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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5강
열둘을 세우셨으니
말씀 / 마가복음 3:7-35
요절 /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열두 명의 핵심 제자들을 세웁니다. 새로운 시대, 예수님 이후의 시대를 섬길 새로운 일꾼들입니다. 이들을 통해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세상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사역이 계승되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들을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와 가족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기 위해 회당에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이 따라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 이방 땅 두로와 시돈에서도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여기저기 지역에서 어찌나 많은 무리가 몰려와 예수님을 에워싸며 미는지 작은 배를 대기시켜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질병으로 고생하거나 더러운 귀신 들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일까요?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8b).” 그들은 예수님이 추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며 깨끗하게 하시고 각종 환자들을 일일이 받아주고 고쳐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그를 일어나 걷게 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연약한 한 손 마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신 예수님의 용기와 참사랑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감동하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듯 구름떼처럼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고통받고 시달리다 예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려고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사랑해주고 그들을 고쳐주고 그들을 섬겨주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줄 선한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헤롯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음란하고 불의하였고,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이 완악해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였을 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였습니다. 그 시대는 양들을 책임감 있게 돌봐줄 목자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젊은이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나가 헤롯 정권 타도를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누가복음 6장 12,13절은 조금 더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또 산에 오르십니다. 등산을 좋아해서라기보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이때, 이들을 섬길 사람이 없는 그 시대의 문제를 안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를 세우는 일이 예수님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고통당하고 방황하는 양들은 누가 돌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을 돌보고 섬기기 위해선 자신의 사역을 계승할 제자들이 필요함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기도 후, 제자 열둘을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계승할 핵심 제자 양성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13).” 여기 ‘자기가 원하는 자들’은 감정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공동 번역 성경을 보면,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평소 눈여겨보시고 키우기로 마음먹은 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오래전부터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고 부르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내가 원한다고 다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절대적인 주권’, ‘일방적인 은혜’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로마서 9장 16절도 말씀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절대적인 주권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으시고 부르신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고 인도하십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여기 ‘세우다’라는 말은 ‘창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예수님이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방식은 소수의 핵심 제자 양성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명의 제자를 뽑으셨다는 것은 참 의외입니다. 너무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두 명은 우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는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 다시 말해 지금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열두 명의 소수 핵심을 뽑으셨다는 것은 교육적, 환경적 요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하실 때 가장 적합한 환경을 고려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보다 소수의 핵심 제자 양성에 집중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열둘을 세우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것은 인격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심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과 깊은 관계성을 맺고 그들의 병든 내면이 치유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전인교육으로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여행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을 통해 삶과 성품을 배우도록 하는 산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즉 주님과의 동행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까이 오면 부담스러워합니다.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고 사생활을 지키길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모든 삶을 제자들에게 오픈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실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배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많은 시간과 경험, 끊임없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제자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순간적인 흥분이나 감동만으로는 안 됩니다. 일상에서의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닮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과의 동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신앙생활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일상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루일과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주님과 시작해야 합니다. 아침 식탁에 주님을 모시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걸으면서도, 운전하면서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일상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제자 훈련의 분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전 영역이 제자 훈련입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보내서 전도하게 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첫째 목적이 예수님과의 동행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는 데 있다면, 둘째 목적은 세상에 나가 배운 바를 전하고 양들을 섬기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 학생은 선생으로부터 어떤 사실과 지식을 배우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고 교육을 받습니다. 왜 전도해야 할까요? 세상은 복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질 문제가 죄와 죽음이고, 그 죄와 죽음을 복음만이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전도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자 그 전도사역을 계승할 제자들을 세우십니다. 전도는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 열둘은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교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도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기대만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도’를 거꾸로 하면 ‘도전’입니다. ‘도전’하면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에 있어 ‘도전’하고자 하는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적인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영접하도록 돕는 것은 그 영혼을 자기의 권세 아래 두고 있는 사탄와의 싸움입니다. 사람들을 영적 무지 가운데 가둬놓고 결박하고 있는 사탄은 강한 자입니다. 그 강한 자가 휘어잡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은 27절을 보면, 사탄에게서 강탈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강탈하기 위해서는 싸워 이겨야 합니다.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파워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 전도자로서 여기에 필요한 영적인 파워도 갖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파워를 주십니다. 영적인 파워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함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깊이 있는 말씀 묵상을 통해 말씀을 영접해야 합니다. 또 영접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성령 충만함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영적인 진보를 이루며 승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 파워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사탄의 지배 아래 고통당하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우신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16-19절에 열두 제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갈릴리 지역 시골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능력이 탁월하지도 않았고, 출신배경도 평범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죄인 취급 받는 세리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이들 중에서 만약에 삼성이나 LG에 입사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가룟 유다밖에 없을 것이다.” 유다는 돈 계산에 빨라 자기 욕심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였습니다. 한마디로 별의별 사람을 핵심 제자들로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기 거론된 사람 중에 예수님의 제자로 뽑힐 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들 중 아무도 성경에 능통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대제사장 출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부나 죄인 취급 받는 세리라고 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것만 봐도 우리는 그가 읽고 글을 쓸 줄 알며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문화와 학문을 배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이들을 “학문이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행4:13). 그리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열두 제자들은 매번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 그들의 믿음 또한 연약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수십 번 책망을 받습니다. 또 그들은 수시로 누가 크냐고 싸움을 잘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던 날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버립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을까요? 수많은 사람 중에 이들보다 더 괜찮은 사람은 없었을까요? 성격이 더 부드러운 사람, 배경이 더 좋은 사람, 배운 것이 더 많은 사람은 없었을까요?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받은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까? 재산이 많은 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들일까요?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게 될수록 하나님이 그들을 은혜로 선택하셨음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의 어떤 인간적인 기질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서울 정도로 부패시키는 죄악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은혜로, 그리고 주권으로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열두 제자들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열둘 가운데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열한 명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만 여러 가지 핍박을 받으면서도 노년까지 주를 위해 헌신했고 전승에 따르면 나머지는 복음을 전하다가 빨리 순교합니다.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합니다. 빌립은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합니다. 또 다른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고 톱으로 베임을 당해 순교합니다. 열심당원 시몬도 십자가형을 받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죽으면서 “나는 이 행복한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려왔는지 모른다”라고 고백했다고 전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채찍에 맞아 죽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살갗을 다 뜯겨내는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족하고 허물지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셨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이토록 헌신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은혜로 불러주셨고 은혜의 절정으로 그들을 대신해 먼저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모로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집니다. 평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이 ‘원하시는 자’입니다. 이 주님의 원하심과 부르심을 영접하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다 보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귀하게 쓰임 받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집에 들어가시자 무리가 다시 모여듭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섬기느라 식사하실 겨를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친족들이 붙들러 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예수님이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가문 망신 다 시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가짜 뉴스도 떠돌아다닙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아까는 친족들이었는데 이번엔 예수님의 가족인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옵니다. 가족들이 왔으니 마땅히 버선발로 나가 맞이해야 할듯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가르치십니다. 답답하게 여긴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온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리어 질문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동생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사렛에서 목수이신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그들의 일을 도왔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까지도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하실 정도로 육신의 모친을 끝까지 섬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를 부정하거나, 혹은 가족 해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이고,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 공동체는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로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같이 갈 사람들이기에 소중하고, 혈연으로 맺어진 육신의 가족들은 소중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물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은 맞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도 혈연으로 맺어진 육신의 가족들, 친족들에게서 배척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불신했다기보다는 예수님이 ‘미친 사람’ 취급받으니까 걱정스러움이 컸겠죠. 지금은 한 핏줄인 가족,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친 사람’ 취급받으니까 붙잡으러 온 모양인데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 쓰임 받고 있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믿지 않는 우리의 가족들도 하나님의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예수님 믿고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에 들어오게 될 줄 믿고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가족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 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영적 가족 공동체입니다. 가족의 힘이 사랑에 있듯 우리가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할 때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고 동행하듯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하고 돕고 섬기며 사랑하며 동행하는 가족이기를 소망합니다. 어리고 연약하고 부족할수록 더 사랑하고 더 아껴주고 더 돌봐주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영혼들이 영적인 눈을 떠가며 새로운 가족으로 자리를 잡고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소망 가운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원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셔서 부르셨는데 누가 감히 제자 된 우리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무한한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늘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삶과 성품을 배우므로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가족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요 교회 가족으로서 서로에게 함께 해주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