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에 대한 반감과 거부감의 역사는 짧지 않다. 예수 이전에 살았던 로마의 철학시인 루크레티우스(BC 94?~55?)의 오래된 격언, 즉 “종교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데 그것이 너무나 위력적이다”가 그것을 증명한다. 루크레티우스에서 도킨스에 이르기까지 2000년을 이어오는 종교에 대한 반감과 거부감은 대부분 종교 자체에서 나왔다기보다 그것을 신봉하는 종교인들의 과오에서 나왔다. 도킨스가 위에서 열거한 전쟁과 테러 그리고 폭력적 사건들이 그 가운데 일부다. 그런데 종교를 빌미 삼아 배척과 분쟁, 그리고 전쟁과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그가 유대교인이든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은 사실상 그들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이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은 사실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거나 이기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들을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기만하고 선동하여 전쟁과 테러 그리고 폭력을 자행한다.
예컨대 중세 십자군 원정의 동력은 성직자의 종교적 타락, 황제와 왕의 정치적 야심, 귀족과 상인의 경제적 탐욕, 그리고 평민의 전리품들을 바라는 기대와 같이 저급하고 세속적인 욕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지 탈환을 “신의 뜻이다”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했기 때문에 이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은 자신들을 ‘순례자’ 또는 ‘십자가로 서명한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숱한 살인·강간·약탈·방화를 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원정이 신성한 과업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80년 이후 발생한 모든 자살폭탄테러를 면밀히 연구한 시카고대학의 로버트 페이프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 자살폭탄테러의 실상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종교가 반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원인 가운데 근대 이후 특히 부각된 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적 진리는 미신 또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말인데, 바로 이것이 대부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종교를 꺼리는 이유이다. 근래에는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대한 과학자들의 비난이 거세다. 도킨스를 비롯한 16명의 저명한 현대과학자들이 공동저서 ‘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 하는가.’에서 펼친 신랄한 공격이 그 한 예다. 가히 진리 투쟁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 싸움에는 정통 기독교에서 줄곧 부인해온 ‘지적설계론’을 고집하며 과학자와 맞서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과오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다툼은 원초적으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단지 진리라는 용어를 같이 사용할 뿐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중략-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다”라고 정의한 바로 그 진리다. 그래서 ‘사실적 진리’라고도 한다. 하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삶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道)에 대한 진술이다. 그래서 ‘삶의 진리’라고도 한다. 독일의 철학자 미카엘 란트만은 그의 저서 ‘근원의 형상과 창조자의 행위’에서 이 두 진리의 차이를 ‘거울’과 ‘반석’에 비유해 설명했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다. 과학적 진리(또는 사실적 진리)는 마치 거울이 사물들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듯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뜻이다. ‘종교적 진리’(또는 삶의 진리)는 ‘흔들리지 않는 지속성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곳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반석과 같다는 의미다. 예컨대 예수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洪水)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마태복음 7:24)라며 교훈한 것이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라며 가르친 바로 그 진리다.
지면이 부족하니 하나만 예로 들자. 구약성서 창세기 서두에는 신이 오직 말만으로 우주 만물을 ‘무(無)로부터 창조’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이것은 그 어떤 자연과학적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오직 ‘신의 전능성’이다. 즉 신이 세계의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의지대로 생성·소멸·인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이 신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니 하물며 당신이 지금 마주한 절망과 파국, 슬픔과 고통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에서 당신을 구하는 일이 신에게는 여반장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종교적 진리는 언제나 인간의 삶, 바로 당신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20012. 9.10.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에서
여기에서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하나님은 인류가 인류역사상 헤아릴 수 없는 생명과 재산의 손실을 보는 동안, 신은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에 대하여 답을 해야 할 것인가? 성경 속에 신은 죽었다는 것인가? 그때 신은 다른 행성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구에는 ‘神의 不在’였다는 것인지를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 가지 더 질문이 있다. 한국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의 인구가 그들의 통계에 의하면, 인구 5천여만 명중에서 3천여만 명이 넘어서, 각 자의 왕국을 가지고 있는 데, 일제의 참혹한 식민지 통치하에서 우리의 삶과 6.25동란이라는 전쟁에서 생명과 재산의 손실을 왜 외면하여 신의 부재를 말하게 하는가? 배달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기 때문인가? 에 대하여 답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에서나마 기독교가 이단(異端)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의 민속(무속)이 아닌 진정한 종교로서의 올바른 신앙이 될 것이니까?
윗글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교 교의와 그 교의를 바탕으로 정의되고 있는 종교와 그 종교의 필요성과 반감에 대하여, 동학과 천도교의 교의의 입장에서 수긍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 신앙의 교의에 따라 설명한다면, 기존의 종교학에 관련된 모든 학문은 어떻게 될 것인가? 를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본 적이 있는가? 천도교의 4대 종교적 목적이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인데, 이 교의에 따라 종교의 정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왜 천도교 교의에 따라 종교의 정의를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천도교가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旣成宗敎/外來宗敎)에서 정의하고 있는 종교의 정의에 따라 신앙하는 것이 천도교의 4대 종교적 목표 실현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므로 합당하다고 보는 승인(承認)이고 주장인가? 필자의 생각에는 절대로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운이 무극대도를 서학이 아니고 동학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은, 다른 도학과 종교와는 많이 다르므로, 모든 것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필자는 인지(認知)하고 믿고 있다. 천도교의 올바른 신앙과 종교적 목표를 위해서는, 반드시 동학과 천도교의 교의에 따라 종교의 정의와 올곧은 신앙의 절차와 마음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약 1세기에 걸쳐 동학과 천도교를 연구해온 학계서는 일반적으로 수운의 신앙대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이유를 밝힌 것을 직접 자술(自述)하여 담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는 두 가지 신앙대상에 대한 명칭이 나타나는데 천주(天主)와 ᄒᆞᄂᆞᆯ님이 그 것이다. 천주 또는 ᄒᆞᄂᆞᆯ님(하ᄂᆞᆯ님/교훈가에서 1회/ 국어의 正文法에서는 ᄒᆞᄂᆞᆯ이 아니고 하ᄂᆞᆯ이 올바른 것이다. ᄒᆞᄂᆞᆯ은 非文法의 용어라 할 수 있다.-오암)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수운의 입장을 알아보려면,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는데,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두 가지의 해석이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하나는 ᄒᆞᄂᆞᆯ님은 초월자超越者)이나 부모님같이 섬길 수 있는 인격적(人格的) 존재(存在)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ᄒᆞᄂᆞᆯ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부분 발췌하여 재정리함.
필자가 반세기가 넘게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동학과 천도교에 관련된 1,2차 자료들을 수집하여 분류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수운은 무극대도를 득도하기 이전에 36년 동안 국내외의 현실정세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려 노력했고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득도이후 약 5년간 동안 경전을 자술(自述)할 때 어떻게 표현하려고 얼마나 많은 고심(苦心)을 하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내 나름대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수운의 삶과 사상이 담겨져 있는 각 편의 글들을 세심하게 살펴보려 했다. 그 결과 내 나름대로의 각 편의 구성의 특이성(特異性)을 찾을 수가 있었다. 특히 수운의 삶과 사상이 잘 들어난 布德文, 論學文, 修德文, 不然基然의 4篇과 歎道儒心急에서 문장의 첫 번째 1ㅡ2문단에서 천도의 질서나 고대 역사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도의 질서(生生之理/自然의 運行秩序)에 따른 인간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 수운은 그의 사상과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특이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는 수운의 사상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천도에 따른 인간의 삶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해야한다는 강력한 당부(當付)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운의 법설을 깊이 이해하려면, 더 나아가 우리가 당면해야 미래를 예측(豫測)하려면, 수운이 경험한 그 시대의 조류(潮流)에 따른 시대정신(時代精神)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해설과 이해는, 지금의 시대정신으로 해석하지 말고, 수운이 살아가면서 느낀 그 시대의 조류에 따른 시대정신위에서 해석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參考資料
道學(東學)에서 宗敎(天道敎)로 發展的 轉換의 根據로 볼 수 있는 法說
水雲의 東學論/論學文
海月의 天道와 儒,佛,仙.과 開闢運數
義庵의 大宗正義와 天道敎와 新宗敎
의암은 ‘동학을 천도교’로 大告天下(온 세상에 알림)한 다음에, 천도교가 어떤 종교인가에 대하여, ‘天道敎와 新宗敎’/『天道敎經典』PP.705-706.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天道敎는 天道敎人의 私有物이 아니요 世界人類의 公有物이니라
天道敎는 門戶的宗敎가 아니요 開放的宗敎니라
天道敎는 階級的宗敎가 아니요 平等的宗敎이며
區域的宗敎가 아니요 世界的宗敎이며
偏頗的宗敎가 아니요 廣博的宗敎이며
人爲的宗敎가 아니요 天然的宗敎인 今不聞古不聞 今不比古不比之新宗敎也니라.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개개인의 종교(사적이고 개별적인)가 아니요, 전 세계 인류가 모두 같이 신앙하는 인류의 종교이다. 천도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고 누구에게도 믿을 수 있도록 신앙의 자유를 주는 열려진 종교이며. 천도교는 차별적인 종교가 아니고 빈부귀천이 아닌 천부적(天賦的)인 평등적 종교이며, 어는 한 지역의 국한된 종교(동서양으로 분리된)가 아니고 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모두가 다 신앙할 수 있는 세계적 종교이며, 한쪽으로 치우쳐 공정하지 못한 편중된 종교가 아니고 넓고 해박한 지식을 갖출 수 있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종교이며,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작위적(作爲的)으로 만들어 낸 종교가 아니고, 한울의 근원적인 질서에 따라 생겨난 자연적인 종교로서, 지금에도 들어본 적이 없고 옛날 기록에서도 듣고 보지 못하였고, 예나지금이나 어느 시대나 사회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새로운 종교라 할 수 있다.
■ 나를 돌아보는 참고의 글.
아래의 글들은 김용천 자료실에 게재된 필자의 글들입니다.
남북통일만이 지상과제가 아니다. /김용천 /2004.08.05
88올림픽이후 냉전시대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상황아래 남북통일이 최우선의 지상과제인 것처럼 된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진정 ‘우리에게 최우선의 지상과제일까’ 하는 반문을 해본다. 우리에겐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분법에 의한 집단들 간의 극단적인 갈등, 편향적인 시각을 가진 일부 집단의 괴이한 이론제기와 집단행동, 그리고 많은 민생문제가 산적해 있어 전후좌우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수입의 주체가 아닌, 수입의 주체로부터 용돈을 타서 소비하는 계층이, 사회의 중심이 되고,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 해결자로 자처하는 정신 나간 계층에 의해 끌려 다니는 세계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한심한 사회이며, 수입의 주체로부터 용돈을 타서 소비하는 계층이, 소비의 주체가 된 웃지도 못할 우리 사회가 아닌가. 서른 살 전후, 부모 형제들의 도움아래 막대한 부모의 재산으로 4, 50대에도 이루지 못할 부를 갖고 시집 장가가 시작부터 어려움을 모르고 삶을 시작하는 계층, 그들은 당연하고 행복할 런지는 몰라도 부모형제들은 그늘이 진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우리 보다 못 살고 문화가 뒤떨어졌다고 알려져 우리는 그렇게 믿고 후진국이라 인정한 나라에서도, 신랑 신부가 자신의 노력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의 분수에 맞게 결혼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3, 40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않고 부모의 집에 기생하고 있으며(캥거루 族), 결혼 후에도 한도 끝도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비의 중심에 서 있다면, 소도 개도 웃을 일이다.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해도 두려울 게 없겠지만, 하루하루를 긴장하면서 실수 없이 살아가도 이 험난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통일은 사치이다. 통일이 된다고 지금의 생활이 나아 질 수 있다는 확신이 설 수 있을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마냥 즐겁고 복에 겨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료해서 통일이나 한번 해볼까. 북한 땅이나 헤집고 다니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자본주의의 장, 단점을 잘 모르고, 빠른 시일 내에 적응할 수도 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게 거품을 물고 자랑이나 한번 해보겠다는 뱃심이 아닌 다음에야, 이 고달픈 현실을 외면하고 잠 고대를 하자는 것인가. 2, 30대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걱정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고 금융신용 불량자 300여만 명, 생계보호 대상자가 200여만 명에 이르러 내부문제로 확산되어, 사회의 기틀마저 흔들려 사회와 경제가 혼란해질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삶의 방향이 오리무중인 현실에서 통일이 우리에게 무슨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매우 자명한 것이다.
국가경영을 위해서 시대적 상황과는 거리가 좀 있다손 치더라도 미래를 위한 장기계획으로 논의해 보든가, 정당의 미래지향적 목적을 위하여 통일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 - 가족의 생계와 사회 각 영역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우리 사회가 빨리 안정되고 복지사회가 되어 살 맛 나는 삶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사람들.- 내부의 결속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힘든 현실을 먼저 극복해야 할 중차대한 이 시점이다. 그런데 남북의 통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여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반 통일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더 나아가 단일민족의식이 부족하고 뜨거운 동포애도 없는 매정한 인간으로 매도(罵倒)하는 태도는 더더욱 있을 수 없다. 북한이 생지옥이라고 북한 땅을 탈출하는 북한 주민이 수만, 수십만 명에 달하는 현실과 구금, 투옥, 처형하는 북한의 인권은 외면한 채 북한을 찬양하는 그들은, 취사선택하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이라는 기괴한 잣대를 가지고 남북문제를 농단(壟斷)하고 있다.
이런 중심없는 시대에 천도교인들은 이런 경향에 덩달아 놀아나지 말고, 좀 더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대처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남북의 분단으로 전체 교인의 7, 80%가 북한에 있어 우리의 사활이 걸려 있었지만, 북한 사회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 종교활동이 위축이 아니라 중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러 종국엔 천도교 청우당으로 북한 조선노동당의 우당으로 명맥을 이을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수용해야 했다. 이 뼈아픈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지는 좀 더 역사가 흘러 가 재평가되는 시대를 기다려야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25 사변 무렵 북한에 우리 교인이 380-420만 명이 되었다는 데 1990년대 초, 통일원에서 북한자료를 조사한 결과 1만 5천명으로 풍비박산(風飛雹散/風地雹散은 非標準語)이 되었다니 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역사의 현실인가. 이 인원도 남, 북간 사회단체의 대화를 위한 것으로 사실 여부도 확인 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6, 25사변 후 50여 년 간의 북한에서의 천도교의 종교활동과 청우당의 정치활동을 우리의 독자적인 정보수집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대외 자료마저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남북문제 논의는 최우선이 될 수 없다. 사회적 시각인 반 통일세력, 단일 민족애가 없는 인간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도외시하는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해방 후 우리 교인들은, 북한 정권과 맞서 싸운 3.1 재현운동과 영우회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선배 교인들이 투옥, 사형을 당하면서, 천도교를 지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는 3.1재현운동과 영우회 사건으로 희생된 선배 교인들과 통일은 반드시 해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북한에 침투하여 활동하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천도교인 북파 공작원들의 명예를 찾아 주어야 하고, 잘못된 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몰락한 천도교의 신앙활동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일제시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 6,25와 월남 파병으로 조국을 위하여 희생된 호국영령들, 우리 천도교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고마움을 때가 되면, 한 마디씩 너나없이 하지만, 평생을 그들의 죽음과 희생의 대가로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현재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희생이고, 나는 나다. 라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겠는가? 우리들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라도 연명(延命)하고 있음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 우리가 선배 교인들의 희생을 본받고 고귀한 희생이 되게 하기 위해, 선배 교인들의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들 정책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현재와 같은 천도교의 몰락이 없이 남북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대 도약을 할 수 있는 3-400만 명의 교인들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 근, 현대 100여 년의 역사를 이끌어 찬연히 빛나게 했던 동학군의 자랑스러운 명예를 되찾을 뿐더러 21세기 새 역사창조에 선봉이 될 수 있는 자신감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뿌듯하게 담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역사여!. 가슴이 저리도록 아프다.
불행한 우리 민족은 과거 100여 년의 역사가 우리의 희망대로 되지 못하고, 세계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묻혀 외세에 번번이 농락당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역사였으니까.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자주, 자결, 자립으로 현대사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에게 있었는가. 엄혹했던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우리에게 그런 저력이 있었고 있다고 믿는다면, 매우 낭만적이고 근시안적인 역사관을 가진 자기도취(自己陶醉)에 빠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상당 부분을 세계의 흐름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제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몸부림이야 쳐야겠지만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할 수는 없다는 것이 비참하지만 현재 우리의 역사 현실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자주, 자립, 자결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준비를 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또한 우리 전체 교인들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분의 교령님(崔德新과 吳益濟)이 자진 월북하여 자의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대남 적화통일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아픔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내부적으로 정리된 다음에 통일논의를 해도 늦지 않는다. 통일된 뒤의 우리의 원대한 교단 중흥사업을 준비하지도 않으면서 환상에 젖어 통일을 외친다는 것은, 오라고 하지도 않은 남의 집 잔치에 가, 푼수 없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정성을 모아 힘들여 차린 성대한 잔치 마당에서 많은 구경꾼을 모아 놓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자. /부분 수정 보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