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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종교를 넘어서다(요 4:23~24)
건설 현장에서 만난 30대 후반의 청년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학원 운영을 하다가 진 빚을 갚기 위해 나섰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는 안 나가지만 하나님은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시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매우 친절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성품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힘들고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항상 웃으며 다른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온화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당분간은 교회에 나갈 생각이 없지만, 자신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따르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틱낫한은 베트남 출신의 승려로, 세계적인 불교지도자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다가 고국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플럼빌리지라는 명상 공동체를 운영하며 유럽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분입니다. 틱낫한은 자신의 종교는 불교요, 자신은 분명 승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따르는 부처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고 탁월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가 부처 외에도 따르고 존경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느 기독교인 못지않은 예수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진 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너무나 흠모하여 자신의 방에 부처상과 예수상을 나란히 세워 놓고 있습니다. 또 「살아계신 부처, 살아계신 그리스도」란 책도 집필할 정도로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더그라는 청년은 힙합을 사랑하는 미국의 젊은이입니다. 그는 자신의 힙합에 대한 애정과 힙합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회를 떠나 홀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록 몸은 교회로부터는 멀지만, 마음은 항상, 오히려 더욱 그리스도와 가까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떠나서도, 제도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서도 예수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종교 안에서도 예수를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처럼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종교적 겉치레로는 식별할 수 없는 영적 갈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면서도, 몸은 교회에 나와 있으면서도 내면 깊은 곳의 영적 갈망을 자각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이상 기독교와 교회가 자신들의 영적 갈망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는 과감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로부터 먼 곳에서 자신의 영적 갈망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종교적이지 않은데 영적일 수가 있을까요? 종교를 떠나 있으면서도, 교회를 떠나 기독교를 떠나 있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있을까요? 이들에게도, 즉 교회 밖, 기독교 밖, 제도적인 종교 밖에도 정말 예수님은, 하나님은 함께 하실까요? 이에 대한 명백한 실례가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방문이 매우 제한된 한 지역으로 가서, 랍비로서는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을 만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찾아가서 그 사람을 만난 일은 몇 번 안 됩니다. 제자들을 선택하기 위해 제자들 각각을 찾아간 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그의 가족을 찾아간 일, 그리고 바로 지금 말씀드리려는 그 사람을 일부러 찾아가신 일입니다. 그곳은 바로 사마리아이고, 만난 이는 사마리아 어느 동네에 사는 한 여인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사마리아는 유대인에겐 가기를 꺼리는 지역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특히 종교적으로는 더욱 꺼리고 불경시하던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보다도 더 멀리하고 싶은 이단, 사이비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꺼리는 사마리아 지역을 일부러 찾아가셨습니다. 당시 랍비의 룰을 깨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여인을 만나 대화하셨습니다. 더구나 그 여인은 부정한 여인, 남편을 일곱이나 두었던 그런 행실이 좋지 못한 여인,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손가락질 당하고 멸시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6절에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라는 말은 예수님의 심신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숨이 턱에 찰 정도로, 힘든 육체노동 이후에 거의 탈진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일부러 만날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을 찾아가신 일이 흔치 않습니다. 그것도 혼신을 다하여 자신의 몸이 극도로 지치고 탈진상태일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만나러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토록 자신의 혼신을 다해 누군가를 만나려 하셨다면 거기엔 어떤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중심지인 유대지역의 밖, 이단의 땅, 다른 종교의 땅입니다. 오늘날도 서로 섣불리 만나서는 안 되는 극도로 적대적인 관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한 사람이 북한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간첩이 됩니다. 과거 미국의 흑인들은 백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가는 봉변을 당합니다. 식당에서 백인들이 앉는 자리에 흑인이 모르고 앉았다가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요즘도 인도 어느 곳에선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이 서로 때리고 죽이기도 합니다.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간디는 힌두교인이었습니다. 그 생애 말년에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화합을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원수지간인 두 종교의 화해를 위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암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그를 죽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투람 고드세라는 같은 힌두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같은 유대인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이 알았다면 랍비로서의 예수님의 명성은 큰 위기에 처해질 것이고, 심지어 간디처럼 같은 유대교인에게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27절입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제자들도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란 것이지요. 아마도 속으로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은 왜 알려지면 자신의 랍비로서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를, 혹시 돌에 맞을지도 모를 일을 숨이 턱에 차고 육신이 탈진될 정도로 열성을 가지고 행하신 걸까요? 제자들도 이상하게 여기고 충격을 받을 정도의 예수님의 이 기이한 행적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행동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예수님이 혼신을 다해 만나고자 했던 그 여인과의 대화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인과 나눈 대화의 첫 내용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바로 ‘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행으로 인해 매우 피곤하고 지쳐있습니다. 무엇보다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물을 달라하신 것은 당신이 목마른 상태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여인의 숨겨진 목마름 때문입니다. 지금 육신적으로 목마른 이는 예수님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목마름을 가진 이는 바로 ‘물을 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 여인이었습니다. 물이라는 것이 여인에게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여인은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결혼을 여섯 번 한 여인이 있다면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받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는 더했겠지요. 마을에서도 이 여인은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여인에게 가장 곤란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물을 길러 가는 일입니다. 어쨌거나 먹고 살려면 음식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할 텐데, 물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얻으려면 마을의 공동 우물을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물가는 옛날에 여인들의 수다 장소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다른 여인들이 물길러 오는 시간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갔다가는 그 따갑고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래서 여인은 항상 남들이 안다니는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옵니다. 그때도 혹시나 다른 사람이 나오지나 않을까, 다른 이의 눈에 띄지는 않을까, 노심초사입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조마조마하며 나왔는데, 하필 오늘 웬 남자가 그 우물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딱 봐도 유대인입니다. 그냥 모른 척했으면 좋으련만 눈치 없이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인도 충격입니다. “왜 유대인인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물을 달라는 물음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여인이 웬 유대인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에 다소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며 묻자, 예수님은 더 이상한 말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좀 전에 물을 달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생수를, 즉 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물을 주겠다는 말 앞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뭐하시는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 즉 신의 선물을 주시는 자요, 그 선물은 바로 생수라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합치면 예수님은 뭘 주시는 분입니까? 바로 생수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입니다. 물 때문에 항상 곤란을 겪는 여인은 예수께서 물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귀가 솔깃합니다. 만일 물 문제만 해결되면 여인은 굳이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아도 되니까요. 남들이 모르는 물, 남들은 맞닥뜨리지 않아도 되는 그 물만 얻을 수 있다면, 그렇잖아도 피곤한 인생이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있을테니까요. 여인이 그 물을 도대체 어디서 주시겠다는 겁니까, 라고 반응하자 예수님은 조금 더 나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지금 이 우물에 길은 물은 마시고 난 후 다시 목마르게 되지만, 자신이 주는 물은 끝없이 목마르지 않고, 더 여인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끝없이 샘솟는 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없이! 어디서요? ‘그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요. 이 말에 여인은 당장 그 물을 자기에게도 달라고 반응합니다. 여인의 속에서 앞서 말씀드린 괴롭고 고달픈 인생 역정, 그리고 그 괴로운 인생을 끝내고 싶은 깊은 내적 욕구, 자신도 몰랐던 깊은 내면의 갈망을 자신도 모르게 끄집어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여인의 간절한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괴로운 저의 인생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여인 안에 숨겨있던 이 내면의 갈망이 튀어나오자, 예수님은 드디어 본론을 꺼내십니다. 그 여인 안에 감춰진 내적 갈망이 무엇인지를 들춰내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아니 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남편을 불러오라니요. 남편은 이 여인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감추고 싶은 치부입니다. 또 여인의 채우지 못한 욕망입니다. 여섯 명이나 다른 남자를 만날 정도로 여인은 남자에 대한 욕망, 남자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치부요, 자신의 욕망인 이 남자에 대한 욕망도 사실은 여인의 더 깊은 내적 갈망을 채워주지 못해 대신 선택한 진정한 갈망의 모조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욕망, 또 다른 갈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인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든 모르든, 여인은 그 깊은 갈망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그 깊은 진정한 갈망을 남자라는 모조품을 통해 대신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때문에 여인을 만나러 혼신을 다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여인 안에 감춰진 내면의 진정한 욕구, 참된 갈망을 끄집어내어 그 갈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신비한 통찰력을 발휘해, 말하지도 않았는데 지금의 남편이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이 이전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지금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계신 겁니다. 이 여인과의 만남이 그만큼 매우 특별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보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 중요한 이유가 여인의 이 질문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물과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예배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물, 남편, 예배. 이건 바로 여인의 깊은 갈망을 드러내 보여주는 요소들입니다. 여인의 인생을 고달프고 목마르게 하는 것은 물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니었습니다. 더 깊은 것,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물음을 잘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이 있다고 하네요.” 여인이 이렇게 물은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신의 동족인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 방식으로 예배 드려봤지만, 유대인들의 예배 방식에도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방식으로 예배 드려봤지만,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방식, 즉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에도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즉 물로도 채우지 못하고, 남편으로도 채우지 못한 여인의 깊은 내적인 갈망은, 지금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겁니까? 바로 자신들, 즉 사마리아인들의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자신의 종교로도 채워지지 않은 겁니다. 자신의 종교로도 채워지지 않은 그 깊은 갈망이 혹시 당신들 유대인들의 종교로는 채워질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의 진짜 갈망은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갈망이 아닙니다. 여인의 깊은 내적인, 내면적인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그 갈망의 정체, 그 내적 갈망의 본질을 끄집어내시기 위해 육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인의 갈망은 종교적인 갈망이 아니라, 종교로도 채울 수 없는 더 깊은 갈망, 즉 내면의 갈망, 영적인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의 갈망은 물이라는 물질, 남편이라는 사람, 이 산과 예루살렘이라는 종교로도 채울 수 없는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 모두의 진정한 갈망이 바로 영적인 갈망임을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지된 지역에 들어가, 금지된 대상과 일부러 혼신을 다해 만나러 가신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매우 중요하고도 크나큰 메시지입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하는 여인의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도 생전 한 번도 예수님께 한 적이 없습니다. 이 중요한 질문을 금지된 지역에 사는, 금기시되는 여인이 묻습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닌 이단자요, 다른 종교를 가진 타종교인이 물은 겁니다. 지금 참으로 놀라운 아이러니입니다. 예수와 함께 다니던 제자들은 영적으로 깜깜하고 영적갈망이 식어있는 반면, 이단자요 타종교인, 그것도 여인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그 아이러니.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가 다음 말씀을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식으로도 아니고, 유대 식으로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뭐가요? 종교로는 도대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종교, 유대 종교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성전도 아니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독교도 아니고, 가톨릭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로는 도대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고, 말고 하다가 나온 예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여인은 예배드릴 장소를 묻는데, 예수님은 때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나온 예수님의 설명은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말씀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산은 사마리아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그리심산과 거기 있는 사마리아 성전을,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예루살렘과 거기 있는 성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둘에 대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종교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배 의식으로는, 종교 활동으로는 아니다, 대신에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서요? 또 어떻게요? 이 두 질문 모두 틀렸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둘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요? “진정한 예배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때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곧 이 때라.” 이때가 언제입니까? Now,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종교로서의 예배, 절차와 형식으로 진행되는 예배, 제도와 조직으로서의 교회와 종교의 모습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극히 단순하고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바로 여인의 감춰진 갈망, 그 내적인 갈망, 그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지극한 경외심으로 흠모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심산이라는, 예루살렘이라는 또 성전이라는 특정한 공간이나 그곳에서 진행되는 특정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알라는 것, 즉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것, 내면의 깊은 중심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지금 이 순간에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나’로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려면, 바로 우리 자신이 항상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 하나님과 만나 있는 하나님의 존재여야 합니다. 고전 6장 19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지금 이 순간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셔야 합니까? 항상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그리심산,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몸과 나의 실존이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인에게 하나님은 바로 네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 안, 내 내면 깊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 내면 깊은 곳, 바로 나의 진정한 중심에 계십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내면 깊은 곳에서 내 영을 자비롭게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흠모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내면 깊은 곳에 계셔서, 직접 나의 중심이 되어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목마름도, 배고픔도, 불만족도 없습니다. 항상 끊임없이 흐르는 깨끗하고 맛있는 생수가 흘러넘칩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혼신을 다해 만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내면이 성전임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자신의 내면, 자신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그것은 영적으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의 깊은 갈망, 영의 갈망은 여러분 자신의 내면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영적갈망을 해결해줄 생수, 생수의 근원은 이미 여러분의 내면에, 여러분의 중심에 흐르고 있습니다. 종교로도, 그 어떤 노력으로도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내면 안에 흘러넘치는 생수가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리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이미 나의 내면에 계신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자각하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