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후배가 모죽지랑가로 마음을 대신하여 묘비앞에 바친 추모패)
(둘째줄 왼측에서 세번째가 오랑생도)
간 봄 그리매
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기회를) 지으리이다.
郞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일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제32대 효소왕(692-702) 때에 죽만랑의 낭도 중에 득오(혹은 곡이라고도 한다)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는 날마다 출근하여 정진하고 있었는데 한 열흘 동안이나 보이지 않자 죽만랑이 그 어머
니를 불러서,
"그대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당전으로 있는 모량부의 익선 아간이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차출시켜 급히 달려가느라 미처 낭에게 하직 인사를 못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죽만랑은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거기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으므로 마땅히 찾아가서 대접해야 겠소."
하고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좌인(방언으로는 개질지라 하니 종을 말함이다)들에게 들리워 득오를 찾아갔다. 낭도 137명도 모두 의례를 갖추어 그를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자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대로 부역하고 있습니다."
고 하였다. 죽만랑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대접하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같이 돌아오려 하였으나 익선은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에서 조세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정을 아름답게 여기고 변통성이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생각하여 거둔 벼 30석을 주며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진절 사지가 타던 말과 안장을 주니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조정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이가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한 짓을 씻겨주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하여 숨어버려 대신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동짓달 몹시 추운 날 그를 성 안의 못에다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죽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어명으로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 버리고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복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승려가 된 자가 있어도 큰 절에는 들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간진의 자손은 평정호의 자손(枰定戶孫)으로 삼아 특별히 표창하게 하였다. 원측법사는 해동의 큰 스님이지만 모량리 사람이므로 승직을 주지 않았다.
처음 죽지랑의 아버지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가 되어서 임지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삼한에 병란이 일어나 기병 3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고개의 길을 닦고 있어 술종공이 그것을 보고 찬미하였다.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혁혁함을 좋게 여겨 서로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술종공이 부임지에 간 지 한 달이 되었는데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랍고 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었더니,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
고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죽은 그 날이 꿈꾼 날과 같았다. 술종공이 생각하기를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그를 장사하게 하고, 그 무덤 앞에 돌미륵 하나를 세웠다. 술종공의 아내는 꿈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죽지는 자라서 벼슬길에 나아가 유신공과 함께 부원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무 4대 조정에서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