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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경종의 장인 심호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심호[沈浩, ? ∼숙종 30년(1704)], 본관은 청송(靑松), 조부는 전라도 관찰사 심권(沈權),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심봉서(沈鳳瑞), 배위는 영원부부인 고령 박씨이다. |
▲ 묘역 입구에서 올려다 본 좌우측 묘역 모습. 입구에 심호 묘비(좌)와 심권 신도비(우)가 있습니다. |
▲ 심권(沈權) 묘역 전경 |
숙종 22년(1696) 따님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자, 영소전참봉에 배수되었다. 세자빈은 고(故)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孚)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로우며 예쁘고 온순하여 11세에 간택에 뽑혀 책례(冊禮)를 행하였었다. |
▲ 심호선생 묘역 전경. 곡장은 허물어져 기단만 남아 있습니다. |
이후 양궁(兩宮)을 받들어 섬기는 데에는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동궁(東宮)을 섬기는 데에는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서 곡진하게 예절을 갖추었다. |
▲ 심호선생 봉분과 우측에 위치한 묘비와 망주석 |
숙종 29년(1703)에 사직령(社稷令)이 되었으나, 어리석고 둔하며 무식한데 권세만 믿고 위세를 부렸다. 금오랑(金吾郞)으로 있을 때에는 하리(下吏)를 매질하여 거의 하루도 거른 날이 없었으므로, 온 부내(府內)가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 |
▲ 좌측면에서 바라 본 심호선생 묘역. 좌측에는 깨져서 교체된 상석이 보입니다. |
길을 가며 사람을 물리칠 때 즉각 돌아서서 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바로 잡아가두고 하인을 시켜 뇌물까지 요구하여 욕심을 채우니, 원망과 비방이 항간에 끓어올랐다. 전조(銓曹)에서 사직서(社稷署)는 한직(閑職)이므로 폐단이 없을 것을 바라고 옮겨 임명하니, 그가 매우 분개하고 원망하였다고 전한다. |
▲ 곡장은 양쪽 기둥만 남아있고 삼면은 대리석으로 낮게 둘렀습니다. 묘역 우측에는 곡장 기단석들이 덩그러니 흩어져 있어... |
숙종 30년(1704) 2월에 첨정(僉正)으로서 졸(卒)하니, 왕세자가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하고, 임금이 상장(喪葬)에 드는 물품을 넉넉히 지급하게 하였다. 이후 4월에는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경종 1년(1720)에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에 추봉되었다. |
▲ 심호선생 묘역 뒷편에서 남한강 방면으로 바라 본 모습 |
강상면 세월리 노인회관 좌측으로 다리를 건너 300m쯤 들어가면 고목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곳에서 다시 좌측 길을 유지하고 들어가면 왼편 야산 밑에 심열 신도비가 보인다. 이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더하우스 펜션(강상면 세월리 268-11) 바로 옆에 청송심씨 문중 묘역이 있다. |
▲ 우측 능선으로 내려 오면서 다른 묘역을 둘러 보았습니다. 상단의 심예겸(沈禮謙)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과 전면 모습 |
▲ 심예겸 묘역 아래는 아들인 심열(沈悅 - 생부는 심충겸)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심열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과 전면 모습 |
▲ 묘역군 능선 중간의 중앙 부분에는 심열의 아들인 심희세(沈熙世) 묘역이 있습니다. 우측 묘역은 처음에 올랐던 심권 묘입니다. |
▲ 전후면에서 바라 본 심희세 묘역 |
심호선생 묘역 위치도 |
↑ 위의 화살표 부분에 심호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산7 |
지도 하단의 하얀 바탕에 화살표 부분이 심호선생 묘역입니다. 양평군청을 기준으로 위치와 거리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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