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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시의 공간 : 창원(마산)·김해
사라진 이름 위에 출렁이는 한 시대의 물결들
김점용
‘마산’이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적어도 행정제도에서는 그렇다. 마산, 창원, 진해가 2010년에 ‘창원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산 주변의 도로 표지판에서도 그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이름은 더러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곡절 끝에 돌아오기도 하지만, 이름에 얽힌 기억이나 장소성은 오래도록 남아서 우리들 생활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룬다. 동서양 철학의 대석학이자 뛰어난 한글 철학자이기도 했던 다석多夕 유영모는 이름의 어원을 ‘이르다’ 혹은 ‘다다르다’에서 찾는다. 도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체험이나 감성, 지식, 기억 따위를 특정 섹터에 고정시킨다. 그렇게 고정된 섹터는 고유의 이름자리를 빌어서 되불려 나오고, 일부는 개인의 장단기 기억을 거쳐 새롭게 윤색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인지적 무의식을 형성하며,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스템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사람의 이름이나 장소의 이름과 같은 고유명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고유명은 존재의 단독성을 마련하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인 셈이다. “고유명을 사용하고 있는 이상,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개체의 개체성”(가라타니 고진)을 갖는다. 그리고 그 개체성은 타자에 의해 발견된다. 따라서 이름의 통합은 그 고유성 내지 개체성을 한 통에 짓이겨 넣은 것이나 진배없다. 비유컨대, 빨강, 노랑, 초록의 물감을 한 통에 넣고 “노랑”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특히 장소는 그 지역 고유의 지역성locality을 가지는 까닭에 이름(지명)의 인위적 통합에서 오는 장소성의 훼손이나 상실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장소성은 해당 지역이 아니고는 결코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언어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현대시의 공간으로써 장소성은 그 지역의 고유성, 단독성, 개별성, 특수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장소place는 균질적이고 일반적인 공간space이 아니다. 그 장소 고유의 역사와 기억, 경험이 압축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특정한 장소는 장소성placeness 내지 장소 정체성을 갖는다. 따라서 ‘마산’의 기억과 ‘창원’의 기억이 같을 수는 없다. 창원이 마산의 오래전 옛이름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름이 문화적으로 유전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의 도시행정가들이 국가의 행정 자원을 절감하기 위해 억지로 붙여놓은 이름 앞에 우리들의 기억은 물론, 경험으로 축적된 인지적 무의식도 혼란스러워진다. 사라진 도로 표지판 앞에서 “어!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일순 난감해한다. 아구찜은 ‘마산아구찜’이어야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이며 사라진 입맛이 돌아오는 법이고, ‘3·15의거’와 ‘부마항쟁’도 ‘민주성지 마산’과 어울려야 오랫동안 숙져온 가슴속 핏줄을 뜨겁게 데울 수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이긴 하다. 최신 모델도 서너 달 지나면 구식이 돼버린다. 기민하게 따라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다 보면 금방 촌놈이 되고 수구가 되고 보수가 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주위 환경에 적응하는 모듈로 본다. 원칙적으로 그것이 옳다.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에 적응하는 한편 자연을 변화시켜왔다. 하지만 근본에 있어 자연은 매우 더디게,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변한다. 이 말은 인간 마음의 진화 속도 역시 자연의 변화 속도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인간 마음의 진화는 문명의 변화에 맞춰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과 변화에 맞춰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변화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는 지진아의 반항이 결코 아닌, 인간 마음의 자연스런 운용의 결과이다. 그리고 시詩는 바로 이와 같은 변화의 물결 위에서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적응의 노래이며, 그러한 변화에 대한 문화적 응전이기도 하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데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중략…)
옛 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夕陽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거나 깨끗이도 깨끗이
──이은상, 「가고파」 부분
‘창원’ 속으로 사라진 마산을 이야기하면서 노산 이은상의 「가고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32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이 작품은, 익히 아는 대로 가곡으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의 경성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지방의 물자와 사람들을 빠르고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높은 건물을 우뚝우뚝 세운 수직의 도시는, 기실 수평의 지방을 식민화한 결과이다. 작품에 드러나는 짙은 향수는 그렇게 서울 부산 등의 대처로 나간 사람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까닭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입에서 오래도록 노래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아득한 노스텔지어를 견디며 현실에 적응해 나간다.
시에서 사용되는 사투리 역시 지역의 고유성을 온전히 받아낸다.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의 구절을 보라. 기층의 생활 언어는 그 지역의 사투리를 통해서 지역 고유의 특수한 정서와 감정을 전달한다.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평소에는 표준어를 구사하다가도 갑작스런 상황이나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향말의 억양이나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산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기도 하다. ‘3·15의거’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로써, 4·19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인가. 1979년,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며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졌던 ‘부마항쟁’ 역시 한 독재자의 종말을 가져온 10·26사태의 빌미가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일제치하 당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카프 운동에 가담했던 시인 권환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1903년 마산에서 태어난 권환 시인은 1926년 희곡 「광狂」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교토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후 귀국하여 카프에 가담했으나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귀향하여 마산에서 첫 시집 『자화상』을 펴냈다.
거울을 무서워하는 나는
아침마다 하얀 벽 바닥에
얼굴을 대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영영 안 보였다
하얀 벽에는
하얀 벽뿐이었다
하얀 벽뿐이었다
어떤 꿈 많은 시인은
제2의 나가 따라다녔더란다
단 둘이 얼마나 심심하였으랴
나는 그러나 제3의 나…… 제9의 나…… 제00의 나까지
언제나 깊은 밤이면
둘러싸고 들볶는다
──권환, 「자화상」 전문
드러난 문면만 보면 영락없는 주체의 분열이다. 유행가의 한 소절도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아래에 깔고 보면 식민지 치하의 지식인이 겪어야 할 고뇌가 깊이 서린 작품으로 읽힌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시대의 선각자로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들볶”이는 내면의 고통이 결국 주체의 분열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오랜 지병인 폐결핵으로 50세에 이승을 떠났다.
문학이 공공의 자산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은 정신적 가치를 문화적 DNA로 담아내 면면이 이어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기운이 남아서였는지 ‘마산의 터줏대감’ 혹은 ‘창동 허새비’로 불리던 시인 이선관은 뇌성마비 장애에도 불구하고 분단과 환경 문제를 온몸으로 노래했다.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이따이 이따이
아아
바다의 유언
이따이 이따이
──이선관, 「독수대 1」 전문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시로 불린다. ‘독수대毒水帶’란 바다의 특정 부분이 조류가 내뿜는 독소로 물든 곳을 말한다. 적조가 심해지면 독수대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위 시에서는 마산의 수출자유지역과 창원 공단 등에서 흘려보낸 온갖 산업 폐수와 독극물로 마산만이 병든 것을 함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따이 이따이”는 아프다는 뜻의 일본어이다. 하지만 민족어에 기반을 둔 언어 내셔널리즘을 내세우며 외국어를 차용했다며 크게 흠잡을 일은 결코 아니다. 시인이 모국어의 수호자라는 영국 시인의 말도 찬찬히 따지고 들면 종래에는 언어 내셔널리즘의 변종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이전에 시인은 세상살이의 한 진경에 가장 정직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는가. “잘 빚어진 항아리”(클리언스 브룩스)처럼 말이다. 더구나 이 시에서 쓰인 “이따이 이따이”는 완전한 외국어가 아니라 카드뮴 중독에서 비롯된 ‘이따이이따이병’의 변용으로 읽어야 옳을 것이다. 그래야만 마산 앞바다에 흘러드는 산업 폐기물과 독극물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표현은 산업화에 의한 환경 파괴와 우리의 바다가 아프다는 중의적인 효과를 매우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죽어가던 마산만의 언저리, 마산과 창원을 잇는 마창대교를 지나 터널을 뚫고 나가면 진해이다. 물론 지금은 창원시로 통합되었다. 그곳은 정일근 시인이 교편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를 썼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등단작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는 지금 읽어도 명편이다. 특히 “사의제四宜齊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의 결구는 전남 강진의 풍경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마산이나 진해 근해의 풍경에 아득하게 겹쳐 놓아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그의 시정은 “남해바다”를 두루 끼고 넘실넘실 풀어져갔을 터이다. 그의 또 다른 시도 남해의 물결을 칠판 삼아 쓰지 않았을까.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바다 한 장
──정일근, 「바다가 보이는 교실 10 -유리창 청소」 부분
시인의 교사 체험이 깊게 녹아 있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은 연작시이다. 그중에는 저 뜨거웠던 1980년대의 열정에서 비롯된 “이 땅의 민주주의”와 “혁명의 빛바랜 꿈”도 있지만, 이처럼 남해의 출렁이는 물살을 맑은 유리창처럼 잘 닦아낸 시도 있다. “형제섬”이라는 고유명 역시 시가 태어난 고장의 장소성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아무래도 마산의 시와 시인은 바다를 떠날 수 없는 모양이다. 정일근 시인의 뒤를 이은 최갑수 시인은 마산에서 대학을 다녔고 마산 앞바다를 배경으로 시를 썼다. 1997년 『문학동네』 등단작에 그 기미가 뚜렷하다.
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최갑수, 「밀물여인숙 1」 전문
지금은 거의 사라진 여인숙. 그것도 물이랑이 넘실대는 바닷가 여인숙에 지친 몸을 뉘어본 적이 있는지……. 운좋게 둘이 몸을 포개어도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그 거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진 적이 있는지……. 바다의 수평, 멀리 하늘과 맞닿은 그 하염없는 끝이 바닷가 여인숙의 끝방에 널브러진 지친 육신으로 밀물져 오는 소리를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바라본 적이 있는지……. 난바다의 물결은 지금도 출렁거리는데…….
최갑수 시인의 고향은 김해다. 지금의 통합 창원시 바로 옆인데 예전에도 창원과 이웃해 있었다. 김해를 배경으로 한 시들은 많지만 대표적으로는 마산에서 태어난 정진업 시인이 있다. 그는 1939년 『문장』에 소설로 등단했으나, 1948년에 시집 『풍장』을, 이어 1953년에는 시집 『김해평야』를 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김해가 갖는 장소성은 우리나라 정치의 희망이자 비극으로 생을 마감하며 남은 자들에게 큰 몫을 안겨준 노무현 전대통령으로 더욱 크게 부각된다. 무거운 마음으로 한 편의 추모시를 읽으며 글을 마친다. 단언컨대, 모든 시는 시대의 물결과 더불어 출렁인다.
국화 한 송이 올릴 줄 몰랐네
담배 한 개비 불 당겨 바칠 줄은 몰랐네
그 고통의 크기 감히 헤아리지도 못했네
어제 같던 그 감동 그 환희 내 생에 또 있을까
이렇게 웃는 사진 앞에 두고 절을 하자니
지키지 못해 미안하단 말 가슴을 친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고
다시는 정치하지 마시길
운명처럼 대통령 또다시 되더라도
정의와 원칙이 통하는 그런 세상은 목숨 걸로 꿈꾸지 마시길
나 같은 삼류 시인이나 되어
한세상 놀다 가시길
혁명, 민주, 인권, 통일도 없는
그런 말조차 사전에 없는 그런 나라에서 태어나시길
엎드려 비나이다.
──조인선, 「노래 1 -노무현 대통령 영전에 바침」 전문
김점용 /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으며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다. 평론집 『슬픔을 긍정하기까지』가 있고 2011년 시산맥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