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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를 지키고자 한 것이 죄가 되어
증 언 자 : 조철응(남)
생년월일 : 1962. 3. 24(당시 나이 18세)
직 업 : 재수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1980년 당시 고입 재수를 하고 있던 조철응 씨는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아는 선배를 만나 18일부터 27일 새벽 2시까지 시내 전역 시위에 참여한다.
27일 새벽 2시 두려운 마음에 도청에서 도망쳤다가 아침에 붙잡혀 6개월 정도 상무대 헌병대 영창에서 수감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시위에 참여
1962년에 나는 광주시 서2동에서 5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건축에 관계되는 일을 하고 계셔서 잘 살지는 못했어도 쪼들리지 않은 가정생활이었다. 대성국민학교를 마치고 충장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여러 사정상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있다가 1980년 18세의 나이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1880년 5월 16일 오후에 나는 대성국민학교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그때 친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와 금남로에서 전투경찰과 학생들 간에 싸움이 있다고 같이 가보자고 하였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 친구와 함께 금남로를 따라 도청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학생들과 전투경찰이 어느 정도의 사이를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한참을 대치하고 있던 전투경찰과 학생 사이에 드디어 싸움이 벌어졌다. 학생 쪽에서는 돌멩이가 날아가고 전투경찰 쪽에서는 최루탄이 쏟아졌다. 최루탄을 쏘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데모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최루탄이 얼마나 매운지 전혀 몰랐다. 나는 무작정 학생들 사이에 끼여 학생들이 돌을 던지면 나도 던지고 노래를 부르면 따라 부르며 행동을 같이 했다. 학생들은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동안 그들과 함께 행동하다 나는 피로하여 서동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5월 19일, 12시가 넘어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 가보니 학생과 전투경찰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16일과 마찬가지로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 대열 속에서 중학교 때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피킷을 들고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피킷을 건네주며 자기를 따라다니라고 하였다. 이 선배를 만남으로 해서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게 되었다.
전경들은 16일과는 달리 시위군중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아가 곤봉으로 구타하고는 붙잡아 갔다. 이것을 본 시민들은 최루탄 가스의 매운 연기를 마시면서도 전경을 향해 야유를 하거나 욕설을 퍼부었다.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또다시 최루탄이 터지면 흩어지는 것을 몇 번 반복하였다. 그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붙잡혀갔다.
나와 선배는 흩어진 일부 학생들과 함께 충장로로 갔다. 충장로 어느 골목에 가니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화염병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화염병을 보았고 또한 처음으로 전경들을 향해 던져보았다. 그러나 처음 던져서 그런지 화염병은 내가 던지고자 했던 목표물에 닿지 않고 엉뚱하게도 가게의 간판에 떨어져 간판을 태웠다. 선배를 따라 노래를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통금시간이 되기 몇 시간 전에야 집에 들어갔다. 밖이 시끄러운데 내가 계속 돌아다니자 어머니는 못마땅해 하셨다.
광주역에서 부상
5월 19일 아침에 집을 나서려 하니 어느새 어머니께서 하나밖에 없는 내 신발을 빨아버렸다.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할 판인데 전날 본 것도 있고 해서 집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후에는 어머니 몰래 슬리퍼를 신은 채 옥상으로 올라가 밖으로 뛰어내려 시내로 나갔다. 금남로에는 어느새 시민 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위대열은 전날과 달리 학생들보다는 시민들이 더 많았다.
전날 함께 다녔던 중학교 선배를 찾으며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금남로를 거쳐 유동 삼거리를 지나 광주고속터미널 앞까지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지 4.5톤 덤프트럭이 달려왔다. 그곳에 마침 선배와 친구 몇 명이 있었다. 근처에 널려 있던 화염병 2개와 돌을 몇 개 들고 우리는 4.5톤 덤프트럭에 탔다. 내가 탄 덤프트럭에는 약 2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광주역 앞에 배치된 계엄군을 향해 차를 타고 갔다.
광주역 앞에는 많은 계엄군이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있었다. 깜깜한 밤이라 군인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양쪽 인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화염병에 불을 붙여 계엄군에게 던지려 했으나 차가 너무 빨리 달려 불이 붙지 않았다. 거기에다 트럭 운전기사가 운전을 제대로 못해 차가 갈지자로 달렸다. 갈팡질팡하던 중에 나도 무엇엔가 심하게 맞아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한참 후 깨어나보니 서석병원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현장에서 다친 사람은 나 외에도 3명이 더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나는 귀를 부상당했는지 귀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병원에는 친구 한 명도 뇌를 크게 다쳐 수술을 하고 누워 있었다.
한편 병원 안에는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2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병원에 들어오는 부상자마다 이것저것 체크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지만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는데 병원장이 내 귀를 치료하면서 두 사람이 수상하니 어디에서 어떻게 다쳤다는 말도 하지 말고, 진료카드도 가짜로 작성하라고 했다. 심지어는 원장 본인에게도 진짜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진료카드에 성이 양씨라고 적어놨다.
나와 친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 없어 원장에게 나가겠다고 말했다. 원장은 이미 통행금지 시간이 지났고 밖에는 계엄군이 쫙 깔렸으니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수상한 사람들이 계속 병원에 있는 이상 무섭고 두려워서 계속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원장은 뇌수술을 한 친구에게 토하게 되면 큰일난다고 조심하라고 했다. 우리는 수상한 두 사람을 피해 조용히 병원 문을 나섰다.
밖에는 가랑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었다. 그때 시간은 밤 12시가 넘었다. 우리는 친구집까지 불빛를 피해 깜깜한 곳으로만 기다시피 하여 도착했다. 친구집은 유동 삼거리와 광주역 사이에 있었다.
MBC 방송국 방화목격
5월 20일 아침에 깨어보니 내 옷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 친구집에 있기가 미안하여 나는 아무도 몰래 그 집을 빠져나왔다. 아직 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 혼자 서 있을 수도 없어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 한참 숨어 있었다. 비도 촉촉히 내리는데 나 자신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다.
조금 지나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골목에서 나와 옹기종기 모인 시민들 틈에 끼여들었다. 시민들은 전날까지 각자 보았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모든 이야기가 계엄군들의 잔인한 만행에 관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시내 중심가로 나가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고, 아직도 공수부대가 시내 요소요소를 막고 있다는 것도 알았으나 공포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시민들은 오직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에 치를 떨 뿐이었다. 시민들이 많이 모이자 천천히 유동 삼거리에서 도청 쪽으로 나갔다. 20일 아침부터 이미 광주공원에는 찜통에다 밥을 가득히 해서 퍼주고 있었다.
나는 아침밥도 먹지 못한 터라 배가 고팠다. 그런데 어떤 시민이 광주공원 앞에 가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곳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공원 앞에는 시민들이 밥을 찜통 등에다 잔뜩 가져와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밥을 얻어먹고 나서 가톨릭센터 쪽으로 갔다. 그러나 계엄군들이 군데군데 서 있어서 가톨릭센터 앞까지는 가지 못했다. 이때 금남로에 모인 시위군중은 내가 밥을 먹으러 가기 전보다 훨씬 많이 있었다.
나는 도청 앞으로 가려고 수협 옆으로 난 골목으로 갔다. 그곳에도 시민들이 꽤 모여 있었다. 나는 부상으로 몸이 좋지 않아 직접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사람들 속에 끼여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시민들이 많이 모이면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지는 시민들과 함께 나도 우체국 앞까지 도망갔다. 그러나 그쪽에도 계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누군가 화염병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몸이 아팠으나 그 순간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단지 시민들을 구타하고 잡아가는 계엄군을 물리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화염병을 받아 우체국 앞에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던졌다. 이번에도 역시 화염병은 빗나가 간판에 맞았다.
시위대는 계엄군이 쫓아오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센터 앞까지 가게 되었다. 계엄군은 가톨릭센터 앞에서도 완강하게 저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이때가 밤 10시경이었다. 시민들은 그때까지 혹시나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열심히 시청하였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속극이나 오락 프로만 방영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방송국과 가까운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엄군의 총과 칼에 죽어가고 있는데 가끔씩 계엄당국의 강경 일변도의 발표만이 보도되고 있을 뿐이었다.
MBC 방송국 앞의 시민들은 사실 그대로 지금 밖에서 진행되는 모든 참상을 보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이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분노한 시위대는 방송국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 계엄군 몇 명이 방송국 주위 경비를 맡고 있다가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을 알았는지 철수해 버렸다. 순식간에 건물 뒤편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아 건물 전체로 퍼졌다.
나는 방송국 안에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얼마 후 도청 쪽에서 계엄군의 장갑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시민들을 향해 달려왔다. 이것을 본 수많은 시민들은 방송국 맞은편의 전남여고 담을 넘거나, 골목으로 피신했다. 어떤 사람은 도망치다가 길가에 넘어지기도 하였다. 나도 도망쳐 근처에 살던 친구집으로 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도청으로 들어가
5월 21일에도 다시 시내로 나왔다. 이날 오전에 내가 어떻게 시위를 하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오후에 도청에서 전남대병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화순 방면에서 가져왔다는 수류탄 2개와 카빈총 한 자루, 그리고 방독면 담는 가방에 가득 찰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총을 쏘며 돌아다녔다. 어디에서 어떻게 싸웠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고 얼마쯤 있다가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했다고 해서 나는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도청으로 들어가 19일에 부상당하여 흘린 피로 피범벅이 된 상의를 벗고 도청 안에 있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도청 안에는 많은 시민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부상자들도 많았다. 옷을 갈아입은 뒤 나는 현재의 도청 2층 민원봉사실에서 하룻밤을 잤다.
광천동 공단 입구에서 지역방위
5월 22일, 날이 밝자마자 나는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이사람 저사람이 나서서 중구난방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한쪽에서는 차 한 대 한 대에 번호를 붙여 시외곽 지역을 방어하는 일을 분담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나이 드신 분이 변두리 동네에 불량한 아이들이 설치고 다닐지 모른다면서 범죄를 방지하는 의미로 지역을 지켜달라고 해서 한 지프차에 올랐다.
5명이 함께 차를 타고 광천동 공단입구로 갔다. 우리는 개인당 총 한 자루씩을 배당받았다. 공단입구 사거리에서 보니 육군통합병원 근처 도로 한가운데에 계엄군들이 장갑차를 세워두고 지키고 있었다. 시민들도 공단 입구에다 커다란 통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있었다.
우리는 사거리 옆에 처박혀 있는 서울 번호판이 붙은 관광차가 있어 거기에 본부를 차렸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우리들은 계엄군들을 향해 무조건 총을 쏘았다. 계엄군이 철수하기 이전에 시내에서 계엄군과 직접적으로 맞부닥칠 때는 두렵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는데 이때에는 솔직히 두려웠다.
우리들은 공수부대원들이 2, 3명씩 잠입하여 스파이 활동을 한다고 하여 암호를 시간마다 새로 정했다. 예를 들면 '해, 달' 그런 식이었다. 암호를 정하게 된 것은 내가 도청에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 지역방위를 맡아 도청을 출발할 때 무전기를 하나씩 나눠주어 수시로 도청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밥은 우리 공단 입구 본부가 있는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제공해 주었다. 잠을 잘 때는 관광차 안에서 잤는데 밖에 문지기를 한 명씩 세워놓고 잤다.
나는 공단 입구 사거리에만 있지 않고 도청까지 왔다갔다하며 불미스러운 일이 없나 살펴보기도 하였다. 하루는 내가 도청에 있는데 동명동 가정집에 식칼을 든 사람이 들어왔다는 시민의 전화를 받았다. 도청에서는 우선 동명동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전을 치고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가보라고 이르고는 도청에서도 한 팀이 나갔다. 나도 그 차에 타고 동명동까지 갔다. 사건 현장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범인이 붙잡혀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차에 태워 도청까지 되돌아왔다.
조사해 보니 그 사람은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무서워 남의 집에 숨어 들었는데 주인집에서 도둑이라고 신고하였다. 별 혐의가 없어 그냥 풀어줬다.
그 당시 시내 곳곳에서는 계엄군의 스파이들이 숨어들어 민심을 이간시키려 하거나 살상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어떤 때는 시민들에 의해 스파이들이 잡혀 도청까지 끌려오기도 하였다. 도청에서는 잡혀온 스파이들을 조사하여 계엄군의 스파이임이 밝혀지면 상무대로 무전 연락을 하였다. 계엄군에게 잡혀 있는 시민 몇 명과 교환하자고 하였다.
내가 광천동 공단 입구 사거리에 있을 때 스파이를 싣고 상무대로 가는 차량을 몇 번 본 일이 있다. 그러나 한번 간 차는 계엄군에게 연행되었는지, 어디로 도망쳤는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도청에는 많은 시체가 있었다. 시민들은 소식이 없는 가족들을 찾아 도청으로 왔다. 신원이 확인된 시체는 도청 안에 안치되었고 확인이 안 된 시체는 시민들이 찾기 쉽도록 상무관 앞에 줄줄이 나열해 놓았다.
광천동 공단 입구 사거리에서 밤을 보내자면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컸다. 통합병원 앞길에 서 있는 장갑차는 밤만 되면 양쪽 라이트를 환하게 켜고 있었다. 우리들은 밤에는 특공대를 결성하여 장갑차를 부순다며 기어서 우리가 쳐둔 바리케이드를 넘어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람들을 잡혔는지 도망갔는지 돌아올 줄 몰랐다. 우리는 다시 통나무로 쌓았던 바리케이드 앞 몇 미터에 차 타이어를 줄줄이 늘어놓고 석유를 뿌린 뒤 불을 질러놓기도 하였다.
내가 광천동 공단 입구에 25일까지 있는 동안 한 번의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마지막 밤, 도청 비상
계엄군이 27일 0시를 기해 시내로 진압한다는 말이 있어서 우리는 26일 오후에 공단 입구 사거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도청으로 들어가니 도청 안은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흥분해 있었다.
도청 안에는 많은 화약이 있었는데 그것을 계엄군 첩자가 들어와 뇌관을 다 없애버렸다는 소문이 퍼져 더욱 불안해 했다. 그야말로 초비상 상태였다.
우리는 계엄군이 쳐들어올 경우 방어를 하기 위해 다시 팀을 짰다. 나는 다른 4명과 함께 분수대 앞을 지키는 팀이 되어 그곳에 배치되었다.
계엄군이 27일 0시에 들어온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마음이 몹시 초조하고 불안하였다. 시간이 무척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았다. 그 불안함을 견디다 못한 나는 27일 새벽 2시에 슬그머니 도망쳐버렸다. 왜냐하면 도청 안에 있을 때 언뜻 듣기에 LMG 두 대와 케리버50 한 대를 시민군이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 무기는 각각 관광호텔 옥상, 전일빌딩 옥상, 전남대병원 옥상 등에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 무기가 계엄군에게 접수되어 버렸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분수대 앞 경계를 맡았던 5명이 모두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우리 5명은 처음에 생각하기를 광주경찰서 쪽으로 해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가서 차를 한 대 구해 가지고 시외로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쪽에서도 계엄군이 밀려온다고 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우리 일행 중에 강기배 씨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남선빌딩 근처에서 여인숙을 하고 있는 사람을 안다고 하여 그 여인숙을 찾아갔다.
"우리는 지금 도청에서 도망 나오는 길이니 숨겨주시오."
우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얘기하자 주인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인에게 간곡하게 얘기하여 허락을 받고 그 여인숙에 머물게 되었다. 여인숙 주인이 밖의 상황을 알아본다고 나갔다 오더니 남선빌딩 앞에 이미 많은 계엄군이 진주해 있더라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계엄군이 있다고 하니 겁이 덜컥 나면서 총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먼저났다. 그래서 살며시 여인숙을 빠져나와 골목 하나 차이인 한일은행 사거리 근처에 있는 남선빌딩 뒷건물로 들어갔다. 지하실이 열려 있어 가보니 기관실이었다. 다른 2명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고 거기까지 간 사람은 3명뿐이었다. 기관실은 3명이 겨우 앉을 정도로 좁은 곳이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 좁은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자니 잠이 왔다.
깜박 잠이 들락말락하는데 계엄군이 밖에서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우리보고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그곳에 숨는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계엄군은 셋을 셀 동안에 나오라고 하였다. 시간적 여유를 많이 주어도 나갈까말까 망설일텐데 급박하게 나오라고 하니 무섭기만 했다.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숨을 죽였다. 그러자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옆사람이 '윽'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이제 우리 모두가 죽는구나'하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다행히 총에 맞지는 않았다.
잠시 후 사격을 그친 계엄군이 다시 한 번 셋을 셀 테니 나오라고 하였다.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이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나가니 군인들이 다짜고짜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몸 여기저기를 세차게 때렸다. 한참을 맞은 후 포승에 묶여 남선빌딩 안으로 끌려갔디. 그곳에는 계엄군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여러 명의 계엄군에게 사정없이 맞았다. 그러고는 윗옷을 벗기고 등뒤에다 빨간 색 페인트로 무슨 글자를 썼다.
개처럼 취급 당하며 상무대 영창으로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점심때가 되었다. 한참 매타작을 당하고 널부러져 있자니 계엄군들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군인들 몇 명이 우리에게 자기들이 먹던 오곡밥을 주었다.
밥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온몸이 묶인 채로 금남로의 노란 중앙선을 따라 현 교보빌딩 근처에 있는 아모레화장품 건물 앞까지 끌려갔다. 시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많은 계엄군들만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더욱더 겁이 났다.
일단 우리들은 아모레화장품 건물 옥상 위로 끌려갔다. 옥상에는 미리 잡혀와 있던 20-30명 정도의 시민들이 포승으로 묶여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시민들을 보자 무척 반가웠다.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도 누가 나에게 '제일 기뻤던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우리 일행은 이미 잡혀온 사람들과는 급수가 달랐는지 따로 떨어져 앉게 하였다. 아마 그 사람들은 계엄군이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시내로 나오다 잡혔던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몇 명은 훈방되었다.
옥상에서 저녁밥을 주었는데 우리들은 개가 밥을 먹는 것처럼 포승줄로 손을 뒤로 묶인 채로 밥을 먹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포승한 상태로 끌고 가 계엄군이 옷을 내리고 올리고 하였다. 오랫동안 꽉 죄이게 손목을 포승하고 있어서 손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한참 만에 우리는 시청으로 끌려갔다. 4명이 군용트럭에 실려갔는데 머리를 처박게 한 뒤 계엄군이 워커를 신은 채 우리 등뒤에 서서 트럭 난간을 잡고 있었다. 차가 흔들려 몸이 조금만 흔들려도 계엄군은 흔들거린다고 워커발로 우리를 걷어찼다. 잡힐 때부터 여기저기를 거치면서 계엄군에게 얼마나 맞았던지 나중에는 아무리 세게 때려도 아프다는 느낌이 없었다.
우리가 간 곳은 시청 내 우측에 있는 보건소였다. 보건소에 들어가자 계엄군 4명이 거만한 폼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꿇어앉으라고 하더니 곡괭이 자루로 무조건 때리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계엄군 한 명이 끌려간 사람 한 명씩을 상대로 권투를 하였다. 권투를 할 때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맞아야 했다. 그리고 계엄군이 생각할 때 넘어져야 할 순간에 쓰러지지 않으면 쓰러지지 않는다고 더욱 호되게 맞았다.
내 차례가 되어 나가니 나를 때리던 계엄군이 잘못하여 손목에 차고 있던 가죽 시계줄이 떨어져버렸다.
"이 새끼야, 이 시계를 누가 사준 건데 떨어뜨려."
시계줄이 끊어진 것이 내 책임라도 되는 듯 그 군인은 나를 더욱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아마도 애인이 그 시계를 사준 모양이었다. 어찌나 심하게 때리던지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쓰러지던 나는 하필 보건소 앞문 유리창으로 넘겨졌다. 유리가 깨지는 것과 함께 내 손목의 동맥이 끊어졌다.
곧바로 치료하지 못해 그때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새끼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몰라 불안에 떨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데 다음날 아침 50이 넘은 할머니가 밥을 해가지고 왔다. 시청에 있던 계엄군들이 아침밥을 먹기 위해 시킨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가져온 찜통 뚜껑을 열었다. 하얀 쌀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반찬으로는 열무김치였다.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들을 유심히 보더니 눈물을 흘리시면서 보건소 안에 있던 계엄군에게 간곡히 말했다.
"저 어린 학생들에게 밥을 좀 주시오."
그러나 계엄군들은 우리들이 중죄인이어서 밥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해 버렸다. 할머니는 그래도 계속 밥과 반찬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여전히 손이 뒤로 묶인 채 개처럼 밥을 먹었다. 할머니가 또다시 계엄군에게 밥을 먹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나가더니 장교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장교를 찾아가 애원한 모양이었다. 장교가 졸병들에게 우리들의 포승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하루가 넘는 시간을 계속 포승하고 있다가 풀려나니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수저를 주지 않아 손으로 밥을 떠먹어야 했는데 목이 메어 먹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차마 볼 수가 없었는지 밖으로 나가버렸다. 할머니가 밖으로 나감으로 해서 우리들의 식사는 끝이 났다.
곧이어 우리는 시청 앞에서 버스에 실려 상무대내 헌병대 연병장으로 갔다. 도착하는 즉시 우리는 옷을 벗고 검사를 받은 다음 영창에 수감되었다.
영창에 들어갈 때도 절차가 필요했다. 영창문 밖에서 한 사람씩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하게 하고는 굵은 곡괭이 자루로 한 사람당 5대씩 맞고 들어가야 했다. 제대로 다 맞지 못하면 또다시 맞아야 했다. 5대씩 못 맞고 쓰러지는 사람도 허다했으나 나는 거뜬히 맞았다. 그때는 아프다는 감각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헌병대 영창은 7소대까지 해서 6칸이 있었다. 4소대는 죽을 사자라고 해서인지 없었다. 7소대에는 넓은 칸에 2개의 독방이 있었다.
내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한 칸에 30여 명씩 있었는데 그날 저녁 무렵에는 계속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1백여 명씩이 수용되었다.
영창에서는 하루 내내 정좌한 자세로 있어야 했다. 밥은 식판 하나에 두 사람분이 나왔는데 2, 3숟가락 정도밖에 주지 않았다. 반찬으로는 잘하면 단무지 하나 나올까말까 했다. 너무나 배가 고팠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배가 고파 혹시나 밥알이 복도에 떨어지지 않았나 하고 밥알을 주으러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이런 생활을 한 달 이상 했다. 영창 안에는 상무대 군수과장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군수과장 면회를 신청하여 만나 밥이 너무 적어 살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밥도 많이 나오고 그전에는 구경할 수 없었던 국과 3가지 반찬이 식판 위에 올려졌다.
영창에 수용된 지 1주일 만에 조사를 받으러 불려나갔다. 조사 받으러 간 곳은 상무대내 사병식당이었다. 식당의 책상은 일반책상과는 달리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조사를 받기 위해 사복 입은 조사원 앞에 앉았다. 앉아서 보니 책상 옆에는 굵은 곡괭이 자루가 세워져 있고 책상 위에는 꼬챙이, 송곳 등이 있었다. 그 수사요원은 내가 앉자마자 송곳을 들어 내 가슴에 찌를 듯이 대고는 조용히 물었다.
"이것으로 네 가슴을 찔러버리면 어떻게 되겠냐?"
가슴이 섬뜩했다. 한참 위협을 하더니 조사에 들어갔다. 나는 시위에 참가한 사실을 말하면 저들이 나를 죽일 것이니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5일에 우연히 도청에 가서 계속 장기를 두며 놀다가 27일날 잡히게 되었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들은 그것이 말이 되냐면서 곡괭이로 때리고 발로 짓밟기도 하였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나중에는 조용한 말투로 회유도 하고 유도심문을 하기도 하였다.
그때 받았던 고문은 물고문, 고춧가루 먹이기, 개미가 가득 있는 방에 처넣기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때 받은 고문 때문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어깨가 굽어버렸다.
영창생활 3, 4개월째 되는 어느 날 내가 아는 형님이 오셔서 영창 안을 두루 살피고 다녔다. 우리 어머니와 그 형의 어머니가 친한 사이여서 나와는 안면이 있었다. 그 형은 보안대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제대하기 2개월 전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엄마가 그 형님을 만나 사정 얘기를 해 나를 찾아보라고 했다 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형님을 본 순간 머리를 숙여버렸다. 얼마 전 어떤 수감자가 아는 군인장교가 있어서 면회를 했는데 그 사람이 고달픈 영창생활을 하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워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 뒤 장교가 나가자마자 헌병들은 그 사람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것과 그 사람을 만나 울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니 나중에 어떤 보복이 닥칠지 몰라 나는 그 형님을 알은 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발견하지 못한 형님은 그냥 가버렸다. 얼마 후 다시 찾아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처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다가 두 번째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일어섰다.
형님을 만났더니 형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써서 실형을 받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하였다. 형님의 말을 들으니 기쁘기도 하였지만 형이 가고 나면 당해야 할 보복을 생각하니 암담하였다. 형이 가고 나자 걱정이 되어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그러나 웬일인지 때리지 않고 오히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한마디로 좀 편해졌다. 그 형님 덕분으로 나는 영창생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9년이 지난 다음에야 진단을 받으라니
처음에 막 나와서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완전히 퍼져버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헤맸다. 병원에도 가보았으나 병원에서는 별 이상이 없다고만 하였다. 그렇지만 몸은 계속 아프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베개 위에는 시커멓게 머리카락이 빠져 있었다. 몸에 좋다고 하는 약은 다 먹어보았다. 심지어는 똥물까지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 노력 끝에 영창에서 나온 지 6개월이 지나서야 사람답게 걸어다니게 되었다.
1981년에 현대건설 원자력 회사에 취직하여 6개월 정도 근무하였다. 6개월이 지난 뒤 회사에서 서류검사를 하며 회사원에 대한 신원조회를 했던 모양이었다. 5·18 때 수감되었던 나는 당연히 해고였다.
그 뒤로는 몸도 아프고 어디에 취직하려고 해도 전과자 아닌 전과자여서 취직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도 그때 맞았던 후유증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서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 동안은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한다. 서울에 한번 가려고 해도 버스를 타지 못하고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기차를 타야 한다.
영창에서 막 나와 집에서 앓아누워 있을 때 친구 누나가 동정심에서였는지 친절하게 대해 줬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이 가까워져 지금은 그 누나가 나의 아내가 되었다. 처자식도 있는데 몸이 아파 일도 하지 못해 할 수 없이 부모님에게서 생활비를 타다 쓰고 있다. 지금은 30만 원짜리 사글세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피해의식에서 헤어나질 못해 부상자신고를 하지 못하다 1988년 6월 29일 부상자신고 마감 전날에 신고하였다. 시청에 신고를 하였더니 신체검사를 받으라고 하였다.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9년이 지난 지금에 진단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때의 상처나 아픔이 그 당시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와서 진단하여 나온 급수에 따라 보상금을 주려면 부상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해줬으면 좋겠다. (조사.정리 허혜자)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비 개인 하늘이 무척이나 맑네요.
아름다운 주말시간 보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