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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주의 신앙의 종말
말씀/열왕기하 14-17장
요절/열왕기하 17:18
‘실패학’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성공학’은 익숙하지만 ‘실패학’은 낯섭니다. 그런데 실패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패학은 말 그대로 ‘실패의 경험에서 성공의 비결을 찾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검색하다 보니 ‘성서실패학’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사건이 그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실패의 모델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들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1장, 실패로 달려가는 유다와 이스라엘(14-16장)
14장은 유다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이야기입니다. 보통 업적이 나오고 평가가 나오는데, 아마샤는 먼저 평가가 나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역대하 25:2절에 보면,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으나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스타일만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 대해서는 죄를 물었지만, 그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묻지 말라는 것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율법에 따라 산 그런대로 괜찮은 왕입니다.
이런 아마샤가 오랫동안 유다에 조공을 바치다가 독립해 나간 에돔을 사해 근처인 소금골짜기에서 쳐서 만 명을 죽였습니다.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였습니다. 늘 당하기만 했는데 승리를 하자, 아마샤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람을 보내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번 겨루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는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나무에게 전갈을 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아마샤를 싹 무시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요아스 자신은 백향목이고, 아마샤는 가시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는 급이 다르니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금 이긴 것으로 마음이 교만해졌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마샤가 듣지 않자, 요아스는 유다의 군대를 박살내 버렸습니다. 아마샤도 사로잡아 버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180미터나 허물고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기구를 탈취해서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괜히 의기양양해져서 까불다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반역한 무리에게 아마샤는 죽고 그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었습니다. 잠깐의 승리에 취해 교만을 떨던 아마샤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정확히 하면 여로보암 2세입니다. 그는 그 이름 여로보암과 같이 그의 삶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한마디로 못된 것만 골라서 배운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영토가 하맛 어귀에서 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라비아에서 오는 상인들과 지중해로 나가는 무역선을 잇는 무역로를 확보한 것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여로보암 왕 때 이스라엘은 잠깐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잘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이렇게 번성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하나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구원의 희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변나라를 통해 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역사에서 지우실 마음은 없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비록 악한 왕이지만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악인인데,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이런 그를 도우셔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악인의 번성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못된 것들이 번성하게 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변화되어서도 아닙니다. 아직은 심판의 유보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때 누렸던 번영과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마지막 권고였습니다. 회개하면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영원히 즐길 수 있다는 호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최후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60년 후에 멸망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는 것이 죄인에게 있어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내가 봐도 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잘 풀립니다. 그러면 이를 하나님이 나를 다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 없는 착각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유보요, 아직은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탕을 주시며 달래고 계시는구나?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유다는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었습니다. 아사랴는 이사야서에 웃시야로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아사랴보다는 웃시야로 더 많이 알려진 왕입니다. 그는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웃시야 왕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역하26장에 보면, 그는 이방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주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기보다 아버지 아마샤가 에돔을 친 후에 교만해져서 이스라엘에게 덤볐던 것처럼, 그도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제사장만 드리는 제사를 직접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치셔서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요담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달리 유다는 그래도 희망의 싹이 자라는 것 같았지만 교만 때문에 스스로 자기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어떨까요? 15장 8절을 보십시오.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후의 4대 손으로 예후에게 하셨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여섯 달 만에 살룸이 반역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살룸도 한 달 만에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하고 끝이 났습니다(14). 므나헴은 사마리아에서 10년을 다스리는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신흥강대국이 등장합니다. 앗수르입니다. 앗수르는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 중간 지대로, 당시 유목민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앗스르 왕 불이 북이스라엘을 치러 오자 므나헴은 이스라엘의 부자들에게 돈을 거둬 은 천달란트로 급한 불을 껐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북이스라엘은 므나헴에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어 다스렸지만 여전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베가가 그를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즉 북이스라엘은 4번째 반역으로 왕이 바뀌고 있습니다. 베가는 20년간 다스리는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이 이스라엘의 북쪽지방 특히 길르앗, 갈릴리, 납달리까지 다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겨 갔습니다. 나라의 대부분, 2/3를 빼앗긴 것입니다. 사마리아 지역만 남은 것입니다. 이때 호세아가 앗수르의 힘을 빌려 베가를 죽이고 대신 왕이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렇게 반역의 피로 왕권이 자주 교체되는 가운데 남 유다에서는 그래도 다윗의 계보를 따라 왕의 계승이 이루어져 갔습니다. 나병환자가 된 웃시야를 이어 요담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요담은 성전의 북쪽을 재건하였고, 아버지와 달리 직무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또 역대하 27:3절을 보면, 성읍을 많이 건축하고 수도를 요새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람 왕 르신과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습니다. 그시절, 선지자 이사야가 대활약을 합니다(사7:1-8:8). 이사야서를 보면, 앗수르는 계속 서쪽으로,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요담의 말년에 유다의 수뇌부는 친 앗수르 정책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들이 생각할 때, 아람과 북이스라엘 위에 신흥 강대국 앗수르가 있으니깐, 앗수르가 이 두 나라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눌러주면 된다. 그러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치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인 계산 때문입니다. 이때 이사야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계속 경고하지만 듣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이방 나라를 의지하고, 정치적 계산 가운데 친 앗수르 정책을 펴는 유다를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를 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요담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하스는 여전히 친 앗수르 정책을 폈습니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아하스는 남 유다의 왕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로 행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왕들의 길이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여호보암의 길을 따라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했습니다. 즉 자기 아들을 번제물로 받친 것입니다. 이것은 최악입니다. 거기에다 산당들과 작은 산위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온갖 우상숭배와 못된 짓을 서슴없이 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못된 것을 배운 유다가 더 심합니다.
이때에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군을 구성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성을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 동맹군의 소식을 듣고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사시나무에 떨 듯이 떨었습니다(사7:2). 하지만 여호와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전하신대로 아람-이스라엘 연합군은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다는 예루살렘을 지켜냈지만 아람 왕 르신은 엘랏을 회복하여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즉 유다의 영토를 빼앗긴 것입니다. 유다 입장에서는 위기였습니다. 친 앗수르 정책을 펴서,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공격을 막고자 했는데, 오히려 이런 친 앗수르 정책이 이 두 나라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 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유다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이 위기 앞에서 아하스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 보다 정치적 계산 가운데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면서 말합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7) 이것은 아하스가 자발적으로 앗수르의 봉신이 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항복 문서를 내밀고, 나 앗수르의 종이 될테니, 살려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예루살렘을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에워쌌지만 함락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셨습니다. 그 증거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라고 하면서, 아하스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에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베가를 치고 다메섹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로서 아람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때 유다의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을 만나 승전축하를 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았습니다. 정말 폼이 나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래봤자,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던 제단이었는데, 그 제단에 마음을 빼앗긴 아하스 왕은 구조와 양식을 그려서 제사장에게 그대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제단을 만든 후에 왕은 그 제단을 성전에 두고 그 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본래 성전에서의 제사는 오직 제사장만 집행합니다. 더구나 그 제단위에 올라가서 드리지 않습니다. 웃시야 왕은 제사장이 행하는 제사를 자신이 직접 하고자 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반면 아하스 왕은 제사장이 행하는 제사를 자신이 직접 행하고, 제단 위에 올라가지 않는데도, 올라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도 문둥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완전히 포기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이방나라의 우상숭배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행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전에 있던 놋 제단은 성전북쪽에 두고 새 제단을 중심으로 모든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놋제단은 자신이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아하스 왕은 성전의 기구들 중에 청동으로 된 것들을 전부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가 왓수르 왕으로 두려여하여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18). 메시지 성경은 그는 성전 안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앗수르 왕의 비위에 거슬릴만한 것들을 모두 치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자기 신앙을 숨기는 것과 같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백성다운 품위를 지켜가던 유다가 완전히 자발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다 같이 실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2장, 완전한 실패, 이스라엘(17:1-6)
유다 왕 아하스 제 12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9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했습니다.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도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오자 호세아 왕은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쳤습니다. 한때 주변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이스라엘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호세아는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반면 앗수르 왕에게는 해마다 바치던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일명 갈아타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호세아의 배반을 가만히 보고 있을 앗수르가 아니었습니다. 당장에 군대를 동원해 호세아 왕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배반의 싹을 밟아버리고자 이스라엘의 모든 곳을 점령하고 사마리아까지 올라와 삼년간 에워쌌습니다. 결국 호세아 9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때가 BC 722년입니다. 여로보암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지 200여 년 만에 이스라엘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수르로 끌려가 앗수르 지역의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탄생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굳게 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지 않은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학점으로 하면 하나 같이 F학점입니다. 온갖 우상숭배와 혼합주의로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돕고자 많은 선지자들(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아모스, 요나)를 보내셨지만 이들은 이 모든 메시지를 외면하고 결국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완전한 실패의 결과만 남기고 이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왜 이들은 실패했을까요?
3장, 실패의 이유(7-18)
하나님은 왜 이들이 실패했는가를 밝히십니다. 17:7,8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이것은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죄인의 죄를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실패한 이유는 한마디로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실패의 이유를 말하기 전에 먼저 중요한 한 가지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우리는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너무 일방적으로 규칙을 강요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과연 옳은가?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 율법, 방향만 주시고 지키지 못하면 심판을 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선고하시면서 먼저 소개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손길이요, 이들이 받은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들이 사는 길로서 우상숭배를 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지키는 것이요, 이들의 사는 행복의 길이었습니다. 즉 먼저 은혜가 있었고, 구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구원과 사랑을 지키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분명히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행복의 길,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숭배하지 않는 길 보다 자기를 나름대로 자기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면 망한다. 다시 죄의 종이 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그 길을 가다가 망하였습니다. 누구 탓입니까? 하나님 탓입니까? 하나님의 법이 너무 쎈 것입니까?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산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곧 우리 자신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운전하는 사람이 도로에서 당연히 규칙을 지켜야 안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역주행하거나 음주운전하면 결국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후에, 이들의 삶은 우상숭배로 추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빈 자리를 온갖 우상으로 채우다가 망한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온갖 곳에 우상을 세워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습니다. 하지 말라고 한 일만 골라서 한 것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허망해져서 온갖 것으로 채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돌이키고자 하셨지만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망한 조상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이들은 여호와께서 조상들과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거룩한 분을 따르면 거룩하게 되지만, 우상처럼 허무한 것을 따르면 자신 스스로 허망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는 우리의 소유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섬기느냐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것들만을 따라갔습니다. 그중 최악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녀를 불구덩이에 던져서 제물로 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을 ‘인간 번제’로 드린 사람은 유다 왕 아하스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죄를 논하면서 실제적인 예는 유다의 죄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두 나라가 영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격노하사 그들을 그들 앞에서 제거하셨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실패를 한 것입니다. 예견된 실패를 한 것입니다.
결국 실패의 제 1원인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행복의 길에서 떠난 것입니다. 떠나 버리자, 자연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를 잊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죄악된 본성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로울 것 같은데, 하나님을 대항하면 더 잘 나가고 더 클 것 같은데, 망해버리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했습니다. 즉 받은 것을 잘 잊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왜 안죠? 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나의 구원의 길이요, 행복의 길임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패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결국은 망합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실패를 하게 됩니다. 이들의 실패에서 성공의 길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장, 실패의 뒷맛(19-41)
그럼 유다는 희망이 있을까요? 19절을 보십시오.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따라가는 유다도 위험합니다. 24절부터는 실패의 씁쓸함을 보여줍니다. 앗수르 왕은 강제이주정책을 펴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보내고, 반면 바벨론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을 사마리아 여러 성읍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왜죠? 나라는 망했지만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게 흩어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새롭게 사마리아 땅에 들어온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보내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사자에게 물려 죽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앗수르 왕에게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대책마련을 호소했습니다. 즉 그 지역을 관할하는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는 사마리아 신이 있고, 가나안에는 가나안의 신이 있다는 식입니다. 앗수르 왕은 사로잡은 온 제사장 한 사람을 세워서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이 제사장은 이스라엘에 들어와 있던 온갖 우상을 섬기던 금송아지 제사장이나 바알의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벧엘에 살며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자신도 여호와를 모르는데, 하나님을 섬겨본 적이 없는데, 여호와를 가르칩니다. 이런 씁쓸한 코미디가 망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아도 신학박사가 되고, 목회자가 됩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자신들이 거주하는 성읍에 세워 신상전시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32절에 보면, 타이틀은 ‘여호와를 경외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제목은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데 자기를 위하여 그것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면서, 우상숭배하는 장소에서 자기를 위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슬픈 코미디입니다. 하나님이 망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조롱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습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다고 했습니다. 너무 씁쓸합니다. 이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평일에는 무당을 찾아가 사주풀이를 합니다. “이번에 사업을 하나 하고자 하는데, 어디서 해야 잘 될까요?” 얼마나 웃긴 이야기입니까? 지금 내가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면서, 조그만 신상을 만들고 빌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34절부터는 이 문제를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41절에 보면, ‘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아예 여호와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옆에 우상을 놓고 같이 섬깁니다. 하나님이 나의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우상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고, 이 땅의 문제는 삼재도 없애야 하고, ‘마’가 끼어서는 안 되니까 역술인들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기독교의 모습이라면 끔찍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망각할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자기 필요에 따라 살다보면, 점점 더 이런 혼합주의의 모습을 띄게 됩니다. 우리는 이들의 실패에서 배워야 합니다. 실패에서 배우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배워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지키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방향이 나를 올가 매는 틀이 아니라, 나의 행복과 구원의 길임을 알고 따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왕의 길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악을 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