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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나는 고난
- 나무 조각의 비명
M. R. 데한의 “Broken Things”에는 나무 자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나무를 베고, 자르고, 구멍을 내자, 작은 나무 조각이 비명을 지르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나무 주인인 나무의 비명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나무가 고통스러워해도 자르고 구멍 내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꼭 나무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습니다.
“작은 나무 조각아, 내가 이렇게 베고, 자르고, 구멍을 내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검은색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아. 쓸모없는 나무 조각 말이야. 너는 내가 너를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너를 아름다운 피리로 만들고 있어. 너의 아름다운 소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슬퍼하는 영혼들을 위로하려는 거야. 너를 베고 자르는 것은 너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려 하는 거야. 그렇게 해야만 너는 이 세상의 축복이 될 수 있거든.”
- 위장된 축복, 고난
살다 보면 누구나 고난을 만납니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사실 우리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손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베이고 뚫리는 고난을 통해 버려질 나무 조각이 아름다운 피리로 태어나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고난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축복이 되는 위대한 사람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축복이 되었던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꿈꾸는 사람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가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비롯해 수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이 소중하게 쓰신 사도 바오로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2코린 11,25)
그렇습니다.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통해 축복을 누리고, 세상의 축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고난을 아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고난이 축복임을 알지 못하기에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것만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소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세상의 축복이 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고난당하실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고, 온 인류의 축복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고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고난을 알고 이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 상상할 수도 없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일까요?
1. 우리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6)
-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왜 죄인입니까? 나는 죄 지은 것이 없는데요?”라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사실입니다.
첫째,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죄인인 것을 증거합니다. 거짓과 시기와 미움과 질투로 인해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친구를 왕따시키고, 거짓으로 나쁜 말을 퍼뜨리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좋은 점수를 따기 위해 컨닝도 불사합니다. 부모를 거역합니다. 인터넷과 채팅을 통해 음란한 짓을 하면서도 그것을 숨깁니다.
둘째,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죄인임을 증거합니다. 나쁜 짓을 할 때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두신 양심은 찔립니다.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양심을 외면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 죽음을 부르는 욕심
에스키모인들은 늑대 사냥을 좋아합니다. 사납고 날쌘 늑대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칼 한 자루와 짐승의 피만 있으면 됩니다. 먼저 에스키모인들은 날카로운 칼날에 짐승의 피를 발라 그것이 얼 때까지 놓아둡니다. 그러고 나서 그 위에 다시 피를 발라 얼리고, 또 피를 발라 얼리고 하는 과정을 피가 칼날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 계속합니다. 그러고는 그 칼을 늑대가 다니는 길목에 하늘을 향해 세워서 땅에 고정 시킵니다.
얼마 후 늑대가 예민한 코로 냄새의 근원인 미끼를 찾아와 얼어붙은 칼을 핥기 시작합니다. 늑대는 피맛에 취해 점점 더 열심히 핥다가 결국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드러납니다. 늑대의 혀는 칼날에 상처를 입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늑대는 계속해서 칼날을 핥아댑니다. 자기가 흘린 따뜻한 피맛에 취해 점점 더 갈증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늑대의 죽음을 부르는 식욕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어 결국 싸늘한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합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욕심으로 인해 죄의 허기를 채우고 결국 죽어가는 인생의 모습, 그것은 죽음의 칼날을 핥아대는 늑대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망하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죄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돌아서야 합니다. 더 이상 죄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 양 같은 우리
문제는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결코 죄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양을 가까이에서 보거나 길러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왜 인간을 양으로 비유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존, 인간 본연의 모습이 양과 같기 때문입니다.
양은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우선 멀리 보지 못해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 근시안적인 눈 때문에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고집이 세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잘 돌아서지 않습니다. 또한 하얀 털 때문에 쉽게 더러워집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할 어떤 보호막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양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만 돌아오지 않고 마침내 사나운 맹수의 공격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를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양과 같은 우리들은 다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부인하고 제멋대로 살아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2. 우리를 대신해 맞으시고 상처 입으시고 짓밟히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상처를 입으시고, 짓밟히시고,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 대신에 매를 맞아 본 적이 있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십자가의 고난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까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 십자가형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먼저 채찍질을 합니다. 채찍도 보통 채찍이 아닙니다. 그 끝이 아홉 갈래로 갈라져 있고, 가죽끈 끝에 동물의 뼈가 박혀 있어서 채찍을 내리칠 때마다 그 뼈가 몸속 깊숙이 박힙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채찍을 낚아채면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피가 흐릅니다. 뼈가 드러납니다.
세간의 관심이 쏠렸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을 다 오르시기도 전에 채찍질 때문에 거의 초죽음이 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극도로 피곤하신 상태였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너무나 절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당신을 배반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극도로 지친 순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 억울합니다. 왜 저에게 이렇게 힘든 고난을 주시는 겁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 엄청난 고난을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로마 군사들에게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십자가의 무게는 180근이나 된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여 이미 지치신 주님은 채찍에 맞으시면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파른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고 또 쓰러지시던 주님은 로마 군사들이 욕을 하며 채찍질을 해도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버리셨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키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 우리를 위한 고난
주님이 죄가 있어서 그런 엄청난 형벌을 받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미움으로 찔러 죽이고, 시기와 질투로 찔러 죽였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허리에 창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와 물을 다 쏟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허리는 창에 찔리시고, 손과 발은 대못에 찔리셨습니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몸의 모든 기능이 균형이 깨져 고열에 시달리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모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주님은 오직 우리를 위해 당하셨습니다.
바로 나의 허물 때문에, 내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내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모에게 거역하고, 세상에 빠져 쾌락을 즐겼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고난입니까? 아무 죄 없이 우리를 위해 그토록 견디기 힘든 고난을 당하신 주님, 그 주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그 고난을 견디신 주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찾아온 고난을 피하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주님의 고난을 나도 받기 원한다고, 그 고난의 흔적을 갖기 원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을 망치고, 취직이 안 되고, 사업에 실패한 것이 고난입니까? 좋은 집에 살지 못하고, 사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하는 것이 고난입니까?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아무 잘못도 없이 누군가를 위해 견디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온 세상의 축복이 되기 위해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고난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왜 고난이 축복인지 알지 못한다면 마지막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까?
3.우리가 평화를 얻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 고난에는 뜻이 있다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축복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맞으시고 상처를 입으심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의 값을 치르셔서 우리가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가 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대신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죄인들이 감당해야 할 죗값을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의 고난, 그 고난 때문에 우리가 회복되고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고아원의 특별 규칙
프랑스에 나쁜 짓을 일삼는 아이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 한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그 고아원만의 특별한 규칙 때문이었습니다. 그 규칙은, 잘못을 행한 아이에게는 엄격한 처벌을 내리는데, 만약 대신 벌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그 아이가 대신 벌을 받게 하는 규칙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팔을 칼로 찌르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칼을 휘두른 아이는 고아원 아이들의 공동의 결정으로 암실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암실 근처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고, 꼭 필요한 음식만 넣어 주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중에 암실에 갇힌 아이를 대신해 벌 받을 사람이 있니?”
그러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암실에 갇힌 아이에게 칼에 찔린 아이가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칼에 찔린 아이가 대신 암실에 갇히고, 칼을 휘두른 아이는 풀려났습니다. 풀려난 아이는 빵과 물을 나르게 되었는데, 점차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자신을 대신해 벌을 받는 아이의 사랑 앞에서 마음이 변화된 것입니다. 칼을 휘두른 아이는 그 길로 원장님을 찾아가 울면서 청했습니다.
“저 아이를 빨리 꺼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
자신을 칼로 찌른 아이를 대신 암실에 갇힌 그 아이처럼,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짓밟히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져 상처와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혹시 고난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빨리 고난을 피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인간이 고안한 고난의 극치라는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죄 없는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십시오. 채찍에 맞으신 그분의 몸을 만져 보십시오. 찔리신 손과 허리에 손을 넣어 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고난의 언덕 골고타를 올라가신 주님의 찢기신 발을 씻겨 보십시오.
그러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난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힘듦과 어려움을 고난이라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던 모습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 고난으로의 초대
제게도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제 허물과 죄로 당하는 고통을 고난이라 여겼던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회복되어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는 행복을 누리면서도 힘들다고 원망했던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이제 그 부끄러움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주님처럼 고난을 받음으로 누군가의 축복이 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이 고난의 축복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함께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왜!
왜요?’라고 울부짖었지만….
죄를 짓게 하심도
고통을 이겨내게 하기 위한
속죄의 표징이셨고,
사랑의 표현이셨음을...
시련에 닥친 순간의 감정으로는
왜! 하필 나인가요? 외쳐보지만,
이내 침묵 속에
나의 허물과 죄를 보여주심에
고개 숙이며 순명 하였지요.
그러나….
너무도 갑자기
너무도 빨리
너무나도 큰 시련 앞에서는
목놓아 울부짖었었네요.
하느님!!
계시기는 계시는 건가요?
계시면 한번 나와보세요?
저의 그 울부짖음 저버리지 않으시고
드러내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그 깊은 사랑에 감사드리며
지난날의 부끄러움 모두 버리고
주님 손 꼭 잡고 기꺼이 걸어가겠나이다. 아멘.
고난은...필요하지 않은데 꼭 주시드라구요..
익숙해질라 하믄 거둬주셔서 그나마 감사기도도 드리는데
지나고 보면 고난도 보약이 되는것 같으니..참 간사합니다.
뭐든지 주시면 받아야 하는 신앙인이,
무섭기도 하지만 달게 받겠습니다,
제가 견딜만큼만 주실것을 믿기에...
아멘.
아멘.
아~~멘.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주님처럼 고난을 받음으로
누군가의 축복이 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