각풍(秋史刻風)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수립하여
자신의 작품에 낙관(落款)으로 사용했다.
그밖에도 문학에서는 39통에 이르는 친필 언간(諺簡)이 실학적인 어문의식(語文意識)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문집으로 〈완당집〉·〈완당척독 阮堂尺牘〉·〈담연재시고 覃硏齋詩藁〉가 있고
1934년에 간행된 〈완당선생전집〉이 있다.
 

 
洪善杓 글 /다운솔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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