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지도는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을 설명하는 지문이 있군요. 2014년 6월 고등학교 2학년 영어 학력고사 23번 빈 칸에 들어갈 적절한 말 넣기 문제의 지문입니다.
23. Not only is it easy to lie with maps, but it’s essential. A map must distort reality in order to portray a complex, threedimensional world on a flat sheet of paper. To take a simple example, a map is a scale model, but the symbols it uses for parks, restaurants, and other places are not drawn to the same scale, which-if taken literally-would make them much bigger or smaller in reality. Furthermore, a map cannot show everything, or it will hide critical information in a fog of detail. The map, therefore, must offer a selective, incomplete view of reality. There’s no escape from the mapmaking paradox: to present a useful and truthful picture, an accurate map must . [3점]
*scale model: 축척 모형
① show details
② tell white lies
③ use more symbols
④ be multidimensional
⑤ be drawn at full size
23. 지도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쉬울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지도는 복잡하고 삼차원적인 세상을 평평한 종이 위에 그리기 위해 반드시 현실을 왜곡해야 한다. 간단한 예를 들면, 지도는 축척 모형이지만 지도에 사용된 공원, 식당, 그리고 다른 장소를 나타내는 기호들이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 기호들은-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실제보다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현실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더욱이, 지도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거나 세부사항의 안개 속에 중요한 정보를 가릴 수도 있다. 따라서, 지도가 제공해야만 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선택적이고 불완전한 모습이다. 다음 지도 제작의 역설을 피할 수는 없다: 유용하고 올바른 그림을 제시하기 위해서 정확한 지도는 반드시 하얀[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① 세부 사항을 보여줘야
②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③ 더 많은 상징을 사용해야
④ 다차원적이 되어야
⑤ 완전한 크기로 그려져야
지도가 풍경이 아닌 이유를 2가지 들었네요. 사실 지도가 풍경이 아니듯이 관념은 현실이 아닙니다.
1. 복잡한 3차원 입체[즉 공(ball)의 표면에 가까운 지구 표면]를 2차원 종이 위의 지도에 그리기 위해서는 현실을 왜곡할 수 밖에 없다(A map must distort reality in order to portray a complex, threedimensional world on a flat sheet of paper).
여기서는 현실을 3차원으로 파악했는데, 사실은 실제 풍경은 3차원도 아닙니다. 한 번에 육식(六識) 중의 한 식(識)만 나타나며 사라지고 있고, 물질[色=루빠]은 오감 중의 한 감각으로만 나타납니다. 이와 결부된 감정의 바탕이 되는 괴로움/즐거움/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맨느낌 작용(受=웨다나)과 관념의 바탕이 되는 지적(知的) 작용[想=산냐], 그밖의 마음 작용[行=상카라]은 10배 이상 더 빨리 식[識=윈냐나]과 함께 생멸합니다. 이런 실제 생멸 작용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생의 관념과 무기(無記)로 가득 찬 앎으로는 불가능하죠. 위빠사나 수행에서 관념적 인식을 넘어선 알아차림이 점점 더 빨라질 때만 생멸하는 현실에 점점 더 다가갈 수 있을 뿐입니다.
‘볼 때는 보이는 것만 있고, 들을 때는 들리는 것만 있고...’라고 석존께서 말씀하신 현실을 ‘내가 있고 사물이 있다’는 관념 지도의 세계로 환원하며, 그 관념 지도의 세계에 빠져서 현실이 차단함으로써 중생의 관념과 스토리[story]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To take a simple example, a map is a scale model, but the symbols it uses for parks, restaurants, and other places are not drawn to the same scale, which-if taken literally-would make them much bigger or smaller in reality.
예를 들어서 지도에 나타난 기호[학교, 명승지, 철도, 도로 등을 나타내는 기호]가 실제 지도 축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네요. 예컨대 지도에 나타난 철도의 기호는 실제 철도의 크기보다 엄청나게 크게 그려진다는 말이지요. 우리의 관념도 이와 같이 현실에 대한 지도를 만들면서 자신의 애착이 가는 특정부분을 엄청나게 크게 부풀려요. 이것은 필요한 부분을 선별해서 축적하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시끌벅적한 시장통이나 카페에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입니다. 실제로 녹음을 해보면 그 순간들은 오만 소리로 가득차서 대화하는 상대방의 말만을 알아듣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끄러운 여러 사람의 소음 속에서 대화하는 상대방의 말을 내가 속으로 하는 말로 바꿔서 비교적 잘 알아듣습니다. 또한 길을 걸어갈 때 실제의 시야는 크게 작게 흔들리면서 생멸합니다. 그런데도, 흔들리며 생멸하는 흐름 속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정지된 길의 관념이나 찾는 목적지, 사람의 관념을 추출해서 목적지를 찾아가지요. 하지만 이렇게 추출된 관념의 지도에 함몰되어서 축소/확대/과장/은폐의 과정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which-if taken literally-would make them much bigger or smaller in reality) 관념을 통한 행동은 탐진치(貪瞋痴) 등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2. 지도가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고, 세부 사항의 안개 속에 중요한 정보를 가릴 수 있다.
육식(六識)의 진실, 오온(五蘊) 생멸(生滅)의 진실을 외면하는 관념이 감각의 현실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관념이 제시하는 것은 감각적 현실에 대한 내 버전(version)의 이야기일 뿐이죠. 관념에 근거한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감각의 현실과 감정의 생멸은 축소/확대/은폐/왜곡/조작/와전됩니다. 관념은 이렇게 스토리를 펼칠 수도 있지요.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있네. 나를 보고 웃네. 쿨하게 생겼군. 내게 말을 걸면 뭐라고 하지? 부모님은 저 사람과 사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친구들은 입방아를 어떻게 찧어댈까?’ 하지만 잠시 뒤에 그 사람이 말을 건 건 내 옆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보고 있었던 것은 내 옆 사람이었지요.
지도가 풍경이 아니듯이, 관념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고, 감각과 생각을 구별해는 게 현실을 직시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관념과 무기(無記)에 찌든 중생에게는 사실 힘들고 불가능해보일 수도 있지만, 괴로움(苦=dukkha)의 불안정성에 시달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시작할 수밖에 없는 출발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