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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 연구
1. 서론
현대 이론은 1960년대 이론을 위한 이론이라는 언어중심적 구조주의 이론 대신에 푸코, 데리다, 라깡, 알튀세르 등의
이론가를 중심으로 후기구조주의적 양상으로 변해갔다.
쟈크 라깡의 이론도 50년대의 언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다가 서서히 언어가 파악하지 못하는 실재의 차원으로
이동해갔다.
푸코 역시 60년대 이후에는 재현에 대한 관심을 떨치고, 주체와 사회의 관계에, 특히 주체가 그 사회적 담론을 체화하는
주체화과정에서 자신의 성욕까지도 사회적 집단의 패러다임에 의해 변모시키고 복종하는 생명-정치적 기제에 관심을
두었다.
쟈크 데리다는 알튀세르 등이 가르치는 ‘에콜 노말 수피리에’라는 그랑제콜에서 이런 이론적 영향 아래에 있다가 1967년
미국 강연 이후 언어와 재현의 해체를 통해 미국에서 유명해졌다.
그 이후 80년대에까지 문화와 철학의 담론에서 언어의 후기구조성을 전파하고 후기구조주의의 대가가 되었다.
그러나 데리다는 1980년 말 서구사회가 두개의 양립되는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고, 동구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선언 이후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세가 등등하게 되자 해체의 대상을
언어와 형이상학에서 현존하는 민주주의와 강대국의 패권적 정치로 전환시킨다.
이런 데리다의 정치적 해체의 성향은 80년대에 남미의 월터 미뇰로(Walter Mignolo)가 비미국적, 비패권주의적, 비서구
중심적 이론, 즉 해체론과 유사하게 해체론적 탈고리(delink) 이론을 통해 대안적 근대화(alternative modernity)를 주창
하던 것과 공명을 이룬다.
그러나 데리다는 미뇰로와는 달리, 구체적 정치 상황에 대해 반응하기보다 선배인 레비나스의 영향에 힘입어, 언어 및
기호의 후기구조중심의 언어적 전회로부터 ‘윤리적 전회’를 한다.
데리다는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타자에게 무한한 책임감이 있다는 레비나스처럼, 주체는 타자에게 무조건적으로
환대(hospitality)를 해야 하며, 타자에게 주는 ‘선물’의 행위는 자본주의적 교환관계를 초월하여 비교환적인 윤리적
행위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종교를 언급한다:
“절대적으로 타자와의 조우란 무엇인가? . . . 총체성을 방해하고 그것들과 거리를 가지는, 언어와 눈길 안에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 . . . 레비나스는 이것을 종교라고 부른다.
이것은 윤리를 열어준다.
윤리적 관계는 종교적 관계이다. 어떤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인 것의 종교성, 그 종교이다”(Writing and 95-96).
데리다의 해체론에서의 메시아성에 대한 이번 연구는 데리다의 ‘윤리적 전회’의 정치성을 입증한 이후, 데리다의 메시아성 이론이 정치적 담론으로서도 유효함을 밝힐 것이다.
지금까지 데리다의 연구는 국내에서는 특히 초창기 이론의 차연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
데리다의 90년대 이후 저서와 2004년도 죽기 바로 직전의 대 저작들, “환대에 대하여”(Of Hospitality)와 짐승과
군주(The Beast & the Sovereign), 불한당들: 이성에 대한 두 에세이(Rogues: Two Essays on Reason)등의
정치적 양상의 저서와 ‘메시아 없는 메시아성’ 연구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지금까지 포스트모던 담론으로서 헤겔, 칸트 등 이성중심주의에 맞서서 이성의 한계와 진리의 현존
성을 해체하는 것이 주목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즉 데리다는 진리의 불가해성에만 관심을 두면서 말의 유희에 고착
되어 비정치적이며, 현실 사회에 유용하지 않은 현학적인 사변활동을 하는 것으로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데리다의 연구를 깊게 진행한 학자들은 데리다의 해체론이 얼마나 현실 사회에 직접적 관계를 가지고 유효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지 인식한다.
예를 들어, 데리다의 불한당들은 9/11 사건이후 이라크를 재침공한 미국의 정치적 역사를 언급하면서, 미국의 패권
주의 형태를 불한당의 행위로 묘사한다.
데리다는 이 저서에서 미국이 과거에 아프가니스탄을 대상으로 러시아와의 간접적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즉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길러낸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전사들이 어떻게 수 십 년 이후 미국을 직접 공격하는가를 자가면역
(autoimmunity)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데리다는 패권주의 국가가 자기를 보호하는 정책이 거꾸로 자기를 공격하는 결과적 구조를 가짐을 드러내 보인다.
데리다에 대한 이번 연구는 이런 현상의 이론적 배경을 메시아성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더 진정한 민주주의가 구현
되는 가능성을 탐색해 보기로 한다.
II. 데리다의 윤리적 혹은 종교적 전회
한국에서도 “현대사회에 있어서 종교교육의 필요성은 다양한 점에서 요청되어” 오고 “현대국가에서 종교가 하나의 ‘국민
적 자본’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언급되듯이(김종서 3), ’”마이클 나스(Michael Naas)는 “1990년대 중반에는 . . 외양적으로 예측되지 않은 즉흥적인 ‘종교로의 전회’ 혹은 ‘종교적인 것의 회귀’에 대해 말하는 것이 흔한 일임이 사실”(29)이라고 말한다.
나스는 데리다의 윤리적 혹은 종교적 전회는 이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라 초창기 70년대에도 있었음을 주지하면서, 데리다는 우리 정치의 핵심 개념인 주권성, 정치성 등이 이미 종교적인 것과 밀접함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나스는 데리다가 중동 지역과 미국에서의 종교적 근본주의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종교적 전회가 있음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나스는 다음의 설명을 통해, 사실 데리다는 당대에 유행하던 종교적 회귀가 그 깊은 의미에서는 회귀가 아님을 강조한다고 밝힌다:
잛게 ‘회귀’라고 불리는 그것은 이슬람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 . . “근본주의들” 혹은 공격적으로 정치적인 “통합 운동들”의 특징이다.
이것들은 정치적인 것 혹은 국가의 권위를 반박하거나 혹은 단순히 민주주의를 신정정치에 복종시키려한다.
이런 현상은 여러 차원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것’, 국가, 특히 주권성이라는 개념들이 그 자체로 기원에 있어서 신학적인 개념들이 아니라면,
이런 운동들의 힘을 설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들은 전혀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PM 116). (Miracle 31)
위의 진술에서 드러난 데리다의 종교와 세속의 연관성에 대한 믿음은 데리다가 종교로 회귀하면서 세속의 핵심인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이유가 된다.
“데리다의 ‘윤리적’ 혹은 ‘종교적 전회’는 레비나스가 강조하듯, 기존의 윤리가 아니라 윤리를 초월한 윤리의 전회이다.
이런 윤리적 양상은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윤리와 직결되며, 한미야는 “애도의 과정”조차도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수반하는 과정이라고 본다”(152).
헨트 드 브리즈(Hent de Vries)는 이런 데리다의 윤리적 전회를 ‘종교적 전회’라고 명명한다.
데리다의 이런 윤리적 혹은 종교적 전회는 데리다의 초창기 이론인 차연이 지나치게 비역사적이고 비사회적이라는 해묵은 비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사회 특히 타자에 대해 주체가 갖는 책임을 강조한다.
현대에서 벤야민의 신학이 힘 빠진 난장이로 변모하여 숨어서 역사유물론 자체를 조정하였듯, 헨트 드 브리즈는 현대의
종교가 이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무수한 ‘죽음’을 거쳐 오히려 더 소생하여 그 원래의 기능을 다한다는 사실을 데리다가
입증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데리다의 ‘종교적 전회’는 타자에게 깊이 정치적으로 연루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차원을 가진다.
그러나 데리다의 정치적 언급은 절대적으로 기존의 국가를 초월하며 ‘메시아적 정치학’(messianic politics)가 된다.
데리다의 ‘메시아적 정치학’은 레비나스로부터 빌려온 개념으로서 그렇다고 유대교적 색깔을 가진 것도 아니고 기독교적
전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데리다에 의하면,
레비나스는 우리가 서구 정치론(Western politology)을 장악하는 이 전통—그리스 혹은 후기-헬레니즘 전통—에서 정치학으로 이해하는 것과 구별되는, ‘메시아적 정치학’을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 . .
이런 배경으로, 레비나스는 한 방법 이상으로 과감하게 생각되어질 어떤 가설을 설정한다:
한편으로, 세속적 도시와 신의 도시의 구분, 정치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의 구분은 전-혹은 후기-기독교 유대주의에서는
기독교에서 만큼이나 명확한 경계를 갖지 않는다;
반면에, 기독교가 “흔히 국가 종교가 되어 온 것”은 역설적으로, 레비나스가 서슴지 않고 명명하는 바로 이 엄격한 구분,
기독교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다.
이 정치적 무관심은 어떤 종류이던 간에, 어떤 대가를 치르던 간에, 힘을 위한 힘의 취향을 촉발시킨다.
이것이 국가를 장악하게 될 때마다 통제할 수 없는 교회의 권위주의와 독단주의(dogmatism)을 용서하게 될 것이다.
(Adieu 74)
데리다는 진정한 이론은 타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본다:
“[제대로 된] 형이상학은 이론이 존재론, 동일자의 독단과 즉각성으로서의 자신을 비판할 때, 특히 형이상학이 윤리의
움직임 안에서 타자에 의해 자신이 질문되어지도록 할 때 시작 된다”(Writing and 96).
이런 타자의 이해는 절대적으로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이해가 아니며,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그 자체로서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레비나스 분석은 칭찬 일색으로 끝나지 않는다.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타자의 순수한 차이성을 너무나 절대화하여서 오히려 타자가 형이상학에서처럼 실체화되는 것을
비판한다.
데리다는 이렇게 타자의 절대적 차이성을 너무 강조하기 위해 얼굴이나 권태 등 오히려 온갖 형태의 메타포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그가 회피하려는 하나의 ‘경험주위’ 오류의 틀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한다.
데리다는 타자의 독자성, 타자의 권리, 타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감을 강조하다가 오히려 기피하고자 한 경험주의의 오류에 빠진 레비나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학적 개념의 총체성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해체의 전략 특히 흔적과 차연에 더욱 의존한다.
이런 데리다의 입장은 그의 부정 신학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영어권 및 유럽권 비평계는 데리다의 ‘윤리적 전회’를 더욱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확산시켜 데리다의 해체론을 종교적 학문 영역의 차원에서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와 연결하였다.
그러나 데리다가 타자를 실체화하는 레비나스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듯이, 신은 알 수 없다는 자세로 일관하는 부정 신학과도 신의 파악 불가능성을 지나치게 본질화한다는 점에서 차별을 둔다:
내가 쓰는 것은 “부정 신학”이 아니다. . . . “부정 신학”은 모든 실질적인 [신은 무엇이다라는] 서술을 초월하지만, 심지어 존재(Being)를 조월하지만, 어떤 극도의 과잉본질성(hyperessentiality), 존재를 넘은 어떤 존재(a being beyond Being)를 보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나의 담론은 부정 신학이 아니다]. (Coward 77)
데리다는 신의 불가해성, 신의 비규정성을 절대적으로 타자화하는 레비나스의 한계를 부정 신학에서도 발견한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진리가 불가해하며 오로지 진리의 흔적만이 차연, 즉 기표들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듯하다가 그 정확한 의미가 또다시 연기되는 차연(différance)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부정 신학으로 오해받았다.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은 신은 알 수가 없으며 불가해한 존재이므로 인간의 언어로 절대 표현되지 않고 인간의 언어를 부정한 상태에서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존재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데리다의 해체론과 부합된다고 일반적
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부정 신학 조차도 신이라는 존재가 어떤 개체로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절대적 선 혹은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존재성(presence)에 고착하는 플라톤, 칸트, 헤겔로 대변되는 존재성의 형이상학이라고 보고 자신의 해체론이 부정 신학을 초월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부정 신학과의 연계도 거부하는 데리다의 해체론은 그렇다고 이런 물자체 혹은 진리 자체의 접근이 죽음으로의 존재인 인간인 현존재의 유한성을 무시하는 오만한 형이상학의 산물이라는 하이데거의 입장도 초월한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인간의 유한성만 강조하는 하이데거나 물자체에 대한 인간의 충실성을 정언명령으로서 강조하는 칸트도 초월한다.
이 맥락에서 데리다는 절대적 지의 차원이 자기-의식성을 통해 역사 안에서 타자와의 변증법적 관계를 온전히 마친 후 자기 자신과 타자의 변증법적 결합을 한다는 헤겔적 입장도 반대한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바로 현재 혹은 현재 속의 주체는 그 자체가 완성은커녕 끊임없이 현재가 아닌 다른 시간, 미래에 의존해 있으면서 이런 시간 속에서의 타자에 매여서 혹은 주체의 차원에서는 자기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책임감 속에서 자신을 열어놓고 타자와의 연계 속에서 차연의 과정을 거쳐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데리다의 해체론은 따라서 모든 기존적 체계와 기존의 개념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배제된 진리가
차연 속에서 드러나도록 도모하는 입장을 취한다.
데리다는 부정신학을 대신하여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을 제시한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 철학 담론에서 니체가 대두시킨 ‘신의 죽음’을 기존의 신학적 용어는 물론 그 전통 신학의
입장을 초월한 ‘부정 신학’의 차원도 거부하여 나온 개념이다.
존 D. 카푸토(John D. Caputo) 등의 종교 철학자는 데리다의 해체론, 메시아성의 논리가 외양상으로도 급진적인 ‘부정
신학’의 차원에 머무르는 단순논리의 종교학을 극복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들은 데리다의 해체론을 이용하여, 신학적 강령을 넘어서려는 ‘부정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좀 더 열려 있는 신학
연구를 하려고 노력해왔다.
데리다의 메시아성: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
데리다의 메시아성은 기존의 종교적 메시아주의(messianism)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메시아성(messianic or messianicity)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을 종교 영역에 적용하는 존 카푸포는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의 양상을 ‘종교 없는 종교’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신학적 담론이 데리다의 해체론에 의해 진일보한 급진적 양상을 가지게 됨을 강조한다.
데리다의 메시아성 개념은 기존의 강령화된 메시아주의를 극복하고 해체론적 진리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이 메시아성은 레비나스의 영향을 받은 데리다의 환대, 타자에 대한 책임, ‘도래할 민주주의’ 등의 개념과 일직선상에 있다.
이 메시아성 혹은 메시아적인 것은 벤야민에 의해 쓰여진 개념이다.
워너 하마커(Werner Hamacher)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을 설명하는 논문의 한 주에서 이 개념을 통해 데리다와 벤야민이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하마커가 설명한 것과 같이, 벤야민은 “[세속적 혹은 역사적] 차원과 메시아적인 것의 관계는 역사철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 중의 하나이다’(p.203)”(Ghostly 212)는 사실을 벤야민의 짧은 논문, “신학-정치적 단편”(Theological-Political Fragment)에서 강조한다. 이 논문은 짧지만 벤야민의 유년시절 친구, 게르샴 숄렘은 1920년대 논문이라 하고 아도르노는 1937년경의 논문이라 할 정도로 유래가 모호한 논문이지만 벤야민의 메시아적인 것을 직접 언급하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논문에서 벤야민은 메시아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메시야 자신만이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과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재생시키고 완성한다는 점에서 오로지 그만이
역사를 완성시킨다.
이런 이유로 역사적인 것은 그 자신의 토대에서 메시아적인 것과 관계 지을 수 없다.
따라서 신의 왕국은 역사적 역동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목표로 구축될 수 없다.
역사의 관점에서 이것은 목표가 아니라 종착점이다.
따라서 세속적 차원은 신의 왕국이라는 개념 위에 구축될 수 없고, 신적 정치(theocrasy)는 정치적이 아닌 오로지 종교적 의미만 가진다.
지극한 열정으로 신적 정치의 정치적 의미를 거부해 온 것이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Spirit of Utopia)의 핵심적
업적이다. (Walter Vol. III 305)
이런 벤야민의 진술은 일부 비평가들이 벤야민을 유대교적이라고 단정 짓게 만드는 진술이다.
그러나 곧 벤야민은 하마커의 지적대로 그 반대의 말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벤야민은 메시아적인 것은 세속적인 것의 기초는 될 수 없지만, “세속적 차원은 행복[메시아적 구원]의 개념 위에 기초해” 있는바 ‘메시아적 왕국’은 역사 혹은 세속 안에서 “메시아적 열정”(messianic intensity)을 통해 그 도래가 촉진된다고 말한다(Walter vol. III 305).
이 말은 벤야민의 유명한 공식어인 “오늘 매 순간(second)이 메시아가 도래할 문이다”라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벤야민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적인 것’ 혹은 ‘메시아적이지 않은 메시아적 순간’이라는 ‘절대적 역설’은 데리다의 “메시아
주의 없는 메시아성”의 표현이다.
벤야민의 역설은 메시아적인 것이 세속적인 것 혹은 역사 안에서 구원 즉 행복을 추구하는 메시아적 열정을 통해 완성되
므로 역설적 관계 속에서 메시아적인 것과 역사의 불가분적 관계를 표출한다.
벤야민의 메시아성이 역사철학 특히 역사유물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의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데리다는 벤야민이 “‘역사유물론’과 정확히 어떤 ‘약한 메시아적 힘’의 유산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Specters 69). 데리다는 이 사실을 긴 주에서 설명하면서 자신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의 개념을 촉발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messianic wihout messianism), 즉 ‘약한 메시아적 힘’을 언급한다:
[벤야민의 역사 테제 논문에서 난장이 언급 이후] 그 다음의 단락은 메시아주의, 더 정확히,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약한 메시아적 힘” (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 벤야민의 강조)을 명명한다. . . ..우리는 이 개념들이 나온]
어렵고 모호한 모든 페이지들을 인용하고 재독하여서--메시아적인 것이 지금-시간(Jetztzeit)이라는 몸체에 기입하는
그 ‘조각’(파편)에 대한 최종적 암시는 물론 메시아의 통로를 위한 ‘좁은 문’, 즉 매 ‘순간’이 언급되는 부분까지 도달해야
한다. (Specters 228)
데리다에게 벤야민적 ‘약한 메시아적 힘’은 데리다 특유의 메시아성으로 나타난다.
데리다는 그의 “메시아성, 혹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 이것은 미래 혹은 정의의 도래로서의 타자의 도래에 대한 열림이지만, 예측의 지평과 예언자적 예시(prefiguration)이 없다. . . . 이 메시아적 차원은 어떤 메시아주의에 의존하지 않으며, 어떤 규정된 계시를 따르지도 않고, 어떤 아브라함의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하지 않았다”고 말한다(Acts 56).
이런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그의 해체론의 한 양태로서 바로 이성 혹은 주체와 이것을 기초한 형이상학적 혹은 법적 제도의 현재성 혹은 고착성을 부정하는 점에서 이성보다 타자를, 타자에 대한 책임을, 그리고 계산적이고 교환적인 경제를 초월한 선물(gift)을, 미래와 약속(promise)을, 그리고 고착된 법에 제한되지 않은 정의를 불러일으킨다.
데리다는 “권리를 초월하여 그리고 법률주의를 초월하여, 도덕성을 초월하여, 그리고 더욱이 도덕주의를 초월하여, 타자와의 관계로서의 정의는 이와 반대로 시간교란(시대착오) 혹은 불일치의 환원 불가능한 잉여 . . . 존재와 시간 자체에서의
‘어긋나는’ 탈구에 기초해 있지 않은가?”(Specters 32)라면서 정의의 메시아성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이 점을 부연설명하면서 ‘사막-같은 메시아주의’를 언급한다:
이것[존재와 시간 안의 불일치]이 해체론이 선물과, 해체 불가능한 정의, 모든 해체의 해체 불가능한 조건 . . . 에 대한 사고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는 훌륭한 양심에 머무르게 되고 미래, 약속 혹은 호소, 욕망 . . . (내용도 없고 인식 가능한 메시아가 없는) 이 사막-같은 메시아주의, 이 심연의(abyssal) 사막, “사막 안의 사막”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 . . . 이 사막은 다른, 심연의, 혼돈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벌려진 입의 텅 빈 구멍의 광할함,
잉여성, 비균형성을 의미한다면, 혼돈의 사막을 지시하는데, 이 모든 것은 메시아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여기서 다음과 같이 별칭을 붙인 것을 기다리고 요구하고 있다:
타자의 도래, 정의로서 도달하는 것의 절대적이고 예측불허적인 고유성. (Specters 32-33)
‘사막-같은 메시아주의’는 기존의 종말론에서 기다리는 전형적 메시아주의가 아니라 ‘(내용도 없고 인식 가능한 메시아가 없는)’ 메시아주의로서 해체론의 다른 이름이다.
데리다는 이런 ‘사막-같은 메시아주의’를 해체론의 토대로 삼으면서 모든 현존의 이데올로기와 체제 및 정치와 종교를 초월하는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데리다는 “해체의 가능성 자체로서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 것은 아마도 해방적 약속의 어떤 경험이다;
이것은 아마도 구조적 메시아주의, 종교 없는 메시아주의, 심지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a messianic without messianism), 우리가 법 혹은 권리 심지어 인권과도 차별화하는—정의라는 개념 그리고 우리가 현재 . . . 규정되고 쓰여지는 그
개념과 차별화하는—민주주의라는 개념의 형태성이기도 하다”(Specters 32-33)고 덧붙인다.
카푸토는 데리다의 메시아성을 정의내리기를:
[‘신앙과 지식’이라는 논문에서] 데리다는 종교 자체의, 그리고 오늘의 종교의, 오늘날 대규모적으로 세계적인 근본주의의 재등장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그의 사막-같은 . . . 종교 없는 종교, 계몽주의 이후의
또 다른 종교의 귀환을 언급한다. 그는 놀랍게 간결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이 메시아적 종교가 “홀로 ‘종교’의 주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담론을 허락한다”. (Prayers 151)
데리다의 ‘사막-같은 메시아주의’, 즉 ‘메시아 없는 메시아성’은 메시아가 왔고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와 달리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 전통과 가깝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다.
요세프 예루살미(Yosef Yerushalmi)는 동양의 인도 사상에서 먼저 논의된 무의식을 재발견한 후 이론화하여 그것의 작업을 규명하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유대과학이라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정신분석 운동은., 내개 말해왔듯이, 역사적으로 유대적이다”(99).
이와 같이, 수잔 핸들만(Susan Handelman)도 메시아 자체보다는 미래의 희망과 가능성을 텍스트성의 무한한 차연 혹은 흔적의 과정을 통해 살리려는 데리다의 메시아성의 해체적 속성이 유대과학이라는 시각을 주장한다.
핸들만은 데리다의 유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데리다가 말하기를, 유대인은 유대인을 선택한, 경전(Scripture) (Writing-Ecriture) 을 채택했다.
[유대계 프랑스 작가] 야베스(Jabés)는 유대인이 되는 것의 어려움이 글쓰기의 어려움과 혼돈된다고 인식하는 것에서
옳았다.
왜냐하면 유대주의와 경전(혹은 Writing)은 같은 기대, 같은 희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야베스론의 입장임].
유대인과 경전 사이의 이 교환은 이 책을 하나의 ‘긴 은유’로 만드는데, 여기서, 데리다는 말하기를, 유대인의 상황이 시인, 글자와 글쓰기와 사람의 상황의 범례가 된다. (81)
카푸토는 벤야민과 데리다 둘 다의 신학적 입장은 존재의 형이상학처럼 현존의 강한 강령적 독단이 아니라 규명되기 어려운 신 혹은 진리가 흔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견지한다고 본다.
벤야민이 과거를 기억하는 자세와, 현대 문명의 폐허에서 약한 메시아의 힘을 드러내는 양상을 강조하였다면, 데리다는
도래할 미래와 희망에서 약한 메시아적 힘을 발견한다.
카푸토는 이 둘 다의 약한 메시아적 힘이 상보적 관계라고 본다:
[벤야민의] 천사는 천국으로부터 오는 질풍, 카인과 아벨이 시작한, 역사의 힘인, “진보”라 불리는 질풍에 쫓기어 미래로
이끌려 간다.
미래로 뒷걸음쳐진 상태에서, 이 천사는 희망 없는 폐허 속에서 희망의 천사가 되어야만 한다. . . . [벤야민에게] 구원은
기억하기이며, 기억하기는 기억하기 속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불꽃이다. . . . 이것이 벤야민의 뒷걸음치는 메시아주의의
약한 힘과 이런 [죽은] 유령적 인물이 미래를 향해 회전하는, 도래할 정의에 대한 소명인, 데리다의 “도래함”의 약한 힘과
결합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데리다의 메시아적 개념은 . . . 죽은 자, 유령의 구원만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의 더 일상적 의미인, 미래,
어린이, 도래할 것(arrivants), 다가올 이의 구원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이것은 둘 사이[과거와 미래]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신의 이름은 죽은 자를 기억하기에서뿐만 아니라, 복수하기보다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기 . . . 자비 . . . 혹은 환대 . . . 끝 모르는 절망 앞에서도 긍정으로 대답하기 같은, 약한 메시아적 힘들 안에서 움직인다. (Weakness 96)
카푸토의 벤야민적 혹은 데리다적 약한 메시아적 개념이 결합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은 정신분석이 유대과학인가에 대한
프로이트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예루살미의 열망에 대한 데리다의 입장 정리에서도 드러난다.
데리다는 예루살미의 유대교(Judaism) 혹은 유대교를 넘어서 더 보편적인 유대적인(Jewishness)에 대한 개념 설정조차도 진리의 아포리아를 생각할 때 적절치 않은 자세라고 본다.
특히 데리다는 예루살미가 오이디프스 신화 등 과거에 더 친숙한 프로이트의 이론이 유대적인 것의 핵심 속성인 미래에
열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유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을 비판한다.
데리다는 ‘비결정성의’ 힘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무엇이 과학과 유대적인 것을 [각각] 묶어주는지, 이 개념들을
고착시키고 보장해주는 것에 대해 적절한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 . . [따라서] 나는 지나가는 말로 이 사실이 지금까지
증명해보이려는 것을 중립화하거나 아마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Archive 71).
데리다는 예루살미의 프로이트 논의가 유대적인 속성의 미래지향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예루살미의 다른 책] 기억
하라:
유대적 역사와 유대적 기억(Zakhor: Jewish History and Jewish Memory)는 과거를 기억하기에 중점을 주고 있음을
지적한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연관된 글쓰기의 필연적 조건인 차연과 흔적을 강조하는 것이며 글쓰기나 메시아적 희망이 유대인의 특이한 상항이거나 그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절대적인 해체 불가능한 조건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일부 비평가들이 그를 무신론자로 보게 하듯이, 니체처럼 신은 죽었고 우리가 말하는 신은 인간이 만든 후천적
구성물이라고 보게 만드는, “신이 흔적의 효과”라는 진술을 한다. 드 브리스(De Vries)도 데리다의 “‘신’은 . , , 흔적을 대신할 가장 좋은 단어이다”(Philosophy 94)라고 말한다.
또한 “흔적으로서 신은 계속 . . . 타자--타자의 타자들 . . . 에 의해 결정되거나 정지당하며, 명목상의 무한성 혹은 현존
속에서 자기 스스로의 소멸을 요구한다”(Philosophy 355)고 말한다.
핸들만의 신과 흔적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데리다의 레비나스 분석은 존재론과 독립되어 발전한 해석학 . . . 랍비적 사고의 성향들에 대한 적절한 요약이다.
그의 텍스트[레비나스 분석 글]은 . . . 형이상학을 신과의 대화, 끊임없는 대화, 논쟁, 해석 그리고 재해석으로 간주한다.
[데리다와 레비나스와]반대로 기독교는 부재가 허락되지 않으며, 존재들(beings)은 담론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존재(Being)와 관련하는, 그리스적 존재론에 매여 있다. . . .
그러나 데리다는 레비나스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묻기를, 세상이 “신의 흔적”의 효과가 아니라 그 반대이면 어떨까:
“신이 흔적의 효과”이라면 어떻까. (Handelman 173)
핸들만은 데리다에 대한 자기 논문을 “랍비 데리다의 성경”(Reb Derrida's Scripture)라고 지칭하면서 데리다의 신에 대한 언급을 설명하지만, 바로 그의 ‘흔적’ 개념 때문에 데리다를 바울처럼 ‘유대 이단적 해석학의 변종’(a variation of a Jewish heretic hermeneutic), 프로이트처럼 ‘모세의 살해’(slaying of Moses) 행위자로 못 박는다:
데리다는 흔적의 개념으로 존재론 비판하게 된 것을 레비나스에게 빚졌다고 한다.
존재론과 기호학을 문자학으로 돌리면서, 데리다는 “차이”가 모든 유사성을 앞선다:
그리고 순수한 차이인 흔적은 충만함 밖의 현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 . : “흔적은 일반적 의미의 절대적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의미의 절대적 기원은 없다는 말과 같다.
흔적은 외양과 의미화작용을 열어주는 차이이다”라고 말한다. . . .
그러나 이 흔적의 재기입은 역시 신학적이지 않은가라고 우리는 데리다에게 물을 수 있다. . . . 이런 반대를 의식하고,
데리다는 “성경으로의 회귀”에 대해 경고한다. . . . [이런 경고에서] 바울의 메아리는 가장 확연하다;
이것은 유대 이단적 해석학의 변종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전(Scripture)을 대체할 육화된 신 같은 그런 조야한 것이 아니라, 더 세심하고 더 유대적인 것:
텍스트, ‘성전을 넘은 글쓰기’이다. . . . 기원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부재가 아니라 흔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게 하는 기원이다. 그래서 또다른 모세 죽이기, 아버지 박탈하기, 아버지와 기원의 재전유, 새 글쓰기 . . . 이다. (173)
유대계 학자인 핸들만은 데리다와 프로이트 둘 다 아버지를 배반한 ‘방탕한 아들’로 규정하고 데리다의 흔적 혹은 그의
해체론이 유대교의 글, 경전을 빼앗은 것으로 보면서도 이들이 원래의 경전, 즉 “잃어버린 편지”를 해석의 행위를 통해
다시 재생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보인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편지’를 다시 탈환하여, 그리스인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행해진 남용들로부터 성경을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해석 행위를 통해 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쓰기를, “해석의 기원적 시작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랍비와 시인들은 존재할 것이다는 의미를 가진다. 언
제나 유대인과 그리스 사람 사이에 전쟁은, 경전에 대해 전쟁은 계속 될 것이다”. (177)
핸들만의 이런 진술은 무한한 해석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즉 차연과 흔적의 과정을 이해하면서도 결국에는 이것을 다시
유대적 성경을 복원하는 행위로 축약시키는 오류, 즉 가장 해체론을 배반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이와 반대로, 데리다는 유대기독교적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유대교 학자들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고 지속적
으로 자신의 메시아성을 종교적 기존 개념에서 탈피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종말 없는 종말(Apocalypse without apocalypse)이라는 개념에서 드러난다.
데리다의 메시아성과 종말론: ‘종말 없는 종말’(the apocalypse without apocalypse)
데리다는 자신의 메시아성, 즉 해체의 힘이 부정 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듯이, 기존의 종말론과도 구별 짓는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시간의 일직선상의 끝(the end)과 관련 있다면, 데리다의 종말론은 종말 없는 종말을 상정한다.
데리다는 “최근 철학에서 채택된 종말론적 어조에 대해”라는 논문에서 “우리의 현재 종말[은 이렇다]:
어떤 결정의 확신에서 오는 한 사건을 발생시키는 힘의 ‘도래’(come)를 확신시키는 일종의 공동-목적지”에로의 파견 같은 것도 아니고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선과 악의 집합체로서의 종말에 대한 장소는 없다. 종말 없는 종말이 있을 뿐이다. . . . 이 없는이라는 용어는 종말의 내적 그리고 외적 재앙을 의미한다, 즉 . . . 종말론의 글들에서 공표되거나 묘사된 재앙과
융합되지 않는 의미의 전복을 의미한다.
여기서 재앙은 종말 자체 . . . 끝이 없는 닫힘, 끝이 없는 끝일 것이다”(Detweiler 94-95)고 말한다.
데리다는 ‘종말 없는 종말’이 일진선상의 시간 측면에서 오거나 종말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존재나 목적을
초월하는 “도래”(Come)이며 이 ‘도래’가 해체 자체임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이 ‘도래’(오라)라는 용어를 묵시록의 저자로 알려진 파트모스의 요한의 글에서 인용한다.
데리다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 ‘도래’의 사건은 [다른] 사건을 앞서고 불러들이기도 한다. 이것은 기존의 주어진 사건 법주 안에서 생각 될 수 없는
사건의 도래함, 왕래함, 어떤 사건이 존재하게 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 . . ‘도래’는 이것 자체가 하나의 서술 . . . 일 때
조차도, 어떤 메타언어적 인용을 지지하지 않는다.
‘도래’는 . . . 어떤 존재-신학-종말론에 의해 자신을 멈추게 하지도 조사받지도 않는다. . . . ‘도래’는 . . . 타자로부터 온다. . . .
존재 너머의 ‘도래’--이것은 존재 너머로부터 오고 . . . 존재 너머로 소환한다. ‘도래’는 인도하려거나 지휘하려 하지 않는다. . . . ‘도래’는 자기를 대변하지도 않고, 미리 결정가능한 정체성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결정성의 정체성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 일종의 표류이다. ‘도래’는 오로지 . , , 타자로부터, 파생되어지고, 절대적으로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지는 것이다. (Detweiler 94-95)
케더린 켈러(Catherine Keller)와 스티븐 D. 무어(Stephen D. Moore)는 데리다의 이 설명을 위해 “데리다종말”(Derridapocalypse)라는 논문을 썼다. 무어는 “종말적인 ‘도래’는 차연의 또 다른 비동의어적인 동의어”(Sherwood 194)라고 본다. 또한 무어는 ‘도래’와 같은 종말은 데리다가 말하는 ‘절대적으로 비밀인’(absolutely secret)것으로서 이런 “절대적 비밀은 절대적으로 밀폐되고 절대적으로 옷 입혀졌지만 그런 것으로서 무한히 개방적이다”(Sherwood 192)이라고 말한다.
또한 “타자, 타자성, 미래에게 그것들을 위해 급진적이고 파격적으로 열려진, ‘도래’는 데리다의 주제 혹은 비주제, 법을
너머선 정의, 교환을 너머선 환대, (죽음의 선물을 포함하여) 채무를 너머선 선물과도 뗄 수 없게 맞물려 있다.
그리고, 물론, 메시아성과도 [맞물려 있다]”(Sherwood 194)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 신학자 켈러는 데리다의 이런 ‘사막적인 종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출한다:
데리다는 그렇게 ‘어떤 종교나 어떤 존재론도 동일시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막적인 메시아적 종말론’(messianic eschatology)을 만들어낸다. 이 교묘한 [데리다의] 전략: 종말론에서 존재신학을 [자신의 사막 종말론에서] 메말라 버리게 하기, 메시아성으로부터 종교적인 것을 구워내기. . . . 이 사막 종말론은 그의 ‘종교 없는 신앙’에는 어울린다. 그러나 여기에 내 염려가 있다. . . . : 바로 이 전략이 . . . 정통 신학의 토대를 메아리치고 있지 않는가. 왜냐하면 “시초에”--창세기에서는 아니어도 정통 기독교(Christian orthodoxy)[가 제시해온] . . . 무로부터 [창조](the ex nihilo)는 성경에서는 종말에 말라버릴 때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던 물로 된 심연, 바다인 테홈(the tehom)을 사라지게 하지 않았는가? 이런 무로부터[창조]는 이런
혼돈의 유대교적 그리고 신비적 잔존물을 정화해버리고, 동시에 신앙의 순수함을 은총으로 결정하는 순수한 위력의 신적
주권성을 설정하였다. (Sherwood 202)
켈러는 태초에 무로부터가 아니라 바다와 같은 혼돈에서 세상이 창조된 것으로 보아서 심연의 얼굴: 생성의 신학(The Face of the Deep: A Theology of Becoming)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정통 남성 신학이 여성성과 연결되는 비결정성을
거부하고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보는 남성 신학에 대한 대안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태초의 혼돈, 코라, 심연(tehom)에 기초한 테홈신학(tehom theology, tehomophilia, tehomology) 혹은 만유내재신론(panentheistic theology) 신학 그룹의 일원인 켈러는 데리다가 타자 혹은 이질성을 강조하고 순수화시킨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의 천지창조를 무로부터 창조한 것으로 환원하는 정통 신학의 오류를 반복함을 염려한다.
그녀는 심지어 칼 바르트와 같이 오로지 믿음에 의거한 입장도 믿음에 의거한 순수한 종교와 그렇지 못한 종교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것이라고 본다:
“종국에, 개신교 신-정통[신학]도 믿음의 순수성과 [개신교 아닌] 종교의 이질성의 이분법--칼 바르트의 ‘기독교 믿음’
대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에 토대를 두지 않았는가?”(Sherwood 202).
켈러는 데리다의 사막적 종말론은 “[사막에서처럼] 절대적으로 해체적인 것을 위해, [모든]가능한 것조차도 정화시켜 가면서, 우리의 상호연관들의 혼돈의 유동성을 거부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메시아적 순수성이 [존재-신학론적] 결정성에 대한 유일한 대안일까? . . . [여성성과 연관된] 비결정성은 이 [남성 가부장적 인물] ‘노바디(Nobodaddy)’(블레이크의 시)”로부터의 확실한 메시아적 해방을 필요로 한다“(Sherwood 201-202)고 말한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결국에는 데리다의 이론의 유효성을 완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일부[테홈tehom: abyss, the sea을 옹호하는 여성 신학자]는—코라적이고 테홈적인—무한한 비결정성을 . . .
모든 정통주의의 불안한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데리다를 필요로 한다.
민주적으로 보편적인 정의와 명상적 긍정을 유지하는—이 바닥이 안 보이는 비결정성을 위해 우리들의 일부는 그의 신비로운 신학으로 흘러들어가서, 그의 신적 잉여에 의존한다. (Sherwood 202)
켈러는 그녀의 글 말미에서 “[데리다와의] 해체불가능한 정의의 공감된 정신 속에서 그는 성경과 그 해석자들을 유령처럼
쫒아 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그를 유령처럼 쫒아 다녔듯이”(Sherwood 202-204)라고 결론지으면서 해체적 읽기와 ‘해체불가능한 정의’를
연결한다.
켈러의 염려와 달리, 데리다의 사막 종말론은 태초의 테홈의 심연을 실체화하거나 정화시켜 정통존재론에 편승하기는커녕 그의 ‘도래할 민주주의’와 교환 없는 환대 그리고 타자에 대한 해체 불가능한 책임감 등 그의 핵심적 사상의 토대가 된다.
켈러가 테홈을 강조하였다면, 데리다는 플라토의 코라 개념을 다시 살려내는 데 주력하였다.
마이클 나스는 데리다의 코라는 심지어 데리다의 메시아성을 더 능가할 정도의 사막적 코라적 개방성과 타자성을 가졌으며 ‘도래할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고 본다:
이 모든 것[데리다의 진리의 아포리아성이 메시아성과 코라로 드러나는 현상]은, 내가 믿건대, 코라의 비유가 데리다의 지난 20년간의 저작에서 그렇게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준다.
정말로 우리가 데리다가 [그의 글에서] 실질적으로 코라 혹은 사막을 다른 것들, 아마도 메시아성의 개념보다도 더 우위에 두는 것을 듣게 된다면,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다. . . .
데리다는 코라에 대한 구절 중간에 [이것을] ‘사막 가운데 사막’(desert in the desert)로 주장한다:
“이것(코라)을 포함시킨 [플라톤적] 전통을 뿌리 뽑으면서, 이것을 탈신학화하면서, 이 추상개념은, 신앙을 거부함이 없이, 이것과 떨어질 수 없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보편적 합리성을 해방시킨다”(#22).
이 문장 끝의 민주주의의 도래는 불한당들에서 “도래할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의 코라 같다”(R 82)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중간에서의 주장만큼이나 적어도 원초적으로 놀랍고 기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Miracles 182-83)
데리다의 코라는 하이데거의 “존재도 아니고, 선도, 신도, 인간도, 역사도 아니다. 이것은 항상 이것들을 거부하고 . . . 무한히 통과되지 않을 끈질김<restance>의 장소:
궁극적으로 얼굴 없는 타자(utterly faceless other)이다”(Acts 59).
데리다의 코라 혹은 사막 같은 메시아성 혹은 종말 없는 종말은 타자와 연결되어서 신앙과 약속, 미래를 가능하게 한다.
데리다의 메시아성은 ‘얼굴 없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이며 이것의 특이성을 무시하지 않고 자아를 희생하여서라도 존중
하게 만드는 존재 이전의 차원이다.
데리다의 메시아성은 타자가 바로 신의 얼굴이 타자의 얼굴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드 브리스는 “이 타자, 이웃으로서의 타자와 신과의 관계, 신의 얼굴이 타자의 얼굴에 남겨지는 이 그 임, 제3자성, (illeité)”(Violence 15)을 언급한다.
데리다의 메시아성은 바로 타자의 특이성(singularity)도 무시하지 않고 그 모든 타자들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개체의 존재론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론을 초월한다.
데리다의 메시아성은 현재의 기존 의미 체계에서 담겨지지 않아 라깡의 ‘일그러진 형상’처럼 유령으로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타자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령론(hauntology)이라는 용어와 연결된다. 데리다는 서구의 민주주의가 승리를 이루었다는 후쿠야마의 선언을 반박하면서, 동유럽의 공산주의의 끝으로 마르크스가 죽었다는 일반적 이해를 비판하기 위해
유령이라는 단어를 쓴다.
데리다는 이런 해방적 사상의 마르크스의 유령은 죽지 않고 우리의 정치문화적 삶에서 아직도 맴돈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도래할 것,” 즉 어떤 형태로 나타나질지 모르기에 빈자리로 남아져야하는 이 해방적 “메시아적 열림”이 “유령성의 바로 그 장소”(Specters 82)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유령은 우리가 생각해야할--그리고 행해야 할 대부분을 주는 것으로 남는다.
계속 주장하여 명확히 말해보자: 행동하고 일으키고 그리고 도래하게 하기 위해”(Specters 122).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해방적 사상의 한계성을 지적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이 실현하고자한 메시아적 해방의 꿈, 실패하여
유령으로 남은 꿈을 긍정적으로 제시한다.
캐더린 켈러에 의하면, “데리다는 마르크스가 모든 정치적 종말론을 활성화시키는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유령들을 포함
하여--유령들에 대한 끈기를 발달시키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데리다는 그의 섬뜩하게 환대적인 유령시학(spectropoetics)를 제시하게 된다”(Sherwood 197).
데리다의 유령론은 다른 데리다의 종교적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데리다는 “무엇보다, 언론인들은 안돼!”(Above All, No Journlists!)라는 논문에서 아브하람이 이삭을 모리아의 산으로
데려가 번제물로 들이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장면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대해 비밀을 고수한 것을 유대교의 특징
으로 설명한다.
데리다는 하느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부친 노력을 유대교의 핵심으로 강조하는 반면에 이런 유대교의 ‘아버지
종교’가 ‘아들 종교’인 기독교로 발전되면서 하느님의 몸이 비어져서 아들 예수로 이전되는 성체성사(Eucharist)가 강조
되는 것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유대교에 대해 때로는 벤야민이 강조하듯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전통에 긍정적이면서도 위의
논문에서는 유대교와 이슬람 종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 그대로 고수하는 ‘글쓰기의 종교’인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을
표출한다.
그런 반면에, 하느님의 육체를 이렇게 예수의 몸으로 전이하여 매개화하는(mediatize) 기독교의 능력에 긍정적 입장을
취한다. 데리다는 유대교 종교는 비밀을 고수하지만, 기독교는 멀리 전파하기에 힘쓴다고 설명한다:
소위 ‘종교적인 것의 회귀’는 매체(media)와 무슨 관계일까? . . . 이것은 중재 혹은 매체, 아득한 메시지가 공간에서 즉각적으로 보내지고 수용되어서 그 결과 사적이거나 비밀스럽지 않게 되는 것을 자연적으로 의미한다.
멀리 보내진 공적 메시지에 의해 비밀이 깨지는 것은 종교가 말하는 것들, 무엇보다 영(the spirit)과 유사한 구조이다.
기독교를 특징짓는 육화(incarnation), 그리스도의 육체에 의한 중재, 는 영적 육화, 유령화이다.
왜냐하면 단어들로 유희하지 않는 영은 또한 유령(Geist, Holy Ghost)이기 때문이다.
육화의 과정, 성체성사는 예수의 육체를 동시에 영화하는 것이면서 유령화하기이며 호스트(유령이 들러붙은 Host)에 내면화하기이다. 매체에 의해 멀리 보내져서, 이 메시지는 메신저(천사 혹은 선교사)만큼이나 이 유령화를 만들어 내거나 이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종교적인 것과 매체적인 것의 관계, 밀접한 공모성이 존재한다. (Religion and 61)
데리다는 바울에 의해 성령과 그것이 전세계에 선교할 것이 강조되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인 글로벌라틴화(globalatinization)이라고 설명하였다. 데리다는 아브라함 유대교 종교의 시작을 “언론인은 안돼!”로 빗대어 특징화하였듯이, 비밀고수가
아니라 이것을 보편화하기에 힘쓰고 멀리(tele) 전파하기에 힘쓴 기독교를 가능하게 하는 예수를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evangelist)럼, 최초의 언론인 혹은 뉴스-맨”(Religion and 57)으로 설명한다.
데리다는 종교의 속성 중 하나가 믿음(faith)임을 강조하면서 성체성사에서나 종교에서 이 기본적 믿음이 토대임을 강조
한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는 “종교적인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많은 식민지적 사회에서 억압되었을 뿐이다. . . . 그것의 회귀는 무대에서 재등장이지 절대로 재탄생이 아니다:
종교는 거듭나지 않는다”(Religion and 72)고 본다.
데리다에 의하면, 성체성사나 성경에서의 기적에 대한 믿음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타자에 대한 믿음이다.
데리다의 도발적인 이런 종교적인 견해는 때로는 기독교적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리다와 달리 종교적인 것과 민주적인 것을 불가분적으로 보는 데리다를 보여준다. 데리다는 기독교의 매체 의존성을 지적하면서, 때로는 바로 이런 속성이
민주화를 촉발한다고 말한다:
매체는 남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주의의 붕괴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텔레비전은 국경을 초월하여 . . . 서구
민주주의의 모델들을 이동시켜준다.
이것은 전체주의 와해에 참여하게 했으며 어떤 민주화를 증진시켰다;
이것은 소위 ‘종교적인 것의 회귀’라 불리는 것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 . . [‘종교적’ 탄압 혹은 종교적인 것이라 표명하는
문화적 모델의 억압]이것은 . . . 민주주의 개념이 적어도 우리에게 익숙한 지배적 형태에서 현저하게 기독교적이고 심지어 바울적, 등등의 속성으로 특징화되어진다는 사실을 망각함이 없이, 종교적인 것과 민주화의 변형을 초래할 것이다. . . .
어쨌든, 다시 한 번 민주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단순한 분리선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Religion and 77-78)
데리다의 외양상으로 기독교 애호적이고 매체 우호적인 이런 자세는 많은 이론가들의 질문을 유발하였다.
미셀 장드로-마살루(Michele Gendreau-Massaloux)는 지적하기를, “[기독교의 메시지 전파에 의한] ‘글로벌라틴화’
(globalatinization)는 논평(commentary)[해석]의 종말과 어떤 개인적 해석 가능성의 종말이다.
텔레비전엣 제시된 기적들의 행위나 마법적 행위를 포함하여 내가 감지하는 바는 표출된 요구들이 기독교의 특성을 유지
하는 기관들에 너무 의존하거나 너무 제도화되어서, 신약의 텍스트의 정신이나 육체에 의한 연결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육체 안에서의 현존성의 흔적에만 목표를 둔다”(Religion and Media 82-83).
이에 대한 대답으로 데리다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같은 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설명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공통으로 가지는 것은 감지할 수 없는 것, 초월성 그래서 부재함의 경험이다. . . . 거기서 신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도 육화하지도 않는다.
비밀의 경험이 무한한 주석의 경험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 . . [그러나] 기독교적 제스쳐는 이 무한성의 이름으로 이 [부재 혹은 비밀] 장면을 내재화한다.
이 무한한 비밀은 남되 명목화(virtulualization) 상태로 남는다.
성체성사, 실질적 현존은 또한 명목화의 종류이다. . . . 그의[기독교인의] 첫 시도는 내재화하고 그 과정에서 애도하는 것
이다:
신, 인간-신을 애도하기는 . . .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 찾아볼 수 없다.
후자들은 . . . [애도와는 거리가 먼] 삶과 살아있는 삶에 대한 생각들이다. . . .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내면화, 영(靈)화, 무한화가 있다.
성 바울은 [유대교의] 할례를 내면화하고 이것의 온전한 직접성을 영화함으로써 동화시켰다.
네[장드로-마살루]가 말한 [논평] 주해는 문자의 위력을 전시해주는, 글자에 의한 논평들이다.
이 글자의 힘은 기독교적 일기의 무한한 자산들에 의해, 그리고 바울에 의해 영적화되었다. (Religion and 84-85)
데리다는 또한 매체와 기독교의 효율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데서 의견을 달리하며 “텔레비전은 사물 자체를 보여 주기보다 일종의 구조물, 위조물”이라는 지적에 대항하여 “어떤 텔레비전의 비판도 매체의 초월적 환상을 지울 수 없다. . . . 또 다른 종류의 믿음, 또 다른 종류의 환상적인 믿음은 계속 작동될 것이며 다른 현상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Religion and Media 85)고 옹호한다.
데리다는 이슬람교의 코란의 ‘비번역성’이 강조되는 것을 ‘번역의 저항성’이라 보고 이와는 반대로 “문자는 반복되어야만 하며” 이것이 저지될 때 글자의 반복성을 읽고 고착된 상태로 머무른다고 지적한다:
로이트가 기독교 종교는 아들의 종교이고 유대교는 아버지의 종교라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형은 반복이다 등을 말할 때, 정신분석적 해석은 일종의 가계, 아버지-아들 관계,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 사이의 아버지-아들 관계 해석에서의 친자관계 분석에서 행해진다--이 세 경우에서의 여성의 문제는 비켜간다.
우리는 . . . (아브람적 유일신교들 혹은 경전의 종교들인) ‘계시된’이라고 불리는 종교들 안에서의 결별을 고집하면서도
그럼에도 동시에 결국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기대되어진다. . . . 텔레비전, 이 보편적 매체화가 파악하고 우선 만들어내려는 것은 이 “부모적-형제적” 동일성의 통일적 지평이다. . . . 우리는 미디아가 종교들 사이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무엇보다 기독교에서 종교라고 불리는 것의 이름으로 중재자로서 기능한다. 매체를 침투한 것은 매체의 종교 혹은 종교의 매체라는 바로 이 종교이다. (Religion and 88)
데리다가 특별히 따로 강조점을 둔 이 종교는 매체의 확산적 기능과 결합하여 데리다가 종교에게 기대하는 민주화의 결과를 초해한다.
데리다의 종교, 메시아성은 이렇게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개념과 불가분적이다.
이것은 데리다의 해체론의 기본적 입장인 ‘종교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주장의 배경이 된다.
데리다는 이런 종교의 민주화가 결국에는 보편적인 국제법의 역할을 조장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종교 혹은 믿음의 희망,
약속, 환대에 대한 권리를 실행하게 하고 누리게 하는 데 기여한다고 본다.
사무엘 웨버는 종교의 국제법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당신은 종교 혹은 종교적인 것의 회귀는 그 내용고 형태에서 국제법 개념의 변화에 기여하리라 보느냐?
당신은 이전에 어떤 패권에 대항하는 반작용으로서 종교들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이미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세속화된 제도들의 형성에 기독교 전통의 영향이 남긴, 그 영향력과 기여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슬람과 힌두교 등의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이 너가 “글로벌라틴화”라고 묘사한 과정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Sherwood 89-90):
데리다는 사무엘 웨버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여전히 국가의 주권성 안에서 행해지는 현재의 국제법의 양상은 만족스럽지 못하며, 기독교측이나 이슬람측에서의 “형제적 모델”이 문제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형제적 모델은 암시적으로 남근중심적이다;
이것은 여성을 희생하여 형제(아버지와 아들)을 특혜화하기”때문이다(Sherwood 91).
데리다는 “국제법의 변화는 . . . 국가의 성격을 안가지고 주권성 자체의 기제를 버린 권력이나 힘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초월하지만 여전히 그것의 특징을 공유하는 새롱운 조직의 형태들을 향하여 진화할 것이다”(Sherwood 91)고
결론 내린다.
데리다의 메시아성의 문화정치적 효과—도래할 민주주의
1980년대의 많은 이론가들은 현 자본주의 속에서 영리주의의 시녀로 전락한 민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그것을 무비판적
으로 비판하는가하면,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같은 이론가는 이전에 군주에서 한 인간의 형태로 대변되는 권력의
핵심부가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빈자리로 남아 있는 바, 왕살해(regicide) 이후 빈자리는 오로지 민주주의 속에서 투표나
대의제도로 매 선거 때마다 각기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데리다는 현재의 대의주의적 체제를 변호하는 것에 반대하고, ‘해체는 민주주의이다’ 혹은 ‘해체는 정의이다’라는 공식적
표현을 내놓는다.
즉 진정한 민주주의는 기존의 개념이나 제도를 극복하고, 진리와 정의의 차연의 과정을 통해 도래할 미래의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미래적 차원을 견지한다.
데리다는 도래할 민주주의와 유사한 타자에 대한 ‘환대’의 이론을 특히 911이후 데리다의 저서들, 짐승과 군주,
불한당들: 이성에 대한 두 에세이라는 책에서 주장한다.
데리다는 미국과 같은 서구 패권주의적 국가를 불한당으로 표현하면서, 마구잡이로 힘을 휘두르는 주권성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이런 입장을 통해 데리다는 극명하게 그 정치적 양면을 드러내 보인다.
데리다의 강한 정치적 입장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 데리다의 메시아성 덕분이다.
데리다는 이런 정치적 입장을 그의 “믿음과 지식”(Faith and Knowledge)라는 논문에서 드러낸다.
데리다는 초기와 달리 후반부에서 해체론은 비정치적이라는 기본적 비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정치적인 입장을 고수하
였다.
심지어, 체코에서의 반정부 운동에 대한 의혹으로 감옥에까지 투옥된다.
마틴 제이(Martin Jay)는 데리다를 푸코의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는 개념, 파레지아(parrhesia)를 적용하여 데리다를 “진실을 말하는 자”(parrhesiast)(Pheng 236)로 규정한다.
데리다가 기존의 법을 너머서 진정한 정의를 구하고 윤리를 넘어선 윤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데리다는 죽음의 선물에서 타자에 대한 책임의 아포리아를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타자에 대한 책임이 일반적인 차원이라면 이것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신 앞에서의 절대적 책임’ 앞에서 이런 윤리적 차원은 초월당하여 데리다적 ‘윤리를 넘은 윤리’의 차원이 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준수하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행위가 바로 윤리를 넘은 윤리, 즉 타자에 대한 절대적 책임감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키에르케고르를 빌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선포하기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것은 유혹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그는 [윤리적] 책임감, 자기-정당화의 명목 하에 신 앞에서 정당화될 수 없고, 은밀하며 절대적인 책임감을 잃게 만드는,
그의 특이성(singularity)와 더불어 궁극적 책임을 잃게 만드는, 도덕적 유혹을 회피하기 위해 침묵한다. (Gift 62)
데리다의 윤리를 넘은 윤리, 즉 그의 메시아성은 타자에게 주는 선물을 교환경제를 피하여 상정하게 하듯이, 윤리적[교환적] 차원을 넘어 타자를 위해서 죽음을 선물하는 아포리아적 상황을 상정한다. 결론적으로 데리다는 “내가 타자, 그의 눈길,
시선, 부탁, 사랑, 명령, 혹은 타자의 부름과의 관계에 들어설 때, 나는 . . . 윤리를 희생시킴으로써만 반응할 수 있음을
안다”(Gift 62). 데리다는 선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역사는 책임감, 믿음, 선물에 매여 있기 때문에, 정복될 정체성도 아니고 결정될 대상도 아니다. 책임감에 매여진 것은 . . . 지식이나 주어진 규범으로부터 결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절대적 결정들의 경험에서이다; 종교적 신앙에 매여진 것은 지식이나 확실성을 너머서, 절대적 위험으로의 모험이기도 한 타자와의 관계와 연결에서이다; 선물과 죽음의 선물에 매여진 것은 . . . 이기적이지 않은 선(goodness)으로서의 신--타자의 초월성과의 관계로 나를 집어넣는 것에서이다. (Gift 7-8)
데리다의 타자에 대한 책임감, 특히 죽음의 선물과 관련하여 자기 아들의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타자에 대한 책임을 준수하는 양상은 일반 신학자들에게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존 밀뱅크는 데리다의 이런 개념들이 너무 자학적이고 “너무 도덕적임”을 지적한다:
[용서에 대한 학술대회장에서] 데리다는 희생에 대해 말한다: “ . . . . 나는 [윤리적] 희생의 논리를 해체한다. . . . 그래서 나는 단순히 희생주의자적이 되려고 하지 않고 동시에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도 거부할 수 없다.”
데리다는 최근 기억에 가장 논쟁적이고 복잡한 신학적 운동들 중의 하나인 “급진 정통파”의 뒤에 있는 핵심 인물, 존 밀뱅크로부터 질문에 대답하는 중이었다.
밀뱅크는 데리다에거 그의 용서와 책임감의 개념들이 “너무 도덕적이지” 않았나,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윤리적 순수성에 대한 그의 강조가 주체를 말살하여 “일종의 자학증을 조장하는 ”순수한 절대적 자기-희생”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를 질문
했다.
이 질문으로 밀뱅크는 데리다와 “허무주의적 포스트모던 철학”의 모범들이라고 그가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가혹한, 비판적이고 복잡한 논쟁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Sherwood 263)
일러 로버츠(Tyler Roberts)는 위의 사실을 보고하면서, 밀뱅크가 최근의 논문에서는 데리다의 생각이 “우선, 비도덕적이고, 둘째로는 불가능하며, 셋째로는 기독교 복음을 . . . 왜곡하는 ‘희생의 윤리학’”(Sherwood 263)이라는 사실도 덧붙인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종교적 입장이 긍정적인 담론으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그의 종교적인 개념들이 정치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나스는 데리다의 ‘믿음과 지식’이라는 논문을 주제로 한 그의 책에서 이 사실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여기서 적어도 1990년도부터 [그가 사망한] 2004에 이르는 그의 저작들의 핵심에 . . . 한 주제를 소개한다: . . . [데리다가 절대 세속적이라고 생각지 않는] 주권성 같은 정치적 개념들의 신학적 혹은 존재신학적 근원들이 그것이다.
데리다에게 우리가 가장 외양상으로 세속적인 근대성의 개념들도 명백한 신학적-정치적 잔존물을 함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로의 회귀는 종교가--신학적 개념들의 형태에서--세속적이라고 잘못 이해되어진 서구 정치적 개념들 안에서 계속 기능하는 한, 전혀 [종교가] 회귀한 것이 아니다. (Miracles 31-32)
데리다에 의하면, 종교적인 것과 세속의 정치적 개념들이 서로 연관이 있듯이, 종교와 과학, 혹은 믿음과 지식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불가분적이면서 자가면역적 관계를 이룬다: “지식과 믿음, 테크노과학 . . . 과 신념 . . . 은 언제나 같은 원인을 가지며 서로 반대의 동아줄에 의해 서로에게 매여 있다”(Acts 43).
이 불가분적 속성은 종교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과학에 의존하여 메시지를 전파하고 세력을 확장하듯이, 과학도 종교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교처럼 어떤 형태의 믿음(faith) 때문에 그 영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 사실을 유추하기 위해 종교의 어원을 언급하면서 종교의 두 가지 원천을 말한다:
어원학자들에 의하면 . . . [종교라는 단어의 어원인] religio는 [한편으로] 라틴어 relegere, legere로부터 오는데, 이 의미는 거두다. 수집하다, 모으다, [다른 한편으로] religare, ligare로부터 오는데 의미는 연결하거나 동여 매다이다.
종교의 어원에 대한 이 두 원천 혹은 이론은 종교의 속성에 관해 두 개의 매우 다른 사고들로 이어진다.
한편으로 종교는 모으고 회상하는 것 . . . 존경심과 연결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혹은 사람과 인간 사이의 . . .
의무 . . . 책무“(♯34)로 연결된다. (Miracles 62)
나스는 이 두 원천들이 하나는 성스러움의 실천으로, 다른 하나는 주체들 사이의 혹은 신과 사람 사이의 연결인 의무로 집결된다고 해석한다. 데리다는 “이것들[두 원천들]이 두 개의 명확한 원천 혹은 초점을 구성한다.
[그러나] ‘종교’는 . . . 이것들의 생략을 형상화한다”(Acts 72)고 말한다.
데리다는 종교라는 용어 안에서 이 두 가지 원천들이 겹치는 사실을 주목할 뿐만 아니라 지식과 종교라는 두 요소가 불가분적 관계로 특히 자가면역적 관계로 기능한다고 본다:
종교와 텔레-테크노과학을 불가분적으로 만드는 같은 움직임은 그 가장 중요한 양상에서 자기 자체에게 불가피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해독제를 분비하지만 자기 자신만의 자가면역의 힘도 분출한다. 우리는 여기서 . . . [종교의 첫 출처 요소인] 성스러운 것의 자기-방어가 이 자신의 방어, 자신의 경찰 . . . 한마디로 . . . 자신의 면역성에 대항해 자기를 보호하여야 한다.
과학과 종교를 항상 연결되게 만드는 것은 이 성스러운 것의 자가면역의 끔찍하지만 치명적인 논리이다. (Acts 79)
종교적인 것과 과학이 서로의 자가면역 때문에 불가분적으로 연결되듯이, 정치는 자가면역 때문에 종국에는 자기를 상해하는 결과를 입게 된다.
데리다의 자가면역 개념은 해체의 다른 양태로서 서로 상반되게 영역을 고수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노력이 철저히 와해되어 그 반대항으로 변모하는 아포리아의 구조를 가진다.
타자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는 자기보호적인 담론과 체제가 이런 자가면역으로 인해 와해되는 이 과정은 데리다로 하여금
패권주의적 담론과 체제의 허구를 공격하는 데 중요한 무기를 제공한다.
데리다는 미국이 자기의 적인 러시아의 공산 이데올로기를 막기 위해, 자기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키운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전사들이 결국에는 미국 자신을 공격하는 도구로 변하는 과정을 한 주권국가의 담론과 체제의 자기공격적인
‘자가면역’의 구조로 설명하였다.
데리다는 기존의 민주주의가 바로 이런 자가면역의 과정 속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로 변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수자적 다수에 힘입어, 민주주의적 자유의 가장 최악의 적들이, 그럴듯한 수사학적 모사를 통해 . . . 자신을 강력한 민주주의자로 드러낸다.
이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미 발단된 공리들의 그 많은 도착적이고 자가면역적 효과들 중의 하나이다.
(Rogues 34)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민주주의를 고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가면역의 효과를 간과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민주주의는 차연 속에서만 자기일 수 있는데, 이 차연에 의해 민주주의는 자신을 연기하고 [현재의 불완전한]
자기로부터 차별한다”(Rogues 34).
데리다는 f해체는 민주주의이다 혹은 민주주의는 차연이라는 명제를 이용하여 차연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재확인한다.
데리다는 자본주의자들이 길거리의 떠도는 자들을 불한당으로 지목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자들, 패권국가는
사실 자가면역의 과정을 통해 자기스스로가 불한당이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데리다는짐승과 군주에서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자신을 주권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짐승처럼 공격적으로
난폭하게 드러나는 양상을 고발한다.
데리다는 짐승과 군주자의 자가면역적 관계를 지적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까지 해체하기 위해 자신의 고양이 앞에서 나체로 있었을 때의 수치심은 물론 고양이의 시선의 엄숙함을 지적하면서 언어를 사용하기에 동물과 차별을 두는 하이데거의 인간관의 한계를 지적한다. 데리다는 “짐승과 군주(커플, 교합, 교접), 짐승은 군주이고, 인간은 인간에게 짐승, homo homini lupus”(Beast Vol. I 30)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군주가 인간 고유의 것이라지만(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이것은 무책임의 약탈적인 환희와 같을 것이며, 일반적으로 강령적으로 동물성, 신성 혹은 죽음으로 불리어지는 그 무반응의 장소와 같을 것이다”(Beast Vol. I 57)고 지적한다.
데리다는 관용이나 인도주의적 등 인간에 적합한 실천이라든가 국가의 주권에도 비판을 가하여 인본주의적 정신을 조심
할 것을 경고한다:
나는 국가 혹은 [초국가적] 비-국가의 주권성을 언급하는 것도 조심한다. 왜냐하면 인권 혹은 인류에 대한 범죄, 국제적 권리, 국제 사법 단체가 야기하는 인권 혹은 인간--이 모든 기구들이 국가 주권성 위에 그것을 너머서 그것 이전으로 . . .
인간자신의 주권성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Beast Vol. I 71)
데리다는 인간중심주의가 우리의 본연의 의무인 타자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보고 진정한 윤리는
“나와 가장 다른, 완전히 다른, 정확히, 괴물 같이 다른, 인식되지 않은 타자와 관련하여서 책임을 다하는 의무”(Beast Vol.
I 71)라고 밝힌다.
데리다는 특히 국가가 주권을 법과 권리의 이름으로, 심지어 국제법의 이름으로 힘없는 타자, 다른 국가들을 괴롭히는
‘짐승’으로서의 강력한 주권국가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 아렌트가 주장하듯이, 국제적 권리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들의 이익이 되게 외곡하면서 사실 때로는 자기들이 만든
국제적 권리를 존경하지도 않고 위반하면서,....더 약한 국가들의 주건에 제한을 기획하고 행사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주권국가들이다. (Beast Vol. I 280)
데리다는 이런 주권국가들의 횡포에 맞서는 것은 레비나스처럼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윤리가 (레비나스가 시도했었을 바처럼) 주체로 하여금 자기가 주체이고, [환대를 베풀] 집주인이거나 [환대에 묶인] 인질이니까 타자, 완전히 다른 타자 혹은 어떤 다른 타자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말한다는] 언어로도 [동물은 본능으로 반응하고(react) 인간은 책임감으로 타자에] 대응(response)한다는 것으로도 인간-기계의 데카르트 전통을 깰 수 없다.
심지어 주체의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체의 전복”을 주장하는 무의식의 윤리나 논리로도 충분하지 않다.
(Beast Vol. I 159)
데리다에게 인본주의적이고 서구중심적인 현대의 주권국가들의 횡포나 주권자들의 횡포에 대응하는 방법은 뼈 속 깊이
인간과 동물의 데카르트 이분법을 의존하는 우리의 철학적 사고 체계부터 시작하여 민주주의라는 다수의 횡포를 법의
이름으로 묵인하는 수동적 자세를 개혁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약한 메시아주의라는 벤야민의 사상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만들어낸다. 데리다는 벤야민의 “폭력”에 대한 개념에서 벤야민이 봉건제에서 폭력은 경찰의 형태로 극명히 드러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그 반대로 폭력이 더 이상 경찰의 정신으로 수여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은 사실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음을 지적한다
(Acts 281):
1. 민주주의는 법, 폭력, 권위와 법의 힘의 타락이 될 것이다. 2. 이 이름에 알맞는 어떤 민주주의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아직 도래할 상태로 남아 생성되거나 재생성될 것이다.
[이런] 벤야민의 담론은 자유 민주주의의 의회주의의 비판으로 인도되는데 따라서 마르크시즘에 경도되면서 . . . 혁명적
이다. (Acts 281)
비록 데리다는 자신의 ‘도래할 민주주의’를 벤야민에게 빚지지만, 그의 혁명이라는 개념도 모든 혁명의 개념이 모호하여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는 물론, “더 순수한 기원의 과거로의 복귀라는 의미에서의--복고적인(reactionary)”(Acts 281)
양상을 포함하는 것을 인정한다.
데리다의 이런 벤야민 해석은 더 정확히 깊게 천착해 볼 때 완전히 수긍될 시각은 아니다.
데리다는 위의 벤야민의 설명을 포함한 그의 "법의 힘"(Force of Law)라는 논문의 결론에서 벤야민이 정부나 국가의 ‘신화적 폭력’에 대항하여 강조하는 ‘신적 폭력’(divine violence)를 근거로 벤야민이 아직도 자신처럼 완전한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를 유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너무 하이데거적이고, 너무 메시아적으로-마르크스주의자적이거나 원형-종말론적이다”(Acts 289)고 고백한다:
내가 이 텍스트[벤야민의 폭력비판 논문]에서 , . . 가장 의문이 가고, 정말 아마도 거의 참을 수 없다고 느낀 것은 어떤 유혹인데, 이 유혹은 [독일의 나찌가 취한 유대인 문제 해결에 대한] “최종 해결책”의 희생자나 생존자,
이것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생존자에게 특히 열려 있는 유혹이다.
어떤 유혹이냐고?
신적 폭력이, 벤야민이 말하기를, 소멸시키고, 용서하며 무혈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법을, (내가 벤야민을 재인용
하면) [나쁜자들에게] “타격을 가해서 속죄하도록 만드는 무혈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법을 파괴하는 신적 폭력이라는 점에서, 홀로코스트를 신적 폭력의 해석불가능한 표출로 생각하게 만드는 유혹이다. (Acts 298)
벤야민의 신적 폭력에 대한 데리다의 혹독한 비판은 그 문맥상으로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 비정치적이고 차연적이지 않아서이다.
데리다는 국제법의 만행을 고치는 방법이 국제법의 폐쇠에 있다고 보기보다 이 법을 보완하여 이것이 행사되도록 하는 초개인적인 국가적 행사력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또한 혁명은 신에 의해서이건 이렇게 한 번에 와해되고 깨어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혁명의 정신은 차연의 과정에서 새로운 ‘윤리를 초월한 윤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만 실현가능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는 해체는 민주주의라는 명제를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도래할 민주주의’와 정의를 다음과 같이 연결한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정의와 불가분적으로 연결된다. . . . 이 제스쳐는 도래할 민주주의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라는 공식표현과 . . . 유령학 혹은 유령성 뿐만 아니라 법과 정의 사이의 독특한 차이(이질적이면서도 불가분적인)로 기입되는
필요성을 보여준다. . . . 나는 정의를 [현체제의 법으로부터의] 탈구(disjointure) . . . 타자의 무한한 비밀과 연결시킨다. . . . 이것은 미래의 문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 . . 민주주의와 정의의 결합은 우정의 정치학(Politics of Friendhsip)의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Rogues 89)
데리다에게 민주주의와 정의는 자신이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 한 순간에 가해지는 것으로 오해되듯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연 혹은 해체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구현되어져야 한다.
데리다는 “이 그리스 이름,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일이 문맥, 수사학 혹은 전략, 심지어 정치학의 . . .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 . . 자기 카드를 안보여주는 반민주주의자들의 기회주의나 냉소주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그 반대다: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에서의 보장된 권리들을) 질문하고, 비판하고 해체하는 이 무한한 권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없이 해체는 없고, 해체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Rogues 80-90)고 주장한다.
결론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성에 나타난 그의 종교관은 전적으로 정치적 맥락과 분리되어지지 않는다.
데리다는 그 스스로가 밝히듯이, 언어나 국가의 측면에서도 경계지역(borderplace, limittrophe)에 소속되어 프랑스어를 쓰면서도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언어는 잘 구사하지 못하는 아랍어일 수 있다는 부조리한 말을 남긴다.
또한 자신을 “서자 중의 서자”(bastard of the bastards)라는 말로 정의내리면서 모든 경계의 상호침투성을 강조한다.
생후 8일째 유대인 의식으로 할례의 의무를 당할 때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그 상처부위를 입으로 진정시켜주신 상세한 사실까지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유대성은 물론 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아 무신론자로 인식되는 데리다는
바로 모든 주장의 자가면역으로 인해 그 반대의 상황을 살았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 삶은 무신론자의 삶을 살기는커녕, 그의 친한 지인, 엘렌 식수스에 의해 젊은 유대인 성인으로서의
쟈크 데리다의 초상(Portrait of Jacques Derrida as a Young Jewish Saint)에서 성인과도 연결되었다.
또한 일부 지인들, 특히 지오프리 베닝턴(Geoffrey Bennington)은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중간 이름, Eli가 엘리야 선지자 이름에서 온 것을 밝힐 정도로 한 명의 선지자로 기억되고 한 명의 랍비로도 기억된다.
이 논문에서 깊게 다루지 못한 그의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한 주해는 물론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호감 등은 그가 한 명의 신학자 못지않게 깊게 성경을 연구한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때로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면서도 이 논문에서 보았듯이, 기독교의 긍정성도 한편으로 인정하는 그의 모순적 태도는 그의 신학적 개념들이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기초해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종교성 짙은 논문, “믿음과 지식”을 자신의 책에서 설명한 마이클 나스의 글들을 읽으면 데리다의 해석이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적인지 아니면 그를 설명한 나스 자신의 시각이 기독교 중심적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랍에 대한
차별적 시각까지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깊이 잘 읽어보면 이렇게 아랍 차별적 시각이라 보이는 것은 현재 종교들이 구현하는 그 자체의 실천에서 드러나는 양상을 기록한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데리다는 아브라함의 종교와 이슬람의 종교가 한 조상, 아브라함으로 온 것을 인식한다.
라깡이 신의 부름을 각적(shofar)라는 유대교의 나팔에서 유추하려 하였듯이, 데리다는 기독교와 달리 아브라함의 종교인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시각의 종교[성체의식 장면을 보여주는 행위]와 달리, 청각의 종교임도 부각하였다.
데리다의 연구에서 어려움은 하나의 시각이 대체로 일관되게 전개되기보다 또 스스로 해체하듯이, 마치 담론의 자가면역에 의해 해체 당하듯이, 그 반대의 말을 하는 순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신의 후기 담론의 핵심인 ‘도래할 민주주의’ 를 설명하면서자가면역적 해체적 민주주위의 양상을 다시 환기
시킨다:
민주주의의 바로 그 동인에서 [내가 사실 “자가면역적” 힘이라고 했을] 자기-파괴적인 힘을 처음부터 기입했을 절대적인
차원, 민주주의 자체가 자기를 제한해야할 의무이자 가능성[이며] . . . 민주주의는 . . . 해체적인 자기-제한의 자기들(the autos)[자가면역 혹은 자기제한]이다.
통제적 개념과 무한한 완벽성의 이름으로서의 . . . 자기 제한 말이다. (Acts 281)
자가면역으로 인한 해체의 필요성에 대한 이 주장은 바로 기존의 ‘지금-여기’에 있는 어떤 제도적 장치나 담론을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해체할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이런 데리다의 정치성은 바로 그의 메시아성의 담론과 불가분적임을 이번 논문에서 보여주었다.
데리다의 많은 저작에서 계속 부각되는 것은 아직도 많은 측면에서 해방적 기제가 작동하고 성과를 올렸지만, 특히 종교적 담론에서는 여성을 위해 충분히 해체론적 시각이 파악되지 않은 것이 철학자의 직무태만임이 지적된다.
이번 데리다의 메시아성의 연구로 앞으로 젠더의 측면에서 해체적 읽기가 촉발되기를 희망하며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