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복원사업은 2003년 7월 1일 착공하여 2005년 9월 30일에 완공되었다. 또, 가든파이브가 완공된 것은 2008년 12월의 일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을 청계천의 입점상인과 노점상은 어떻게 보냈을까.
공사가 시작되면 청계천 상인들의 영업에 막대한 지장이 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청계천을 마주한 도로가 폐쇄되고 고가가 철거되는 사업이었다. 교통 혼잡이 예상되었고 각종 공사 소음과 비산먼지가 유동 인구를 크게 줄였다. 이에 상인들은 공사에 따른 손실보상과 착공연기 등을 주장하였으나 서울시의 입장은 일절 불가하다는 방침이었다.
서울시가 제시한 세 가지 대책
서울시는 공사를 반드시 강행하겠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상인들에게 세 가지 대책을 제안했다. 첫째, 상인대책 전담기구의 설치, 둘째, 이주와 잔류를 구분하지 않는 상권 관련 상인대책 마련, 셋째, 이주상가 추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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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의 공문 “시장과 청계천 상인대표와의 면담결과 통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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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공문의 면담결과 부분 확대 |
이 중 첫째, 상인대책 전담기구는 청계천복원추진단이 2005년 청계천 복원 이후 해체되고 2006년까지 동남권이주사업추진단이라는 이름으로 전환되나 오세훈 시장 집권기에 들어 담당 업무가 ‘도심활성화 및 지역균형발전사업’을 담당하는 균형발전추진본부로 이관되며 사라진다. 동남권이주사업을 담당하는 부서의 존속기간은 2006년 1월 1일에서 2007년 1월 1일로 단 1년이었다. 셋째, 이주대책은 현재 가든파이브가 되어 이주한 상인들의 고혈을 짜내고 있다.
청계천 상인들이 착공에서 이주에 이르는 긴 기간을 버틸 수 있는 수단은 둘째, 이주와 잔류를 구분하지 않는 상권 관련 상인대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회의적이었다. 먼저 임대료 문제였다. 종로 3가와 종로 4가 및 을지로 3, 4, 5가동과 광희동의 청계천로 주변 상가의 임대료가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공사기간의 상가 임대료 하향세에서 벗어나 2005년부터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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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로 주변 상가의 청계천복원사업 전후의 임대료(월세기준) 동향 비교(어메니티와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유오봉, 2008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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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료가 상승하자 청계천 주변 상권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점포가 몰락하고 새로운 점포가 속속들이 문을 열었다. 청계천복원사업 시행 전(2001년에서 2002년)과 시행직전과 시행 후(2002년에서 2003)를 비교하면, 종로구는 일부 제조업 및 도매업과 함께 금융업, 부동산관련업, 사업지원서비스업이 대폭 증가했고 반대로 중구는 목재, 제지, 화공, 기계 제조업을 중심으로 사업체가 감소했다.
종로와 중구를 통틀어 금융, 부동산, 사업서비스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광고업은 165%, 전문디자인업은 171%, 그리고 금융관련서비스업은 71%의 증가세를 보였다. 또 100개 이상의 사업체를 가진 업종의 사업체 변화율을 기준으로, 가장 많이 늘어난 업종은 부동산 임대 공급업으로 25.8%였다.
오직 부동산 가격 올리는 약속만 지킨 서울시
청계천 복원이 완공된 이후로는 주변지역의 땅값, 집값, 임대료가 모두 상승했고 종로 1가 지역의 상가 분양가격은 준공식 전후로 2배, 청계천 6가와 7가의 상가 임대료는 평균 30%가 상승했다(청계천의 재자연화를 둘러싼 갈등과 쟁점, 조명래, 2005). 청계천 상인들로써는 버티기 어려운 변화들이었다. 결국 점포들은 몰락했고, 자금력 있는 업종이 대신 들이찼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2005년 당시의 풍경은 까페나 레스토랑과 같은 고급업종이 공구상과 같은 기존 업종을 대체해갔으며, 건물의 모습과 간판도 하루게 다르게 바뀌어갔다.
청계천복원사업을 계기로 청계천 주변의 상권이 쇠퇴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상권의 특징이 변했다. 도시경관의 서비스업 중심의 변화는 유입인구의 소비특성에 변화를 불러온다. 금융관련 서비스업장과 부동산업장의 틈 사이에 낀 공구상이나 기계부속품 가게는 변화된 도시경관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소비하러 온 사람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청계천변 주변 상권은 각 상점과 상점간의 상호작용이 활발한 곳으로 누군가는 부품을 공급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부품을 조립하며 산업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곳이다. 임대료의 상승으로 네트워크의 연결고리는 하나, 둘 사라졌고 그 자리에 다른 상점이 들어섬으로 유입인구는 교체되었다.
결국 공문서의 내용에서 약속의 축을 이루는 3가지 중 이루어진 것은 이 중 한 개인 이주단지건설, 즉 또 다른 개발사업이 전부였다. 임대료를 포함한 부동산 가격의 급상승, 이에 따른 상권과 유입인구의 교체는 청계천 입점상인들의 몰락을 불렀고 이 과정에서 서울시가 할 수 있는 것은 약속과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이주가 약속되었다고는 해도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5년을 버티라는 것은 너무 길다. 잔류를 결심한 사람들로써는 부적응은 곧 끝을 의미했다.
쫓겨가는 상인들
한편 노점상에 대하여 서울시는 보상과 관련한 어떠한 대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굳이 하나를 들자면 2003년 6월에 설치한, 주변 상인 및 노점상들의 동향파악을 맡는 ‘노점대책반’이었다. 이들의 역할은 노점상의 공사 반대행동에 대한 동향 파악 및 철거집행의 지원이었다. 청계천의 노점상들은 수 십 년간 자체적으로 도로와 인도에 구획을 설정하고 영업을 해왔지만 이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보장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결국 2002년 8월 노점상 박봉규 씨가 분신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곧 노점상들은 공사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설계에 따르면 기존 청계천변 인도의 폭인 5m에서 7m는 공사 이후 3m로 줄게 되었다. 이에 노점상들은 변경을 요구하였으나 공사는 이대로 진행되었고, 착공 4개월만인 2003년 11월 이들에 대한 강제철거가 집행되었다.
서울시는 철거된 노점상들에게 동대문운동장 및 동묘역 부근의 주말 벼룩시장에서의 영업을 제안한다. 2004년 1월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이 문을 열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청계천 시절 노점상들은 업종별로 서로의 지역을 구분하여 구조적인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수 십 년이라는 시간을 통한 경험은 비단 노점상 뿐 아닌 이들을 찾는 유동인구도 가지고 있어, 자신이 구매하고자 하는 물품이 밀집한 지역과 이동경로가 존재했으며 단골 등의 관계 또한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소성과 역사성을 강제철거로 일소 후 한 운동장에 몰아넣은 폭력의 예후는 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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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풍물시장 전경(출처: 노동당 서울시당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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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오세훈 전 시장은 이마저도 2006년 디자인 콤플렉스 건립 계획(지금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약칭 DDP)을 발표하며 현 동대문운동장의 철거를 기정사실화한다.
오세훈의 인수위원회 시절 노점상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발표했던 것에 대해서는 인수위원회 시기가 끝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라며 발뺌했다.
노점상들은 긴 시간에 걸쳐 싸웠지만 2008년 4월 16일, 4년전의 강제철거가 다시 한 번 되풀이 되었다. 제기동에 위치한 옛 숭인여중 부지가 대체지로 떠올랐지만 많은 노점상들은 여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처럼 2003년에서 2008년에 이르는 5년간은 청계천의 입점상과 노점상을 막론하고 수난의 시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