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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I. 로이드 존스의 생애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남 웨일즈 카디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1981년 3월 1일에 81년간의 순례자의 길을 마치었다. 그는 본래 내과 의사로 수업을 받고 그는 왕실주치의였던 호오더경의 조수로서 미래가 보장된 의료계의 경력을 1927년에 포기하고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채 같은 내과 의사였던 아내 베단과 함께 그의 고향인 남 웨일즈 탈보트 항구의 아베라본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1938년에 그는 버킹엄 게이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켐벨 모르간 박사와 동사로서 초청을 받았다. 1943년 단독 사역을 시작했고 1968년 8월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하기까지 거기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그 다음 그는 순회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여생을 주를 위하여 섬겼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1)
설교자로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한국에서 많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이다. 그의 저서들의 계속하여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데 그 분의 책들을 참고하시면 여러분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II. 로이드 존스의 성령사역과 성령세례
1. 들어가는 말
현대 21세기의 영성과 성령에 많은 관심이 대두되는 시기에 이렇게 중요한 사람들의 성령론을 고찰하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빛과 소금교회 그리고 문설연과 새벽이슬에게 또한 감사 드린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더욱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렇게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문설연의 신목사님과 그 밖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먼저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중에서 성령의 세례라는 부분은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적인 생각과 신학을 가지고 또한 개혁주의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분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적인 길을 벗어나 조금 그 사역에서 문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개혁주의 성령론에서는 조금 나아가고 그렇다고 오순절적인 성령론에는 다른 그런 견해를 필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많은 독서와 목회에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운 듯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웨일즈의 부흥을 보고 자랐다고 할 수 있고 자신이 하는 목회사역에서 큰 부흥은 없었지만 개인적인 그리고 지엽적인 부흥을 보고 갈망한 사람이다. 이것들이 그의 목회와 사역에 그리고 신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번 발제에서 전체적인 성령론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논쟁이 되는 부분에 집중을 하도록 한다. 성령론에서 그는 성경의 논리와 교회사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필역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그 안에서 목회자로서 성도로서 우리에 유익을 주는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2. 성령의 중생의 사역
1> 성령의 중생의 은밀한 사역
로이드 존스에게 성령의 사역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사역은 중생의 사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에게 그 일이 발생했을 때에만 알게 된다.1)
그가 중생한 증거들로 그는 롬8:7,9절을 통해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로마서를 인용하면서 성령의 사역으로 자연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된다.2)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과 12절과 고린도전서 2:14절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일을 받을 수 있고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다3) 라고 말한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으며, 모든 성도들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런데 성령의 중생의 사역은 은밀한 사역으로 보고 있다.
2> 중생한 사람의 증거들
중생은 은밀한 사역이지만 우리가 내주의 사역으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 사고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시게 하며, 규정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어지고, 그리고 언제나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을 소원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된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늘 염려하고 주님, 내 사랑이 약하고 연약해서 늘 걱정입니다 고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더욱 더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죄를 짓는데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에서 자기가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더불어 그는 점점 갈수록 죄와 알과 유혹이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예민해 진다.
결론적으로 자기 속에서 의와 거룩을 사모하여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들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면서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없는 지는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4)고 로이드 존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으로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중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 즉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5)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성령의 세례를 별개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로 인한 중생의 사역은 죄를 깨닫게 하시며, 빛을 비추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사람 안에서 내주함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다. 그리고 은밀한 사역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알 수 없는 사역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결과들은 분명히 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3. 성령세례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고 보면서 성령의 세례는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로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행동이고 특권이다1)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 세례는“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2) 라고 말한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특수하게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령 세례에 대한 그 나름대로 이론은 사도들이 중생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계신 당시에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으고 예수가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하면서 이 성령 세례는 중심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역임을 증거한다.
1) 성령 세례의 성경적 증거들
1> 사도들의 성령 세례: (행1-2),
여기에 나오는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다. 그런 증거로 요한복음 7:37-38을 증거 하면서 여기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를 말하면서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5:3,17:6-9) 이것으로 볼 때 사도들이 오순절 이전에 모두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은 성령이 부음 바 된 사람들이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3) 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1:4-8을 통해서 이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똑같은 사람들이 이미 신자들이고 거듭난 사람들이며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 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주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고 있는 것이다.
2> 사마리아의 성령 세례 (행8장)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6-8)
여기서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8:12 )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오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 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4-17)
이들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믿은 참된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를 함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4)
3> 바울의 성령 세례(행9장)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7-18)
여기서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믿었다고 보며 더불어 후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보냄을 받고 그가 안수함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후에 물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고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고 성령의 세례를 주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습니다. 행9장18절을 보면서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이것으로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다5)고 말합니다.
4> 고넬료 가정의 성령세례 ( 행10장)
고넬료 가정의 사건은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세례가 내려온 것으로 보고 있다. 믿음과 성령 세례가 같이 올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5> 에베소의 12제자의 성령세례 (행19장)
그리고 행 19장을 통해서 그는 더욱 자신의 논증을 분명히 밝혀나갑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 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여기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으면서 그들이 복음을 믿었지만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세례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한다 그리고 바울이 안수를 함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6) 고 말하면서 분명히 중생과 믿음과 연관되고 그 이후에 성령세례를 별개의 것임을 주장한다.
6> 에베소 교회의 성령 세례 (엡1:13-14)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회상시키며 그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3-14)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그리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하면서 신자만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순서적으로 믿는 일이 먼저이고 그 후에 성령으로 인치는 것이 온다고 말한다.7)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세례는 동시에 일어날 수 도 있고 또는 다르게 일어날 수 도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성령 세례의 결과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의 직접적인 결과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체험적인 증거라고 말합니다. 중생은 신비한 것이며 영혼의 깊은 곳에서와 중심부에서 이뤄진 기적적인 행동으로 어느 누구도 그리고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그가 중생한 그 순간에 관해서 말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의식적이며 체험적이며 분명하며 명백하고 선명하여 받는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것이 인식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1) 체험적인 것에 관하여 그는 주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으로 구분을 한다.
1> 주관적인 체험
주관적인 체험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례적인 자각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 성부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성령)의 영광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것을 믿었지만 그가 말하듯이 그것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로 20세기 웨일즈의 대학 총장인 토머스 찰스 에드워드가 1859년 그가 학생 때 체험한 것을 말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을 때에 어느 집회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가 떠날 때에 “...그가 심지어 육안으로 불수 있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는 것입니다.”그는 하나님과 만났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D.L.무디의 체험을 더불어 말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례적인 자각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2)
그러면서 개인적인 체험의 부분에서 성령의 세례가 임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색다른 확신을 갖는다고 말합니다.3) 그러나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일시 여기면 모두가 자동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확신을 가진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4)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나 그 밖의 성경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듯하다 고 말합니다. 성령의 세례가 오면 더욱 확신을 가지고 기쁨과 행복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의 한 부분을 통해서 “믿음을 얻는 것과 믿음의 확신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끌어내는데 매우 신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5) 말한다 .
다음으로 성령세례는 가장 높은 형태의 확신을 준다고 한다. 첫 번째 확신의 유형은 성경에서 추론하여 얻는 확신입니다. 두 번째 확신의 유형은 요한 1서 5장13절의 말씀과 같이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세 번째 유형은 친히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이다. (롬8장15-16절) 이것을 토마스 굳윈의 글을 인용하면서 아버지와 아이가 길을 가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아이를 들어올려 안아주면 귀여워해 주는 사랑을 듬뿍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6)
성령으로 세례가 임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타서 체험적인 것이 된다. 이것으로 영적 마음이 자극하게 된다고 증거 하면서 그는 청교도인 존 플라벨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체험적인 것들을 증거합니다. “이것들은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7).
2> 외부적인 증거
그러면서 성령 세례의 외부적인 증거들을 여러 가지 제시합니다.
그 한가지로 교회의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세례가 교회 역사상 모든 위대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령세례와 부흥과의 사이에 있어서 차이점은 단순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수효의 차이이다. 큰 무리, 즉 사람의 그룹으로서 부흥을 정의하는데,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성령이 함께 모인 사람들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이다.8)
여기서 말하는 부흥이라는 것은 교회성장 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영적 대각성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은 사도행전의 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재현9)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이 교회위에 다시 부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가 집단적으로 부어지는 역사가 부흥이고 부흥이 성령의 세례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령세례는 발생하는 사람들에게와 이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10)
3> 성령세례를 받은 외부적인 증거들에 대한 성경의 증거
이러한 증거들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들을 이러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듯이 오순절 강림사건은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2:12-13)
사람들이 감정의 격발과 활력, 그리고 기쁨과 풍부와 힘이 넘침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혹하는 것11) 그리고 그 결과가 사도행전 2장 44-47절에 나오는 유무상통하는 삶이고, 이러한 경향들이 부흥의 시기마다 있었다는 것입니다.12)
그리고 사도행전 4장31절에 나오듯 모인 곳이 진동하였다. 즉 굉장한 감정의 고조가 그 자리에 모든 사도들과 모든 제자들에게 있었다는 것13)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 집사들을 임명할 때에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관찰될 수 있다14)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들이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전도와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목격될 수 있고 그리고 9장에서 바울을 통해서 아나니아의 안수로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성령이 충만하여 변화된 것15)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10장에서 고넬료 집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베드로와 그 동행한 자들이 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장에서 제자들에게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묻고 그들이 세례를 받고 후에 바울이 안수를 함으로 성령이 임하는 것16)입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서 초대교회에서는 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그리고 반복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그들 위에 부으심으로 기독교회가 시작하셨다는 것과 신약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교회이다 그리고 신약의 모든 교훈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고 말하면서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지 못하여 문제가 심각하게 된 것이며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초대교회와 같아야 할 것이라 17)고 말한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를 부으심과 교회의 부흥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말하고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은 바로 이 성령세례로 기름부음의 역사를 통해서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부흥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온전히 그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주님이 주권자이며 성자께서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서 이 선물과 세례를 베푸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3) 교회사 속에 있었던 증거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성령세례와 부흥의 관계를 교회사 속에서 몇가지로 증거한다.
1904-1905년에 있었던 웨일즈의 부흥에서 사람들은 그의 신앙이 부흥되었다고 표현을 했다. 이전에 신앙이 있었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었는데 부흥으로 그들의 신앙에 부흥이 된 것18)입니다. 이것은 부흥의 때에 성령이 사람들과 회중에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1738년 5월 24일에 있었던 올더스 게이트 가에서 존 웨슬리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IVF(UCCF)그 밖의 여러 단체의 원조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지도했던 캠브리지의 유명한 성직자인 찰스 시몬은 “ 이것(부흥/성령의 부음)은 결코 그것을 아직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많은 백성들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즐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심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감정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찰스 시몬에게 체험적인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보통 그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침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믿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해온 자들을 위해마련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이러한 은사가 그들에게 허락되어지는 것이다.”19) 라고 말하면서 끝맺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입는 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이고 성령의 부음이고 인 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은 그 사역을 색다르고 능력 있게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4) 성령세례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러면 성령의 세례가 주어지는 목적이 무엇인가?
일차적인 목적과 기능으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위대한 구원사역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한다1)고 말한다. 그는 누가복음 24장 45-49절에서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목격자로서 증인으로 해야 할 일과 더불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 울 것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설명한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모든 말씀에서 성령의 세례의 목적은 바로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2)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2장을 기점으로 제자들은 완전히 증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나가 성령세례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좀 더 완전한 지식을 얻게 한다고 말한다. 즉 행2장33에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성령 세례로 인하여 베드로가 설교하는 내용을 통하여 단번에 알게 된 것이고 분명해 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줍니다.3)
즉 이것은 설교의 역사와 관련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과 그리고 설교자의 모습과 설교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레이 맥췌인의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설교단에 올라가서 설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것은 그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으면서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신 결과들 중의 하나가 외부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의 활동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들은 집회들과 신앙의 운동등을 조직하여 기본적인 요소를 대체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성령이 오실 때 그의 증거가 오류가 없으며, 또 그 결과는 놀랄 만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4) 그래서 우리가 다시금 신약의 본래에로 되돌아 갈 때에 만이 비로소 소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의 초대교회 본래에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능력과 자유이다.5) 사람들이 담대히 증거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세례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무력해졌을 때 하나님은 갑자기 한 사람을 붙드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으시며 그를 일으켜 세워 그의 설교를 변화 시겼다6) 고 말합니다. 그 예로 독일의 요한 타울러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그리고 스코트랜드의 존 낙스 존 리빙스톤 그리고 호웰 해리스 그리고 조지 휫필드나 웨슬리, 찰스 피니 그리고 D.L. 무디와 R.A.토레이, A,B. 심프슨 등을 예로 설명하기를 설교자가 능력과 확신으로 전하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7)고 말합니다.
성령세례와 성화의 관계에서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증거로 행 2:9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증거를 통하여 성령세례는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능력의 세례이다.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가 성령 세례를 받았어도 많은 문제들이 나타난다. 이것을 봄으로 성령세례와 성화의 문제는 직접적인 관련됨을 볼 수 없다. 그러면서 롬8:12 말씀과 같이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죄를 없애버린다면 사도가 굳이 우리에게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7) 성령세례와 성화의 관계
성령의 세례와 성화저인 측면에서 성령의 열매는 자란다는 것으로 구별된다고 보고 있다. 열매가 맺어지고 자라나는 것은 성화적인 측면인데 성령의 세례가 이 성화적인 측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1)고 생각한다.
성령세례는 성화가 다 이루어진다고 보는 성결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성령의 세례는 성화를 가능한 한 가장 많이 격려해 준다. 성령세계가 성화에 가장 자극제이며 동기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매우 좋은 시금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항상 성령의 사역과 작용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것이나 모든 것에 적용시켜야 한다.2)
4. 성령의 인침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세례는 같다 같은 것인데 문맥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3) 라고 말합니다.
1> 인침의 구절과 이해
성령의 인침이라는 것은 고후1:22 20-22 “ 우리에게 기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그리고 에베소1:13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나니”, 엡4:30 “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이것은 이미 구약에 약속된 것이지만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때에 성취된다.4) 인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것이고 그리고 신약의 교회와 성도에게 성취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인치는 것이 믿음으로 중생한 이후에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2> 인침의 의미
인침의 의미에서 찰스 하지는“ 인치심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의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다”
찰스 시몬은 이것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교회에는 언제나 그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많은 자들이 있다.……, 이와 같이 성화의 더 높은 확신은 믿은 후에 하나님과 더 가까지 동행하는 사람들의 것이다.5) 성령의 인침의 의미들을 권위자들의 생각을 빌려오면서 인침의 의미가 또 다른 어떤 것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하여 교회에는 언제나 인침의 의미는 소유권적인 의미가 있고 더나가 권위를 부여하거나 참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6)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요1장 33절과 6:25-27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하여 인쳐 진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에서 보증의 의미보다 권위를 부여하다. 혹은 참되다 증명하는 것7)이다. 웨스트 코드 감독은 인침과 보증에 대하여 “부과된 것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위해 엄중히 따로 구별해 두며 이해할 만한 싸인들로 말미암아 보증된 것”8)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세례와 인침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고 믿은 이후에 얻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감동으로 믿는 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인치는 것은 믿은 후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은 후”에 혹은 “ 믿고 나서 막”9)을 말하면서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5. 성령 충만에 관하여
그러면서 성령세례의 또 한 증거가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음과 동시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1) 그리고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 그는 성령의 세례가 “ 성령의 충만함”을 내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체험하지 않고도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다.2)
1) 성령 충만의 의미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테일러의 헬라어 사전을 인용하면서“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기운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성령에 의해서 지?정?의의 인격이 다 다른 영향과 다른 세력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3)
성령의 충만함에 관하여 충만한이란 ‘가득차다’. 혹은‘성령으로 흠뻑 젖은 것’, 단순히 그들속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넘쳐흐르는 성령으로 충만된, ’성령으로 흠뻑 젖는‘ 것4)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을 두 가지로 구분을 한다.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으로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브사렐과 오홀리압 엘리사벳의 경우들이 있다.5)
그리고 생활상에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이다. 엡5장 18절의 말씀을 관련하여서는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여기서 성령 충만을 지시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한 상태나 조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적인 현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자의 임무수행을 위한 충만과 구별6)을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롬5장2절의 말씀에 관련한 존 오웬의 ‘성령과의 교제’를 진술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망가운데 기뻐하는 것 ... 그것은 어떠한 고난이나 영광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가운데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 성령은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시면서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심령의 환희로 채우시면서 우리 영혼에 그것을 은밀히 주시시도 하고 거두어 가시기도 한다.”7)
그리고 토마스 굳윈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영혼에 임하시고 인간을 압도하시며,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 그는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시켜주며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부터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은 일반적 신앙의 빛을 넘어선 빛입니다.”8) 즉 로이드 존스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백성에서 특별하게 그리고 예외적으로 주시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며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세례는 성령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 곧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는 아니라고 로이드 존스는 본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을 통해서 중생을 한다. 그리고 그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중생과 더불어 성화의 과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가 반드시 완전한 성화를 만들어 내놓지는 않지만 가장 큰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교회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확신과 기쁨과 부흥을 맛보게 하는 것이요 설교자나 사역자들이 권능을 입고 능력있게 사역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령세례라는 책에서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사하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말하면서 우리는 힘써 기도하며 힘써 구해야 할 것이라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구할 가치가 있고 내가 힘써 구해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혹은 성령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성령의 은사들
1) 은사들은 구분 기준들
로이든 존스는 성령의 세례를 다른 것을 보는 사람들과 또 다르게 그 은사들을 이해한다. 첫 번째로 성령의 은사들은 자연적인 은사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연적인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라고 그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들은 이 자연적인 은사들과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진 은사들은 직접적인 은사들입니다.1) 지연적인 재능과 성령의 은사를 구분한다.
그는 계속하여 영적인 은사들이란 “어떤 그리스도인을 구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능력들로 이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영혼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한 신적 은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고 정의한다.2) 교회를 섬기는 목적으로 주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두 번째로 은사들이 성령님에 의해서 주권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주권의 능력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은사를 주실 것인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주시기로 계획하시고 시행하신다는 이것이 성령님의 특권이다.3)
세 번째로 이 은사는 각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져 소유되고 있는 선물이다. 고전 12장 7, 11절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참된 각 지체는, 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받은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별한 영적 은사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네 번째로 은사의 중요성에서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12장14절의 말씀과 같이 몸은 한 지체뿐이 아니요 여럿이니(12:14) 라고 말을 하지만 28절에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라고 인용하면 은사들이 그 중요성에 있어서 다양하다는 분명한 가르친다. 그리고 14장 18-19절을 통해서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음5)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로 모든 은사들은 항상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은 13장을 통하여 "은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과 단순히 그런 이름들은 가진 은사들은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성을 평가 혹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6)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어떤 특별한 은사를 소유하거나 나타내지 못한다면, 우리를 향하여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지도 혹은 성려의 어떤 충만함도 알지 못한다고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7) 이러한 가르침은 거짓된 가르침이다.
2) 일시적인 은사
은사들에 대하여 이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항상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고전 12장의 은사들이 초대교회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일까?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일까? 영속적인 것일까? 이런 모든 은사들에게 이런 원칙 중 어떤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은사들을 나누어야 할까?8)로 질문을 하면서 은사에 대하여 고찰한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은사적인 이해를 기준으로 가지고 은사들을 구분합니다. 그는 은사들 중에 일시적인 은사가 있고 계속적으로 있는 영속적인 은사가 있다고9) 말을 한다.
로이드 존스는 일시적인 은사로는 첫째로 사도직의 은사입니다. 사도직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 영원합니다.10)사도직의 은사와 관련이 있는 예언의 은사11)와 사도적 치유의 은사12)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진 직접적인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환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도의 결과로 환자가 치료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영적인 자들과 어떤 이들이 치유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지만 성령님의 치유의 은사는 사도들과 함께 끝났다고 그는 보고 있다13)고 로이드 존스는 보고 있다. 더나가 기적들14)과 영을 분별하는 은사와 방언의 은사들까지 그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났다15)고 본다.
3) 항존적인 은사
로이드 존스는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항존적인 은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오는 은사들 중에 항존 하는 은사 목록들을 제시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교육의 능력과 섬김과 돕는 은사, 집행과 통치의 은사, 집사와 장로 그리고 다른 직분자들이 소유한 능력, 복음 전파의 능력, 목회를 위한 능력, 권면의 은사와 9절에서 나오는 믿음의 은사 - 여기서 이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사역을 수행했던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며 그런 일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 이다16).
4) 방언에 대하여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에 사도들이 했던 방언은 언어로 15개국의 언어 들려 졌다. 그리고 고린도에 나타나는 방언을 어떤 사람들이 이해됨이 없는 단지 소리나 말들로 일종의 무아지경 속에서의 외침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과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방언의 차이는 오순절 날, 고넬료의 집 그리고 에베소에서 완전함과 영광으로 모두에게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방언을 말하는 자신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으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은 해석할 수 있는 자들을 새로운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볼 때 예루살렘에서도 모든 사람이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 있었던 해석자들이 있었다.17)
로이드 존스는 방언의 은사가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18)
로이드 존스는 사도적인 은사는 그쳐졌다고 말하고 이 사도적 은사와 연관되어 있는 은사들은 그쳐졌고 더불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은사들은 항존적인 은사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 론: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이 개혁주의에서 벗어나서 펜타코스트의 길로 약간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이다. 그는 설교와 목양에 힘쓴 목회자이다. 그래서 그는 목회적 관점에서 그 누구보다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설교자가 이 성령 세례(기름부음, 인침)를 받아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할 때 권능을 입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적인 부분에서 이러한 성령 세례(인침, 기름부음)가 있음으로 부흥과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와 관점에서 성령의 기름부음 즉 성령 세례의 중요성은 특별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초대교회와 같은 그러한 일(성령의 기름부음)들이 교회 회복의 유일한 소망임을 필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가 펜타코스트주의 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은사 면에서 그들과 전혀 다른 면을 보이고 개혁주의 측면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사역적인 면과 설교적인 측면에서 중요하지만 비정상적인 은사 운동에 대하여서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사의 유용성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데 목적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에서 비정상적인 은사운동들이 횡횡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에 대하여 일침을 가하지 않나 생각된다. 은사라는 것이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이 주권적으로 은사들을 주신다는 것을 통해서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러한 은사들이나, 마치 자신이 사도와 같은 권위의 은사가 있음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의 교만함이 사악함을 드러내 주고 있는 듯하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단지 논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목회자로서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는 자로서 그리고 사역에 놓인 우리의 사역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 많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참고도서
성령세례: 로이드 존스, 정원태, 기독교 문서 선교회
성령론: 로이드 존스, 홍정식, 새순출판사
에베소서강해 1 영적 선택, 로이드 존스, 서문강, 기독교문서 선교회
에베소서강해 6 영적생활, 로이드 존스, 서문강, 기독교 문서 선교회
로이드존스 성경교리 강해 시리지2 성령하나님, 로이드 존스, 이순태, 기독교문서 선교회
로마서 강해시리즈 5권. 로이드 존스, 서문강, 기독교문서 선교회
진정한 기독교 1 로이드 존스, 전의우, 복있는 사람
출처 : 로이드 존스 연구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