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이번 학기 수업을 종강하고, 몇 주 더 지나면 직장을 떠난다. 생일이 8월이어서 만 65세를 넘기면서 바로 정년퇴직을 하는 것이다.
요즘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사치레로 ‘시원섭섭하시겠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도 가볍게 ‘네.’라고 대답한다.
또 어떤 사람은 ‘퇴직 후에 어디서 살 거냐, 서울이 고향이니 올라갈 거냐’고 묻기도 하고, ‘버킷 리스트가 뭐냐, 앞으로 계획이 있을 거 아니냐’라고 어려운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제부터 마음 편하게 여행이나 실컷 다녀라’, ‘나이 들수록 건강에 신경 써라’라는 조언도 종종 듣는다.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도 번거로우니 이 글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퇴직 후의 거처에 관해서는, 계속 경남 마산에서 살 것이다. 부모, 형제, 친구들이 서울에 있지만 그들 곁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은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지금 살고 있는 마산 집을 팔아서는 서울 아파트 1평도 사지 못한다. 떠나지 못하니 계속 머물 수밖에.
버킷 리스트? 앞으로의 계획? 그런 거 없다. 그냥 가만히 있을 생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70부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인생 이모작’은 꿈도 꾸지 않는다. 나는 대학 졸업도 하기 전부터 직장에 나가기 시작해 환갑을 5년이나 넘긴 오늘까지 줄곧 봉급쟁이로 살아왔다. 남들이 모두 활용하는 안식년이나 교환교수 기회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많이 지쳤다. 진이 모두 빠졌다. 쓸모를 다 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이 나는 좋다. 쓸모가 남아있다면 마저 쓰고 싶지 않겠는가. 여력이 남았는데 뒷방으로 물러나야 한다면 아쉽고 찝찝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 상태가 홀가분해서 정말 마음에 든다.
이때쯤 누군가는 ‘오늘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고 충고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라고? 없는 힘을 쥐어짜 천방지축 사방으로 뛰어다닐까? 아서라. 그러다 낙상하기 십상이다. 나는 앞으로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련다. 돈벌이도 하지 않을 거고, 취미생활에도 열심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실컷 다니라는 충고도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나는 여행에 한 맺힌 사람이 아니다. 실은 직장 다닐 때도 여행은 자주 했다. 여행이 생활화되었다고나 할까. 그 덕에 버거운 조직생활을 견디고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된다.
건강에 유념하라는 말씀도 그저 귀로만 듣고 마음에는 담아두지 않으련다. 건강에 너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이제까지 가족 굶기지 않고 직장 계속 다닐 수 있을 만큼 건강했던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더 바란다면 욕심이다. 더 이상 쓸모도 없는 사람이 계속 건강해서 또 뭐에 쓰랴. 할 일도 없는데 기운이 넘치면 그것도 곤란하지 않겠나. 나는 인생에서 건강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장수가 하늘이 내린 복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운동은 적성에도 맞지 않으니 하지 않을 것이고, 건강에 좋다고 맛없는 것을 찾아 먹지 않고 당장 입에 맛난 것을 안주 삼아 아침부터 소주를 마실 것이다.
또 어떤 분은 그간 쌓은 경륜이 아깝지 않느냐, 사회에 환원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고맙고도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영리하다. ‘자네, 늙어봤나? 나는 젊어 봤네.’라는 맥락 없는 망발을 지껄이며 주제 파악 못하는 꼰대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 앞으로는 글도 쓰지 않을 것이고, 남들 앞에 서서 말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앞으로 어쩌겠다는 거냐고 묻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 싶어 미리 말씀드린다면.... 나는 그저 점점 더 늙어갈 것이고, 그러다가 병들 것이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고, 고통이 너무 심하면 삶에 미련이 없어질 테고, 그때쯤 죽을 것이다. 생로병사가 모든 생명체의 숙명이니 나도 그 길을 갈 수밖에. 몇 년 전 내 절친 용구도 죽었고, 한때 잘 나갔던 해외의 동갑내기 친구 마이클 잭슨도 진즉 세상을 떠났다. 이 나이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오래 산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꼭 한 가지 소망이 있긴 하다. 내 반려견 ‘호두’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사는 것! 혹시 호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호두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다. 먹을 것을 챙기는 것도 그렇지만 호두는 하루 두 번은 용변 보러 꼭 밖에 나가야 하는데 그걸 누가 감당하겠나. 다른 가족은 모두 제 일로 바빠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리고 호두는 드라이브를 정말 좋아한다. 나 역시 하루 중 호두와 차 타고 들로, 강으로,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닐 때가 가장 즐겁다.
정년퇴직이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것이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오랜 직장생활하면서 보람도 있었고 수모도 겪었다. 앞으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무슨 큰 차이가 있으랴. 행복을 언감생심 바라지 않으며, 하루하루 ‘다행’이라고 여기며 보낼 수 있다면 천운으로 알겠다. 끝으로 한 가지 다짐하는 것은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며 늙음을 한탄하고 젊음을 시샘하는 나잇값 못하는 늙은이만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동안 좋은 세월 만나 오늘까지 잘 늙어 와서 참 다행이다. 모든 게 고맙다!
(2023. 5.29.)
(경남대 김원중)
첫댓글 교수님 퇴임하시면 삼천포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좋아하시는 생선회와 소주한잔 하입시다.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글까지 적지 않으시는 것은
무척 서운합니다. 교수님 안부를 쉽게 여쭐수 없는 성격의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요. 이참에 성격을 바꾸는것도 좋겠지만 교수님께서 글을 남겨 주시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게 느껴져 간청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