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2fQ7CAJJ0QA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1서 4장 7-8,12절
어릴 때는 공포스러운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인가 존재에 대한 허무감이 때때로 온몸으로 밀려와 밤마다 불을 끄지 못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불을 끄고 눈을 감으면 생명이란 존재가 이렇게 잠깐 존재했다가 내가 나를 알지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채로 시간이 영원히 흘러간다는 느낌이 몰려들면서 마치 블랙홀 같은 데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그 허무함과 공포감에 잠 못 들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내가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인가 싶은 거죠. 그러면 극심한 허무감이 몰려오는 거죠. 이런 느낌은 젊은 시절까지도 저를 많이 지배했고 뭔가에 파묻혀 살 때는 때때로 잊기도 했지만 삶의 저 근저에서는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20대 사랑을 알게 되었고 사랑을 알게 되면서 가슴이 뛰고 주고 줘도 아깝지 않고 더 못줘서 마음 아픈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모든 회의와 허무감은 일시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잠시라도 이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을 알고 사랑을 깨달고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경험하고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동안 우리는 최선의 사랑을 가꾸고 그 풍성한 사랑의 시간만큼 나의 존재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다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했습니다.
서정윤씨의 시에 보면 <사랑한다는 것으로> 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사랑한다는 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존재다워지고 그 사람이 그 사람다워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도와주고 손을 잡아주고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죠. 그래서 저의 젊은 날은 이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아내는 아내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딸은 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저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저마다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함께 도우며 함께 공생하는 <공생의 사랑>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아 함게 유학길에 올랐고, 그랬더니 저의 주변에는 항상 여자분들이 많았고 아내의 주변에는 항상 남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요리를 했고 목회를 했고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는 한글책 어린이 도서관을 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글학교 교사를 했고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노동을 했습니다. 아내는 아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했고 가정을 일구고 함께 결혼을 했기 때문에 주어진 공동의 과제 아이를 키우는 일이나 집안 일을 하는 일이나 재정적인 것을 책임지는 일이나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것들은 서로 힘닿는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함께 해왔습니다.
다시 동녘에 와서는 크게 세 가지에 중점을 두면서 목회를 해왔습니다.
사도바울의 선생님 말씀처럼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존재는 없고 어떤 존재든 존재는 그자체로 귀하다> 는 생각으로 목회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존재든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는 이들을 공동체 안에서 환대하는 목회를 했습니다. 어느 누가와도 한 사람은 한 세상입니다. 걸어왔던 시간과 땀과 노력과 역사가 담긴 한 세상이라는 마음으로 환대했습니다. 우리의 색깔에 묻혀 그 사람의 색깔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고유한 색깔로 동녘의 무지개빛 색깔이 더 다양해지고 더 넓어져야한다는 마음으로 환대했습니다. 만남을 환대하고 함께 살아가는 길속에서 서로 끊임없이 환대받고 환대해주어야한다는 마음으로 환대했습니다. 삶의 마무리 과정속에서도 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가 그 사람에 어떤 존재인지 그 의미와 가치를 나누며 환대했습니다. 물론 이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의 약함 때문에 직면한 상처와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저앉지 않았고 우리는 그 상처와 아픔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배움의 길을 통해 너 넓은 품을 가지고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나 나이 들어갈 때나 죽음의 순간 속에서도 우리는 존재자체로 환대되어야하고 우리의 환대가 나를 넘어서서 우리에게로 우리를 넘어서서 가장 힘들고 아프고 고독한 곳으로 더 나아가야하는 시대적 책임은 우리가 공동체를 일구며 계속해서 열어가야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관계중심의 살림의 목회를 했습니다. 소유하거나 지배하거나 전도해서 채우는 동원식, 행사위주의 목회를 하지 않고 한사람이라도 사람에 집중하고 생명을 돌보면서 사람을 살리는, 지쳐있던 한 사람이 따뜻한 그물망 안에서 다시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연대하고 응원하고 존재의 결들을 지지하고 살려가는 살림의 목회를 했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목사님을 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이혼 직전에, 경제적 위기 속에서, 뜻하지 않는 위기 속에서 때로는 개인이 때로는 가정이 교회를 찾아온데요. 그리고는 애쓰고 노력하고 보듬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신앙하면서 적지 않을 시간들을 거쳐 회복되면 그래서 살만해지면 큰 교회로 더 좋은 교회로 떠나간다는 거예요. 그게 내 사명이지 싶다가도 한순간 힘이 빠지고 목회를 계속해야하나 허탈감에 빠진다는 거예요. 그 목사님의 고민의 지점은 그런 거죠. 금강경에 나오는 뗏목이야기처럼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하는 것처럼 교회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저마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데 있어서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죠.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교인이 존재하는 건 아니죠.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은 한순간 이루어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뗏목이야기처럼 한번 건너면 끝나는 게 아니라 삶이라는 게 매일 매일 건너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매일 매일 끊임없이 건너야하는 삶속에서 배가 부실하면 건널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 지점에서의 고민이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그랬어요. 목사님 그래도 살았잖아요. 그럼 감사하죠. 옆방에서 건너방으로 이사갔다고 힘은 빠지지만 그래서 사람이 살았잖아요. 사람이 없는 교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예수 정신이 사라진 교회 아닐까요? 사람이 적어도 예수정신을 여전히 품고 있다면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하잖아요. 그러면 됐지요. 제가 무슨 큰 영화를 보려고 목회하는 것도 아닌데...
저는 목회하면서 부러운 교회는 없습니다. 저에게 보여지는 아름다운 교회들은 있지만 부러운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늘 감사합니다. 소유 성장 중심의 사고로 저를 몰아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서로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아주면서 서로의 속도와 결들을 존중해주면서 그저 살림의 정신을 가지고 함께 그 길을 열어가는 여러분들이 있어서 늘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모임을 하든 소외를 낳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일을 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밥을 먹을 때는 혼자 먹는 사람은 없나를 생각했고 농산물 하나를 나누더라도 누구하나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나누려 했고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갈 때할 때 끝까지 소외되는 사람 없이 마지막 한사람까지 챙기려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을 하다보면 선한 열정은 매우 좋으나 그 선한 열정이 한쪽(끼리끼리나 혹은 편한 사람 좋은 사람)에 갇혀 있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계속해서 소외를 낳을 수가 있고 때때로 아니한 만 못한 경우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더라고 가능하면 밴드에 오픈하는 방식으로 일을 했고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방식으로 일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건강한 99마리의 양보다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모이게 하신 이유는 어쩌면 그런 이유들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제 잠시의 안식년을 다녀옵니다. 저도 처음 해보는 안식년이라 어디 교과서에 안식년은 이렇게 하십시오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포지션을 취해야하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자연스러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간은 해야하는 일이 있고 얼마간은 배움이 있고 얼마간은 쉼이 있고 얼마간은 비움의 시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안식년이라해서 다른 모든 일까지 놓을 수는 없습니다. 교인들이 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는 절대 아닙니다. 단지 담임직을 내려놓고 살아갈 뿐입니다. 자연스럽게 만나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기시나 장례를 당하셨을 때는 언제든지 지체없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안식년동안 교회 운영과 관련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책임을 지고 많은 부담을 가지시기보다는 공동체안에 빈구석이나 어려운 이들을 챙겨가면서 그저 지금까지 해오셨던 것처럼 따뜻한 서로의 손길을 느끼며 늘 그랬던 것처럼 온기와 사람냄새를 느끼며 지내실 수 있으면 그뿐입니다.
요한 1서 기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올해로 목회 30년째입니다. 목회 30년을 해도 목회를 잘 모르겠습니다. 늘 어렵고 자주 헤매고 때때로 놓치고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님은 볼 수 있거나 만져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안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클레오의 세계>라는 프랑스 영화를 보았습니다. 엄마를 일찍 잃은 백인 꼬마아이와 흑인 유모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아이와 어른을, 흑인과 백인을, 베이비시터(노동자)와 주인을 일부러 대비시키는 구도로 영화를 전개시킵니다. 그런데 마치 유모가 진짜 엄마처럼 그들은 너무 아름답고 재미지게 놀고 먹고 장난치고 돌보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피부색이나 나이나 삶의 조건이 사랑에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유모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고향땅에 이 꼬마아이가 방학을 맞이하여 찾아갑니다. 흑인들 뿐이 그 고향마을에서 이 아이는 원초적 사랑의 경험을 진하게 합니다. 영화는 너무 아름답고 너무도 고향의 향기를 진하게 담고 있습니다. 인간 원형의 사랑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일상의 가장 평범한 곳에서 모든 조건을 넘어서 보듬고 껴안고 돌보고 싸우고 용서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그 삶이 거룩한 성소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더 넓어지고 더 커지고 더 깊어지는 사랑가운데서 우리의 삶의 여정이 더 따듯해지고 더 의미되어지고 더 행복해지기만을 바랄뿐입니다. 안식년 기간에도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삶과 일터와 모든 것을 지켜주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