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치형과 함께 떠나는 일본바둑기행에 앞서 - 들어가며
바둑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바둑기술뿐이었던 제가 대학에서 바둑에 관한 강의를 하게 된 지 벌써 7년이 되어 가는군요. 바둑사, 바둑문화론, 기사론, 명국연구... 창피하게도,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바둑을 공부했던 수 년 간 그리고 프로기사가 된 이후 수 년 간, 제 자신은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수업들, 하지만 바둑을 둘러싼 문화의 이해를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수업들.
그 수업들을 위해 읽지도 못하는 중국과 일본의 바둑서적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떠듬떠듬 책들을 읽어가며 준비한 수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어느새 연구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매년 똑 같은 패턴으로 이루어지는 강의와 행정업무 속에서 타성에 젖기 쉬운 학교라는 공간을 떠나, 변화하는 세상을 경험하고 부족했던 공부를 보충하도록 주어지는 이 소중한 시간은 1년입니다.
수업을 위한 단편적인 공부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공부가 가능해진 이 시간을 저는 지금까지 책에서만 읽었던 내용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는 시간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내린 결정이 일본 문화기행입니다.
중국이 고대바둑의 발상지라면 일본은 현대바둑의 초석과 기틀을 세운 곳. 바둑과 관련된 유적과 자료가 풍부한 그곳에서 1년을 보내며 그 황홀할 문화를 직접 체험할 생각입니다. 처음 머무르게 될 곳은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간사이(關西) 지방입니다. 교토(京都)에는 초대 본인방 산샤가 머물렀던 작코지(寂光寺)가 있고 나라(奈良)에는 17개의 화점을 가진 목화자단기국이 보관된 쇼소인(正倉院)이 있으며 오사카(大阪)에는 1948년 일본기원으로부터 독립하여 지금까지 관서바둑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관서기원이 있습니다.
▲오사카의 중심, 나카노지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전체의 비중이 도쿄(東京)로 옮겨지기 전까지 일본바둑의 중심이었던 이곳에서부터 일본의 바둑문화를 공부하는 것이 이번 연구년의 목표입니다. 전설이 된 명인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 과거 장인들의 예술혼이 담긴 바둑 유물들, 현대바둑 고수들의 격전현장을 직접 보게 된다는 기대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렙니다만 한편으론, 저 혼자 이러한 호사를 누린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분들과 저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연재를 결심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 간, 제가 다녀온 곳, 만난 사람, 공부한 내용은 간략하게나마 정리되어 이곳에 소개될 것입니다. 지면을 통한 전달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의 바둑문화에 대한 이해가 좀더 깊어지는 데 작은 힘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잘 다녀 오겠습니다.
▲관서기원 전경 남치형 교수와 함께 떠나는 일본 바둑문화 기행 1. 관서기원(關西棋院)
한국의 한국기원, 중국의 중국기원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기원으로서 일본기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일본에는 한국, 중국과는 달리 또 하나의 기원이 있다. 현재 121명의 프로기사가 소속되어 있고, 매월 기관지 『圍碁關西』를 발행하며, 내년이면 창립 60주년을 맞는 관서기원(關西棋院)이 바로 그것이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일본의 바둑문화를 소개하기로 하였으니 관서기원을 그 첫 주제로 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30도를 넘는 뜨거운 날씨에 기온을 내리기는커녕 습도만 높이는 가랑비가 내리는 여름, 관서기원의 모리노 세츠오(森野節男) 9단의 안내로 관서기원을 찾아갔다. 구(舊)오사카시청, 오사카 공회당, 오사카제국대학(현오사카제국대학) 등과 주요 상업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오사카의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 나카노지마 바로 옆에 위치한 관서기원은 외관부터 방문자를 기쁘게 하는 깨끗하고 단정한 9층짜리 건물이었다.
◀바둑이 강해지는 사탕, 하나 먹을 때마다 한 점씩 늘까?
일부러 시합이 있는 수요일에 방문 날짜를 잡았더니 역시나 꽤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기원에 나와 있었다. 건물 1층에 있는 바둑살롱은 일반인들이 바둑을 둘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간단한 음료를 마실 수 있고 프로들의 시합이 있는 날은 시합장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전해지는 대국 실황을 볼 수 있으며, 인터넷 대국이나 강좌를 즐길 수도 있는 이곳의 하루 이용료는 1500엔(회원은 1000엔, 여성과 학생은 20% 할인).
깨끗할 뿐 아니라 프로기사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을 감안하면 비싸지 않은 액수다. 기껏 일반인들이 방문하더라도 1층 로비에조차 앉을 곳 하나 없는 지금의 한국기원을 생각하면, 일반인 대국실이 있었던 관철동 시절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좀 더 나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지하 1층의 사무국에서 프로기사이자 사무국장인 타키구치 마사키 9단과 만나 관서기원의 과거와 현재, 기사들의 근황 등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다.
지부 소속 기사까지 총 121명의 기사와 60개의 지부를 거느리고 있으며, 자체 입단제도와 연구생제도, 거기에 자체 기전까지 개최하고 있는 관서기원의 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당당했다. 규모나 재정 면에서 월등한 일본기원이 존재하는 가운데 간사이(關西)지방의 힘만으로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기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도쿠가와 막부가 수도를 에도(현재의 도쿄)로 옮긴 후에도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 불릴 정도로 각지의 물산이 몰리는 곳이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일본의 문화와 경제의 수도는 간사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정치가 사회의 대부분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경제와 문화 역시 도쿄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둑살롱, 내부-쾌적하고 운치도 있다
일본기원과 당시 일본기원 간사이별관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했던 지금의 관서기원도 그러한 역학관계의 틀 속에서 위치해 있었다. 간사이별관 소속 프로기사는 5단 이상으로 승단하려면 일본기원에 가서 승단대회를 치러야 했고, 8단 이상이 되어야만 일본기원에서 열리는 시합에 참가할 수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간사이지방에서 도쿄로 가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부담이었을 전후(戰後)의 사정을 감안하면 자부심 센 간사이 출신 기사들이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에 불만을 가졌던 것도 당연하다.
프로기사를 목표로 하는 어린 기사들은 물론이고, 당시 관서별관의 대표적인 기사였던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마저도 도쿄로 거처를 옮기는 것을 고려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하시모토 우타로를 붙잡은 이가 간사이지방의 실업가였던 키무라 히데요시(木村秀吉)였다. “최고의 기사가 생활을 이유로 도쿄로 가는 것은 간사이의 수치”라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키무라에 지원에 힘입어 간사이의 바둑 팬과 프로기사들은 1948년 6월 일본기원 간사이별관이라는 이름을 관서기원으로 개칭하게 된다.
일본기원과 갈라서기를 주장하는 독립파의 기운이 거세었고, 이름도 관서기원으로 바꾸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일본기원의 하부조직일 뿐이었던 관서기원을 완전히 독립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열린 혼인보(本因坊)전이었다. 일본기원이 당시 2년에 한 번씩 개최되던 혼인보전을 매년 개최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는데, 이것이 당시 혼인보위를 가지고 있던 하시모토 9단과 관서기원 사람들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독립을 추진하게 하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원래는 하시모토 9단도 혼인보전을 매년 개최하는 것에 찬성하는 기사 중 하나였으나, 그가 혼인보에 오르자마자, 그것도 본인과는 아무런 상의 없이 일본기원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50년 9월, 관서기원은 일본기원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 스스로 면장을 발행하고 승단대회를 치르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한다. 한편 독립에 반대했던 협조파 기사들은 일본기원 관서총본부라는 명칭 하에 활동하게 된다.
▲관서기원 본선 대국실, 일본식 다다미 - 외국인의 눈에 이런 게 큰 매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5단 이상 고단자가 6명, 저단자가 21명, 총 27명으로 시작된 관서기원의 가장 큰 힘은 혼인보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하시모토 우타로일 수밖에 없었다. 혼인보는 현재에도 여전히 일본 3대 타이틀의 하나로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유일한 타이틀전이었던 만큼 그 의미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컸다.
때문에 관서기원의 독립 후 일본기원에서는 하시모토 9단의 혼인보위를 박탈하자는 의견이 상당하였으나, 도전자로 결정되어 있던 사카다 에이오를 비롯한 많은 기사들이 ‘바둑 두는 사람은 바둑으로 승부할 뿐’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결국 이듬해 두 기사 간의 도전기가 치러진다. 결과는 다시 하지모토 9단의 승리. 역사를 가정해 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만일 이 때 사카다가 우승을 하였다면 과연 지금까지 관서기원이 존재했을까 의심이 될 만큼 중요한 승부였다.
그로부터 약 60년이 흘렀다. 일본기원에 등을 돌렸던 기사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일본기원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지금도 여전히 면장의 발행, 자체적인 입단제도 등을 두고 있지만 그것들이 기원의 주 수입원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을 두고 서로 다투지 않는다.
일본기원 출신의 기사라 할지라도 관서기원 출신의 기사가 단위가 더 높을 경우에는 관서기원에 와서 대국을 하도록 되어있을 정도이다. 여전히 전국을 상대로 하는 일본기원에 비해 여러 가지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지만 소속 기사들은 물론 관서기원을 응원하는 지역의 바둑 팬들의 열성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보인다.
현재 관서기원의 대표 기사라 할 수 있는 유키 사토시(結城 總) 9단은 기성전(棋聖戰) 준우승 등 일본기원의 일류 기사 못지않은 성적으로 관서기원을 빛내주고 있다. 한편 얼마 전 열린 그의 제56회 NHK배 우승 축하연에는 1인당 15000엔이라는 비싼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마추어 팬들이 참가하여 그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다. 유키 9단은 현재 일본기원의 장쉬 9단과 ‘작은 기성’이라 불리는 기성(碁聖) 타이틀을 놓고 도전기를 벌이는 중이다.
▲관서기원 본선 대국실에서 바라보이는 외부 전경 지역 바둑 인구를 늘리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기원 5층에 위치한 위기교실(圍碁敎室)에서는 주중 하루도 빠짐없이 바둑강좌가 열리고 여기에는 주로 젊은 기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중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입문강좌는 무료로 들을 수 있는데 이 역시 새로운 바둑 팬을 만들고자 하는 관서기원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각종 아마추어 대회뿐만 아니라 어린이 바둑 페스티벌, 프로기사와 함께 하는 합숙 훈련 등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타키구치 사무국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한국기원에서 열리는 시합 중 점심시간이 1시에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11시 45분부터 시작된다. 주변 회사원들이 붐비는 점심시간을 피해보자는 취지라고 한다. 덕분에 기사들이 대국하고 있는 장면을 놓치긴 했지만 대신 대국실 안을 내 집처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살펴 볼 수 있었다. 깨끗한 일본식 다다미 방, 기분을 차분하게 해 주는 도코노마(床の間)의 장식, 그리고 관서기원 건물 중 가장 높은 9층에 대국실이 자리 잡은 덕에 한 눈에 펼쳐지는 나카노지마의 격식 있고 고풍스런 풍경.
이런 곳에서 바둑을 두면 나도 좀 더 잘 둘 수 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모리노 9단의 단골 소바집으로 향했다.
▲일반 바둑 팬들이 이용하는 바둑살롱 전경
○●... ◇ 남치형
프로입단후 서울대 영문과, 동대학 영문과 대학원을 나왔다. 바둑TV해설, 신문관전기 등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남치형의 일본棋행'은 월간바둑에서 2009년 8월부터 연재되고 있으며, 일본바둑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한국바둑의 문화를 되짚게 해주는 수준높은 칼럼이다. 사이버오로에서는 1회분을 내용에 따라 매주 1회, 혹은 2주에 걸쳐 2회로 나눠 연재한다.
저서로는 Jungsuk in Our Time(2000, 한국기원), Contemporary Go Terms(2004, 오로미디어), Baduk Made Fun & Easy 1(2006, 은행나무), Baduk Made Fun & Easy 2(2007, 은행나무) 등 다수의 영어 바둑책을 펴냈으며, “Malory의 The Tale of the sankgreal연구”(2004, 석사학위논문) 외 다수의 바둑학 논문이 있다.
[글 : 남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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