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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여정의 기록, 자유를 향한 인간 여정의 출발점으로서의 베르그송의 사유
베르그송을 읽는 두 가지 방법
여기 베르그송의 글이 있다.
이전에 한 번이라도 그의 저작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떤 글이든 그의 텍스트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그송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껏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혹은 어렴풋한 경험만이 있을 뿐인 전적으로
새로운 사유에 참여하도록 이끌고 있음을 의식할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사유를 이해하는 익숙한 방법은, 그러한 사유를 한 철학자가 제기한 물음과 답, 그 물음과 답을 정초
지으면서 해결하는 개념들을 찾아 그것들이 구축하고 있는 사유의 체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한 철학자의 사유, 철학함이란 독특한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주춧돌 삼아 세계를 거듭 다시 짓는
작업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대면한 세계를 탐구하는 가운데 그 모든 현상들을 설명해줄 열쇠와도 같은 몇몇 개념들을
창안해내고, 이를 도구로 세계를 낱낱이 파헤쳐 몇 가지 요소와 관계들로 정리하고 재조립한다.
그 개념과 체계 전체가 내적으로 얼마나 정합적이고 외적으로 시간의 풍화작용을 얼마나 견뎌내는가에 따라 그 사유
체계의 보편성이 담보된다.
이러한 시험을 거쳐 세계 전체, 우주 만물을 하나의 실로 꿰고자 하는, 철학자들의 수만큼 많은 체계들, 조립된 세계들이
있어왔다.
맑스가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라고 했을 때, 이는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었다.
베르그송의 새로운 사유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이 익숙한 방법을 사용하여 그 새로움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가 제기한 물음, 이에 대한 그의 답변, 그리고 그가 제기한 물음과 답을 이해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가 되는
명제와 개념들을 찾아내 그것들 간의 관계를 설정해야만 한다.
모호한 전제나 모순적인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면, 그의 사유 체계 전체가 무너질 것이며, 사유의 체계를
파악하는 과정은 그러한 허점의 존재여부를 살피면서 그의 사유를 시험에 부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험에 이용되는 척도들은 우리 이성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빛나는 관념들, 사유의 법칙들이다.
이렇듯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도구와 체계를 가지고 새로운 도구와 체계의 견고함을 시험하기 위해 우리는 베르그송의 글들을 읽어간다.
그런데 자신의 철학함에 대한 친절한 안내문이자, 새로운 형이상학의 정립을 모색하고 있는 글인 「형이상학 입문」에서
베르그송은 바로 이러한 사유습관들로는 결코 실재에 가닿을 수도, 철학함을 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실재의 ‘주위를 돌’ 뿐, 실재의 ‘내부로 곧장 들어갈 수 없’고, ‘상대적 인식에 머무르게’ 된다.
시험관에게 그 채점기준으로는 나를 평가할 수 없으며, 이러한 시험 자체가 나를 이해하는 데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같이, 베르그송은 실재에 접촉하기 위해서는 유동하는 흐름을 부동화하고, 고정된 항(개념)들의 병렬로 대체하고, 그렇게 병렬된 항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사유의 습관적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조언한다.
이는 베르그송의 철학 안에서 실재 뿐 아니라 베르그송의 사유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채택되어야 할 방법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베르그송 사유의 독특함이라는 실재에 직접 접촉하는 것은 그의 저작에서 개념들을 뽑아내고,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세우고, 저작의 내용을 요약, 암기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까?
베르그송은 우리 사유의 습관들을 규정하는 경향성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한다. 거스르라고?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분석하고, 종합하고, 추론하는 사유의 방법을 베르그송이 ‘지성의 습관적 경향’이라고 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사유의
‘한 가지’ 경향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사유한다’는 것을 곧 분석, 종합, 추론과 동일시해왔지만 실은 그러한 작업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일어
나는지에 대한 반성이나 의식 없이, 사유를 한다고 하면 분석, 종합, 추론작업에 곧장 기계적으로 착수할 만큼 습관적
으로 그러한 경향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러한 방법으로는 한 사물의 본질에, 구체적인 실재에, 한 철학자의 단순한 직관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즉 지성의 습관적 방법으로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이해할 수 없고, 철학자들의 체계는 세계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한 소통불가능성, 진리 혹은 실재의 불가지성에 떨어지는 것인가?
베르그송은 우리가 의식과 지성을 동외연적인 것으로 놓지 않고, 사유를 지성의 독점적 기능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지성의 빛나는 핵 곁에 별무리처럼 어스름한 불빛으로, 하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직관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직관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실재의 내부에 자리잡을 수 있다.
분석이나 추론의 방법을 사용했을 때와 같은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직접 실재에 접촉하고 공감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은 개념들을 늘어놓고 조작해도 무수한 논쟁만을 야기하는 해석을 만들어내지 않고 곧장 철학자의
빛나는 직관을 공감하게 해 줄 것이고, 직관의 철학은 구체적 실재에 꼭 들어맞는 유연한 개념들을 연속창조해내며
절대적인 진리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직관의 방법으로 베르그송의 저작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베르그송의 직관에 도달하기 위해, 특권적 개념들, 미리 짐작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텍스트를 일갈하고, 그 내적
정합성을 따지며,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와의 비교에 부치는 습관을 일단은 버려야 할 것이다.
구체적 실재로서의 지속, 지속에 접촉하는 직관의 방법, 잠재적으로 공존하는 다양한 지속의 정도들, 가장 낮은 지속의
정도로서의 물질, 순수지속으로서의 기억/의식/과거, 연속적으로 변화하면서 현재를 과거에 저장하는 시간으로서의
지속, 거짓문제로서의 무와 무질서 문제 등 베르그송의 독특한 사유의 결과물들 앞에서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지만
일단은 그의 가정-실재하는 지속,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방향을 가지며 연속적으로 변화, 팽창하는 시간으로서의 지속-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리고 다음과 같은 순간을 기다려보기만 하면 된다.
베르그송의 텍스트들을 읽어나가면서, 참일 개연성만을 가진 이러한 가정이 증명을 통해 점차 그 개연성이 증대되고,
따라서 이 가정이 실재 그 자체에 잘 맞는 그래서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어떤 절대적 인식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설탕물을 얻으려면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하듯이 베르그송의 사유를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글에서 그 의문이 풀리거나 또 다른 글에서 의문 자체가 거짓문제로 해소되고,
이해했다고 생각한 어떤 개념이 다른 글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고, 다시 텍스트를 뒤적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베르그송의 사유를 조금은 이해했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지속으로서의 실재
베르그송은 관념론, 경험론 모두에 맞서 철저한 실재론을 주장한다.
실재는 우리의 경험을 추상한 텅 빈 이념, 혹은 관념으로 있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감각경험들의 무한한 계열만 존재해서
그 모든 감각 경험을 하나로 꿰는 실재가 없는 것도 아니며, 있어도 닿을 수 없는 저 편의 것으로 존재하지도 아니한다.
이 모든 주장은 실재에 대해 취해진 하나의 외관, 관점에 불과하며 대립적으로 보이는 각각의 관점들은 정확히 지성의
영화적 기작의 이런저런 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실재에 대해 지성의 습관적 경향만을 작동시킨다면 실재의 구성적 부분에, 따라서 결국 실재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실재는 존재한다. 그것도 우리가 늘상 체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구체적인 경험으로 존재한다.
눈 앞의 컵에 대해 관념론이 모든 컵들의 본질이자 존재인 ‘컵임’의 이데아를 고심하고, 경험론이 지금 내 눈에 지각된
컵과 다음 순간의 컵 혹은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의 컵 사이의 동일성이 있는지 없는지 머리를 싸맬 때, 베르그송은
우리 눈 앞의 컵은 우리가 보고, 만지는 그대로의 구체적 실재임을 긍정한다.
가장 상식적인 것에서 출발한 베르그송은 그러나 가장 낯선 길로 우리를 안내하는데, 컵을 컵이라는 말, 딱딱하고 일정
하게 형태지워진, ‘나’와 독립적으로,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로서가 아니라 이 사물의 실재에 가 닿으려면 컵을 위
와 같이 인식하는 지성의 작업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독려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의 방향을 역전시켜 이를 수 있는 실재는, 주체와 객체, 부동적인 것들의 공간적 병치로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관점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연속적으로 변이하고 수많은 정도들이 잠재적으로 공존하며 매순간의 현재를 자신의 뒤에 축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지속으로서의 모습이다.
베르그송은 이해를 돕기 위해 풀리면서 감기는 실패, 연속적으로 변화하며 나아가는 스펙트럼, 한껏 수축했다 나선형을
그리며 늘어나는 용수철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 중 어느 것으로도 실재를 완벽히 묘사할 수 없지만, 이 모든 이미지들을 염두에 두고 이 이미지가 가리키는 구체적
실재를 사유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다양성, 단일성, 팽창, 수축과 같은 개념들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실재
로서의 지속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실재로서의 지속에는 각기 다른 리듬, 다른 정도를 가진 지속들이 잠재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지속들이 공존하고 있다고 했을 때, 지속이 독립된 사물과 같이 병치되어 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지속의 정도들은 원뿔의 단면들과 같이 연속되어 실재 전체로서의 실재를 이루고 있다.
이 원뿔 전체가 끊임없이 현재를 뚫고 나가면서 그 현재를 뒤에다 쌓아나감에 따라 팽창하고 변화한다.
물질은 가장 낮은 정도의 지속, 따라서 거의 순간적이며 반복만을 계속하는-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으로 변이하는
-지속이다.
그것의 다른 극에는 가장 풍부하고 유동적인 흐름으로서 순수지속, 순수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를 우리의 외부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선재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해선 안된다.
인간, 각각의 개인 역시 독특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지속이며 그 안에도 무한한 지속의 정도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를 철저하게 지속의 원뿔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공존하는 무수한 지속의 정도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무정형의 흐름들 속으로 용해되는 것은 아니다.
경계지어지면서도 무수한 흐름들을 내포하고 또 그 자체가 하나의 흐름인 그러한 ‘다양한 단일성’을 상상해야 한다.
인간에게서는 신체가 가장 낮은 지속의 정도를 가진다.
신체는 ‘외부사물’이라 인식되는 물질과 우리 안의 보다 높은 정도의 지속인 의식이 만나는 막의 역할을 수행한다.
바로 이 ‘막’인 신체 위에서 물질 이미지가 만들어지고(지각), 이에 대해 의식이 선택한 행위가 수행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의식은 신체에 가해진 외부 물질의 작용에 대한 반응에 유용한 기억을 의식의 저장고로부터 가지고
온다.
신체가 주의를 기울여 지각한, 혹은 의식하지 않고도 지각한 현재 전체가 매순간 연속적으로 우리의 기억에 저장되지만
우리가 행위를 하면서, 즉 삶을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기억 이미지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우리의 전 과거, 전 기억의 아주 작은 조각만이 행위에 붙어 유용한 기억들을 잘라내도록 특징지어진 의식-지성-의 스포
트라이트를 받는다.
나머지 기억 전체, 지성 이외의 의식 전체는 어둠 속에 침잠해 있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물질과 일종의 대사작용을 해야 한다.
음식을 먹어 에너지를 섭취해야 하고, 생명 유지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다른 물질들을 변형
시켜야 하고, 때론 싸우거나 힘을 모아야 하고 등등.
이로부터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따라서 외부 물질들에 대한 작용에 적합하게 발달된 의식의 부분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성’이다.
삶에 대한 요구는 생명체에게 매우 강력한 것이므로, 이 지성은 의식의 빛나는 핵을 이루게 된다.
그 자신의 주변에 달무리처럼 잠재적으로 공존하는 의식의 다른 부분들을 잊게 할 만큼.
따라서 지성의 방향을 따라서는 연속적인 변이, 창조의 단일한 방향으로서의 지속에 이를 수 없다.
지성은 물질의 구조를 따라 구조화되고, 거의 순간적인 반복의 연속인 물질의 운동 방향을 따라 기능지어져 있어서 변화
를 부동적인 것들의 공간적 병렬로 대치하여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순간적인 반복, 따라서 공간을 향하는 물질, 지성의 방향과 정 반대 방향의 운동, 흐름이다.
공간은 실재나 지속이 전혀 아닌데, 지성은 물질 안에 공간화 될 수 있는 경향을 끝까지 밀어부쳐 공간을 표상하고, 모든
실재를 공간화한다.
따라서 다시 한 번, 공간을 향하는 지성은 혹은 지성만으로는 결코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이라는 천형을 진 우리는 어떻게 실재에 접촉할 수 있을까.
물질보다 높은, 다양한 정도의 지속을 지닌 우리 의식은 삶에 대한 주의를 이완시킴으로써 의식의 보다 높은 수준들에
이를 수도, 반대로 거의 물질과도 같은 낮은 정도의 지속에 가 닿을 수도 있다.
특히 시선을 우리의 내면으로 돌려 자신의 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부 사물에 대해 우리가 인식할 때와는 다른
양태의 어떤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순간 순간 강렬하게 떠오르는 인상이나 감정 외에도 흐릿하지만 서로 다른 인상, 감정들이 서로 섞였다가, 달라졌다가
하면서 연속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의 긴장을 점차 이완시킴으로써 우리는 의식의 심층, 인간존재 이상의 존재에도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극에서 순수지속으로서의 생명의 영원성을 보게 될 것이라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이것은 운동을 부동화하는 지성의 산물인 언어로도, 지성의 기작으로도 포착될 수 없고 오직 공감이나 직접 그 안에서
바라본다라고밖에 할 수 없는 직관의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지성을 의식과 동외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실은 영화 속 인물에 대한 동일시나 시의 행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느꼈을 때 이미 경험했던 실재에 대한 체험을 지성 이하의 것으로 폄훼하지 않는다면 오직 실재하는 것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지속, 그리고 시간의 창조일 따름이라는, 또한 그러한 실재를 직관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베르그송
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문
여기까지 베르그송의 사유를 따라오면서 거의 대부분의 의문들이 거짓문제로 일소되거나 저절로 해소되었지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실재하는 것이 오직 시간, 지속이고 연속적으로 변이하는 흐름이며 창조의 운동 그 자체라면, 어떻게 인간의 지성에 실재
하지도 않는 공간이 주어지고 지성이 실재의 흐름들에 대한 부동의 외관을 취할 수 있을까?
그 자신 하나의 지속인 인간은 왜 부동화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도록 운명지워져 있을까?
요컨대, 어떻게 실재는 자신의 특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이 물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간, 부동화, 관점, 외관, 지성의 기작, 언어와 같은 것들을 실재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베르그송의 글 곳곳에서 공간과 언어를 허구로, 지성의 습관적 경향이 지속의 운동 방향을 거스
르는 것으로, 삶에 대한 주의가 실재를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실재 뿐이고, 실재 바깥의 일체의 진공이나 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베르그송은 그러한 것
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 문제를 제기하자.
실재는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냈는가?
결과는 반드시 원인에 포함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스콜라적 인과론을 버리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실제로 베르그송은
이러한 인과론을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비판한다),
그것을 버리고서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것들(운동과 정지, 지속과 반복, 직관과 지성 등)의 공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실재가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냈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것들을 만들어냈는가?
이러한 질문 안에 이미 여러 가지 전제와 원리, 기성의 개념들이 들어있다. 실재는 운동, 변화를 ‘본성’으로 가지고 공간,
외관은 부동화, 반복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떤 것은 자신의 본성에 모순되는 것과 공존할 수 없으며, 그것의
원인이 될 수도 없다는 것, 어떤 것이 말해지고(‘공간’, ‘언어’ 이렇게) 생각될 수 있다고 여겨지면, 반드시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모든 전제와 개념들을 다시 또 물질에 최적화된 지성의 기작으로 돌린
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순환한다.
이 원환을 깨는 것이 베르그송의 사유에 대한 이해로의 도약이 될 것이다.
결국 제기된 문제의 모든 한계를 감수하더라도, 문제는 해소되기 위해 제기되어야만 한다.
공간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대립되는 방향의 두 가지 과정
지성은 물질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식이고, 물질은 거의 순간적인 반복이지만 낮은 정도의 지속이다.
그러나 공간은 다르다.
공간은 지속도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허구일 뿐인데, 일단 이 공간을 표상한 지성은 이것을 마치 제 것인양 활용하여 지각하는 모든 것들을 공간화한다. 지성은 어떻게 아주 낮은 것일지언정 지속하는 물질과 일체의 지속을 포함하지 않는 공간 사이의 극미하나마 명백히
존재하는 간격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곧장 『창조적 진화』의 세 번째 장으로 가야 한다.
창조적 진화 3장 도입부에서 베르그송은 앞 장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면서 지성과 물질성의 발생을 추적할 순간이
왔음을 이야기한다.
제1장에서 우리는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에 구분선을 그어 보았다.
그러나 물질을 무기체로 분할하는 것은 우리의 감관과 지성에 의존하며, 불가분의 전체로 볼 때 물질은 하나의 사물이기
보다는 오히려 흐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타성체와 생명체 사이에 접근하기 위한 길들을 마련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제2장에서 지성과 본능 사이에 동일한 대립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본능은 생명의 특정한 규정들에 의존하며 지성은 무기물질의 모형 위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지성과 본능이 단일한 토대 위에서 서로 분리된다는 것도 역시 우리는 덧붙였다.
이 단일한 토대는, 더 좋은 말이 없으므로 의식 일반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그것은 보편적 생명과 동외연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성을 둘러싸고 있는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발생을 추적할>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강조는 필자).1)
무기물질과 유기물질, 타성체와 생명체 사이의 구분과 접촉의 가능성을 마련한 후 베르그송은 생명체에게 있어 지성과
본능을 구분하고 동시에 양자의 단일한 토대로서의 의식 일반, 보편적 생명을 정초한다.
그렇다면 다음 단락에서 “둘 다[지성성과 물질성] 더욱더 광대하고 더 높은 존재형식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양자가 거기서 파생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바로 그 곳에 그것들을 다시 위치시켜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했을 때, 그 더
높은 존재형식, 지성성과 물질성이 파생되어 나오는 그곳이 보편적 생명과 동외연적인 의식 일반일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즉 지성성과 물질성, 그리고 그것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의 발생을 추적해보기 위해서는 생명 일반의 진화과정 내에
그것들을 위치시켜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실재인 지속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잠시 뒤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물질성과 공간의 발생이 생명 일반과의 관계 속에서 밝혀져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곧장 공간의 발생에 관한 구절들을 살펴보자.
베르그송은 우리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지속의 무한한 정도들을 의식으로 하여금 오르내리도록 하는 것으로 지성성과
물질성의 발생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우리 안에서 외부로부터 가장 멀고, 지성성의 침투가 가장 적은 부분에 집중해보자.
우리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고유한 삶의 가장 내부에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찾아보자.
이 때 우리가 잠기게 되는 곳은 순수 지속 안이다.
여기서 과거는 언제나 전진하며 완전히 새로운 현재로 끊임없이 살찌워진다.
동시에 인격을 격렬히 수축시킴으로써 빠져나가는 과거를 모아 담고, 그것을 불가분인 채로 현재로 밀어 넣어 현재를
새롭게 창조된 현재로 만들어내는 우리 의지의 극한의 응축을 느낀다.
이 순간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와 일체를 이루며 이러한 감정이 깊고 일치가 완벽할수록 우리의 삶은 지성성을
넘어서면서 그것을 흡수한다.
이것이 의식의 첫 번째 방향이다.
반대로 긴장을 풀고 가능한 한 과거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현재 속으로 밀어 넣는 노력을 중단해보자.
긴장이 풀어져 완전히 이완되면 더 이상 기억도 없고 의지도 없을지 모르나, 우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절대적인 수동성으로 떨어지는 일도 결코 없다.
그러나 이완의 극한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 시작하는 현재로 이루어진 존재를 엿보게 된다.
여기에는 무한히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성 외에 실재적 지속은 없다.
그것이 물질 존재인가?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물질은 아무리 짧은 것이라 해도 아주 약하고 사라져가는 지속에 속하는 것이지 무無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존재가 첫 번째 방향으로 향하듯이 물리적 존재는 이 두 번째 방향으로 향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로부터 한편으로 정신성의 근저에, 다른 한편으로 지성성, 물질성의 근저에 대립되는 방향의 두 과정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순수지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의식할수록 우리 존재의 다양한 부분들이 서로의 안으로 잠입하고, 우리의 전 인격이
끝없이 미래를 잠식하면서 그 속에 삽입되는 한 첨점에 집중되어 있음을 느낀다.
자유로운 생명과 행동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반대로 자아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행동하는 대신 꿈을 꾸면 우리의
자아는 단번에 흩어진다.
우리에게 불가분적 충동 속에서 응축되던 과거가 수천의 기억들로 분해되고 이 기억들은 응고되어 상호외재적으로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인격은 공간의 방향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을 아무리 이완시켜도 이는 연장의 방향으로 한 걸음을 뗀 데 지나지 않는다.
이 걸음을 더 멀리 밀어서 야기된 것이 물질이며, 물리적인 것은 단지 심적인 것의 중단 혹은 역전이라고 가정해보자.
물질은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면을 거슬러 내려오도록 더욱 부추길 것이고, 일단 방향을 튼 정신은 자신의 운동을
계속한다.
이 운동이 도달할 수도 있는 극한 지점의 도식이 바로 공간이다.
결국 물질이 단지 그 방향을 지시할 뿐인 운동의 종착점, 그러나 결코 실제로 도달할 수는 없는 바로 그 종착점이 공간
이다.2)
이로써 우리의 정신이, 허구이면서도 우리의 본성에 그리 낯선 것이 아닌 공간 표상에 어떻게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개연성 있는 설명이 제출되었다.
그런데 발생과정에 대한 상술과 함께 또 하나, 애초의 문제제기 자체를 문제시하게 하는 설명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순수지속, 물질, 공간을 각각 상호외재적으로 동등하게 존재하는 실체로 놓고 이 항들 간의 관계를 따져
물은 질문의 지성적 성격 자체에 관한 것이다.
지속 상태, 물질 상태, 공간 상태에 해당하는 실체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서로 대립되는
방향으로 정향된 두 개의 운동과정이다.
이 운동은 부동체의 운동궤적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흐름의 매 순간마다 각기 다른 정도의 지속들을 지나쳐가는
그러한 운동이다.
생명, 자유, 순수지속, 시간의 창조, 행위를 향해가는 운동과 무기물질, 수동성, 공간, 반복을 향해가는 운동이 지나쳐
가는 잠재적으로 다양한 정도들이 있을 따름이다.
중단과 역전
그렇다면 우리가 제기한 의문은 완전히 해소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베르그송이 지적하고 있듯이, ‘실재가 어떻게 긴장에서 연장으로 자유에서 기계적 필연[공간표상이 부착된 물질의 기하
학적 질서]으로 역전에 의해 이행하는가’가 더 자세히 검토되어야 한다.
“원인의 중단이 결과의 역전과 등가라면, 도대체 이완되기만 하면 확장되는 원리는 무엇인가?”3)
베르그송은 더 좋은 말이 없이 이를 의식이라고 불렀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의식의 노력을 통해서 그러한 원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원리적 방향의 역전이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
우리가 자유행위 속에서 우리의 전 존재를 앞으로 던지면서 긴장할 때 우리는 그 행동의 동기와 동력에 대해 다소간
명확한 의식을 가지며 심지어 그것들이 행동으로 조직화되는 생성의 과정도 얼마간 의식한다.
그러나 순수의지, 즉 물질 속에 생명을 전달하며 관통하는 흐름은 거의 느끼기 어려우며 기껏해야 지나치며 스칠 뿐이다.
여기서 잠시 순수지속의 극한을 생명의 영원성이라고 했을 때부터 모호한 채로 남아 있었던 생명과 의식, 실재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베르그송에게 요소들의 무수한 진동인 무기물질부터 우리의 의식, 그리고 어둠의 심연에 잠겨있는 기억 전체에 이르기
까지 이 모든 지속, 이 실재 전체가 스스로를 현재 속에 밀어넣어 끊임없는 변이와 창조를 이루는 것은 그 자체가 ‘생명’
이라는 것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아니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의식 일반과 동외연적이며 생명의 약동은 실재로 하여금 영원한 창조의 요구에 응답하게 한다.
단번에 창조되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일 수 없는 실재의 연속적인 변화는 따라서 생명 진화의 역사로 탐구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이 물질성과 지성성, 공간 표상의 발생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도 바로 이 생명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
지는 『창조적 진화』에서인 것이다.
위의 논의로 돌아가서, 우리는 우리 의식의 심층에 자리 잡으려는 노력과 자유로운 행위의 동기와 동력에 대한 명확한
의식 속에서, 잊고 있던 우리의 자아, 나 자신의 고유한 지속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만, 물질 속에 생명을 전달하는
흐름은 거의 느끼기 어려우며 기껏해야 스쳐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한 순간이라도 거기에 자리잡으려고 시도할 때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의지이다.
우리가 우리 존재를 의지 속에 그리고 의지 자체를 그것이 연장하는 충동 속에 위치시킬 때, 우리는 실재가 영속적 성장
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창조임을 이해하고 느끼게 된다.
발명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적 작품과 자유의 일부를 포함하는 모든 의지적 행위, 자발성을 나타내는 유기체의 모든 운동은 세계 안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물론 그것은 형태의 창조들이다.
형태는 무수한 요소들의 진동으로 용해될 수 있는 흐름들을 우리 지각이 응축작업을 통해 부동화시켜낸 하나의 외관,
하나의 관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언가 실재의 잠재적인 다양성에 상응하는 구분이 존재한다.
그런데 단순한 자유로운 결단에서처럼, 천재적인 작품의 구성 속에서 우리 활동성의 용수철을 가장 높은 곳까지 당겨
어떤 재료들의 집합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새로운 형태)을 창조했다고 해보자.
여기에는 물질성이 있는데, 형태를 발생시키는 행동을 단순히 정지시켜 이것을 구성할 수 있다고 하면(화가가 그린 독창적인 선은 이미 그 자체로 고정이고 한 운동의 응결이 아닌가), 물질의 창조는 불가해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내부에서 보았을 때, 연필을 쥐고 선을 그리는 것과 같은 단순한 행동, 단순한 창조가 순간적으로 멈추었을 때, 그것의
외부에서 무수한 점들로 분해될 준비가 된 직선, 즉 물질이 창조된다.4)
이것을 실재 전체로, 우주 전체로 가져가 보자.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실재는 사물을 생성하는 비물질적 과정과 사물을
해체하는 물질적 과정의 진행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생명이 중력의 방향으로 낙하하는 물질을 가로질러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인 것―그 와중에 물질과 그에 대한
언어는 점증하고 또 그만큼 생명의 자유도 더욱 커지는 그러한 과정―처럼 나타난다.
이제 지성성과 물질성의 발생을 보다 더 내밀하게 추적하기 위해 베르그송이 탐구한 생명의 장구한 진화과정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한 번, 그러나 문제제기의 차원을 달리하여 다음과 같이 묻자.
생명은 왜 순간 순간 정지하고 역전되었는가?
생명의 창조적 진화
어떤 순간, 공간의 어떤 지점에 아주 뚜렷한 하나의 흐름이 탄생했다. 이 흐름은 물체들을 통과하고 그것들을 차례로
유기화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고, 자신의 힘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전진함에 따라 더욱 강렬해지면서,
종들로 나누어지고 개체들로 흩어져 왔다.5) 이것은 생명의 흐름이다.
이러한 생명의 근본에는 물리적 힘들의 필연성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비결정성을 덧붙이려는 노력이 있으며, 생명은
그러한 운동성 자체이다.
물질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생명은 그러나 이 물질로 향하는 필연적이고 기계적인 운동을 거슬러 보다 더 많은 행위
가능성, 보다 더 많은 예측불가능성을 삽입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명이 지나가는 특수한 생명의 형태들[생명체]은 이러한 운동성을 단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언제나 그것에
뒤떨어진다.
각 생명체는 가능한 한 가장 적은 노력을 들이려고 하며, 자신의 유용함만을 목표로 한다.
지나가는 바람이 일으킨 먼지의 소용돌이처럼 생명체들은 생명의 커다란 숨결에 매달려 회전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부동성을 너무도 잘 가장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과정이라기보다는 사물로 취급
한다.
그것들의 형태의 항구성조차도 한 운동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이처럼 생명이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기 위해 나아가는 행위(이것이 생명의 본질이다)와 이러한 형태가 그려지는 행위는
두 가지 다른 운동이며 종종 적대적이기도 하다.6)
어떻게 생명은 이러한 상반되는 두 운동을 자신의 나아감 속에서 만들어내게 되었을까.
생명의 약동은 창조의 요구로 이루어지지만 그 약동은 절대적인 방식으로는 창조할 수 없다.
자신과 반대되는 운동인 물질을 목전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성 자체인 이러한 물질을 포획하고 거기에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양의 비결정성과 자유를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생명은 이 포획된 물질을 조금씩 다른 길로 이끌기 위해 물질의 습관 속으로 들어와야 했다.
따라서 처음에 나타난 생명의 형태들은 매우 단순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놀라운 내적 추진력으로 자신의 한계에까지 성장했다.
그것은 어떤 지점을 넘어서면 성장하는 대신 분열한다.
그런데 분열의 진정한 원인은 생명 그 자신이 보유한 것이었다.
생명은 경향이며, 경향의 본질은 다발의 형태로 발달하는 것인데, 생명은 단지 커진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약동을
공유한 채로 갈라지는 방향들을 창조한 것이다.
생명의 잠재적 경향들은 물질을 만나 현실화됨으로써만 다수로 되고, 공통의 기반을 가짐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상호잠입을 허용한다. 복수적 단일성, 단일한 복수성을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생명은 심리적 존재, 초의식과 동일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자신이 분기한 경향들을 어느 것 하나 희생시키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경향들에 따라 분기한 계열들은 중요성에 있어서 균등하지 않을 수 있다.
진화의 궤도상에서 분기점들은 많았으나 두세 가지 커다란 길 옆에 막다른 골목들이 많이 있다.
이 커다란 길들 중에서도 척추동물을 따라 인간에 이르는 길만이 생명의 커다란 숨결이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이는 특히 인간의 지성을 통하여 가능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대립과는 어긋나게, 인간의 지성은 물질에 더 많은 자유를 불어넣고자 한 생명의 가장 성공적인 전략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지구에서 생명이 무기물질을 맞닥뜨렸을 때, 그 타협점으로써 유기체를 만들어냈다(유기물질과 무기물질의 구분).
생명이 이 유기체에 더 많은 자유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에너지를 축적해 두었다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폭발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행성의 유기체들은 에너지의 원천인 탄소와 질소를 얻는 서로 다른
방식을 택함으로써 식물과 동물로 분기하였다.
식물은 이 요소들을 공급하는 환경으로부터 연속적이고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얻는 방식을 택하였고, 이는 행위와 의식을
잠재우면서 의식의 발달과 밀접한 신경계의 진화를 중지시켰다.
동물은 탄소와 질소를 이미 고정시키고 있는 유기체들 속에서 몇몇 순간에 집중된 불연속적인 의식적 행동에 의해 그것
들을 찾으러 가는 방식을 택하였다.
생명은 동물에게서 더 집중된 의식의 발달과 행위가능성의 확대를 찾을 수 있었다.
동물은 행위와 신체의 형태를 유연화함으로써 보다 더 많은 돌발적인 외부 작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신경계를 복잡화
했는데, 더 많은 이동에서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도록 단단하지만 마디절합된 외피를 선택한 절지동물과 공격과
도망을 더욱 자유롭게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몸을 유연하게 하기로 선택한 척추동물로 분기하였다.
그런데 이 각각의 분기점은 더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척추동물의 진화의 정점인 인간에게서 지성을 향한 생명의 운동을, 절지동물의 진화의 끝인 막시류에게서 본능을 향한
생명의 운동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에서 주어진 도구를 일체의 망설임없이 선천적으로 찾으며, 사회의 존속을 위해 개체가 마치 한 세포의 부분인 듯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본능의 길을 택한 것은 막시류의 개미이다.
이들은 생명이 물질에 얼마간 함께하기로 한 그 만큼에서 비롯되는 요구(생존에의 요구)에 너무도 적합하게 진화하였
으나, 이는 생명의 보다 근원적인 요구, 즉 행위가능성의 극대화, 창조에의 요구를 희생시킴으로써 가능했다.
그것은 막시류에게서 직관이 의식을 결여한 본능의 형태로 남아 있게 하였다.
다른 한 편 인간은 주어진 도구를 발견할 뿐 아니라 도구를 발명, 제작하고 그 도구로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낸다.
인간에게서 행위의 형태는 무한해진다.
인간이 제작한 인공적 도구는 그 직접적 요구의 만족에 있어서는 자연적 도구에 뒤떨어지지만, 요구가 덜 긴박할수록
자연적 도구보다 많은 장점을 지닌다.
게다가 이 도구는 제작자의 본성에 영향을 미쳐, 각 요구에 대한 새로운 요구들을 무한히 창조한다.
그렇게 해서 행동의 원환을 본능이 하듯이 닫아버리는 대신 그 활동을 점점 더 멀리 밀고 나가 점점 더 자유롭게 해주는
무한한 장을 그 활동 앞에 열어 놓는다.
인간이 동물에 대해 가지는 본성적 차이는 우리의 두뇌, 사회, 그리고 언어라는 외면적 기호들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생명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이른 자유의 가장 넓은 통로를 발견한다.
그러나 애초에 실재는, 그리고 생명은 어떤 것을 생성하는 방향과 그것을 해체하는 방향, 이렇게 양 방향의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의 제한된 약동만을 담지하는 생명체들은 진화의 어느 지점에서 원환을 그리며 닫힐 것이다.
이 원환을 뚫고 나아가는 생명의 운동은 생명체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지성은 물질에 최대한의 자유를 불어넣고자 한 생명의 성공이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주의 속에서 닫힌 원환을
그린다.
생명은, 이 행성에서가 아니라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차이나는 반복)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확장
해갈 것이며, 우주 전체를 생각한다면, 해체를 향한 운동이라는 관념에서 곧장 ‘무’, ‘무질서’ 등을 연상하는 것은 부조리
한 것일 것이다.
생명이 물질을 만나 거기에 최대한의 예측불가능성을 부여하고자 한다고 말할 때에도, 생성하는 운동에 대립되는 해체를
향한 운동에 대해 말할 때에도, 이 모든 것이 유일한 실재인 시간, 지속, 즉 생명의 운동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생명적 활동성은 역전된 운동 속에 있는 곧은 운동으로부터 잔존하는 것, 즉 해체되는 실재를 가로질러 생성되는 실재
이기 때문이다.
역전된 운동도, 그 운동을 극한까지 밀어부쳐 얻은 공간화된 물질 개념도 모두 실재의 본성에 ‘반하는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에 제기한 문제―어떻게 실재는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는 간단히 실재의 운동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그러나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의 인위적인 구분을 넘어 생명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의 우주론을 구축하고 있는
베르그송의 사유 앞에서, 나는 하나의 인간 개체로서 질문이 생겨난다.
인간이―아무리 이 행성에서의 성공일지언정―생명의 소용돌이에 매달려 나부끼는 나뭇잎과 같다면, 인간은 생명이 또
다른 분기의 지점에서 새로운 생명 형태를 창조하기까지, 지성의 부산물 더미에서 허덕이거나 간혹 직관에 도달해 생명의 흐름을 일별하고, 최대한의 과거 전체를 응축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면서, 잠시 새로운 습관을 창조하는 자유로움을
맛본 후에 다시 그것이 자동성의 공격에 습격당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걸까?
물론 여기까지 이르기도 쉽지 않겠지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는 적어도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압도적인 허무주의에 빠지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창조적 행위, 자유로운 삶
베르그송에게 어떤 한 가지 개념이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혹은 이러하다 저러하다라고 단정 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한 개념을 이러한 의미로 고정시키려고 하면 다른 텍스트에서 불쑥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그 개념을 사용하고, 그렇게
그러모아진 여러 의미들을 짜깁기 해도 베르그송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그 개념의 정확한 의미는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
만을 남긴 채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베르그송의 단순한 직관에 단번에 자리잡는 것은 아직도 요원하다.
지금까지 지성, 물질 개념이 위에서 말한바와 같았다면 이제 인간의 ‘삶’과 ‘행위’라는 개념이 그러하다.
베르그송이 지속에 접촉하기 위해 삶에 대한 주의를 이완시켜야 한다고 했을 때, 지성이 행위에 부대되어 물질에 적합하게 작업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생명의 원리, 실재하는 지속에 다가가기 위해 등 돌려야 할 것인 듯 했다.
그런데 그는 창조적 진화의 몇몇 부분들에서 지성의 원환을 오직 행동을 통해서만 부술 수 있으며, 인간성의 확장을 통해서 인간성의 초월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추론하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새로운 습관도 얻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주어진 것의 순환 속에 가두어 놓는 일이야말로 추론의 본성에 속한다.
그러나 행동은 이 순환을 깨뜨린다.
사람이 수영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아마도 수영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물 위에서 몸을 떠있게 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이미 수영을 할 줄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추론은 우리를 언제나 단단한 땅에 고정시킬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아무 두려움 없이 실제로 물 위로 몸을 던지면, 나는 우선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면서 물 위에서
그럭저럭 지탱하게 될 것이고, 조금씩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는 지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것에는 일종의 부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히 위험을 받아들인다면 행동은 아마도 추론이 매어 놓고 풀지는 못할 매듭을 풀어줄 것이다.7)
인용문을 옮겨놓고 보니, 잊은 것이 있었다.
베르그송에게서 어떤 것의 외부에 위치할 때에는 그 과정의 지난함과 복잡함이 끝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의 내부에 위치
하여 그것을 해내는 것, 즉 행위하는 것은 아래로 쳐진 팔을 들어올리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것이라는 것 말이다.
물론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지성의 습관, 생명체로서의 폐쇄성을 그것에 발디딘 채로 되돌리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혹은 그것은 노력에 의해서만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인간 종을 뛰어넘는 하나의 새로운 종과도 같은 천재인 개인에게
생명의 약동이 폭발적으로 전달되는 일이 있는 것 같고, 이 천재만이 물질의 하강 운동을 자유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는
신적인 삶,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천재가 아닌 우리는 좌절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약동을 특별히 폭발적으로 부여받은 천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그 천재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어떤 정서, 매력을 이야기 하고 관념에 선재하고 오히려
관념을 낳는 이러한 정서의 추동에 의해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는 사람들과, 사회의 진보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참된 철학, 실재의 몸에 맞지 않는 기성복들을 재단해내지 않고 지성의 작용을 물질의 영역에 한계지을 줄 아는
겸손한 형이상학으로 하여금 인간성 자체에, 우리가 지각하는 구체적 실재 자체에 기반하여 정신의 뿌리깊은 악습을
거스르면서도 종국엔 그것을 흡수하는 인간성의 확장과 초월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지막 저작의 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위대한 수단을 선택하든 사소한 방식을 선택하든 하나의 결단이 필요하다. 인류는 자신이 이룩한 진보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인류는 자신의 미래가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다.
우선 인류는 자신이 계속 살기를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단지 생존만을 원하는지, 아니면 그 위에다 우리의 저항하는 혹성 위에까지 신들을 만들어내는
기계인 우주의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제공하고자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8)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은 질문을 자문하고, 인간임을 넘어서는 인간의 참된 자유에 이르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생존으로서의 삶이 신적인 삶으로, 물질에 반응하는 자동적 기제로서의 행위가 자유로운 의지의 창조적 행위로 도약해야
하는 그 지점에 베르그송은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베르그송이 진정한 ‘지속’의 철학자임이 여기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삶과 모든 기계문명과 모든 사유습관을 폐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은 없다.
인간은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서, 구체적 실재에 단단히 발붙인 채 도약할 것이다.
그는 기계가 기계를 제작하는 데까지 이를 때에 비로소 인간이 땅 위의 노역에서 허리를 펴 하늘을 바라볼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를 지속에 눈 돌리지 못하게 단단히 묶어 두었던 사슬들을 헐겁게 하고, 유연하게 하고, 녹임으로써 우리는 인간임을
넘어설 것이다.
베르그송은 그러한 작업의 총체를 형이상학에 특권적으로 부여하였지만, 다른 텍스트들에서 문학, 음악, 예술, 과학이
그러한 작업에 기여할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베르그송을 탁월한 이분법의 철학자로, 그래서 반지성주의, 반합리주의, 반문명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인간임을 넘어서 생명의 원리에 이를 것을 호소한 진정한 자유의 복음사가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베르그송을 통해 전달된 이 벅찬 환희의 정서를 의지의 창조적 행위로, 자유로운 삶으로
현실화하는 것일 것이다.
참고문헌
『사유와 운동』앙리 베르그손 지음, 이광래 옮김, 문예출판사 1993
『창조적 진화』앙리 베르그손 지음,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05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앙리 베르그손 지음, 송영진 옮김, 서광사 2005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앙리 베르그손 지음, 김재희 옮김, 지만지 고전천줄 2009
『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지음, 김재희 옮김, 살림 2008
1) 『창조적 진화』, 제3장 생명의 의미, 앙리 베르그손 지음,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05, 281p.
2) ibid. 301~308p.
3) ibid. 355p.
4) ibid. 355~358p.
5) ibid. 58p.
6) ibid. 199-200p.
7) ibid. 290~291p.
8)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앙리 베르그손 지음, 송영진 옮김, 서광사 2005, 341p.