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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좋은 글 등(1) 스크랩 스크랩 사랑하는자와 사랑 받는자
유오디아 추천 0 조회 118 05.08.14 23:1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사랑하는자와 사랑 받는자(갈4;12-20)

지난주 서울에 갔을 때 아내와 함께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지하철 벽면에 붙여진 글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기차를 기다리면서 먹기 위해 과자를 한 봉지 샀다. 그리고 그 과자를 먹으려고 하니 옆에 있는 남자가 자기의 의사도 묻지 않고 과자를 집어 먹는 것이다. 이에 조금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과자 하나 같고 너무 쩨쩨하게 그런다고 할까봐 내어 버려 두었다. 그런데 과자를 다 먹기까지 계속 먹는 것이였다. 이에 과자는 하나 밖에 남지 않았고 이 아주머니는 자기의 과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여 그 과자를 먹었다. 이윽고 빈 봉지만 남게 되고 그 남자는 빈 봉지를 들고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아무런 말 없이 그냥 가는 것이였다. 이에 이 아주머니는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하고 표를 점검하려 가방을 열어보니 자신이 산 과자는 그대로 그 가방속에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과자라고 생각하여 먹은 그 과자는 그 남자의 과자였다. 그 여자는 그 남자의 과자를 먹으면서 자신의 과자라고 생각하여 그 과자의 주인인 그 남자를 속으로 욕하고 기분나빠 한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에게 매일수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경험과 기분 주관적인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보는 경향이 있다. 이로인해 사물이나 사람을 진실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되게 볼수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 바리새인 율법사들 그들은 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 그것은 바로 저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과 편견과 아집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 하신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 자신의 주관적이고 잘못된 편견과 아집들은 버려야 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새 술인 진리를 하나님의 참 뜻을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율법주의 자들과 그들의 거짓 교훈과 가르침에 대해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변증하던 대해서 돌이켜 새로운 관점으로 저들에게 접근한다. 신학적이고 논리적이인 면을 떠나서 사도와 성도의 관계로 돌아가 저들에게 사랑의 권면을 한다.

사랑을 일깨운다.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는 이론적이고 율법적인 권고나 충고는 상처를 입히거나 분쟁을 일으킬 뿐이다. 모든 권면이나 충고는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런 관점으로 사도 바울은 사도와 성도의 관계로 돌아가 서로에 대해서 가졌던 사랑을 일깨운다.

내가 너희들과 같이 되었다

사도바울은 먼저 내가 너희들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사도바울은 본래는 유대인이요 율법이 있는자지만 전도를 위해 저들과 같이 되었다. 즉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처럼 율법이 있지만 없는자처럼 하여 저들과 같이 되었다. 그리할 때 비로서 저들의 마음은 열렸으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 사랑은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상대방과 같아졌느냐 하는 것이다.  한 목사님이 갑자기 장로님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장로님께서 혼자서 술을 드시고 계시는 것이였다.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 하는 장로님에게 목사님은 잔을 이리 달라고 하며 친히 술을 따라 장로님 앞에서 같이 마쳤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말씀 하셨다. 장로님 이제 저는 장로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서 같이 생각하며 고민하고 그 고통에 함께 참여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같이 되시고 죄가 없지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가 ? 상대방의 허물 잘못됨을 보면서 나의 탓으로 여기고 나 때문에 그가 저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 아니면 그 반대로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됨을 볼 때 내 의를 자랑하고 드러내며 정죄하고 비난 하며 비평하기를 일삼지 않았는가 ?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주님 말씀하신 한 과원지기의 비유를 생각하여 보라 그 과원지기는 삼년동안 정성껏 기른 포도나무가 계속 열매가 없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는 과원의 주인의 명에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일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 포도나무의 열매 없음을 그 과원지기는 자신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도바울은 그런 마음으로 그들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랑이 우리 교회 가정 삶에 있게 되기를 바란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바울에 대한 저들의 사랑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바울은 원래 사랑받을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아니였다. 그의 외모나 언변 그리고 육체의 연약함=사도바울 육체의 가시가 있었음=을 보나 사랑스런 사람은 아니였다. 게다가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것도 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은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고 가능하다면 눈이라도 빼어 주려 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바울을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사랑하였는가를 볼수 있다. 찰스피니 목사는 사람이 자기자신을 생각하는 기준 세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자기자신을 숙명론적으로 보는 사람. 모든 것을 팔자 운명 탓으로 돌리며 팔자 타령을 하는 사람. 둘째는 율법적으로 보는 사람. 이 사람은 그리스도보다 자신을 더욱 의지하며 자신의 능력 의지 행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의 뜻한 바를 이루면 교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볼 때 정죄하고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이루지 못할 때 쉽게 좌절하고 낙망한다. 그리고 셋째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신을 볼 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없지만 저들의 사랑을 믿었고 확신하였다. 이점이 중요하다.

성도여러분
사람이 왜 고독해 하며 낙심과 좌절을 하는가 ? 그것은 바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랑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이 세상에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잃어 버려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 어떤 처지와 형편에 놓일지라도 주님은 사랑하신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넘어졌을지라도 주님은 사랑하신다. 요13장=제자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자기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요13장에 나오는 제자들 사랑받을만한 가치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 그러나 주님은 저들을 사랑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받는자로 당당히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저들을 위해 다시한번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한다. 저들에 대한 바울의 또 한번의 사랑의 고백이다.
우리도 이런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 해산의 수고 이 속에 나타난 이 사랑은 오래 참음이다.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뜻이다. 믿음이다. 하나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참고 인내하며 믿는가 ? 정말 사랑하는자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 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 사랑이 있을 때 그 사랑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자와 사랑받는자 그는 누구이겠는가 ?
그 사람은 내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미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제는 그 사랑을 나누며 증거하는자로 살아야 한다. 이 사랑의 귀한 증거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아멘

주님 이제 사랑받은자로 사랑하는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출처: 진주중앙교회 http://jinju.advent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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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08.18 09:45

    첫댓글 감사하며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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