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가 없는 세상...
그 곳에는 나도 없을 것입니다.
타자는 나를 경계 지워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타자를 통해서만 나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가 있기에 갱신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파가 있기에 찬성파도
있습니다.
거만한 사람이 있기에 겸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에
용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이 있기에 정의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도 적용 가능합니다.
이렇게 타자는 나를 정립해주는
존재입니다.
타자가 존재하는 이 세상...
타자는 나의 세계를 훔쳐가는
존재입니다.
타자의 시선은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생각이 나의 생각에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세계는 타자의 세계로
끊임없이 흘러나갑니다.
나는 내가 구성한 안정적인
세계를 지키고 싶어합니다.
나의 세계를 더 이상 타자에게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바라보인 존재에서 다시
바라보는 존재이고 싶어합니다.
객체가 아닌 주체이고 싶어합니다.
타자의 시선에 무관심해야
합니다.
타자의 경멸 어린 시선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타자의 생각이 담긴 조언에도
무관심해야 합니다.
‘정의의 회복’과 ‘회개하라’는 조언에 대해서는
‘사랑하라’ ‘용서하라’ ‘정죄하지
말라’가 정답입니다.
물론 반대로도 적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무관심은 언제나
실패합니다.
무관심은 타자로부터 나의
세계를 지킬 수 없습니다.
무관심 속에서 내가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타자가
나의 존재 근거의 확보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정립해주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무관심 다음은 증오입니다.
무관심이 수동적이라면, 증오는 능동적입니다.
하지만 증오 역시 언제나
실패합니다.
증오는 타자로부터 나의
세계를 지킬 수 없습니다.
증오 속에서 내가 소멸시키고자
하는 타자가
나의 존재 근거의 확보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정립해주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부류의
타자가 있습니다.
바로 절대적인 타자인 주님이십니다.
그 분은 자신의 세계를
빼앗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라보는 존재이나 바라보인
존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체이지만
객체가 되셨습니다.
무관심이나 증오가 아닌
십자가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의로운 고난과 위대한
희생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 즉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세계를 빼앗기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바라보인 존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
주체이고 싶지만 기꺼이 객체가
되는 것,
무관심이나 증오가 아닌
사랑을 선택하는 것,
이런 것들이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세상에서
예외 없이 타자입니다.
첫댓글 천국에는 타자가 없습니다. 사랑만 존재하고 증오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세계를 빼앗을 자도 없습니다.
오직 나와 너는 주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일을 말하셨지만 이 세상도 타자가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완성입니다. 나와 너가 합쳐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역활이요 효능입니다. 증오아닌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 없는 사랑만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것은 소자 하나에게도 사랑만을 행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을 축복하는 우리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샬롬,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